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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2:46:19

헤랄트 파넨뷔르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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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랄트 파넨뷔르흐의 수상 이력
{{{#!folding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88
}}} ||
네덜란드의 축구감독
파일:gerald vanenburg fp.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헤랄트 파넨뷔르흐
Gerald Vanenburg
본명 헤랄트 메르핀 파넨뷔르흐
Gerald Mervin Vanenburg
출생 1964년 3월 5일 ([age(1964-03-05)]세)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국적
[[네덜란드|]][[틀:국기|]][[틀:국기|]]
|
[[수리남|]][[틀:국기|]][[틀:국기|]]
신체 172cm / 체중 70kg
주발 양발
직업 축구선수 (윙어, 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AFC 아약스 (1980~1986)
PSV 에인트호번 (1986~1993)
주빌로 이와타 (1993~1996)
FC 위트레흐트 (1997)
AS 칸 (1998~1999)
TSV 1860 뮌헨 (1998~2000)
감독 PSV 에인트호번 유스 (2000~2005)
TSV 1860 뮌헨 (2004)
헬몬트 스포르트 (2006~2007)
FC 에인트호번 (2008)
빌럼 II (2008 / 코치)
국가대표 42경기 1골 (네덜란드 / 1982~1992)
별명 Geraldinho(헤랄지뉴)[1]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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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헤랄트는 이미 17살 때 대단한 선수였다. 그는 공으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해냈다. 내가 본 최고의 재능 중 하나였다. 헤랄트는 공격형 미드필더로서도 많은 골들을 넣었다. 그를 막으려는 선수들은 그를 걷어차려고 했지만 그에게 다가갈 수 조차 없었다. 정말 대단한 기술을 지녔었다. 1988년 그는 플레이 메이커에서 궂은 일을 담당하는 역할로 바뀌어야 했고 그는 그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는 준결승에서 서독을 상대로 매우 좋은 경기를 했다. 사람들은 그 토너먼트에서 반 바스텐에 대해 극찬했지만 에르빈 쿠만과 헤랄트 파넨뷔르흐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했다.
빔 키프트 #

네덜란드축구선수 출신 감독.

1980년대 네덜란드 최고의 재능 중 하나로 AFC 아약스PSV 에인트호번에서 주축으로 10년 넘게 활약하며 에레디비시 우승 8회, 유러피언컵 우승 1회, KNVB 베이커 우승 5회, 트레블 1회, 더블 2회를 달성하는 등 수많은 영광의 순간들을 함께했다. 또한 UEFA 유로 1988에서도 전경기 주전으로 활약하며 조국 네덜란드가 첫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러한 활약들로 2년 연속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80-81 시즌 에레디비시 25라운드 덴하흐전에서 17세 1개월의 나이로 프로 데뷔전을 치렀으며 요한 크루이프가 인정하는 최고의 재능 중 하나답게 바로 주전 자리를 꿰찼다. 이후 빔 키프트, 마르코 판바스턴, 요한 크루이프 등과 함께 팀의 공격을 이끌었고, 1985-86 시즌까지 1983-84 시즌 1시즌을 제외하고 매시즌 20개 이상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AFC 아약스가 리그 우승 3회, KNVB 베이커 우승 2회를 차지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아약스에서의 마지막 시즌, 선수에서 감독으로 돌아온 요한 크루이프에게 과도한 비난을 받으면서 이적을 결심했고,[2] 결국 1986-87 시즌을 앞둔 시점에서 라이벌 팀인 PSV 에인트호번으로 이적하게 된다.

마치 크루이프에게 복수라도 하듯 이적 첫 시즌부터 20개가 넘는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뤼트 휠릿, 로날트 쿠만, 프랑크 아르네센, 레네 판데르히프, 유리에 쿨호프 등과 함께 에인트호번이 8년 만에 리그 정상을 탈환하는 데 주역이 되었다. 이후로도 1990-91 시즌까지 매시즌 20개 이상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며 에레디비시 최정상급 윙어로 군림했다. 1991-92 시즌에는 팀의 주장으로 선임되었고, 부상으로 상당 기간 결장했지만 15개 가량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다. 이러한 6시즌 동안의 활약으로 에인트호번에게 리그 우승 5회, KNVB 베이커 우승 3회, 유러피언컵 우승 1회, 요한 크루이프 스할 우승 1회 및 리그 3연패, 트레블 1회, 더블 1회를 안기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레전드가 되었다.

1992-93 시즌 들어 폼이 떨어짐에 따라서 시즌 종료 후 팀을 떠나 해외 진출을 감행했고 FA로 J리그주빌로 이와타와 3년 계약을 맺었다. 그곳에서 강등된 팀을 승격 시키는 등 3년을 보냈고, 1997년 고향인 위트레흐트를 연고로 하는 FC 위트레흐트로 돌아와 1년을 보낸 뒤 다시 해외로 나가 프랑스의 AS 칸과 독일의 TSV 1860 뮌헨에서 스위퍼로 뛰면서 말년을 보냈고 2000년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81-82 시즌 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는 활약을 펼치자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1982년 4월 14일, 그리스와의 친선전에서 선발 출전하면서 18세 1개월의 나이에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1983 FIFA 월드 유스 챔피언십 멕시코에도 네덜란드 U-20 대표팀의 주장으로 참가했고 2선에서 무수한 찬스들을 만들어내며 네덜란드의 공격을 진두지휘했다.[3] 이러한 활약을 인정 받아 대회 종료 후 네덜란드에서 유일하게 대회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리누스 미헬스 감독의 부름을 받아 UEFA 유로 1988에 참가하여 결승까지 전경기 주전으로 활약하며 네덜란드에게 첫 메이저 대회 우승컵을 안겼다.

레오 베인하커르 감독의 부름을 받아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도 참가했지만 조별리그 1라운드 이집트전 1경기 만을 소화하고 이후에 치러진 16강전까지의 4경기들에서는 벤치를 지켰다.

1992년 10월 14일에 치러진 1994 FIFA 월드컵 미국 유럽 지역예선 폴란드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주연으로 활약했던 클럽에서와 달리 대표팀에서는 주로 헌신하는 조연 역할을 맡으며 1골 2도움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그 역할을 잘해냈기에 A매치 42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3. 플레이 스타일

양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양발잡이로 현란한 드리블과 수준 높은 볼 컨트롤 능력, 거기에 빠른 스피드까지 갖춰 이를 이용하여 드리블 돌파를 자주 시도했고, 거의 매시즌 에레디비시에서 두 자릿수 득점과 두 자릿 수 도움을 기록할 정도로 골 결정력과 플레이 메이킹 능력 또한 두루 갖췄다. 헤랄지뉴(Geraldinho)라는 별명 역시 브라질식 축구를 구사하는 테크니션이라 붙은 별명이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1] 브라질식 축구를 구사하는 테크니션이라 붙은 별명이다.[2] 크루이프는 완벽주의자였으며 자신이 높게 평가하는 선수들에게 유독 엄격했다. 크루이프의 후계자인 마르코 판바스턴은 크루이프에게 독설을 듣고 울면서 훈련장을 나선 적도 있다고 한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파넨뷔르흐에게는 그 정도가 심했다는 후문이다.[3] 당시 대회에 참가했던 네덜란드 선수들 가운데 유일하게 리그 정상급 선수였다. 그 마르코 판바스턴조차 이제 막 1군 주전으로 발돋움하던 때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