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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1-27 22:36:31

헤카림/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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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본 배경2. 모두 죽으리라3. 헤이븐폴의 약탈자4. 하이 눈 스킨 세계관5. 구 배경
5.1. 유니버스 이전5.2. 유니버스 이후

1. 기본 배경

오래전 잊혀져 먼지가 되어버린 한 왕국에서 태어난 헤카림은 강철 기사단의 장교였다. 강철 기사단은 왕의 영토를 수호한다는 맹세 아래 형제처럼 진한 전우애로 뭉친 집단이었다.

헤카림은 자신의 위풍당당한 군마에 올라 연전연승을 이어갔다. 강철 기사단장은 헤카림에게서 자신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을 보았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어두운 면을 보았다. 승리의 영광을 향한 헤카림의 집착은 명예를 저버리게 할 만큼 커졌고, 결국 헤카림은 절대 기사단을 이끌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기사단장의 머릿속에서 확고해졌다.

헤카림은 차기 기사단장이 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분노했지만,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장교로서 자신의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뒤이은 출정에서 기사단장은 휘하 기사들과 떨어진 채 적군에게 포위당했다. 그 모습을 본 헤카림은 기사단장의 자리를 노리고 그가 죽게 내버려 두었다. 헤카림이 저지른 만행을 알 리 없는 강철 기사단원들은 피로 물든 땅 위에 무릎을 꿇으며 헤카림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기사단장 취임식을 위해 도성으로 간 헤카림은 그곳에서 이 가장 신임하는 장군인 칼리스타를 만났다. 헤카림의 기량과 지도력을 높이 산 칼리스타는 독 묻은 칼에 찔린 왕비를 살릴 묘약을 구하러 떠나면서 강철 기사단에 왕의 호위를 맡겼다.

편집증에 사로잡힌 왕은 사방에서 위협을 느꼈고, 죽어가는 왕비에게서 자신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자들에게 분노했다. 그리고 헤카림에게 왕국 전역을 돌며 자신의 뜻에 반하는 자들을 진압하라고 지시했다. 강철 기사단은 왕의 명령을 따르는 무자비한 집행자로서 악명을 떨쳤다. 무수한 마을이 불타고 수많은 사람이 강철 기사단의 칼에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결국 왕비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헤카림은 비탄에 잠긴 왕의 마음속에 증오를 심었다. 왕비의 복수를 핑계 삼아 강철 기사단을 이끌고 타국의 영토를 침략해 더욱 악명을 떨치려는 목적이었다.

하지만 출정을 떠나기 전 칼리스타가 돌아왔다. 그녀는 먼 축복의 빛 군도에서 치료제를 찾았지만, 왕비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칼리스타의 말을 불신한 왕은 반역죄를 물어 그녀를 투옥했다. 호기심이 동한 헤카림은 감옥에 갇힌 칼리스타를 찾아갔다. 그리고 군도를 침략자들로부터 보호하는 백색 안개와 그곳 사람들의 막대한 부, 전설로 전해지는 생명의 정수 등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헤카림은 칼리스타를 설득해 왕의 함대를 축복의 빛 군도로 안내하도록 했다. 축복의 빛 군도는 보통 인간이 볼 수 없도록 장막에 가려져 있었으며, 오직 칼리스타만이 그곳에 가는 방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비의 시신을 실은 함대는 헬리아라는 도시에 당도했다. 강철 기사단이 이끄는 운구 행렬은 도시 지도자들과 마주했지만, 그들은 돕기를 거부했다. 분노에 사로잡힌 왕은 칼리스타에게 그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지만, 칼리스타는 왕의 명을 거역했다. 그리고 헤카림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영겁의 저주를 가져올 결정을 내렸다. 그는 창을 들어 칼리스타의 등을 찌르고, 도시에 숨겨진 신비한 보물들을 약탈하도록 기사단에 명령했다.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도시의 하급 관리인 한 명이 왕을 생명의 정수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헤카림은 살육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축복의 빛 군도가 대몰락에 이르게 되자, 헤카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력의 폭풍이 불어닥쳐 헬리아를 강타했다. 건물은 모조리 무너지고 파편은 혹독한 암흑 속에 갇혔다. 뒤이어 검은 안개가 굉음을 내며 몰려와 모든 생명을 집어삼켰다. 헤카림은 강철 기사단을 수습해 배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기사단원들은 하나둘씩 검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아 끝까지 저항하던 헤카림 역시 그림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위풍당당한 자신의 군마와 한 몸이 되어 귀신과 같은 기괴한 형태로 변해버렸다. 마치 그의 마음속에서 커지던 어둠을 형상화한 듯했다. 검은 안개에 완전히 굴복하다 못해서 하나가 되어버린 그 존재는 분노와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림자 군도에 영원히 갇혀버린 헤카림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예전 삶을 흉내라도 내듯 한때 자신이 정복하려 했던 끔찍한 땅을 배회했다. 지금도 검은 안개가 육지를 덮칠 때면 헤카림과 강철 기사단의 혼령들이 나타나 자신들의 빛바랜 영광을 추억하며 산 자들을 도륙한다.

2. 모두 죽으리라

얼음장 같은 파도가 황량한 바닷가를 때렸다. 해변은 헤카림이 살육한 이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고, 아직 죽이지 않은 인간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후퇴한 뒤였다. 검은 비가 그들을 흠뻑 적셨고, 비통한 먹구름이 섬의 심장부에서 피어올랐다. 헤카림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전투의 함성이었다. 목쉰 목소리로 짜내는 노래의 말뜻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의미만은 분명했다. 정녕 배에 무사히 도착하리라 생각하다니. 나무로 된 방패를 서로 연결하여 한 몸처럼 움직이는 걸 보니 전투력이 아예 없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차피 한낱 인간일 뿐. 헤카림은 공포가 어린 비릿한 살덩이 냄새를 음미했다.

무너져가는 폐허를, 그늘진 안개가 피어오르는 잿빛 모래를 짓밟으며 헤카림은 그들의 주위를 빙 돌았다. 말발굽이 검은 바위에 부딪혀 이는 불꽃 소리는 천둥이 되어 울려 퍼졌고, 그 소리가 듣는 사람들의 용기를 무너뜨렸다. 헤카림은 투구의 벌어진 틈 사이로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만신창이가 된 영혼의 희미한 빛이 몸 주위에서 후광처럼 파르르 깜박거리고 있었다. 헤카림은 그 빛을 갈망하면서도 격렬한 혐오를 느꼈다.

“모두 죽으리라.”

강철 투구 때문에 말이 잘 들리진 않았다. 하지만 귀에 거슬리는 그 소리는 녹슨 칼날처럼, 교수형으로 죽은 이의 목소리처럼 신경을 긁어댔다. 헤카림은 그들의 공포를 음미했다. 누군가 절망에 굴복해 방패를 내던지고 배로 달려가자 헤카림은 씩 웃었다.

갈고리처럼 휜 날을 낮춰 든 헤카림이 잡초 무성한 폐허로부터 괴성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먼 옛날 돌격할 때 느끼곤 했던 익숙한 전율이 느껴졌다. 은빛 군단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던 기억이 어른거렸다.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승리의 기억이었다. 기억은 곧 사그라졌다. 도망치던 남자가 희고 차디찬 파도의 어두운 표면에 도달해 어깨너머로 돌아보며 외쳤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헤카림의 칼이 남자의 몸을 쇄골에서 골반까지 단번에 갈랐다. 천둥 같은 일격이었다.

새카만 칼날이 피에 젖어 파르르 떨렸다. 남자의 시든 영혼은 자유롭게 날아가고자 했지만, 인간에 굶주린 안개가 그를 놓칠 리 없었다. 남자의 모습이 생전의 그를 닮은 어슴푸레한 혼령으로 변하는 것을 헤카림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헤카림이 섬의 힘을 끌어모았다. 피맺힌 파도가 소용돌이치더니 어른거리는 빛으로 엮인 한 무리의 흑기사들이 물에서 일어났다. 오래된 유령 같은 철판 갑옷에 갇힌 이들은 어두운 빛으로 반짝이는 검은 칼들을 빼 들었다. 이전에도 지금도 그를 섬겼으니 헤카림이 알아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헤카림은 그들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는 해변에 있는 인간들 쪽을 돌아보며 안개를 갈랐다. 그러고는 그제야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본 인간들이 공포에 떠는 것을 마음껏 감상했다.

철갑으로 중무장한 거구의 헤카림. 그의 거대한 몸은 인간과 말이 하나 된 악몽 같은 형태다. 그의 몸을 둘러싼 검은 철판에는 이제는 그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의미의 도안이 새겨져 있다. 투구 뒤에는 고뇌의 불이 이글거렸다. 그 안의 차디찬 영혼은 죽었으면서도 끔찍할 정도로 활력이 가득했다.

번개가 하늘을 어지럽게 갈랐다. 헤카림이 뒷발로 섰다가 칼을 낮추더니 그의 기사들을 이끌고 앞으로 돌격했다. 피범벅된 모래와 뼛조각이 사방에 날렸다. 인간들이 함성을 지르며 방패를 들었으나, 혼령들의 공격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선봉에 선 헤카림이 공격을 개시했다. 벼락 같이 검을 휘둘러 방패로 된 벽에 큰 균열을 냈다. 철갑을 두른 헤카림의 거구 아래 사람들은 짓밟혀 피투성이로 으스러졌다. 헤카림은 칼을 사방으로 휘둘렀고, 그의 칼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목숨이 스러졌다. 유령 기사들도 앞길을 막는 모든 것들을 밟아 뭉갰다. 그야말로 끔찍한 광란이었다. 말발굽으로 후려치고 창으로 찌르고 검으로 베는 유령 기사들 앞에서 산 자들은 속절없이 스러졌다. 뼈가 부러지고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죽은 이들의 영혼은 너덜너덜해진 몸을 떠났으나 몰락한 왕의 치명적인 주술에 걸려 이승과 저승 사이에 갇혔다.

죽은 이들의 혼이 헤카림을 둘러쌌다. 바로 자신들을 죽인 헤카림에게 속박된 존재였다. 헤카림은 전투에서 오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탄식하는 혼령들을 무시했다. 이들을 자신의 노예로 삼을 생각조차 없었다. 그런 시시한 괴롭힘은 지옥의 간수 몫으로 남겨도 충분했다.

헤카림에게는 오직 죽이는 행위만이 의미가 있으니까.

3. 헤이븐폴의 약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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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빠른 속도로 밀려오며 교차로 위를 비추는 오후의 태양을 가렸다. 뚫을 수 없는 장막으로 어두워진 세상 속에서 요나스는 두꺼운 덩굴을 헤치며 길을 찾으려 노력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밀려 나온 형체가 요나스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더듬거리는 요나스의 손에 고삐가 들어왔고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떠올리며 정신을 차렸다. 말에 올라타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야 했다.

"이러지 마라. 우리 모두에겐 의무가 있다."

요나스는 두려움이 서린 눈을 깜빡이며 말 위에 쓰러진 기사를 바라보았다. 말에 탄 상태지만, 제대로 안장에 앉지도 못하는 기사였다. 그녀의 갑옷은 꿰뚫린 상태로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요나스는 어떤 무기가 이런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기사는 죽어가고 있었다.

요나스는 기사의 눈이 자신을 판단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약하고 보잘것없는 자였다. 그녀는 장갑을 낀 주먹으로 고삐를 굳게 붙잡고 요나스를 가까이 당겼다.

"우리가 수도에 소식을 전해야 한다. 네가... 후계자에게 알려야 한다. 자르반 왕자님께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해라. 수비대는 놈들을 막을 수 없다."

남쪽에서 들리는 희미한 전투의 소리는 안개가 헤이븐폴에 다가왔다는 것을 요나스에게 알려주었다. 주변의 공기는 더욱 차갑고 어두워졌다. 잉크처럼 어두운 안개가 맥동하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헤이븐폴의 기사들은 요나스가 알 바가 아니었다. 왕실의 정예라고 불리는 그들은 요나스를 위해 무엇 하나 해준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곳의 사람들은...

눈을 질끈 감은 요나스는 기사에게서 고삐를 거칠게 빼앗았다. 안장에서 굴러떨어져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기사를 무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호자시여, 날 용서해주십시오." 요나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말에 오르면서 전에 말을 훔칠 때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려 애썼다.

군마의 덩치는 요나스에게 어느 정도 차분함을 주었다. 근육이 가득한 군마의 목을 더듬던 요나스는 방위를 알아내기 위해 교차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쪽으로 향하는 길은 높은 성벽과 많은 병사들이 있는 위대한 도시로 이어졌다. 그들에게 경고가 필요한 적이 있었나? 분명 안개의 어떤 사악한 발톱과 목소리도 돌과 강철로 만들어진 수도의 방어선에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남쪽으로는 그의 고향인 헤이븐폴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에서 반짝이는 지붕과 일렬로 늘어선 돛대를 볼 수 있었다. 마을 뒤로는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 넓은 땅이 보였다.

요나스는 구불구불한 언덕을 지나며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보냈고, 만이 내려다보이는 하얀 절벽을 따라 입항하는 배와 경주를 하기도 하였고, 바다의 소금기에 머리가 뻣뻣해지는 순간에도 억제할 수 없는 자유의 황홀함을 만끽하였다. 요나스는 자신이 훔친 어떤 물건도 가지지 않았다. 그는 내륙으로 추방되어야 하는 도둑이 아니었다. 그는 말을 빌린 것뿐이고, 돌아오면 지치긴 했지만 멀쩡한 말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말은 어떻게 돌려줘야 하지? 내가 기사에게 말을 남겨두었다면...'

기사가 안개에 사로잡힌 것은 요나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는 생존이라는 기회를 낭비했고 요나스는 그 기회를 붙잡은 것이다. 그녀의 죽음에 요나스의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요나스는 무엇을 하든 미흡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요나스에겐 말을 다루는 능력과 일할 의지가 있었지만, 그의 윗사람인 말 사육자와 상인들도 타인의 요구보다 자신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요나스를 외면하였다. 그들은 신뢰할 수 없는 재능은 쓸모가 없다고 말했다. 요나스는 진정한 자유의 가치도 모르는 자들의 인정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패기를 증명하기 위해 신병 모집에 찾아온 요나스에게 도금된 랜스를 휘두르며 조롱하던, 다른 무엇보다도 복종을 찬양하는 수비대는 말할 필요도 없이 말이다.

그러나 언덕 위에서 강철 같은 준마를 타고 바람을 따라 달리는 요나스는 돋보이는 존재였다. 요나스는 이 끔찍한 안개를 떨쳐내고 널리 퍼진 가축 사이에서 마음껏 달렸다.

남쪽 길을 바라보며 요나스가 군마에 박차를 강하는 순간 주변의 시간이 느려졌다. 요나스가 탄 군마는 갑작스레 굳어버렸고 귀는 납작하게 접혔다. 군마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전투의 소음을 뛰어넘는 이곳에는 속하지 않는 것이었다. 요나스도 느낄 수 있었다. 원초적인 공포가 그를 사로잡았고 집요한 손아귀가 그의 가슴을 붙들었다. 안개가 가까이 밀려왔다. 안개 내부의 사지가 장막을 걷어내는 것처럼 교차로에 펼쳐졌다. 요나스는 죽음과도 같은 고요함 속에서 무엇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단단하게 포장된 도로에서 강철 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장막이 갈라지자 요나스는 어둠 속의 기병들을 볼 수 있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는 말의 소리, 판금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 등자를 박차는 소리가 들렸고 사냥에 나서는 귀족들이나 국경 너머의 위험과 맞서 싸우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돌격을 기다리는 왕실 정예 부대를 그린 예술 작품처럼 움직이지 않는 부대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데마시아의 기사도, 동화 속에 등장하는 구원자도 아니었다. 기병들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검은 철판으로 몸을 둘러싼 그들의 움직이지 않는 눈에서는 사악한 빛이 일렁거렸다. 한 기수가 들고 있는 움직이지 않는 깃발에서는 어째서인지 천이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다. 입술도 없는 입이 악기에 고정된 나팔수는 공격을 알렸다.

안개가 비명을 질렀다. 헤에에카아아리이이임.

어째서인지 요나스는 그것이 이름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개는 헤카림의 도착을 알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의 이름이었다.

이 사실을 안 요나스는 휘청거리며 선두에 선 기수를 주목했다. 그는 어느 수행인들보다 거대했으며, 움직이지 않는 걸음마다 땅이 흔들렸다. 내면의 불길로 밝게 빛나는 그의 눈은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거두어들였다. 전방을 바라보는 와중에도 두 눈은 요나스를 꿰뚫고 관통하여 고대의 고통을 채우는 것만 같았다.

기수는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

요나스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반응하여 비명을 질렀다. 안장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팔다리를 흔들며 발버둥을 쳤고 군마는 깜짝 놀라 앞발을 치켜들었다. 요나스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땅에 떨어지고 충격에 빠진 군마는 어둠 속으로 뛰쳐나갔다. 요나스는 충격에 머리가 지끈거려 신음 소리를 내었다. 이마를 마른 땅에 대고 극심한 공포로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콧로 먼지가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들었을 때 보게 될 존재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기를 원했다.

"일어나라, 종자."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미소가 음절을 팽팽하게 당겼다. "용기를 찾아라... 나를 보아라."

마치 용광로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단어들은 깊은 곳에서 천천히 떠오르며 으르렁거렸다. 요나스는 말투를 알아차릴 수는 없었지만, 조롱하는 말투를 전에 들어본 적이 있었다. 따끔거리는 오래된 악의가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투박하게 편자가 박힌 발굽은 서 있는 땅을 불태웠다. 기수의 말은 모두 검은 철로 만들어져 내부에서 녹색 불이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요나스는 기수를 보고 숨이 턱 막혔다. 기수는 안장에 앉은 것이 아니라 말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는 누구인가? 요나스의 죄를 벌하기 위해 찾아온 것인가? 괴물은 웃으며 천천히 지옥의 창을 들어 올렸다.

요나스의 얼굴을 따라 눈물이 흘렀고 그의 정신은 오직 하나의 생각만을 떠올렸다. '수호자여, 용서해주십시오. 수호자여,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헤카림은 창을 내려치지 않았고, 대신 유령 기수 중 하나를 가까이 불러냈다. 유령 기수도 말에 올라탄 것이 아니라 몸이 말과 하나가 되어 있었다. 모든 병사들이 헤카림처럼 변형되어 있었다. 헤카림은 기수의 목을 붙잡고 천천히, 수월하게 말과 분리시켰다. 초록색 연기가 일렁이는 기수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기괴하게 떨렸다. 그의 몸이 있던 곳에는 이제 쇠약해진 무장 군마의 머리가 생겨났다.

"나중에 찾으러 오마." 그는 기수의 영혼을 해방하며 이죽거렸다. 말의 몸통과 분리된 영혼은 이제 표연히 공중에 떠올랐다. 죽음을 모르는 나머지 병사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로 시간 속에 얼어붙어 있었다.

헤카림은 요나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림자 군도의 섭정, 비에고 폐하의 칙령에 따라 이 땅을 차지하겠다. 나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은 헬리아의 정복자이자 강철 기사단의 단장인 내가 공정한 전투로 적들에게 영광을 베푸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그의 이죽거림에 말이 뒤틀렸다. "그러니 용기를 찾아라, 고귀한 종자여. 그리고 말에 올라타라. 전쟁이 찾아왔다." 그는 유령 군마의 고삐를 요나스에게 내밀었다.

요나스는 헤카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제안하는 그의 말투에서 거짓을 느낄 수 있었다. 요나스는 헤카림의 주변을 보았다. 어렴풋이 보이는 기사들의 해골로 된 얼굴에서 흔들리지 않는 일그러진 미소가 보였다. 그의 정신은 장막 너머의 속삭임을 들으며 비명을 질렀다. 이 괴물들은 병사들이 상대하겠지. 그는 고삐를 잡고 단숨에 안장으로 올라탔다.

군마의 몸통은 단단하면서도 동시에 형체가 없었고 군마의 움직임에 맞춰 움직이는 육중한 마갑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요나스가 느낀 말의 성격은 오로지 공허함뿐이었다. 다른 말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일체감 대신 그는 굶주린 공허의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요나스는 공포가 자신을 지배하도록 두었고 발뒤꿈치로 말의 몸통을 두들겼다. 그는 고삐를 거칠게 당기며 남쪽을 향해 검은 안개를 돌파했다.

휘어진 손톱이 내 피부를 긁는다. 오래전에 죽은 자의 얼굴이 나를 비난한다.

돌파한 장벽의 건너편은 밝았다. 길은 앞으로 열려있었다. 태양은 만을 내리쬐고 바다는 절벽 너머에서 차분히 빛나고 있었다.

요나스의 뒤편으로 공허하고 이글거리는 웃음이 교차로에 울려 퍼졌다.

"추적하라." 요나스는 헤카림의 명령을 들었다.


요나스는 말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자신이 탔던 어떤 종마보다도 빠르게 길을 따라 달렸다. 길을 달리는 요나스의 뒤로 가느다랗고 비정상적인 안개의 흔적이 남았다. 태양이 만으로 지며 짙푸른 황혼이 찾아왔다. 말을 타기에 아름다운 날이었다. 만약 그가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살아서 다른 날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고개를 올리니 어두워지는 하늘에서 수호자의 방패가 보였다. 별자리를 바라보던 요나스의 미소는 사냥의 뿔피리 소리를 듣자 사라졌다.

뒤에서 짙은 안개의 덩굴이 다가오는 모습을 본 요나스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괴물 같은 헤카림과 그의 강철 기사단이 안개 속을 달리고 있었다. 어둠의 덩굴이 요나스의 옆에 나타났고 그는 안개 내부에서 무언가 합쳐지며 형태를 이루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입은 공포로 벌어졌고 갑작스러운 눈물에 시야가 흐려졌다. 그녀였다. 자신이 죽게 내버려 둔 기사가 이제는 안개에 사로잡힌 유령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기사는 팔목이 없는 팔을 들어 올렸다. 고삐를 쥐고 있던 손은 없었다.

그녀가 흐느꼈다. "네겐 명예가 없다. 넌 진정한 데마시아인이 아니다!"

"제발, 안 돼." 요나스가 억지로 앞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는 미친듯이 말의 옆구리를 차며 공포에서 벗어나려 했다. 고삐를 내려보자 기사로부터 분리된 손이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도망쳐라, 겁쟁이." 안개 속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통에 훌쩍이던 요나스는 고삐를 쥔 그녀의 손을 떼어내어 바짝 따라붙은 기수에게 판금 장갑을 던졌다.

"화를 내기엔 너무 이르다, 종자." 헤카림이 조롱했다. "네게 용기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결투를 신청한다면 받아주마. 우리 귀족들에게는 따라야 하는 규율이 있으니 말이다."

헤카림이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접근하자 요나스는 얼굴 앞으로 손을 들었다. 하지만 공격을 당하는 대신 다시 역겨운 어둠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의 주변에 망자의 얼굴들이 보였다. 그들의 경멸 섞인 웃음은 뒤틀린 주인을 위한 노래였다. 요나스는 유령 군마에 박차를 가했고 안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헤카림과 기수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요나스가 헤이븐폴 가장자리에 있는 마구간을 지나자 해안에 밤이 찾아왔다. 전투의 소리는 멈췄고 마을로 통하는 접근로는 대체로 멀쩡했다. 그는 짧은 안도를 느꼈다. 이곳에서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틴다리드 지휘관과 그의 수비대가 요나스를 추격하는 기수들을 쫓아낼 것이다. 성주는 오만하긴 했지만, 불굴의 전사였다.

요나스는 절반은 안장을 채우고 절반은 마구를 채운 군마들을 바라보았다. 일부는 여물통 근처의 난간에 묶인 채로 죽어있었다. 요나스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요나스의 군마가 정착지로 가까워지자 검은 안개의 진정한 공포가 주변에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는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 모든 것들... 사실일 리가 없다. 이건 자신의 불안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산물이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마법사가 저지른 흑마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인 광경은 달랐다.

거리에는 최근에 죽은 마을 사람들의 영혼이 시체 위에 머물러 있었다. 공포에 휩싸여 조용히 울부짖으며 강철 기사단에 의해 쓰러지는 순간을 다시 겪고 있었다. 왕실의 자랑스러운 기사들은 전투 중에 죽은 자리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요나스가 지나가자 영혼들은 하나씩 그들의 텅 빈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방패와 몸에 창을 맞은 기사 하나가 요나스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틴다리드 지휘관을 알아본 순간 입술 사이로 숨이 흘러나왔다. 요나스는 군마에 박차를 가해 빠져나갔다. 내면의 목소리는 그들이 죽어서도 요나스가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속삭였다.

망령과도 같은 습격자들이 상인들의 숙소를 휩쓸었고 생존자들을 건물에 몰아넣은 다음 대장간과 거래소의 지붕에 횃불을 던졌다. 초록색 화염이 건물을 휩쓸었고 광장을 치명적인 빛으로 채웠다. 지붕과 목재는 어째서인지 화염에도 멀쩡히 남아있었다. 건물 안에 있던 마을 사람들은... 요나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애쓰며 시선을 돌렸다.

항구 옆 흰돌 부두에 늘어서 있던 낚싯배와 바지선은 침몰하여 불타고 있었다. 요나스는 만 너머를 바라보았고 그의 시선은 사냥용 뿔피리의 애절한 소리를 따라 잔잔한 물을 따라갔다. 유령 기수 부대는 창을 내리고 달빛 아래에서 잔잔한 물을 가로지르며 마지막으로 떠 있는 배를 향해 접근했다. 그들이 배를 덮치자 무기의 희미한 충돌음과 죽어가는 선원의 비명이 뒤를 이었다. 뒤틀리는 안개 속에서 배의 모습은 사라졌다.

헤이븐폴 전체가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 이번 침공이 데마시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을까?

말을 타고 같은 자리를 맴돌던 요나스는 공포를 다스리고 벗어날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아마도 말을 타고 부두를 향해 달려가 바다를 건너야 할 것이다. 죽음을 모르는 괴물들을 앞지를 수는 없었지만,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 이 끔찍한 악몽을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발자국 소리에 요나스는 정신을 차렸다. 무너진 상점가를 지나가는 생존자들의 무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네 명이었다. 형제임이 분명한 갈색 머리의 청년 한 쌍은 손에 단검을 들었고 공포에 찬 눈으로 광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빛의 사자 수도회 의복을 입고 강철 둔기를 든 노년의 여성을 보호하고 있었다. 요나스는 그들을 이끄는 강인한 인물을 알고 있었다. 바로 대장장이인 아다마르였다. 그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제련 과정에서 검게 그을린 무거운 검과 방패를 들고 있었다.

"요나스!" 아다마르가 조용히 불렀다. "우리가 마지막 생존자인 줄 알았는데. 우린 여기서 벗어날 거다. 너도 함께—" 대장장이는 요나스의 군마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은 분노로 경직되었고 다른 이들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는 검댕이 묻은 방패를 들었다. "네가 괴물들과 한패라니!"

노년의 수도사가 아다마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눈을 보세요. 우리만큼이나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그는 한패가 아니랍니다." 그녀는 요나스를 가리켰다. "괴물에서 내려오세요. 우리와 함께 갑시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행동으로 인한 죄책감이 요나스를 휩쓸었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자신을 비난하며 죽어가던 기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다마르가... 옳습니다. 전 여기에 있어선 안 되고 자비를 받을 자격도 없습니다. 제가 오늘 무슨 짓을 했는지, 제가 누군지 모르실 겁니다. 전 데마시아인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밧줄장이 거리의 요나스며 이방인이 아니랍니다. 해가 지면 수호자의 신전에서 기도하는 당신을 보지 못했을 것 같나요. 당신의 마음이 다시 정의를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요.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밤 중요한 것은 생존입니다. 많은 이들이 살아남지 못했어요. 당신은 우리와 같이 살아남은 생존자입니다. 이제 그... 것에서 내려와 우리와 함께 떠나도록 합시다."

요나스는 안장을 붙잡고 말에서 내리기 위해 다리를 들어 올렸다. "수호자께 당신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그때 마을 광장 위로 안개 뭉치가 찢어지며 열렸고 유령 기수들이 돌진했다. 선두에 있는 헤카림이 전속력으로 달리며 날이 삐죽한 창을 크게 휘둘렀다. 헤카림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요나스가 깨닫기도 전에 창이 수도사의 가슴을 가로질렀다. 헤카림의 기수들은 인정사정없이 아다마르와 두 명의 청년들을 살육한 후 멈췄다. 요나스가 그들을 처음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창은 곧게 세워졌고, 깃발과 받침대는 흔들리지 않았으며, 움직이지 않는 휘장이 펄럭이는 소리만이 죽음과도 같은 고요함을 꿰뚫었다.

맨 앞에는 헤카림이 있었다. 그의 발굽이 땅을 긁었고 짐승과도 같은 신체는 앞뒤로 움직였으며 눈은 고대의 지혜로 불타고 있었다. 기사단장, 정복자, 헤이븐폴의 약탈자, 지옥에서 온 전쟁 군주의 힘에 요나스가 어떻게 맞서란 말인가? 누가 가능하겠는가?

헤카림은 가까이 다가와 요나스의 옆에 나란히 멈추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손을 뻗어 요나스가 빌려간 군마의 굴레를 붙잡았다. 기사단장은 요나스보다 절반은 더 컸다.

"오늘 잘 해냈군." 헤카림이 용광로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깊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의 시선은 요나스 뒤로 달빛을 받는 만을 바라보았다. "나는 왕들이 검은 안개와 안개가 가져온 영원한 분노를 마주하고 실성하는 모습을 보았다. 네가 알던 모든 이들은 오늘 밤 죽어버렸지만, 살아남으려는 네 의지는 깨지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또 누구를 희생할 텐가? 네 군주도 죽게 둘 건가?"

요나스의 심장은 두근거렸고 위협에 압도당해 무력하게 흘린 눈물에 시야가 흐려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헤카림은 고향의 마지막 생존자들을 학살했지만, 지금은 마치 훈련장에서 대련을 하는 것처럼 요나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왕은... 이미 죽었다. 왕세자가 수호자의 인도를 받아 그 뒤를 이을 것이다. 그보다 더 자격이 있는 자는 없다. 나는... 내 이기심으로 그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

헤카림은 잠시 침묵한 뒤에 즐거운 듯이 조롱했다. "계승에 있어 왕관은 항상 자격이 있는 후계자에게 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쇠약한 산 자들의 왕국에 내가 신경을 써야 하는가? 우리 모두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요나스는 가까이에서 헤카림의 갑옷에 남은 셀 수도 없이 많은 구멍과 흠집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헤카림의 타오르는 몸을 감싸고 있는 검은 판금 갑옷에서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전투의 흔적을 볼 수 있었고, 그에 대한 근본적인 진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전쟁에 의해 탄생하여 전쟁을 위해 만들어졌다. 최악의 죄를 반복하는 저주를 받아 수 세기 동안 오직 전쟁만을 위해 살아온 것이다. 그가 살면서 어떤 죄를 저질렀든 이것은 그의 형벌이었다.

그리고 헤카림은 끝없는 형벌의 모든 순간을 즐겼다.

끔찍한 안개가 어딜 가든 헤카림과 그의 강철 기사단이 따랐다. 그들은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고 산 자에게 잔학 행위를 저지르며 즐겼다. 누구도 이런 악을 막지 않는다면 데마시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요나스는 자신이 평생 회피해온 무언가를 마침내 이해할 수 있었다. 용기란 태어나면서 데마시아인들이 타고나는 특별한 특성이나 세상에 자신의 가치를 나타내는 척도가 아니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선택하는 문제였다. 요나스는 교차로를 떠난 이후로 처음으로 차분함을 느꼈다. 부상당한 기사의 마지막 유언을 떠올렸다.

헤이븐폴에는 왕세자에게 이를 알릴 병사가 없었고 곧 왕국 전체가 쑥대밭이 될 운명이었다. 기사단장을 굳게 바라본 요나스는 헤카림의 손에서 고삐를 당겨 군마의 통제를 되찾았다. 성찰에서 호기심으로 태도가 바뀐 헤카림은 요나스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두었다.

요나스는 방향을 돌려 헤카림과 몇 걸음의 거리를 두었다. "나는 네가 무방비한 마을 사람들을 짓밟고 무력한 자들의 비명을 즐기는 모습을 보았다. 네가 영원한 본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네게도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네게 살아있는 자의 티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약간의 명예라도 있다면 나를 보내줄 것이다!"

요나스는 정신을 가라앉혔다. 자신이 위대한 도시에 갈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시도는 할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군마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감하는 듯이 긴장하였다. 요나스는 전력을 다해 박차를 가했고 유령 군마는 돌진하였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는 자신의 입술에서 나온 말을 진심으로 믿었다.

"무관의 왕을 위하여! 데마시아를 위하여!"


헤카림은 강철 기사단의 창을 향해 돌진하는 소년을 보고 히죽거리며 웃었다. 젊음의 어리석음은 그가 죽을 때까지 함께였고 헤카림의 경험에 비하면 너무나도 흔한 결점이었다. 하지만 비에고가 자신의 어리석은 집착을 쫓아 온 세상을 가로지르며 안개를 퍼뜨리는 한 헤카림은 전리품을 즐길 것이다.

그의 주변으로 기수들이 공포와 죽음을 퍼뜨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불타는 두개골에 강철의 미소가 그려졌다.

"만약 우리가 충성 서약에 얽매이지만 않았어도..." 그는 헤이븐폴의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영혼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4. 하이 눈 스킨 세계관

4.1. 지옥의 문이 열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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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 배경

5.1. 유니버스 이전

중무장한 거구의 유령 헤카림은 룬테라 구석구석에서 두려움에 소리 낮춰 불려온 이름이다. 그는 그림자 군도를 방비하며, 이 저주 받은 땅에 발을 들이는 어리석은 자들을 처단한다. 언데드의 수호자[1]인 헤카림은 검은 안개로부터 달려나와, 비정한 발굽으로 산 자들을 짓밟으며 차갑게 웃는다.
헤카림은 어디서 왔을까? 사람들은 헤카림을 망령 기사, 저승에서 온 거인이라고 부른다. 그는 항상 갑옷을 입고 있고 당당한 풍채를 자랑하며 끊임없이 달린다. 헤카림이 발로란 북서부 해안에 처음 출현한 그 순간부터 그를 마주친 사람들은 그야말로 혼비백산, 정신을 잃기 일쑤였다. 아무도 세상에 이런 자가 존재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며 그가 갑자기 발로란에 온 이유도 전혀 가늠되지 않았으니 시민들의 불안이 깊을 만도 했다. 헤카림이 밟고 지나간 자리는 생기를 빼앗겨 황폐하게 변했으며 그가 동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자 밭을 갈던 데마시아 인근 주민들은 황급히 각자의 집에 들어가 벌벌 떨게 되었다. 곧 데마시아 시내에 있는 술집마다 무시무시한 망령에 대한 소문들이 무성하게 퍼져 나갔다. 헤카림이 유령 기사들을 군단처럼 이끌고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흉악한 강령술사가 헤카림을 소환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고대 전사의 망령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죄다 쓸어버리려는 거야!" 마침내 헤카림은 도시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고 헤카림을 무찌르겠다고 결심한 데마시아 사령관 한 명이 뛰어난 부하들을 추려 소수 정예 부대를 꾸리고는 출격했다. 사령관은 부하들을 대동하고 헤카림 앞을 막아선 다음 그가 공격해 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망령이 이들에게 다가올수록 걷잡을 수 없는 공포심이 병사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공포에 짓눌린 채 거대한 망령의 무자비한 공격과 가차 없는 발길질에 속절없이 비명만 내지를 뿐이었다. 헤카림은 겁을 집어먹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사령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경고했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인간의 군대는 그림자 군도의 위력을 당해낼 수 없다."

헤카림은 다시 죽음의 행군을 이어갔다. 악몽과의 대면이 끝난 후 사령관은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동공의 초점을 잃었고 이리저리 헤매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가까스로 데마시아에 돌아왔고 사태의 엄중함을 절박하게 호소했지만 데마시아 사람들에겐 미치광이의 헛소리로만 치부될 뿐이었다. 헤카림이 어디서 왔는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왜 발로란이어야 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그가 전쟁 학회를 향했다는 사실이다. 학회의 정문에 도착한 헤카림은 음산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문을 열어라!"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망령이 우리 모두를 소멸시켜 버릴 거요..." - 데마시아의 전직 사령관

5.2. 유니버스 이후

“저들의 대열을 무너뜨리고 가차 없이 추격하라. 산 자들을 짓밟고 놈들의 두려움을 마음껏 마셔라.”

헤카림은 유령 기수들을 이끌고 산 자를 사냥하며 그림자 군도를 누비는 철갑을 두른 거인이다. 말과 영원히 한몸이 되는 저주를 받은 반인반수 헤카림은 생명을 학살하고 그 영혼을 말발굽으로 짓밟는 쾌락을 즐긴다.

오래전 재로 변해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진 어느 제국에서 태어난 헤카림은 왕의 영토를 수비하겠다는 맹세 아래 형제와 같은 전우애로 뭉친 전설적인 전사 집단, 강철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이곳에서 헤카림은 아주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시련을 거치며 강철 같은 전사로 거듭난다.

헤카림은 성장해가며 모든 형태의 전략전술을 쉽게 통달하였고, 얼마 안 있어 동료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기사가 되었다. 강철 기사단장은 헤카림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신의 뒤를 이을 후보로 점찍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그의 어두운 면모를 깨달았다. 군마에 올라 전장을 휘저으며 연거푸 승리를 일궈내긴 했으나, 명예를 더럽힐 만큼 살육을 즐겼고 승리의 영광에 집착이 지나쳤던 것이다. 단장은 헤카림에게 기사단을 맡겨선 안 되겠다는 확신이 서자 그를 은밀히 따로 불렀다. 헤카림은 차기 기사단장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듣고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애써 누르며 임무로 복귀했다.

기사단의 다음 출정 때, 기사단장은 휘하 기사들과 떨어져 적에게 포위당했다. 그를 도우러 올 수 있는 건 헤카림뿐이었으나, 원한을 품고 있던 헤카림은 기사단장이 죽게 내버려두고 말을 돌렸다. 전투가 끝나고 살아남은 기사들은 헤카림이 저지른 일을 알지 못한 채, 헤카림을 새로운 수장으로 추대해 피맺힌 전장에 무릎을 꿇고 그를 따르리라 맹세했다.

헤카림은 도성으로 돌아가 왕의 근위 기사인 지휘관 칼리스타를 만났다. 칼리스타는 암살자의 독칼에 찔린 왕비를 위한 묘약을 구하러 떠나는 길이었다. 칼리스타는 헤카림의 능력을 높이 사 자신이 없는 동안 왕의 호위 임무를 강철 기사단에 맡겼다. 헤카림은 수락하면서도 이를 칼리스타의 임무에 비해 시시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때 그가 품은 앙심은 훗날 재앙의 씨앗이 된다.

경호 임무를 맡은 헤카림은 왕이 슬픔에 미쳐가는 모습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다. 편집증에 사로잡힌 왕은 죽어가는 왕비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모든 이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자신을 거스르는 기미가 보이면 누구든 반역죄로 다스렸다. 강철 기사단을 이끌고 이런 불만 세력들을 잔혹하게 진압한 것은 헤카림이었다. 왕명을 실행하는 냉혈한이라는 악명을 얻은 것은 물론이다. 무수한 마을이 불타고 많은 이들이 강철 기사단의 칼에 목숨을 잃어, 왕국은 도탄에 빠졌다. 결국 왕비가 숨을 거두자, 헤카림은 왕에게 왕비를 죽인 배후를 알아냈다고 거짓으로 고했다. 강철 기사단을 이끌고 이웃 나라를 짓밟아 더욱 악명을 떨칠 명분이 필요해서였다.

헤카림이 출전하기 전 칼리스타가 원정에서 돌아왔다. 전설로 전해지던 축복의 빛 군도에서 왕비를 치유할 할 방법을 알아왔으나,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왕국이 변해버린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던 칼리스타는 자신이 알아온 비밀을 말하길 거부하다 투옥되었고 이때가 왕의 신임을 얻을 기회라 생각한 헤카림은 철창에 갇힌 칼리스타를 찾아갔다. 그러고는 왕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말리겠다고 약속하면서 비밀을 공개하도록 설득했다. 칼리스타는 마지못해 동의한 후, 왕의 함대가 축복의 빛 군도를 가리는 결계를 통과하게 해주었다.

헤카림은 이미 타락해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왕을 호위하여 축복의 빛 군도 중심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왕은 섬의 수호자들을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수호자들은 동정을 표하며 자신들도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왕에게 말했다. 왕은 격노하여 그들이 마음을 바꿀 때까지 한 명씩 죽이라고 칼리스타에게 명했지만, 칼리스타는 이를 거부하고 섬의 수호자들을 해치려는 왕 앞을 막아섰다.

헤카림은 인생의 갈림길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영원히 굴레에 옭아맬 결정을 내린다. 그는 칼리스타를 거들지 않고, 그녀의 등에 창을 꽂고 부하들에게 모두 학살하라 명령했다. 헤카림과 강철 기사단은 수호자들을 도륙했다. 등불을 든 누더기 차림의 수호자[2]가 마침내 왕에게 왕비를 부활시킬 주문[3]을 알려주고 나서야 잔혹한 살육이 그쳤다.

그러나 이승으로 돌아온 왕비는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썩은 고깃덩어리 같은 소름 끼치는 존재에 불과했으며, 다시 죽기를 애원했다. 사랑하는 왕비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 깨달은 왕은, 그녀와 자신의 생명을 끝내고 영원히 함께하게 해줄 주문을 외웠다. 그 절박한 마법은 성공했으나, 섬 곳곳에 감춰진 마력이 깃든 물건들 때문에 그 위력이 백 배로 강화되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일어나 왕을 삼키더니 이내 섬 전역을 휩쓸며 바람에 닿은 모든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헤카림은 왕을 버려둔 채 강철 기사단을 이끌고 서둘러 해안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있는 보이는 자들은 모두 죽여 버렸다. 그동안 검은 안개 돌풍에 쓰러진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혼령이 되어 다시 일어났다. 기사들도 하나씩 언데드로 변했고, 헤카림만이 홀로 남았다. 멈출 수 없는 무시무시한 저주가 헤카림을 덮쳐 그와 그의 군마를 한 몸으로 만들었다. 진정 어두운 그의 영혼이 제대로 반영된 기괴하고 끔찍한 형상이었다.

분노에 가득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흉포한 철갑 괴물, 전쟁의 전조라 불리게 된 거대한 짐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생전에 지은 죄가 흑마술의 소용돌이에 뒤섞여 태어난 끝없는 원한과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기괴한 존재, 헤카림은 그림자 군도에 묶여 그 끔찍한 땅을 떠돌며, 근위 기사였던 과거를 비웃기라도 하듯 보이는 것을 모두 죽이고 있다.

그리고 그림자 군도에서 스며 나온 검은 안개가 육지를 덮칠 때면, 헤카림과 강철 기사단의 혼령들이 말을 타고 나타나 산 자들을 도륙한다. 오래전에 빛바랜 영광의 시절을 되풀이하려는 듯이.


[1] 원문은 Vanguard로, 선봉장이라고 번역해야 옳다.[2] 원문에선 a lantern-bearing wretch라고 적혀있다. 이자를 쓰레쉬라고 추측하기도 하는데, 결국 쓰레쉬가 맞다고 공식 답변이 나왔다.[3] 원문은 그냥 자신이 목격했던, 왕비를 되살릴 비밀에 대해 말해주었다고 나오지 주문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정황 상 요릭의 스토리에 나오는 영원의 물에 대해 알려준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