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헨리 드 보훈 Henry de Bohun | |
생몰년도 | 미상 ~ 1220년 6월 1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윌트셔 트로브리지 | |
사망지 | 이집트 | |
아버지 | 험프리 드 보훈 | |
어머니 | 헌팅던의 마거릿 | |
형제 | 마거릿 | |
아내 | 모드 드 맨더빌 | |
자녀 | 험프리, 마틸다, 마거릿 | |
직위 | 잉글랜드 고위 경호원, 트로브리지 경, 초대 해리퍼드 백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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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 귀족, 군인. 제1차 남작 전쟁에서 존 왕에 대항하는 귀족 반란군의 일원이었다.2. 생애
잉글랜드 고위 경호원 및 트로브리지 경인 험프리 드 보훈과 스코틀랜드의 왕자이자 헌팅던 및 노섬브리아 백작인 헨리의 딸 마거릿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누이로 나르본 자작 페드로 만리케 데 라라의 아내인 마거릿이 있었다. 1180년 도는 1182년에 아버지가 사망한 뒤 윌트셔에 있는 트로브리지 영지와 잉글랜드 경호원 직위, 그리고 노르망디의 가족 영지를 물려받았다. 또한 헤리퍼드 백작 로저 피츠마일즈의 재산 일부를 물려받은 할머니 헤리퍼드의 마거릿의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어머니로부터 헌팅던주 내 재산을 물려받았다.1199년 또는 1200년 4월 28일에 존 왕으로부터 자신의 영지 소유를 인정받는 대가로 경의를 표했으며, 초대 헤리퍼드 백작에 취임했다. 1201년 다른 귀족들과 함께 링컨으로 가서 자기 삼촌이자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203년 존 왕과 앙굴렘의 이자벨 왕비의 결혼 계약의 증인이 되었다. 1204년, 노르망디 공국이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 넘어가면서, 노르망디 공국 내 코탕탱과 퐁뒤브 지역의 보훈 가문 영지는 프랑스 왕실에 몰수되었다.
1212년, 트로브리지를 놓고 제3대 솔즈베리 백작 윌리엄 롱게스피와 법적 분쟁을 벌였다. 분쟁이 장기화되자, 그는 1213년 6월 심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병으로 정당화하려 했다. 그러나 심리 법원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트로브리지를 왕실의 소유가 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1215년, 프랑스 원정 실패, 귀족과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무거운 세금 부과, 대영주에 대한 존 왕의 정치적 압력에 반감을 품은 잉글랜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헨리는 여기에 가담했고, 존 왕은 반란 세력의 압력에 따라 1215년 6월 15일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했다. 헨리는 해당 조항을 시행하는 것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은 25명의 집행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곧 존 왕과 반란 세력간의 투쟁이 재개되었다. 전황이 존 왕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자, 귀족들은 상황을 바꾸기 위해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의 아들인 루이 왕자를 잉글랜드 국왕으로 추대했다. 헨리는 루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그의 군대 사령관 중 한 명이 되었다. 1216년 10월 19일 존 왕이 사망하고 9세의 아들 헨리 3세가 등극한 뒤 많은 귀족이 헨리 3세 편으로 돌아섰지만, 그는 헨리 3세를 인정하길 거부했다. 그러나 1217년 5월 20일 링컨 전투에서 윌리엄 마샬에게 패배한 뒤 생포되었다. 제1차 남작 전쟁이 끝난 뒤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219년 제5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가 1220년 6월 1일 이집트에서 병사했다. 사후 잉글랜드로 옮겨져서 글로스터셔의 랜토니 세쿤다 수도원에 있는 가족 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 그의 아들 험프리 드 보훈이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
- 모드 드 멘더빌(? ~ 1236): 초대 에식스 백작 제프리 피츠피터의 딸. 1227년 이후 제4대 에식스 여백작이 되었다.
- 험프리 드 보훈(1208 ~ 1275): 제2대 헤리퍼드 백작 및 잉글랜드 고위 경호원. 어머니 모드 사후 초대 에식스 백작이 되었다.
- 마틸다(1210 ~ ?): 제4대 워릭 백작 왈레랑 드 보몬트의 부인.
- 마거릿(? ~ ?): 호크노튼의 영주 헨리 도일리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