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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6 18:50:46

험프리 드 보훈(제2대 헤리퍼드 백작)

성명 험프리 드 보훈
Humphrey de Bohun
생몰년도 1208년경 ~ 1275년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 백작령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워릭셔
아버지 헨리 드 보훈
어머니 모드 드 맨더빌
형제 헨리, 랄프, 로버트, 마틸다, 마거릿
배우자 마고 드 뤼지냥, 모드 드 아벤베리
자녀 험프리, 모드, 앨리스, 엘리노어, 존
직위 제2대 헤리퍼드 백작, 초대 에식스 백작, 도버 성주, 켄트 보안관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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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왕당파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2. 생애

1208년경 잉글랜드 왕국 헤리퍼드 백작령에서 초대 헤리퍼드 백작 헨리 드 보훈과 제4대 에식스 여백작 모드 드 멘더빌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어렸을 때 사망한 남자 형제 헨리, 랄프, 로버트와 누이 마틸다[1], 마거릿[2]이 있었다. 1220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제2대 헤리퍼드 백작과 잉글랜드 대경사로 선임되었고, 1236년 어머니가 사망한 뒤 에식스의 맨더빌 소유지를 물려받았고 1239년 초대 에식스 백작으로 선임되었다.

1227년 헨리 3세콘월의 리처드 사이의 분쟁을 중재했고, 1236년 헨리 3세와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이후 두 사람의 후계자인 에드워드 왕자대부 9인 중 한 명이 되었다. 1239년 켄트 보안관이자 도버 성의 순경으로 임명되었으며, 1242년 헨리 3세의 푸아투 원정에 참여해 가스코뉴로 갔지만 곧 콘월의 리처드와 함게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244년 제6대 글로스터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와 함께 웨일스인들의 봉기를 진압하는 데 참여했지만 실패했다.

1246년 3월, 귀족들과 함께 교황청이 잉글랜드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막대한 세금을 십자군에 필요한 군자금 수금을 명문삼아 뜯어가는 행태를 벌이는 걸 항의하는 서신을 로마에 발송했다. 1256~1258년 웨일스와의 전쟁에 참전했고, 1259년 다른 남작들과 함께 헨리 3세와 웨일스 대공 허웰린 압 그루퍼드가 휴전 협정을 맺는 데 참여했다. 이듬해 전쟁이 재개되었다가 1262년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는데, 험프리는 다시 허웰린과의 협상에 참여했다.

한편, 1250년대에 잉글랜드 귀족들 사이에서 헨리 3세의 통치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1253년, 귀족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헨리 3세가 마그나 카르타를 준수하지 않고 엘레오노르의 수행원에 속한 사보이아인들에게 지나친 특헤를 주고 있다고 항의하는 항의 서한을 작성했는데, 이 서한에 서명한 귀족 중에는 험프리도 있었다. 1258년 옥스퍼드에서 열린 의회에서 시몽 드 몽포르 등과 함께 잉글랜드의 왕권을 제한하기 위해 옥스퍼드 조례를 작성했다. 1260년 헤리퍼드셔, 글로스터셔 및 우스터 주의 순회 판사로 선임되었다.

1263년 시몽 드 몽포르 등이 헨리 3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면서 제2차 남작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는 장남 험프리가 시몽 드 몽포르를 열성적으로 따른 것과는 달리 헨리 3세 편을 들었다. 1264년 5월 14일 루이스 전투에서 왕실군을 이끌었다가 헨리 3세와 함께 시몽 드 몽포르에게 생포되었다. 1265년 헨리 3세와 시몽 드 몽포르 간의 평화를 협상할 중재자 12명 중 한 명으로 선택되었다. 하지만 에드워드 왕자가 시몽 드 몽포르를 상대로 거병하자 즉각 가담했고,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에드워드 왕자가 승리를 거두고 시몽 드 몽포르 등을 전사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때 그의 장남 험프리는 시몽 드 몽포르 편에 섰다가 중상을 입고 생포된 뒤 10월 27일 비스턴 성에서 부상이 악화해 사망했다.

1275년 9월 24일 워릭셔의 케닐워스 성으로 가던 도중에 사망했고, 글로스터셔의 랜서니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 후 손자인 험프리가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3. 가족



[1] 1210 ~ ?, 제4대 워릭 백작 왈레랑 드 보몽[2] ? ~?, 호크노튼 기사 헨리 도일리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