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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12:54:20

형호로

송나라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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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호로 荊湖路

1. 개요2. 행정구역
2.1. 형호남로(荊湖南路)
2.1.1. 담주(潭州)2.1.2. 형주(衡州)2.1.3. 도주(道州)2.1.4. 영주(永州)2.1.5. 침주(郴州)2.1.6. 보경부(寶慶府)2.1.7. 전주(全州)2.1.8. 다릉군(茶陵軍)2.1.9. 계양군(桂陽軍)2.1.10. 무강군(武岡軍)
2.2. 형호북로(荊湖北路)
2.2.1. 강릉부(江陵府)2.2.2. 악주(鄂州)2.2.3. 덕안부(德安府)2.2.4. 복주(復州)2.2.5. 상덕부(常德府)2.2.6. 예주(澧州)2.2.7. 협주(峽州)2.2.8. 악주(岳州)2.2.9. 귀주(歸州)2.2.10. 진주(辰州)2.2.11. 원주(沅州)2.2.12. 정주(靖州)2.2.13. 형문군(荊門軍)2.2.14. 한양군(漢陽軍)2.2.15. 수창군(壽昌軍)

1. 개요

형호로(荊湖路)는 송나라의 최상위 행정구역인 로(路) 중 하나이다. 옛 형주, 즉 오늘날 후베이성과 후난성 일대를 관할하였다. 여기 적힌 정보들은 《송사》 88권 지리지4의 정보를 기준으로 하며 형호북로와 형호남로를 같이 묶어서 서술한다.

2. 행정구역

2.1. 형호남로(荊湖南路)

2.1.1. 담주(潭州)

장사군(長沙郡). 963년 남평을 평정한 이후 방어주가 되었지만, 988년에 다시 군사주가 되었고 무안군(武安軍) 절도주였다.

2.1.2. 형주(衡州)

형양군(衡陽郡). 군사주였다.

2.1.3. 도주(道州)

강화군(江華郡). 군사주였다. 965년에 대력현(大暦縣)을 폐지하고, 1073년에 양매채(楊梅砦), 승강채(勝岡砦), 면전채(綿田砦)를 폐지하였다. 1131년에 형호동로(荊湖東路) 관할로 변경되었다가 1132년에 다시 형호남로의 관할이 되었다.

2.1.4. 영주(永州)

영릉군(零陵郡). 군사주였다. 1073년에 복전채(福田砦)와 낙산채(樂山砦)가 폐지되고 1075년에 영릉채(零陵砦)가 폐지되었다.

2.1.5. 침주(郴州)

계양군(桂陽郡). 군사주였다.

2.1.6. 보경부(寶慶府)

소양군(邵陽郡). 본래 소주(邵州)로 군사주였다. 1225년 당시 이종의 저택이 이곳에 있었기에 수부(陞府)로 승격되었다. 1246년, 보경군(寶慶軍) 절도부가 되었다.

2.1.7. 전주(全州)

군사주였다.

2.1.8. 다릉군(茶陵軍)

형주(衡州) 관할이었으나 1139년 군으로 승격되었고 형주에 속하였다.

2.1.9. 계양군(桂陽軍)

본래 계양감(桂陽監)이었던 곳을 1133년 군으로 승격시켰다. 1131년 형호동로(荊湖東路) 관할이 되었다가 1132년 다시 복구되었다.

2.1.10. 무강군(武岡軍)

1106년에 소주(邵州) 무강현(武岡縣)이 군으로 승격되어 설치되었다.

2.2. 형호북로(荊湖北路)

2.2.1. 강릉부(江陵府)

강릉군(江陵郡).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가 파견되었다. 1128년, 수부(帥府)로 승격되었다.

2.2.2. 악주(鄂州)

강하군(江夏郡). 무창군절도사(武昌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 처음 명칭은 무청군(武淸軍)이었으나 996년 무창군으로 바뀌었다.

2.2.3. 덕안부(德安府)

안륙군(安陸郡). 안원군절도사(安遠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 본래 안주(安州)였고 1023년 경서로 관할이 되었으나 1041년 다시 형호로로 이관되었다. 1119년 덕안부로 승격되었다. 개보 연간에 길양현(吉陽縣)이 폐지되었다.

2.2.4. 복주(復州)

경릉군(景陵郡). 방어주였다. 1130년 덕안부, 복주, 한양군 진무사를 두었다. 1133년 형호북로 안무사를 두었다. 1236년 치소를 면양진(沔陽鎭)으로 옮겼다.

2.2.5. 상덕부(常德府)

무릉군(武陵郡). 상덕군절도사(常德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 본래 낭주(朗州)였다가 1012년 정주(鼎州)로 개칭되었으며, 964년 단련주로 격하되었다. 1074년 도원채(桃源砦), 탕구채(湯口砦), 백애채(白崖砦)가 폐지되었다. 1080년, 백전채(白磚砦), 황석채(黃石砦)가 폐지되었다. 1117년 군으로 승격되었다. 효종이 즉위하기 이전에 효종의 잠번이 정주에 있었고 또한 효종이 상덕군절도사로 재임했기에 1165년 부로 승격되었다. 상덕이라는 문구는 시경에 나오는 구절인 '불변하는 덕으로 무공을 세웠다(有常德以立武事)'에서 가져왔다. 1172년 정주로 환원되었다.

2.2.6. 예주(澧州)

예양군(澧陽郡). 군사주였다. 1130년 도가시산채(陶家市山砦)에 임시로 치소를 두었다가 복구하였다.

2.2.7. 협주(峽州)

이릉군(夷陵郡). 군사주였다. 건염 연간에 치소를 석비산(石鼻山)으로 옮겼다가 1135년 원래 치소로 옮겼다. 1234년 치소를 강남현(江南縣)으로 옮겼다.

2.2.8. 악주(岳州)

파릉군(巴陵郡). 악양군절도사(岳陽軍節度使)가 파견되었다. 본래 군사주였으나 1119년 군액을 받았다. 건염(建炎) 연간에 악주와 악주(鄂州)에서 각각 연강관내안무공사사(沿江管內安撫司公事)를 맡았다. 1155년 순주(純州)로 개칭되고 군액도 화용군(華容軍)으로 개칭되었으나 1161년 복구되었다.

2.2.9. 귀주(歸州)

파동군(巴東郡). 군사주였다. 1130년 기주로(夔路路) 관할이 되었으나 1135년 다시 형호북로 관할이 되었다. 1161년 다시 기주로 관할이 되었으나 1187년 복구되었다. 1188년 다시 기주로 관할이 되었다. 1236년 치소를 우남포(於南浦)로 옮겼다.

2.2.10. 진주(辰州)

노계군(盧溪郡). 군사주였다. 982년 초유현(招諭縣)이 설치되었다. 1074년 마양현(麻陽縣)과 초유현을 원주(沅州) 관할로 바꾸고 만수채(慢水砦), 용문채(龍門砦), 수포채(水浦砦), 동안채(銅安砦), 공계목채(龔溪木砦)을 폐지했다.1076년 명계채(明溪砦), 풍계채(豐溪砦), 여계채(余溪砦), 신흥채(新興砦), 봉이채(鳳伊砦), 철로채(鐵爐砦), 죽평채(竹平砦), 목루채(木樓砦), 오속채(烏速砦), 나자채(騾子砦), 서계채(西溪砦)를 폐지했다.

2.2.11. 원주(沅州)

담양군(潭陽郡). 군사주였으며, 본래 명칭은 의주(懿州)였다. 1074년 수복되어 담양현(潭陽縣)이 있던 곳에 노양현(盧陽縣)을 설치하고 진주(辰州) 마양현(麻陽縣)과 초유현(招諭縣)을 원주로 이관하였다. 1075년 금주채(錦州砦)를 더하고 초유현을 마양현에 통폐합시켰다. 1080년 진강채(鎭江砦)를 검강성(黔江城)에 더하여 검양현(黔陽縣)으로 설치했다가 진강채를 포(鋪)로 격하시켰다. 1082년 옛 탕거채(渠陽砦)를 현으로 승격시켰다가 1091년 다시 격하되었고 1103년 다시 현으로 승격되었다.

2.2.12. 정주(靖州)

군사주였다. 1076년 당계동성주(唐溪洞誠州)를 수복한 뒤 1081년 성주(誠州)로 설치되었다. 1082년 원주(沅州) 관보채(貫保砦)를 현으로 승격시켰다. 1103년 정주(靖州)로 명칭을 고쳤다.

2.2.13. 형문군(荊門軍)

972년 강릉부 관할이었던 장림현(長林縣)과 당양현(當陽縣)을 형문군 관할로 변경했다. 1073년 군이 폐지되어 관할 현들이 다시 강릉부 관할이 되었다가 1088년 다시 복구되었다. 1236년 치소를 당양현으로 옮겼다.]

2.2.14. 한양군(漢陽軍)

1071년 폐지되어 현으로 격하되고 한천현(漢川縣)을 진으로 격하시킨 뒤 악주(鄂州) 관할로 하였으나 1086년 복구되었다. 1135년 다시 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137년 복구되었다.
* 현

2.2.15. 수창군(壽昌軍)

본래 악주(鄂州) 무창현(武昌縣)이었으나 1222년 수창군사(壽昌軍使)를 파견하면서 군으로 승격되었다. 1234년 무창현을 다시 악주(鄂州) 관할로 되돌렸다.

[1] 개보 연간에 장풍현(長豐縣)을 폐지하고 장사현에 통합하였다.[2] 993년, 형산현과 악주(岳州)의 상음현(湘陰縣)과 함께 담주 관할이 되었다.[3] 1073년에 설치되었다. 칠성채(七星砦)를 진으로 바꾸고 수계채(首溪砦)를 폐지하였다.[4] 964년, 정주(鼎州)에서 악주(岳州) 관할이 되었다가 다시 담주 관할이 되었다.[5] 1098년, 장사현 관할의 5개 향과 상담현 관할의 2개 향을 선화현으로 승격시켜 설치하였다.[6] 1073년 현 내에 있던 장중채(奬中砦)를 폐지하였다.[7] 964년, 안인장(安仁塲)을 현으로 승격시켰다.[8] 당나라 시기의 명칭은 연당현(延唐縣)이었다가, 965년에 영원현으로 명칭을 고쳤다.[9] 1072년에 진으로 격하되어 영도현 관할이 되었지만 1086년에 다시 현으로 복구되었다.[10] 984년에 동안장(東安塲)이 현으로 승격되었다.[11] 당나라 시기의 명칭은 의창현(義昌縣)이었지만 후당 시기에 침의현(郴義縣)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뒤 피휘하여 계양현이 되었다.[12] 당나라 시기의 명칭은 의장현(義章縣)이었지만 태종이 즉위한 뒤 한자만 바꿨다.[13] 이전의 고정현(高亭縣)이었으나 1073년에 명칭을 고쳤다.[14] 1209년, 침현의 자흥향(資興鄕)과 정수향(程水鄕)을 나누어 자흥현(資興縣)을 설치했다가 이후 명칭을 흥녕현으로 고쳤다.[15] 1211년, 계양현의 영릉향(零陵鄕)과 의성향(宜城鄕)을 분할하여 상유채(上猶砦)에 신설하였다.[16] 1072년, 매산(梅山)을 수복한 뒤에 설치하였다. 석계채(惜溪砦), 자계채(柘溪砦), 등계채(藤溪砦), 심계채(深溪砦), 운계채(雲溪砦)가 있었다.[17] 향연채(香煙砦), 녹당채(祿塘砦), 장오채(長烏砦), 양장채(羊狀砦), 협석채(硤石砦), 마석채(磨石砦), 획원채(獲源砦)가 있었다.[18] 조수채(洮水砦), 관수채(灌水砦), 길녕채(吉寧砦)가 있었다.[19] 1211년 강락향(康樂鄕), 운양향(雲陽鄕), 상평향(常平鄕)을 분할하여 영현(酃縣)을 설치하였고 형주에 소속하였다. 현의 명칭은 영호(酃湖)에서 가져왔다.[20] 수나라 시기에 설치된 현이었지만 후진 시기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1019년에 다시 설치되었다.[21] 1006년 이전까지 침주 관할이었다.[22] 후진 시기에 폐지된 현이었으나 1141년 다시 설치되었다.[23] 산당채(山塘砦)가 있었다. 1073년, 백사채(白沙砦)가 폐지되고 관협채(關硤砦), 무양채(武陽砦), 성보채(城步砦)가 설치되었다. 1089년, 적목채(赤木砦)가 설치되었다. 1094년 신산채(神山砦)가 설치되었고, 1103년 통협채(通硤砦)가 설치되고, 1107년 협구채(峽口砦)가 설치되었다.[24] 본래 소주 시죽현(蒔竹縣)이었고 1076년 폐지되었다가 다시 설치되었다.[25] 본래 시죽현(蒔竹縣)이었고 1081년 소주 관할이 되었다. 1085년 임구채(臨口砦)가 설치되었다가 1106년 임구현이 되었고 무강군에 소속되었다. 이후 남송 시기에 들어 폐지되었다.[26] 1155년 수두강 북쪽에 설치되었다.[27] 965년, 백복연(白伏巡)을 현으로 승격시켰다.[28] 997년 옥사현(玉沙縣)으로 복주(復州) 관할이었으나 1073년 복주가 폐지되고 감리현에 통폐합되었다.[29] 1073년 송자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086년 복구되었다. 1130년 강릉부의 치소를 지강현에 임시로 설치했다가 1135년 복구했다. 1237년 시주(澌州)와 열주(涅州)로 이관되었다. 1270년, 백수진(白水鎭) 하타시(下沱市)로 치소를 옮겼다.[30] 965년, 백구연(白舊巡)을 현으로 승격시키고 만유현(萬庾縣)을 함께 설치했다가 만유현은 얼마 뒤 폐지되었다. 1073년, 석수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086년 복구되었고 정강의 변 이후 폐지되었다.[31] 당나라 때 설치된 현으로 975년에 숭양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32] 1072년 숭양현의 통성진(通城鎭)을 현으로 승격시켰고 1135년 다시 진으로 격하되었으나 1147년 다시 복구되었다.[33] 1073년 복주를 일부 분할하여 설치하였다.[34] 1074년 동전을 주조하는 감으로 설치되었다.[35] 1069년 운몽현(雲夢縣)을 진으로 격하시켜 안륙현에 통폐합했다가 1086년 복구하였다.[36] 건염 연간에 자자채(紫資砦)로 치소를 옮겼다.[37] 정강의 변 이후 폐지되었다.[38] 1069년 진으로 격하되어 안륙현에 통폐합되었다가 1086년 복구되었고 1137년 치소를 오락시(仵落市)로 옮겼다가 1148년 복구했다.[39] 997년 강릉부 관할이었다가 1039년 면양현(沔陽縣)이 통폐합되었다. 1073년 다시 강릉부 관할이 되었다가 경릉현과 함께 복주 관할이 되었다.[40] 건덕(乾德) 연간에 무릉현의 일부를 분할하여 설치되었다.[41] 대관(大觀) 연간에 진양현(辰陽縣)으로 개칭되었다가 1131년 복구되었다. 1135년 군사(軍使)가 파견되었고 치소를 황성채(黃城砦)로 옮겼으며, 1160년 다시 현이 되었다.[42] 악주(岳州) 관할이었으나 건도 연간에 상덕부로 이관되었다.[43] 대의채(臺宜砦)가 있었다.[44] 삭구채(索口債), 안복채(安福債), 서우채(西牛債), 무구채(武口砦), 예주채(澧州砦)가 있었다.[45] 한류채(漢流砦), 파산채(巴山砦), 마계채(麻溪砦), 어양채(魚陽砦), 장락채(長樂砦), 매자채(梅子砦)와 연석장(鉛錫塲)이 있었다.[46] 한류염정(漢流鹽井)과 비어염정(飛魚鹽井)이 있었다. 1085년, 신안채(新安砦)와 장양채(長楊砦)가 폐지되었다.[47] 고루채(古樓砦)가 있었다.[48] 990년 왕조장(王朝塲)이 현으로 승격되었고 뒤에 명칭이 임상현이 되었다.[49] 1082년 흥산현(興山縣)을 진으로 격하시켜 통폐합했다가 1086년 복구되었다. 벌례채(橃禮砦)와 청림염정(靑林鹽井)이 있었다.[50] 절첩채(折疊砦)가 있었다.[51] 968년 치소를 소군원(昭君院)으로 옮겼다가 989년 향해(香溪) 북쪽에 옮겼다.[52] 현고채(懸鼓砦)가 있었다. 1079년 용담보(龍潭堡)가 설치되었다.[53] 용문채(龍門砦)와 동안채(銅安砦)가 있었다.[54] 1075년 설치되었다.[55] 1058년 설치되었다.[56] 1070년 설치되었다.[57] 1075년 설치되었다.[58] 장주포(蔣州鋪), 서현포(西縣鋪), 팔주포(八洲鋪), 장의포(長宜鋪), 회계포(回溪鋪), 진강포(鎭江鋪), 용문포(龍門鋪), 회화포(懷化鋪)가 있었다.[59] 금주채(錦州砦), 용계포(龍溪鋪), 용가포(龍家鋪), 죽채포(竹砦鋪), 허종포(虛踵鋪), 제천포(齊天鋪), 차계포(叉溪鋪)가 있었다.[60] 죽채포(竹砦鋪), 연계포(煙溪鋪), 무상포(無狀鋪), 목주포(木州鋪), 홍강포(洪江鋪)가 있었다.[61] 홍강포(洪江鋪)와 동안포(銅安鋪)가 있었다. 1073년 협주의 신성을 안강채로 하고 부주의 신성을 진강채로 하였다.[62] 죽난포(竹灘鋪)가 있었으나 1085년 폐지되었다.[63] 1070년 설치되었고 1073년 성주(誠州) 관할이 되었다. 1091년 폐지되었으나 1103년 다시 설치되었다.[64] 죽난채와 홍강채는 1090년에 설치되었고 검양현 관할이었다.[65] 1104년 설치되었다.[66] 본래 거양현(渠陽縣)이었으나 1103년 영평현으로 명칭을 고쳤고 정주 1138년 정주 관할이 되었다.[67] 본래 명칭은 삼강현(三江縣)이었으나 1103년 회동현으로 고쳤다.[68] 본래 나몽현(羅蒙縣)이었으나 1103년 통도현으로 고쳤다.[69] 1083년 설치되었다가 1088년 폐지되었다.[70] 원주에서 정주 관할이 되었다.[71] 1084년 설치되었다가 1088년 폐지되었다.[72] 약수채와 풍산채는 1103년 설치되었다.[73] 석가보와 산촌보는 1081년 설치되었다.[74] 1083년 설치되었다.[75] 대유보와 천촌보는 1084년 설치되었다.[76] 1108년 설치되었다.[77] 1113년 설치되었다.[78] 1118년 설치되었다.[79] 1144년 장림현으로 통폐합되었다가 1146년 복구되었다.[80] 977년 덕안부에서 이관되었다가 1135년 폐지되었고 1137년 복구되었다.[81] 명칭은 무창산(武昌山)에서 가져왔다. 정강의 변 이후 강주(江州)의 치소가 되었으나 악주로 되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