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의 행정구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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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로 | 京畿路
1. 개요
송나라의 최상위 행정구역인 로(路) 중 하나로 북송의 수도인 개봉부와 그 주변 일대를 관할했다. 숭녕(1102~1106년) 연간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경기로는 261,117호, 442,940명의 주민들이 살았던 대단히 번화한 수도권이었으며 동시기 튀르크의 침공으로 전성기가 한풀 꺾인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1],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를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총 16개현을 관할했다.후술할 행정구역들의 괄호 안은 해당 송대 행정구역 일대가 현대(중화인민공화국)에 불리는 이름들이며, 여기 적힌 정보들은 《송사》 85권 지리지1의 정보를 기준으로 한다.
2. 역사
경기로는 1053년에 설치된 최고 행정구역이었으며, 경기로에 전운사(轉運使)와 제점형옥(提點刑獄)을 두었다. 1055년에는 경동로(京東路)의 조주(曹州), 경서로(京西路)의 진주(陳州), 허주(許州), 정주(鄭州), 활주(滑州)를 수도권으로 삼고 경기로에 편입시켰고, 전운사와 제점형옥을 폐지하였다.이후 1105년에는 경기로와 함께 전운사와 제점형옥을 부활시켰고, 영창부(潁昌府), 정주(鄭州), 전주(澶州), 공주(拱州)[2]를 각각 수도권으로 삼았다. 그러다가 1110년에 수도권을 폐지하고 허주, 정주, 전주를 경서로와 하북로에 각각 돌려놓고, 공주를 폐지하였으며, 양읍현을 다시 개봉부에 되돌렸다. 1114년에는 양읍현에 다시 공주를 설치하고, 영창부, 정주, 개덕부와 함께 개봉부의 수도권으로 삼았다. 이후 1120년에는 개봉부만 경기로에 남기면서 개봉부가 경기로의 유일한 행정구역으로 남았다.
정강의 변으로 송나라가 화북 지역을 상실한 이후에는 금나라의 행정구역인 남경로(南京路)의 일부가 되었다.
3. 행정구역
경기로의 하위 행정구역으로는 개봉부(開封府)가 유일하다.3.1. 개봉부(開封府)
현재의 행정구역은 허난성 카이펑시와 그 일대로, 카이펑, 즉 개봉(開封)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춘추시대에 이 지방을 지배하고 있던 정장공이 현재의 카이펑 근처에 성을 쌓고 계봉(啓封)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에서 시작한다. 선진시대엔 위(魏)의 도시 대량(大梁)이었고 기원전 364년에 위나라의 수도가 되었으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황폐화되었고, 이후에도 이름이 여러 번 바뀌었다. 후한 말 삼국시대에는 후한 마지막 황제 헌제가 황제 즉위 이전 책봉받은 작호인 진류왕의 유래이자, 위무제 조조의 첫 근거지로 유명했던 연주 진류(陳留)군에 속한 그 지역으로 당시엔 준의(浚儀)현으로 불렸다. 어쨌거나 이 일대가 군벌로서 조조의 첫 근거지다 보니 조조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충 보았을 지명들도 밑에 꽤 보이는 편이다.수나라가 만든 대운하를 당나라 때 적극 사용하면서 개봉은 번창하였다. 대운하 덕분에 수운이 발달해 상업도시로 성장했는데, 당시 지명은 변(汴)이었다.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들어선 후량의 수도는 낙양이었으나, 913년 들어 주전충이 이곳으로 새롭게 천도하면서 후량의 수도가 되었고 이후 후진, 후한, 후주의 수도로 기능하였다.[3] 이는 북송 시기에도 마찬가지로, 1127년 정강의 변이 일어날 때까지 북송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북송 시기 공식 명칭은 동경개봉부[4]였고 변은 변경(汴京)[5], 변량 등의 명칭이 되어 민간에서 자주 쓰였다.[6][7]
- 현
- 개봉현(開封縣, 북송의 수도이며 현재의 카이펑시), 상부현(祥符縣 카이펑시 샹푸구)[8], 위씨현(尉氏縣, 카이펑시 웨이스현), 진류현(陳留縣, 카이펑시 샹푸구 진류진(陳留鎮)), 옹구현(雍丘縣, 카이펑시 치현), 봉구현(封丘縣, 신샹시 펑추현), 중모현(中牟縣, 정저우시 중무현)[9], 양무현(陽武縣, 신샹시 위안양현), 연진현(延津縣, 신샹시 옌진현)[10], 장원현(長垣縣, 신샹시 창위안현)[11], 동명현(東明縣, 카이펑시 란카오현 서쪽)[12], 부구현(扶溝縣, 저우커우시 푸거우현), 적언현(覿焉縣, 쉬창시 옌링현), 고성현(考城縣, 상추시 민취안 현 서쪽)[13], 태강현(太康縣, 저우커우시 타이캉현)[14], 함평현(咸平縣, 저우커우시 퉁쉬현)[15]
[1] 당시 인구 15만~30만 사이.[2] 양읍현에 설치하였다.[3] 후당은 낙양에 수도를 세웠다.[4] 서울특별시에 비유하면 동경은 특별시, 개봉부는 서울.[5] 사극에서 자주 쓰인다.[6] 조선시대 한성부를 한양이라고도 부르던 것과 같다.[7] 다만 이는 그저 통속적으로 자주 쓰이던 것이지 개봉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쓰였다고 보긴 어렵다.[8] 1010년 이전까지의 명칭은 준의현(俊儀縣)이었다.[9] 1121년(선화 3년), 주왕성(紂王城)을 청양성(靑陽城)으로 바꿨다.[10] 1117년 이전까지의 명칭은 산조현(酸棗縣)이었다.[11] 수나라 광성현(匡城縣)이 있던 곳이다. 학구현(鶴丘縣)이라고 했다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12] 본래 동명진(東明鎭)이던 것을 963년(건덕 원년)에 현으로 격상시켰다.[13] 1105년 공주(拱州)의 속현으로 뒀다가 1110년(대관 4년)에 개봉부로 옮겼다.[14] 본래 개봉부의 속현이었는데, 1120년(선화 2년)에 공주(拱州)의 속현으로 두었다가 4년 뒤에 개봉부로 돌아왔다.[15] 본래 진류현에 속했던 통허진(通許鎭)이던 것을 1002년(함평 5년)에 현으로 격상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