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호시노 카즈요시(星野 一義).jpg | |
임풀 모터스포츠 총감독 호시노 임풀 창업주 겸 회장 | |
호시노 카즈요시 (星野 一義, Kazuyoshi Hoshino) | |
출생 | 1947년 7월 1일 |
일본 시즈오카현 아베군 타마가와촌[1] | |
가족 | 기혼, 슬하 1남 1녀 (아들 호시노 카즈키) |
JGTC 시절 그의 온보드 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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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日本一速い男).
- 나카지마 사토루.
팀 임풀의 총감독[2] 겸 해당 팀의 운영 겸 자동차 부품 제작 및 자사 부품 방착 차량 판매를 담당하는 법인인 주식회사 호시노 임풀의 회장으로[3], 1947년 7월 1일 일본 시즈오카현 출신.- 나카지마 사토루.
원래는 모터사이클, 그 중에서도 모토크로스 레이서로 활동하다가 전업했다. 모터사이클 활동 당시의 스승은 전 마쯔다의 워크스 레이서였던 카타야마 요시미. 당시 카타야마는 가와사키의 워크스팀을 이끌었고, 호시노는 이 팀에 소속되어 전일본 모토크로스 챔피언십에서 2개의 클래스 우승을 차지했다.
1970년대 닛산의 오오모리 워크스 팀[4]의 드라이버로 쿠로사와 모토하루, 하세미 마사히로와 함께 활약했는데 이 때 호시노는 주로 후지 스피드웨이에서 열리던 투어링카 대회에 참전했다.
1980년대에 자신의 레이싱 활동을 위한 회사인 호시노 임풀을 창립, 3년 뒤에 호시노 레이싱을 창단해 자신이 감독 겸 선수로 나서게 된다.
1975년, 1977년 전일본 F2000 챔피언십, 1978년 전일본 F2 챔피언십, 1987년, 1990년, 1993년의 전일본 F3000 챔피언십 우승자인데, 재미있게도 이 기록은 전부 지금의 슈퍼 포뮬러로 기록이 이어진다.[5] 포뮬러의 경우 1997년 지병이던 요통의 악화를 이유로 은퇴[6], 이후 2002년에 활동하던 GT 대회까지 은퇴하면서 선수 생활을 접는다.
2. 경력
2.1. 일본 포뮬러 대회
- 1974년 11월 JAF 스즈카 GP에서 F2000에 데뷔, 3위 입상.
- 1975년 빅토리 서클 레이싱 소속으로 전일본 F2000 챔피언십 우승.
- 1976년 전일본 포뮬러 1300 우승.
- 1977년 히어로즈 레이싱 코퍼레이션 소속으로 전일본 F2000 챔피언십 우승.
- 1978년 1977년과 동일한 팀으로 전일본 F2 챔피언십 우승.
- 1979년부터 1983년까지 5년 연속 2위 차지.[7]
- 1987년 호시노 레이싱으로 전일본 F3000 챔피언십 우승.
- 1990년 CABIN RACING TEAM WITH IMPUL으로 전일본 F3000 챔피언십 우승.
- 1993년 NISSEKI IMPUL RACING TEAM으로 전일본 F3000 챔피언십 우승.
- 1996년 포뮬러 니혼 제1전 우승. 동년 대회 3위
- 1997년 봄 일본 톱 포뮬러 대회 은퇴 발표[8]
총 전적 : 166전 39승, 42회 폴 포지션
2.2. 일본 투어링카/그랜드 투어링카 대회
- 1969년 11월 닛산 스카이라인 GT-R[9]을 타고 후지 스피드 페스티벌 4위로 데뷔
- 1973년 후지 그랜드 챔피언십 마이너 투어링 3위
- 1982년 후지 그랜드 챔피언십 챔피언, Bathurst 1000에서 블루버드 터보로 클래스 우승, 종합 8위
- 1983년 후지 수퍼 실루엣 시리즈 2위.
- 1984년 후지 그랜드 챔피언십 챔피언
- 1990년 전일본 투어링카 챔피언십(JTC) 챔피언(닛산 스카이라인 GT-R)[10]
- 1994년 슈퍼투어링 클래스로 개편된 전일본 투어링카 챔피언십(JTCC)에 닛산 프리메라를 몰고 참전해 8위 기록(제 17전인 후지 1라운드 우승)
- 1996년 JGTC GT500 클래스 4위(파트너는 카게야마 마사히코)
- 2000년 JGTC GT500 클래스 3위(파트너는 모토야마 사토시, 6전이던 MINE 서킷전 우승이 최종)
- 2002년 8월, 선수 은퇴 발표.
2.3. 스포츠카 레이스
- 1985년 전일본 스포츠 프로토타입카 챔피언십(JSPC)에 참전, 이해 열린 세계 내구 챔피언십(World Endurance Championship)[11] 일본 대회에서 우승
- 1987년 JSPC 풀 시즌 출장
- 1990년 르망 24시 내구레이스에 닛산 R90CP로 참가, 결승 5위로 완주.
- 1991년 JSPC 챔피언
- 1992년 JSPC C1 클래스 챔피언
- 1996년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 닛산 GT-R LM으로 15위 완주
- 1998년 르망 24시간 내구레이스에 닛산 R390으로 참전, 이해 스즈키 아구리, 카게야마 마사히코와 함께 종합 3위로 포디움에 오름
3. 인물
- 상당한 골초인지라 피트 내는 금연구역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도 피웠으나 2009년 당시 금연한지 2년 되었다고 한다. 금연 개시는 60세가 된 2007년 10월로, 그 이후에 10kg나 쪘다고 한다.[12]
그러니까, 이 문서의 메인 사진이 되는 감독님의 모습이 사실은 살이 찐 모습이란 거다. 한창 시절의 모습은 본 영상 참조. - 반대로 술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본인 말로는 "담배는 언제 피워도 맛있기 때문에 끊는데 고생했지만, 술을 맛있게 느낀 적은 없었다."라고.
- 보기에는 상당히 호방한 성격이지만,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어서 현역 시절에는 경기 당일에 식사를 잘 하지 않고 바나나 하나로 떼웠다고 한다. 나카지마 사토루와 같은 팀이었을 시절에는 나카지마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레이스 전인데 밥이 잘 넘어가는가 보군" 라고 무심코 말했을 정도. 현역시절에는 레이스 위크에 들어갈 시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수요일에 습진이 생기고, 레이스 이후인 월요일이 되어서야 낫는 사이클이 15년 넘게 반복되었다고 한다.
- 라이벌 드라이버의 실력을 인정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타카기 토라노스케의 경우 당시 타카기가 소속된 나카지마 레이싱의 감독인 나카지마 사토루에게 '티렐이든 어디든 좋으니까, 저쪽(=F1)에 해 버려.'라 평했고 독일의 하인츠하랄트 프렌첸에게는 피트까지 찾아가서 '너는 이런 곳에서 칙칙해지지 말고 얼른 F1에 가라'고 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정말 F1에 데뷔했다.[13]
- 가수 겸 레이서 콘도 마사히코의 레이스 스승이다.
지도하실 때 성격 좀 같이 고쳐주시지... - 1990년대 초반의 전일본 F3000 레이스에서 젊은 레이서의 실수에 휘말려 호시노가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호시노 씨에게 사과하러 가는 편이 좋다"고 주변에 말해 그 젊은이가 호시노의 모터 홈으로 갔는데 유리창에 주먹 모양의 금이 들어가 있어 호시노의 분노의 크기에 떨었다고 한다. 결국 그 레이서는 그 자리에서 철수했다고 한다.
- 동물, 그 중에서도 고양이를 좋아한다. 아들인 호시노 카즈키도 고양이를 좋아하며, 본가에는 동물이 많았다고 한다.
- 골프를 좋아하지만, 은근히 골프채를 부수는 일이 많다. 격정적인 성격이 한 몫 하시는 편으로 현역 은퇴후에도 열정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 아들인 호시노 카즈키에게 성적 면에서는 굉장히 엄했으나, 은퇴 후에는 미안하다고 할 정도로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다. 다만, 손자에게는 약한 편인듯.
4. 차와 관련된 이야기
- 1980년대 후반 호시노가 닛산 워크스와 관계를 맺을 당시 F2/F2000/F3000 선수권에서는 혼다의 엔진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호시노는 닛산 워크스를 떠날 생각으로 닛산 본사에 인사하러 갔다가 닛산 측에서 붙잡는 바람에 그냥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있다.[14]
- 위의 연장선상에서 2006년 이후 IMPUL Racing은 포뮬러 닛폰(현재 슈퍼 포뮬러 챔피언십)에서 토요타제 엔진을 쓰고 있는데 이것도 닛산이 동급에 참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제 될 것이 없었지만, 2008년 당시만 해도 IMPUL 팀 경주차에 토요타와 NISMO의 로고가 붙어있는 모습을 봤다고 하나 이 상황은 현재 진행형인 상황이다. 요즘은 토요타 가주 레이싱 로고까지 붙어서 더한 편.
- 2001년 3월에 과속으로 운전면허 정지로, JGTC에 불참하는 사건이 발생해 같은 레이싱 드라이버인 핫토리 나오키(服部尚貴)[15]가 3전까지 대타를 뛰었고[16] 호시노 본인은 강습을 받던 사진이 주간지에 실리기도 했다. 천하의 호시노 카즈요시가 겪은 굴욕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 2012년에야 알려진 사실이지만 1980년대 후반 혼다의 F1 터보 엔진 제작에 테스트 드라이버로 참가했다. 당시 닛산의 협조를 받아서 했다고.
- 어떤 잡지의 칼럼에서 "지금까지 굉장했던 차는?"이란 질문에 '닛산 그룹 C 카 '라고 대답, "1,000 마력도 나오면 위험하다"고 말했다. 당시는 매 레이스 예선 종료 후 팀 동료 하세미 마사히로와 대면해 "서로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안도하고 C 카테고리가 소멸했을 때는 "이제 죽지 않아도 된다!"고 두 사람이 안심 했다고 한다.
5. 여담
호시노가 4륜레이스에서 활동하던 초기, 즉 1969년~1973년에 닛산 스카이라인 GT-R PGC10/KPGC10이 활약하던 시점에 마쯔다는 파밀리아 로터리 쿠페, 카펠라 로터리 쿠페, 사반나(RX-3) 등을 동원해 닛산 스카이라인 GT-R에 도전했는데, 당시 마쯔다에는 그의 모터사이클 스승이던 카타야마 요시미가 있었다.1971년 12월의 후지 투어리스트 트로피, 닛산과 마쯔다가 모두 카드를 낸 이 대회에서 사반나가 스카이라인 GT-R C10계의 50연승을 저지하면서부터 GT-R과 로터리 엔진 간의 라이벌 관계가 제대로 터졌다. 이 대회에서 서니를 주행했던 호시노는 스승인 카타야마를 이겼지만 둘 다 완주에 실패했고,[17] 게다가 옷파마 워크스에서 낸 스카이라인들이 전부 사반나에게 깨짐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영향이 40년이 지난 현재에도 반영되어 이니셜D에서 타카하시 케이스케가 GT-R과 랜서 에볼루션을 싫어하는 것으로 나온다. 1971년의 레이싱 경주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셈.
큰아들이자 현재는 임펄의 홍보 및 부품 개발에 참여하고 있으며 팀 감독대행[18]이기도 한 호시노 카즈키 주식회사 호시노 임풀 이사[19]도 2021년까지 슈퍼 GT에서 활동하다가 2021년 9월 7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은퇴를 발표했다. 다만, 아들이 레이스를 하는 것에는 반대를 많이 했던 사람이 바로 호시노 카즈요시 본인이라고.[20]
애니메이션에는 그의 이름을 딴 캐릭터가 나오는데 걸판에 등장하는 학교 중 하나인 현립 오아라이 여학원의 레오폰팀 소속 호시노는 그의 이름과 별칭을 따왔고, 이니셜D에 등장하는 호시노 코조는 그를 모델로 한 인물이다.
1977년작인 영화 '서킷의 늑대'[21]에 하세미 마사히로, 나카지마 사토루, 타카하시 쿠니미츠 등 당대의 유명 레이서와 함께 특별 출연한 바 있다. 이때 촬영지는 스즈카 서킷.
나카지마 사토루의 엡손 PIAA, 하세미 마사히로의 토미카처럼 호시노의 유명 스폰서로는 칼소닉칸세이가 있다. 원래는 일본 라디에이터 주식회사, 즉 칼소닉이 스폰서였으나[22] 2000년 칼소닉과 칸세이가 합치면서 지금처럼 이어져오고 있다가 칼소닉칸세이가 마렐리와 합병하면서 마렐리로 이어져오고 있다.
1998년 르망 24시 내구레이스에 출전할 당시 The Alfee가 개인 스폰서로 나섰는데 그 때 계약하는데 1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보통 수개월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진짜 초고속으로 이뤄진 셈. 닛산 R390 GT1의 리어타이어 전방 카울에 THE ALFEE TOSHIBA EMI가 붙었고 1999년 호시노 본인의 레이싱 슈트에 The Alfee의 로고가 붙기도 했다.
2017년, 스즈카 서킷에서 열린 모터스포츠 팬 감사 데이 행사에서 선배 드라이버이자, 혼다의 워크스 라이더 출신인 타카하시 쿠니미츠, 키타노 모토[23]와 함께 과거 혼다의 레이싱 바이크였던 혼다 RC166을 시험주행, 중학교 시절때부터의 꿈을 드디어 이뤘다.[24]
호시노 카즈요시의 현역시절을 지켜본 드라이버 중 1명인 츠치야 케이이치[25]가 호시노 임풀의 유튜브에 출연[26]해서 들려준 이야기에 의하면, 닛산 레이싱 스쿨[27]에서 강사를 하던 시절, 합승한 교육생의 수준을 고려해 차를 살살 달래던 다른 프로 드라이버들과는 달리 페이스를 줄이지 않고 차를 엄청나게 몰아붙였다고 한다. 동승주행시 후지 100R 코너를 노브레이크로 돌파하던 유일한 강사였다고.[28]
또한 츠치야 케이이치가 다른 영상[29]에서 말한 이야기에 의하면, 모터랜드2가 방송될 당시 인터뷰를 하러갈 때 호시노 카즈요시의 눈치를 보고 인터뷰 여부를 정했다고 하는데, 이는 아무래도 전술한 긴장감과 스트레스가 주된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츠치야는 멀리서 눈치를 보고 인터뷰 할 수 있는 상황이 될거 같으면 인터뷰에 들어갔다고 한다.
2024년 7월 1일 호시노 임풀 공식 X를 통해 40년 가까이 지키고 있던 호시노 임풀의 대표이사직에서 내려와 회장으로 영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 후임은 아들인 호시노 카즈키.
[1] 現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아오이구[2] 2023년부터 슈퍼 GT에서는 팀 임풀의 총감독으로 활동한다. 감독직에는 장남이자 호시노 임풀의 이사이기도 한 호시노 카즈키가 취임.[3] 2024년 회사 SNS에서 호시노 카즈요시 총감독을 회장이라 불렀다.[4] 현재는 닛산의 고성능 디비전을 담당하는 니스모 모터스포츠.[5] 즉 명칭만 바뀐 셈.[6] 은퇴를 발표한 시점은 1997년 포뮬러 닛폰의 개막 직전. 즉 1996년 포뮬러 닛폰 최종전이 커리어 마지막 포뮬러 참전이다.[7] 당시 우승자는 1979년에 마츠모토 켄지, 1980년에 하세미 마사히로, 1981, 82년에 나카지마 사토루, 1983년엔 영국의 제프 리스(Geoff Lees)였다.[8] 최종 참가 경기는 1996 포뮬러 니혼 최종전. 은퇴 발표는 1997년 4월의 포뮬러 닛폰 개막 직전으로, 4월 23일자 신문을 통해 은퇴를 알리는 발표가 이뤄졌다.[9] 당시 1세대[10] 3세대[11] 2012년부터 열리는 것이 아닌 1992년을 끝으로 폐지된 World Sportscar Championship을 의미한다.[12] 한창 담배를 피울 때에는 레이스카에 담배를 들고 들어가려다가 스탭이나 후배 레이서인 모토야마 사토시에게 제지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13] 하인츠하랄트 프렌첸은 1994 시즌 F1에 자우버 소속으로, 타카기 토라노스케는 1998년 티렐 레이싱 소속으로 F1에 데뷔했다.[14] 이 이유는 여러가지였는데 하나는 닛산 모터스포츠가 호시노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혼다와 닛산이 레이스에서 직접적으로 대결하지 않는다는 것 등이었다고 한다.[15] 1996년도 JTCC 챔피언이다. 현 슈퍼 GT 드라이빙 표준 감시관. 여담이지만 GT레이스를 은퇴할 당시 혼다, 닛산, 토요타의 워크스 레이싱 팀 소속으로 모두 참가한 전력이 있다. 베스트 모토링 내에서 별명은 한조(핫토리 라는 성 때문에 붙음)[16] 이 당시 핫토리의 원 소속은 히토츠야마 레이싱이었는데, 호시노가 운전면허로 정지를 먹자 임시로 팀 임펄로 이적, 3전까지 뛰고 히토츠야마 레이싱에는 5전부터 복귀하기도. 그 영향 때문인지 2001년 JGTC 당시 히토츠야마 레이싱 팀과 팀 임펄의 엔트리를 보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17] 본 대회 우승자는 카모 스스무(加茂 進)와 마스다 겐키(増田 建基)였다.[18] 2022년 슈퍼 포뮬러 제8전 우승 기자회견에서 밝혀짐. 시즌 전반에는 테크니컬 어드바이저였으나 후반에는 감독대행으로 활동, 2023년에 기여코 슈퍼 GT에서 감독이 되었다.[19] 2024년 7월, 대표이사로 변경[20] 실제로 호시노 카즈키는 대학 졸업후, 22세인 1999년에 카트 레이스를 시작한 후 영국으로 건너갔다. 같은 연배의 레이서들이 걸었던 경력에 비하면 상당히 늦은 셈. 레이서가 갖는 위험성을 잘 아는 호시노 카즈요시가 상당히 반대를 했던 건 사실이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허락했을 정도. 실제로 호시노 카즈키 역시 부친과의 대담 영상을 통해서 자녀가 모터스포츠를 하겠다 하면 허락하겠냐는 질문에는 반대했고 아버지의 뜻을 이제는 알겠다고 했을 정도.[21] 이케자와 사토시가 그린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22] 실루엣 포뮬러 시절에도 스폰서였다![23] 키타노 모토, 타카하시 쿠니미츠는 혼다의 워크스 라이더 출신으로 두 사람 모두 이후 닛산에서 4륜 레이스 활동을 했다.[24] 본래 호시노 카즈요시는 타카하시 쿠니미츠, 키타노 모토의 모터사이클 활동을 잡지나 기사로 본 사람이었으나, 카와사키와 계약을 맺으면서, 혼다의 바이크는 타지 못했었다. 그러나, 호시노의 사연을 들은 타카하시 쿠니미츠와 키타노 모토가 '꿈을 이룬다'라는 계획으로 이 일을 실현, 심지어 호시노의 가족들, 친구들도 다 모았고, 현재 연관된 회사인 닛산으로부터 허락까지 받았다! 주행 후 호시노 카즈요시는 눈물까지 글썽였다고.[25] 실제로 츠치야 케이이치는 전일본 투어링카 챔피언십(JTC) 시절 테레비 도쿄에서 방송한 모터랜드2의 리포터 역할도 했다.[26] 운영은 호시노 카즈키가 하고 있다. 영상을 보면 가장 먼저 인사하는 사람이 호시노 카즈키.[27] 원문상 닛산 레이싱 스쿨이다. 츠치야가 언급한 드라이버들이 60년대부터 80년대 명성을 날린 닛산 워크스 레이서들이라 과거에 존재했던 쪽인 듯. 심지어 1992년에 팀 쿠니미츠를 창단하고 현역 말년이라 할 수 있는 전일본 GT 챔피언십 시절 혼다 NSX를 타셨던 타카하시 쿠니미츠의 이름이 언급되는 걸 보면 이건 빼도박도 못한다![28] 참고로 츠치야 케이이치는 1979년에 닛산 레이싱 스쿨에 입교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시 호시노 카즈요시의 나이가 30대일때......[29] 중고차 소개 영상인데 마침 이때 게스트로 온 사람이 호시노 카즈요시의 아들인 호시노 카즈키였고 차량도 임풀에서 튜닝한 차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