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1전구 사령장관 중화민국 저장성 정부주석 | |
한문 | 胡宗南 |
한국식 독음 | 호종남 |
영문 | Hu Zongnan |
자 | 수산(壽山) |
출생 | 1896년 5월 16일 |
청나라 절강성 진해현 (현 중국 저장성 닝보시 전하이구) | |
사망 | 1962년 2월 14일 (향년 65세) |
중화민국 타이베이시 | |
신장 | 160cm 남짓[1]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학력 | 황포군관학교 |
직업 | 군인, 정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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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인이다. 장제스 직계 군인으로서 국민혁명군 장성을 지냈다. 천청과 탕언보와 함께 장제스의 3대심복으로 불리며, 야전지휘관으로 국민당군의 북벌, 여러 군벌들과의 전쟁 및 초공작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하지만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이 패퇴하면서, 결국 장제스와 함께 대만으로 가서 그곳에서 사망한다.2. 생애
2.1. 1946년까지
장제스와 같은 저장성 출신으로 전하이(鎭海)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약재상을 했다고 한다. 공부를 잘해서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를 하다가, 정세가 심상치 않자 군인을 걷기로 하고 1924년 황포군관학교를 1기로 입학했다. 일설에 의하면 당시 면접 시험관이 훗날 숙적이 되는 마오쩌둥이었다고.[2] 키가 160cm가 안 됐기 때문에 입학이 취소될 뻔 했으나 국민당 재정부장 겸 황포 군관학교 당 대표이던 랴오중카이의 적극 추전으로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입학 후 학창 시절부터 교장 장제스를 전적으로 따랐고, 성적도 매우 우수했다. 공산당원인 저우언라이 학교 정치 주임도 후쭝난을 공산당에 끌어들이려고 포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후에 저우언라이는 "국민당에서 한명 꼭 데리고 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후쭝난이다"라고 평했을 정도.
황포군관학교 졸업 후, 장제스의 신임을 받고 본인의 군사적 능력도 출중했기 때문에, 졸업 후 국민당의 1차 동정, 국민당의 2차 동정 등에 참여하여 천중밍 등의 여러 광둥성 군벌들과의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다. 1926년 7월, 북벌이 시작되자 동기생 중에서도 가장 빠른 승진을 보여 졸업 후 2년만에 대위로 승진해 1926년에는 연대장급까지 승진했고, 1년 후에는 소장이 되면서 사단장이 되었다. 반장전쟁 시기에도 장제스에게 충성하여 중원대전 중 제1사단장 대리에 임명되어 진포로 방면에서 펑위샹 부대와 교전했다. 이후 초공작전에 참가하였고, 섬서성 남부에서 장정 중인 공산군을 저지하기 위해 공세를 펼쳤으나, 큰 전과에도 불구하고 섬멸에는 실패했고, 공산군은 옌안에 도달했다. 1936년 2차 양광사변이 발발하자 호남성의 수비를 맡았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참전했다.
후쭝난은 장제스에게 항일 전선에 나서고 싶다고 간청했지만, 장제스는 섬서성의 공산당이 나중에 더 큰 후환이 될 것이라고 염려했기 때문에 후쭝난을 공산당 견제 임무에 투입했다. 후쭝난은 장제스 직계 장성으로는 가장 군사적 능력이 있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에 34 집단군을 거느리고 섬서성에 있는 공산당 근거지인 옌안 해방구 근처에 주둔했다. 1936년 12월 서안 사건 이후에 국공합작이 이루어졌어도 양당의 불신의 벽은 상당했고, 장제스는 항일을 명분으로 노골적인 세력 확장을 하는 공산군을 불신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산당은 항일을 명분으로 계속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향촌을 중심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을 써서 전쟁 말기가 되면 화북 전역이 공산당의 세력권이 된다. 다만 전쟁 말기까지 양측은 형식적으로나마 협동작전을 펴기도 하며, 일본군에만 유리하게 될 교전은 자제했다.
후쭝난은 이 병력으로 화북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공산당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리하여 중일 전쟁 때는 후쭝난은 그 군사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별로 활약이 없었다. 장제스는 직계군 태반이 양쯔강 하류와 난징 전투에서 무너진 이후, 일본군과 1:1로 맞서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하고, 지구전으로 전략을 바꾸었으며, 이 때문에 서북에 주둔한 후쭝난군은 동진해서 직접 대공세는 펼치지 않았다. 다만 휘하 부대들은 상당수 전출되어 일본군과의 대결에 나선다. 일본군도 보급선이 늘어져서 공세가 곤란했기 때문에, 섬서성 동쪽인 허난성 이서로는 진격하지 않았다.
2.2. 제2차 국공내전
중일전쟁이 중국의 승리로 마무리된 후, 상장 계급을 받았다. 국민당-공산당 양당은 겉으로는 평화적으로 신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다짐했으나, 실제로는 둘다 내전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뒤로는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다. 결국 평화협상은 결렬되고 1946년 내전은 발발했다.후쭝난군은 원래 공산당 근거지 옌안 근방에 주둔한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비슷한 병력을 가지고 허난성에 주둔하던 탕언보의 "중원왕"에 빗대, "서북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이 병력은 중일전쟁 개전 초기에 직계부대 상당수를 날려먹은 장제스가 직접 가지고 있는 병력중에서는 가장 정예였다. 하지만 휘하 병력 상당수가 일본군에 맞서 다른 전선으로 전출되었기 때문에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는 25만에 불과했다. 여기에 야전사령관이던 후쭝난과 달리 중앙에서 참모총장을 맡고 있던 라이벌 천청은 후쭝난이 대승을 거두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여러가지로 후쭝난군을 약화시키려는 팀킬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후쭝난군은 미제 최신예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천청의 농간으로 보급이 잘 안되다보니 고철덩어리가 된 것이다.
후쭝난은 현지 무슬림 군벌인 마가군 (마훙빈, 마훙쿠이 등등)의 도움을 받아 1947년 봄에 옌안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후쭝난군이 시작한 공세는 성공적이어서 3월 19일에는 공산당의 근거지 옌안이 함락되었다. 당시 마오쩌둥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는 옌안을 버리고 훨씬 북쪽인 내몽골 근처까지 도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후쭝난군은 일본군과 같은 처지에 빠지게 되는데, 새로 점령한 지역이 워낙 넓어서 곳곳에 병력을 배치하다보니 이것이 불과 2만5천명의 병력을 가진 펑더화이의 공산군에게 각개격파당하는 원인이 된다.
게다가 천청의 농간과 함께 공산군의 게릴라전으로 중원으로부터 보급이 어려워졌기 때문에 후쭝난군은 초기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점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보급의 곤란으로 오고가도 못하는 처지에서 후쭝난의 대군은 결국 서북에서 한발자국도 못벗어나고 계속 병력이 감소되었고, 1948년부터 만주의 린뱌오군이 공세로 나오면서 국공내전의 전세는 역전, 결국 수도 난징은 함락되었다. 후쭝난도 다른 곳에서 몰려온 공산군의 대군에 역포위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보급을 못받은 휘하 부대는 앞다투어 공산군에 항복했다. 결국 공산군은 1948년 4월 22일 옌안을 수복하였다.
결국 후쭝난군 대부분이 항복하는 가운데, 후쭝난도 1949년 5월 청두로 도피했다. 하지만 그 주위 군벌이 모조리 배신하여 공산군에 항복하면서 총부리를 국민당군에 돌렸고, 후쭝난도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결국 1949년 12월, 청두에 주재하던 장제스와 장웨이궈는 항공편으로 대만으로 도피했고, 쓰촨에서 남아서 계속 공산군과 싸우던 후쭝난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이후인 1950년 3월까지 싸우다가 결국 마훙쿠이와 함께 항공편으로 대만으로 도피한다. 마훙쿠이와 함께 마가군을 이끌던 마훙빈은 잔여부대와 함께 공산군에 항복했고, 이때문에 중공정권에서도 대우를 받았다.
2.3. 국부천대 후
후쭝난의 장례식에 참석한 장제스 |
3. 기타
국민당 특무기관 조사통계국 총수[3]인 다이리와는 친했지만 천청과는 원수지간이었다. 후쭝난은 야전에서 구르다보니 가정을 이룰 시간이 없었고, 다이리는 미인계[4]용으로 양성하던 미녀요원 예샤디 (葉霞翟)를 후쭝난에게 소개해주었다. 둘은 1937년부터 사귀었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후쭝난은 "나라가 위기인데 어찌 결혼하겠소"라고 해서 결혼을 계속 미루었다. 결국 중일전쟁이 끝난 이후, 후쭝난이 52 세(신부는 34세) 되던 1948년 결혼했다.이에 앞서 천리푸가 후쭝난을 자기 편으로 만들 심산에 쿵샹시(공상희)의 둘째딸인 쿵링쥔(공영준)을 소개해 주었는데, 천리푸가 이끄는 중통은 다이리의 군통과 경쟁적 관계에 있었다. 하여 다이리는 쿵링쥔이 엄청난 말괄량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5], 후쭝난이 몰래 확인한 결과, 사실로 드러나자 쿵링쥔과의 정식 만남에서 눈치남 행세를 한다.[6] 일부러 쿵링쥔을 관광명소에 요청하여 관광하였는데, 아름다운 경치만 감상하고 쿵링쥔에게는 눈도 주지 않았다. 게다가 둘은 보행으로 관광하였는데, 쿵링쥔이 아무리 남자 행세를 하고 다닌다지만 결국 곱게 자란 금수저였던만큼, 오래 걷다보니 기진맥진했고, 이걸 후쭝난은 모르는 척 했다. 결국 쿵링쥔은 화가 나서 "후쭝난이 황제가 된다고 해도 난 관심 없다."고 선언한다.
장제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군사적 능력도 장제스 부하중에서는 최고라고 평가받았지만, 정치를 전혀 모르는 우직한 야전지휘관 출신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출세를 더이상 하지 못했다. 라이벌인 정치군인 천청이 부총통까지 오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다이리와 함께 장제스의 친위부대-사설조직인 남의사의 창립멤버이지만, 계속 야전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장제스 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각종 무리수나 탈법행위를 저지르던 남의사 활동에는 거의 간여하지 않았다.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의 저자인 장융은 저서에서, 장즈중 등 여러 거물 국민당 장군들과 더불어 후쭝난이 중공의 간첩이라고 주장했다. 근거는 후쭝난이 저우언라이와도 사이가 좋았고, 특히 옌안을 포위했을 때 공산군을 섬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는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국민당과 국공내전 역사를 조그마한 지식이 있다면 거의 근거가 희박한 주장. 저우언라이와 가까웠다는 것은 황포시절 사제지간이기 때문에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특히 장융은 언어학 박사이지 전문 역사가가 아니며, 문화대혁명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상당히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그녀의 개인적 자서전은 <대륙의 딸들>의 경우, 문혁 시기의 일상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많이 인용되지만 <마오>의 경우에는 프랑크 디쾨터나 알렉산드르 판초프처럼 마오쩌둥을 강도높게 비판하는 학자들에게도 억지주장이 많다고 씹히는 책이다.[7] <마오>에는 상당히 무리한 음모론이나 억지 주장이 많았으나 특히 "후쭝난 간첩설"은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결국 타이완에 남아있던 후쭝난의 유족들이 분노해 소송을 걸었으나 장융은 끝까지 증거를 대지 못해 타이완에서 이 책은 출판금지가 되어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4. 가족
2남 1녀를 두었다.장남은 국립정치대학을 졸업하고 수십년간 외교관으로 근무했는데 민진당 정권에서 민진당의 탈중국화 사상을 반대하는 발언을 해서 면직당했다. 이후 국립정치대학 외교학과의 교수로 근무했다.
차남은 중원대학의 부총장이다.
딸은 베이징에서 부동산투자 컨설턴트로 일했다.
5. 매체에서
호이4의 DLC인 Waking the Tiger가 나온 후 1.5패치와 함께 국민혁명군 장성으로 추가되었다.카이저라이히에서는 국민당이 대부분 삭제당한 관계로 등장이 없었으나 2019년 12월 28일 <장강에 흐르는 피>가 업데이트된 이후에 좌경화된 국민당인 민감기의군으로 플레이할 경우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전체주의 계파인 중화부흥사의 지도자로 내전을 거쳐 집권할 수 있다.
[1] 출처 키가 160cm가 안 됐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후쭝난의 키는 160cm 남짓으로 보인다.[2] 1차 국공합작 시기였기 때문에 마오쩌둥도 국민당원으로 일하고 있었다.[3] 공식 직함은 "부국장"이었는데, 국장이 공석이었다. 그리하여 다이리가 실질적으로 지휘[4] 다이리가 지휘하던 조사통계국은 미인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색계의 탕웨이가 맡은 역은 바로 왕징웨이 정권의 공안 담당자인 딩모춘을 미인계로 유혹해 암살하려다 실패한 정핑루라는 요원을 모델로 한 것이다.[5] 남장을 하고 남자 행세를 하기 좋아했다. 사진을 보면 여자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 그나마도 행실이 바르다면 여장부 소리라도 듣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그저 가문의 세도만 믿고 이런저런 행패를 부리는 게 일쑤였다.[6] 정식 만남에서는 쿵링쥔도 여성스러운 단장을 하고 나섰지만 이미 본모습을 후쭝난은 알고 있으니...[7] 예컨대 장융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황포군관학교 출신이니 공산당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알렉산드르 판초프는 그럼 황포군관학교 교장도 공산당 간첩이 되냐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