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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6:03:26

호쿠토 아키라

파일:DkA7LY2W0AEsnwc.jpg
< DANGEROUS QUEEN / デンジャラス・クイーン>
[ruby(北斗 , ruby=ほくと)] [ruby(晶, ruby=あきら)] / Akira Hokuto

1. 프로필2. 소개3. 프로레슬링 커리어4. 프로레슬링 은퇴 이후5. 여담6. 둘러보기

1. 프로필

이름 北斗 晶 (호쿠토 아키라)
본명 佐々木 久子 (사사키 히사코)
출생 1967년 7월 13일 ([age(1967-07-13)]세)
신장 168cm (5'6")
체중 70kg (154 lbs)
출신지
[[일본|]][[틀:국기|]][[틀:국기|]] 사이타마현 요시카와시
별명 데인저러스 퀸
귀신 마누라
배우자 사사키 켄스케
피니쉬 무브 노던 라이츠 밤
데인저러스 퀸 밤(것렌치 싯아웃 파워밤)
스트랭글 홀드 γ[1]
노던 라이트 할리 TS[2]
노단 라이트 빅토리[3]
유형 테크니션
주요 커리어 전일본 주니어 챔피언 1회
WWWA 월드 태그팀 챔피언 4회
올 퍼시픽 챔피언 2회
CMLL 월드 위민스 챔피언 1회
WCW 위민스 챔피언 1회[4]
AAAW 태그팀 챔피언 1회
재팬 그랑프리 우승(1993년)
AJW 명예의 전당 헌액(1998년)
도쿄 스포츠 선정-토픽 어워드 수상(2004년)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가 선정한 5성급 경기 2개 보유
테마곡 Oro de Ley - 루이스 미겔
다른 이름 우노 히사코(결혼 전 본명, 초창기 링네임), 레이나 후부키(EMLL 시절)

2. 소개



일본의 탤런트이자 前 프로레슬러.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계에선 불 나카노, 토요타 마나미, 아쟈 콩 등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3. 프로레슬링 커리어

1985년 6월 12일, 삿포로의 나카지마 체육센터에서 그리즐리 이와모토와 전일본 여자 프로레슬링에서 데뷔전을 치러 승리한다. 당시엔 본명인 우노 히사코를 링네임으로 사용했는데, 약 2년간 연전연승 기록을 만들었다. 하지만 1987년에는 경기 중에 생긴 목부상으로[5] 장기결장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하필 경추 주위 부분의 부상이라 몇달간 침대에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고, 의사로부터 링에 복귀하게 되면 30세 이후에 후유증이 발생해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까지 들었지만 1년만에 복귀한다. 이때부터 링네임을 호쿠토 아키라로 한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1991년에 불 나카노와 대립을 한다.[6] 2년 후배인 토요타 마나미로부터 "호쿠토 너는 한 번도 날 이긴 적이 없구나"라는 도발을 듣고 분노하여 항쟁을 벌였다. 이 시기에 벌인 항쟁은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의 질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는데, 1995년 9월 2일에 도쿄돔에서 펼친 경기는 데이브 멜처에게서 5성 만점을 받은 한편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1995년 올해의 경기 10위에 랭크한다. 또 둘의 항쟁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은 여성팬의 비율이 많았지만 이후 남성팬들을 경기장에 모여들게 만들었다.

멕시코를 오가며 활동하던 1992년엔 턴힐한 후 2년 후배인 미타 에츠코, 시모다 미마와 라스 카쵸라스 오리엔탈레스[7]라는 팀을 결성하여 리더로 활동했다. 이 시절 호쿠토 아키라와 시모다 미마는 원피스가 주류였던 전녀에서 이례적으로 투피스 형식의 경기복을 착용하기 시작했는데, 곧 팀의 상징이 되었다. 투피스 형식의 의상을 입게 된 이유는 "화장실 가기 편해서"다.

1993년부터 1997년까지의 단체 대항전[8] 시대에는 칸도리 시노부와 치열하게 대립했다. 1993년 4월 2일엔 칸도리 시노부와의 경기에서 서로 출혈을 일으키는 한편 칸도리의 서브미션 기술에 탈골된 팔을 그 자리에서 끼워맞추고선 경기에 임했고, 살벌한 주먹 타격까지 선보인 끝에 승리한 후 독한 마이크워크를 하며 데인져러스 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경기는 데이브 멜처에게서 5성 만점을 받았으며,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 선정 1993년 올해의 경기 3위에 랭크한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Akira%2BHokuto%2B-%2Bjapanese%2Bgirls%2Bwrestling%2B-%2Bjapanese%2Bfemale%2Bwrestlers.jpg
WCW시절 호쿠토 아키라.
왼쪽은 당시 매니저였던 소니 오노[9]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는 동시에 멕시코 등지에서의 활동도 병행했는데, 멕시코에선 레이나 후부키라는 링네임을 사용했다. 이 링네임으로 WCW에도 진출했지만 단 한 번의 경기 이후론 다시 호쿠토 아키라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한다.[10] WWF에서 건너온 메두사와 대립을 가졌는데, 초대 WCW 위민스 챔피언에도 오르며 누구에게도 타이틀을 빼앗기지 않고, 심지어 은퇴조항이 걸린 경기에서 승리해 메두사를 은퇴시킨다. WCW에서 차원이 다른 막강함을 선보였지만 1997년에 고국으로 돌아가며 더이상 WCW에서 활동하지 않았고, WCW 위민스 타이틀도 일시 폐지된다.[11] 이후 나가요 치구사가 설립한 여자 프로레슬링 단체인 GAEA Japan에서 활동한다. 2002년엔 비슷한 나이대의 아들을 둔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서 2002년 4월 7일에 은퇴시합을 치른다.

4. 프로레슬링 은퇴 이후

은퇴 직후엔 주부로서의 역할만 수행했다. 그러다 WJ 프로레슬링에서 탈퇴한 후 힘들어하는 남편 사사키 켄스케[12]를 지원하기 위해 그의 매니저로서 링에 복귀하고, 남편의 프로레슬링 단체 사무실인 켄스케 오피스의 공동 회장도 역임한다. 한편 일본 방송계에도 진출해 중견 연예인으로서 활발히 활약한다.

탤런트로서의 캐릭터는 무서운 주부, 요리고수, 살림고수의 이미지가 있다. 세븐일레븐에 도시락을 런칭하거나, 요리책 출간, 요리 프로그램 우승, 주방세제 CF 모델활동 등을 보면 실제로도 요리실력이 상당한 듯하다.

남편인 사사키 켄스케와는 잉꼬부부로 유명하다. 호쿠토 아키라가 일반인을 폭행했다는 혐의로 사사키 켄스케의 눈앞에서 경찰에게 체포되는 설정의 몰래카메라를 실시한 적이 있는데, 경찰이 호쿠토에게 강압적으로 대한다는 이유로 사사키 켄스케가 경찰(역할의 배우)을 패대기칠 뻔해서 몰래카메라가 긴급중단된 적이 있을 정도다. 사실 사사키 켄스케의 업계에서 악명을 생각하면 불상사 안난게 천만다행 수준.

2015년 9월 23일에 유방암 때문에 입원해서, 24일 오전에 오른쪽 유방 전적출수술을 받았다.

5. 여담


호쿠토 아키라의 노던 라이츠 밤(Northern Lights Bomb). 사사키 켄스케바디슬램에서 들어가지 않고 브레인버스터 자세에서 들어간다. 본인 말로는 브레인버스터가 습관이 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6. 둘러보기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
2000년 레슬링 옵저버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Future_earth-e1581447538208.jpgAJW 재팬 그랜드 프릭스 토너먼트 우승자
1992 1993 1994
아쟈 콩 호쿠토 아키라 홋타 유미코
파일:프로레슬링 옵저버 로고.png레슬링 옵저버 선정 5성 경기
1991년 1월 4일
전일본 여자 프로레슬링
WWWA 월드 챔피언십
불 나카노 vs 호쿠토 아키라


[1] 남편인 사사키 켄스케에게 전수받았다.[2] 팔과 다리를 모두 잡은 채 백 드롭을 시전하는 기술인데, 이 기술로 인해 상대선수가 척추에 부상을 입는 등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봉인되었다.[3] 캐틀 뮤틸레이션과 거의 동형의 기술인데, 호쿠토는 주로 앉아있는 상대에게 사용했다.[4] 초대 챔피언[5] 태그팀 3판 2선승제 경기였다. 첫번째 경기에서 2단 로프에서 툼스톰 파일드라이버를 맞고 목 부상을 당했는데 그 상태에서 간간히 손으로 머리를 제 자리에 고정시켜 놓으면서 두번째와 세번째 경기까지 다 소화해냈다.[6] 호쿠토 아키라는 학교에서 불 나카노의 팬클럽을 만들었을 정도로, 학생 시절에 불 나카노의 팬이었다.[7] Las Cachorras Orientales. 영어로 풀이하면 The Oriental Bitches(...)가 된다.[8] 일본 여자 프로레슬링 단체들의 대표 선수들이 모여 경기를 치렀던 황금기.[9] 일본계 미국인이며 태어난곳은 일본이지만 본명은 이시카와 카즈오이며 현재는 미국의 드라마에서 단역배우로서 활동중이다.[10] WCW에서 레이나 후부키라는 링네임으로 데뷔했을 때는 마스크를 착용했었다. 하지만 호쿠토 아키라로 링네임을 바꾼 뒤엔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11] 1997년에 메두사를 은퇴시킨 시합 이전에 호쿠토 아키라는 WCW를 탈단했지만, 다른 단체에서 연합전으로 가진 경기였다. 호쿠토 아키라와의 경기에서 패해 은퇴한 메두사는 1999년도에 팀 매드니스 멤버로 다시 복귀했다.[12] 사사키 켄스케는 전일본 5강이나 투혼삼총사급 슈퍼스타는 아니었다. 하지만 싱글레슬러로서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삼관 헤비급 챔피언십, 프로레슬링 NOAH의 GHC 헤비웨이트 챔피언을 모두 지낸, 일본에 단 세 명뿐인 그랜드슬램 프로레슬러다(다른 2명은 타카야마 요시히로, 무토 케이지). 사사키 켄스케는 자신의 단체였던 DIAMOND RING을 운영하다가 2014년 2월에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13] 사실 데빌 마사미가 뛰어난 실력과 예능감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아와서 그렇지 당시 일프계에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똥군기 신봉자였다. 호쿠토에게 3단 로프 파일 드라이버를 힘 조절도 안하고 꽂아버린거 자체도 어린 나이에 두각을 보이며 인기를 끌자 후배 길들이기를 넘어 담그려했던 사실상 고의성이 다분한 행위였고, 이것 때문에 호쿠토 아키라의 팬들은 데빌 마사미라면 치를 떤다.[14] 숙소 규칙에도 없는 신입부터 3년차까지는 자위 금지라고 장난을 치질 않나. 단체로 식사중에 후배들에게 주목하라고 하고는 내가 이 흰색컵을 들고 있지만 내가 이걸 검은색컵이라고 하면 너희들도 당연히 검은색이라고 대답해야 하며 반론을 제기하고나 토를 달 경우 그자리에서 면상을 갈기겠다고 하질 않나. 후배 레슬러가 팬들에게 받은 선물을 차들이 씽씽 달리는 8차선 도로에 집어던지고는 그 후배에게 주서와보라며 킬킬대는등 그야말로 악질 중의 악질. 마카베 토우기도 신인시절 이 인간때문에 말도 못하게 고생했고 고통을 참으며 꿈인 프로레슬러를 해야 하나 이렇게 당하느니 저 인간을 칼로 담가버리고 레슬링 판을 떠야하나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을정도(...).[15] 이 모습을 본 남편 사사키 켄스케는 "챠코(호쿠토의 애칭)의 귀여움을 다시 느꼈다"라며 좋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