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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22:50:24

홍동백서

1. 개요2. 상세
사자성어
西
붉을 홍 동녘 동 흰 백 서녘 서

1. 개요

제사에서 제물을 차려 놓는 순서로, 붉은 과실은 동쪽에 흰 과실은 서쪽에 둔다는 것.

마찬가지로 제물의 배치 원칙을 정해놓은 말로는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조율이시(棗栗梨枾)' 등이 있다. 이는 5열 제사상(또는 차례상)을 기준으로 신위에 가까운 쪽부터 첫째 열에는 밥과 국, 둘째 열에는 고기와 생선, 셋째 열에는 탕류, 넷째 열에는 나물, 백김치, 포, 식혜, 다섯째 열에는 과일, 한과를 올릴 때 각각의 열 안에서의 순서를 정해놓은 것이다.

2. 상세

일부에서는 홍동백서 등의 원칙을 제사상을 차릴 때 꼭 지켜야 하는 규범으로 여기고 있으나, 사실 이에 대한 고문헌 상의 근거는 없다. 《주례》나 《주자가례》, 《국조오례의》 등의 대표적인 유교 예법서 어디에도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의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다.

유교식 제사 예법이 정립된 《주자가례》에는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으로 밥과 국, 국수, 고기, 구이(炙), 생선, 떡, 육포, 나물, 육장, 김치, 과일 등 17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종류와 재료, 진설법은 명시하지 않았다. 또 《세종실록오례》에는 조선 초기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대략의 진설도가 나와있는데, 상차림 앞줄에 ‘생율(밤), 생이(배), 실상(잣), 산자(한과, 과줄, 박산), 은행, 강정, 약과, 호도(호두), 사과, 홍시(감), 대조(대추)’ 등이 나타난다.# 이들 모두 오늘날의 제사상, 차례상과는 여러모로 다르다.

따라서 이러한 관습은 제사상, 차례상 문화가 각 지역, 문중별로 분화되면서 나타난 습속으로 추정된다. 화려한 제사상, 차례상이 각 집안의 위세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점점 올리는 음식도 많아지고, 이러한 배치 원칙도 하나 둘씩 생겨났다는 이야기이다. 판소리 흥보가에는 이런 습속을 반영하여 어동육서, 좌포우혜에 대한 언급이 있다.
장담하여 기다릴 제, 쌍교는 무슨 쌍교, 송장 실은 상여인데, 강남서 나오다가, 박통 가에 당도하여, 세상에 나올 테니, 상여를 정상(停喪)하여, 마목(馬木)틀 되어 놓고, 어동육서(魚東肉西) 좌포유혜(左脯右醯), 제를 진설하느라고, 그새 종용하였구나.
판소리 《흥보가》 중

마찬가지로 1920년의 신문 기사를 보면 이 당시 각 집안에서 예를 차린다고 내세우는 허례허식으로 홍동백서를 언급하고 있다.
예(禮)의 조박(糟粕)[1]상복의 전삼후사(前三後四)[2]와 제수(祭需)의 홍동백서 등이나 주장하여 지례자[3]로 자위하는 보통 유자를 다견(多見)하얐지만은...
《조선일보》 1920년 6월 26일자 1면 〈조선 유림에게 고함 (2)〉

이런 지역별, 문중별로 차이가 있던 습속이 해방 이후 가정의례준칙으로 표준화되는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이므로, 굳이 강박적으로 이런 원칙들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다. 오늘날에는 성균관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며 지나치게 이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을 담아 각 집안 형편에 맞는 간소한 제사상, 차례상을 차릴 것을 권하고 있다.#

한편으로 홍동백서 등이 고문헌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제강점기일본의 풍습이 전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근거로는 홍백가합전처럼 홍백을 대립의 의미로 사용하는게 일본의 관습이라는 점이 제기되고는 한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이 조선 후기나 일제강점기 초기에 이미 허례허식이 늘어나서 저런 말들이 유림에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런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


[1] 술을 걸러내고 남은 찌꺼기, 즉 빈 껍데기를 이르는 말이다.[2] 상복을 앞은 3폭, 뒤는 4폭으로 하라는 말이다[3] 예법을 좀 아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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