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실패한 내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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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민란(고려) | 진주 노비들 | |
금주 잡족의 난 | 잡족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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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창궁 사변 | 희종 | |
최광수의 난 | 최광수 | |
제2차 개경승도의 난 | 개경 승도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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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233년, 고려 무신정권 시기에 홍복원과 필현보가 일으킨 반란.2. 전개
1233년에 필현보는 홍복원과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고려 조정에서는 회유에 나서게 된다. 필현보가 한때 정의의 수하였다는 정보를 듣고, 정의를 보내 설득하려 했으나, 필현보는 이를 거부하고 정의와 박녹전을 죽여버리고 만다.이에 최우는 1233년 12월, 북계 병마사 민희와 합세해 난을 진압했다.
3. 진압 이후
이후, 필현보는 강도로 끌려가 요참형으로 죽었고, 필현보와 함께 반란을 일으킨 홍복원은 도망가서 몽골군에게 항복했다. 홍복원의 가족들은 고려 조정에 의해 붙잡혔다.4. 영향
이 반란으로 인해 서경의 백성들을 모두 해도로 옮겼으며, 본래는 서경이 번창한 곳이었지만 이로 인해 폐허가 되었다. 필현보와 함께 홍복원이 동경총관에 임명되어 40여 성이 몽골의 땅으로 넘어가게 된다.[1][2][1] 다음 해인 1234년에는 이 반란에 연루되었다고 해서 조숙창이 참수되었다.[2] 필현보의 난으로 황폐화된 서경은 1252년에 서경 유수관을 두면서 다시 서경을 관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