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년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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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폐지된 기년법 | }}}}}}}}} |
1. 개요
황제기원(黃帝紀元)은 중국 신화에서 삼황오제 중 오제의 대표 격으로 등장하는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를 기준으로 삼은 기년법이다. 약칭하여 황기(黃紀)라고도 한다.2. 배경
1895년 중국은 청일전쟁에서 패배했다. 서구열강만이 아니라 근대화한 일본에게도 패했다는 것은 많은 중국의 지식인들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자, 서둘러 나라를 개혁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케 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젊은 지식인 강유위(康有爲)는 강학회(強學會)라는 단체를 만들고 <중외기문中外紀聞>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다. 이때 <중외기문>은 당시 청나라 연호 광서(光緖)에 앞서 공자졸후(孔子卒後)[1]라는 새로운 기년법을 앞세웠다. 광서 21년(1895) <중외기문> 첫 호를 발행하며[2] 연도를 앞에 공자졸후 2373년, 뒤에 광서 21년이라고 적었다. 금상황제보다 유학의 시조 공자를 앞세운 것이다. 공자졸후 기년의 원년을 따져보면 기원전 478년이다. 공자가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그 이듬해를 '공자졸후 원년'으로 삼았다.강유위 등 변법파(變法派)가 딱히 청나라를 전복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공자는 청나라에서도 중국사를 초월한 성인으로서 숭상하는 존재였으므로 그를 광서제와 나란히 두었다고 해서 반청이라고 단정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18세기 문자의 옥을 아는 이들에게, 비록 청나라 연호를 부정하지야 않았지만 다른 기년법을 앞세움은 자칫하면 '역모'의 뜻을 품었다고 해석하기에 딱 좋았다. 아닌 게 아니라 양계초(梁啓超)가 증언한 바에 따르면, <중외기문>의 연도 표기를 보고 강학회 회원들 중 일부는 화가 닥칠까 두려워서 "이것은 임금의 정삭(正朔)[3]을 받듦이 아니요, 예수를 본받는 것이외다." 하면서 강학회에서 탈퇴할 뜻을 표했다. 장지동(張之洞)은 <중외기문> 첫 호가 발행된 지 2주일 만에 폐간을 명했다.
반대자들의 눈에 공자기년은 중국의 전통을 거부하고 예수(서력기원)를 본받으며 청나라를 부정하려는 뜻이 담긴 짓으로 보였다. 실제로도 강유위는 서력기원과 기독교를 강렬하게 의식하고 이에 대응하여 공자기년과 유교를 강조했다. 공자는 중국에서 가장 높은 성현이므로 공자기년을 사용하면 공자를 존숭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보았다.
여기에 맞서서 나온 또다른 주장이 바로 황제기원이다. 유사배(劉師培)가 1903년 <황제기년론黃帝紀年論>에서 강유위가 주장하는 공자기년을 비판하며 황제기원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강유위는 유교를 지키고자 공자기년을 주장하지만, 자신은 중국민족을 지키려 하므로 황제기원을 주장한다 하였다. 또한 그는 (일본의 진무 천황 기원을 의식하여) 역대 중국의 모든 왕조의 군주들이 결국은 황제의 자손이니, 중국이 황제기원을 사용함은 일본이 진무 천황 기원을 사용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한 황제기년을 사용하면 황제기년 이전의 일은 적으므로 역사를 서술하기 편리하단 점 또한 이야기하였다.[4]
3. 원년
유사배는 황제강생(黃帝降生) 기원을 주장하며 글에 적었는데 원년이 기원전 2711년이었다. 황제가 그때 태어났다고 본 것이다. 또한 만주족이 중국을 다스리는 현실을 부정하여 '정당한 군주가 없는' 시절로 간주하고, 정당한 군주가 없으니 서양의 예를 따라 황제기년을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중국 내에서도 점차 공자기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지고 황제기년을 따르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하여 광서 29년(1903)부터 황제기년을 사용하는 출판물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전통적인 음력을 사용하면서도 연도만 황제기원으로 적었다. 몇 년 전에 <중문기외>가 공자기년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금지되었건만, 그 사이에 청의 통치력은 눈에 띄게 약해지고 사람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서인지 이런 출판물은 아무렇지도 않게 간행될 수 있었다.그런데 황제는 신화 속 인물이므로 막상 황제기원을 쓰려니 어느 해를 원년으로 삼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원년이 몇백 년씩 널뛰기를 하는 황제기원이 서로 병립했다. 1905년 쑹자오런(宋敎仁)은 황극경세(皇極經世) 같은 고서를 바탕으로 황제가 기원전 2697년에 즉위했다고 주장했다. 가장 널리 퍼진 설에 의하면, 황제는 기원전 2716년에 태어나 스무 살이 되는 기원전 2697년에 즉위했으며 119세 되는 기원전 2598년에 천제(天帝)가 보낸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쑨원은 일본에서 쑹자오런과 함께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를 결성했는데, 중국동맹회는 쑹자오런의 주장을 받아들여 기관지 《민보民報》를 발행하여 기원전 2697년을 원년으로 삼은 황제기원을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상원갑자(上元甲子)라 하여 60갑자가 시작된 해가 있다고 여겼다. 그 연도가 언제인지는 그야말로 주술의 영역이라 온갖 다른 주장이 있었지만 기원전 2697년이라는 주장이 널리 알려졌다. 황제가 기원전 2697년부터 60갑자를 시작하여 그해가 갑자년(甲子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중국에서 황제기원의 원년은 갑자가 시작된 해로 삼음이 더 좋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래서 황제기원을 사용할 경우에는 다들 기원전 2697년을 원년으로 삼아서 서기연도+2697로 헤아리는 방식이 가장 대중적이었다.
4. 폐지
민보에서 사용한 기원전 2697년 기준 황제기년이 점차 황제기년의 표준처럼 널리 퍼져 사용되었다. 하지만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이듬해에 청나라가 멸망했다. 쑨원은 중화민국을 건국하고 1912년 1월 1일 임시대총통 자리에 오르면서 '중화민국은 양력을 사용하며, 따라서 황제기년 4608년 11월 13일 신해(辛亥)를 중화민국 원년 1월 1일로 삼는다.'는 내용으로 각 성의 도독(都督)들에게 전보를 보내었다. 이후 중화민국의 연호로 민국기년을 사용하게 된다.비록 더 이상 황제기원을 공적인 영역에서 사용하지는 않지만, 현대 중국에서 일부 민족주의적인 사람이나 단체들은 중원(中元)이란 이름으로 황제기원을 사용한다고 한다.
[1] 한자에서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죽음을 가리키는 표현을 달리 쓴다. 천자는 붕(崩), 제후는 훙(薨), 고위 벼슬아치의 죽음은 졸(卒), 일반 서민의 죽음을 사(死)라고 한다. 그래서 '공자가 죽은 이후'라는 뜻으로 '공자졸후'라 한 것이다.[2] 양력으로는 해를 넘겨 1896년 1월이었지만, 음력으로는 아직 광서 21년(1895) 11월이었다.[3] 임금이 정한 올바른 역법. 여기서는 청나라가 정한 역법과 기년법 체계를 뜻한다. 중국 문화권에서 왕조가 바뀔 때마다 역법과 기년법을 새로 반포하였으므로 '정삭'은 나라와 임금의 통치권을 상징했다.[4] 이것은 강유위가 공자기년을 주장하며 주장한 장점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도 전통적인 연호로 역사를 서술하기가 굉장히 불편하다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