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F 피오렌티나 감독 (1대~50대) | ||||||
{{{#!wiki style="margin: 0 -10px;" {{{#5A318C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 1924년 ~ 1997년 | |||||
1대 커셰기 | 2대 차프카이 | 3대 펠트만 | 4대 펠스너 | 5대 라디 | ||
6대 요제프 | 7대 아라 | 8대 바카니 | 9대 몰나르 | 10대 수체크 | ||
11대 갈루치 ☆ | 12대 비고뇨 | 13대 아라 | 14대 말리 | 15대 젠키 | ||
16대 페레로 | 17대 말리 | 18대 베르나르디니 ★ | 19대 체이즐레르 | 20대 페레로 | ||
21대 카르닐리아 | 22대 체이즐레르 | 23대 키아펠라 | 24대 히데그쿠티 ☆ | 25대 발카레지 | ||
26대 키아펠라 ☆ | 27대 페레로 | 28대 바시 | 29대 페사올라 ★ | 30대 풀리에세 | ||
31대 리드홀름 | 32대 라디체 | 33대 로코 | 34대 마초니 ☆ | 35대 마초네 | ||
36대 키아펠라 | 37대 카로시 | 38대 데 시스티 | 39대 발카레지 | 40대 아그로피 | ||
41대 베르셀리니 | 42대 산타리니 | 43대 에릭손 | 44대 조르지 | 45대 그라치아니 | ||
46대 라자로니 | 47대 라디체 | 48대 아그로피 | 49대 키아루지 | 50대 라니에리 ☆ | ||
▶ ACF 피오렌티나 감독(51대 이후) | ||||||
★:리그 우승 ☆:코파 우승 |
헝가리의 축구감독 | ||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히데그쿠티 난도르 Hidegkuti Nándor[1] | |
출생 | 1922년 3월 3일 헝가리 왕국 부다페스트 | |
사망 | 2002년 2월 14일 (향년 79세) | |
국적 | 헝가리 왕국(1922~1946) 헝가리 제2공화국(1946~1949) 헝가리 인민 공화국(1949~1989) 헝가리(1989~2002) | |
신체 | 키 179cm | |
직업 | 축구선수 (중앙 공격수 / 은퇴) 축구감독 (은퇴)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에레크트로모시 FC(1942~1945) MTK 부다페스트 FC (1945~1958) |
감독 | MTK 헝가리아 FC (1959~1960) ACF 피오렌티나 (1960~1962) AC 만토바 (1962~1963) 죄르 ETO FC (1963~1965) FC 터터바녀 (1966) MTK 헝가리아 FC (1967-1968) 부다페스트 스파르타쿠스 (1968~1971) 스탈 제슈프 (1972) 에그리 도사 (1973) 알 아흘리 SC (1973~1980) 알 아흘리 클럽 (1983~1985) | |
국가대표 | 69경기 39골 (헝가리 /1945~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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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의 축구선수 출신 축구 감독으로 1950년대 매직 마자르 전성기에 크게 이바지 했던 당대 최고의 공격수이자 폴스 나인의 맥을 이은 선수다.[2]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1942년에 에레크트로모시 FC에 데뷔해서 1945년까지 53경기 27골을 넣었다. 1945년 MTK 헝가리아 FC에 이적해서 1949년까지 110경기 73골을 기록했고 1949년~1950년에는 부다페스티 텍스타일스에서는 30경기 23골, 1950년~1952년 사이에는 부다페스티 바슈티아 SE에서 51경기 49골, 1952년~1956년에는 뵈뢰슈 로보고 SE에서 92경기 65골을 넣었다.[3] 1956년에 예전 이름으로 되돌아온 MTK 헝가리아 FC에서 1958년까지 31경기 16골을 넣고 은퇴했다.2.2. 국가대표 경력
1945년에 대표팀에 데뷔한 히데그쿠티는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 압도적인 모습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1953년에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축구 종주국이자 세계최강이라고 자부하던 잉글랜드를 6:3으로 박살냈다.[4] 이후 1954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한 히데그쿠티는 페렌츠 푸스카스 - 산도르 코츠시스 - 요세프 보직 - 졸탄 치보르 등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던 매직 마자르의 일원으로서 최정민 - 주영광 - 홍덕영이 버티는 월드컵에 첫 출전한 대한민국을 9:0, 서독을 상대로 2골을 넣으며 8:3 승리를 이끌었다. 8강 브라질과의 시합에선 선제골을 넣었으며 폭력과 레드카드과 난무하는 접전 끝에 브라질을 격파하고 4강에 진출한 헝가리는 1950 브라질 월드컵 우승국인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를 상대로 1골을 넣으며 연장전 끝에 4:2 승리를 거두며 결승전에 진출한다. 결승전 상대는 서독이었고, 졸탄 치보르와 페렌츠 푸스카스의 골로 2:0으로 리드했으나 헬무트 란의 활약으로 3:2 역전패, 베른의 기적의 희생양이 되어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1958 스웨덴 월드컵에도 출전 했으나 헝가리는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후 국가대표에서 은퇴했다.3. 지도자 경력
히데그쿠티는 헝가리, 이탈리아, 폴란드 및 이집트의 클럽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1961년, 그는 ACF 피오렌티나의 감독이 되어 초대 UEFA 컵 위너스컵에서 팀을 우승으로 인도했고, 팀은 결승전에서 레인저스를 4-1로 물리쳤다. 이와 더불어 1963년에는 죄르 ETO FC를 맡아 헝가리 리그에서 우승시켰고, 1965년에는 팀을 유로피언컵 준결승전까지 진출시켰으나, 후에 준우승한 SL 벤피카에게 패하고 말았다.4. 이후
히데그쿠티의 부고가 알려지고 그의 친정팀인 MTK 부다페스트 FC는 홈구장에 그의 이름을 헌정해 히데그쿠티 난도르 슈터디온으로 개칭했다.5. 수상 경력
선수헝가리
페렌츠바로시 TC
감독
ACF 피오렌티나
- UEFA 컵 위너스컵: 1
- * 1961
[1] 헝가리에서는 성씨가 앞에 오고 이름이 뒤에 온다.[2] 1930년대의 마티아스 신델라가 최초의 폴스 나인 유형의 중앙 공격수로 평가받는데, 진짜로 등번호 9번을 달고 뛴 폴스 나인 유형의 중앙 공격수는 히데그쿠티가 최초이다. 여담으로 월드컵에 등번호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50년 월드컵이다.[3] 팀 이름이 계속 바뀌지만 모두 같은 팀이다.[4] 히데그쿠티는 넓은 범위에서 뛰면서 다른 공격수 4명에게 공을 배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잉글랜드 수비진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하는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이 방법은 혁신적인 전술로, 당시 축구계에 큰 혁명을 일으켰다. 이 전술은 현재 잘 알려져 있는 세컨드 스트라이커인 프란체스코 토티와 웨인 루니 같은 선수들이 오늘날 사용하고 있다.
분류
- 1922년 출생
- 1942년 데뷔
- 1958년 은퇴
- 부다페스트 출신 인물
- 2002년 사망
- 헝가리의 남자 축구 선수
- 공격수
- 헝가리의 남자 축구 감독
- MTK 부다페스트 FC/은퇴, 이적
- MTK 부다페스트 FC/역대 감독
- ACF 피오렌티나/역대 감독
- 만토바 1911/역대 감독
- 죄르 ETO FC/역대 감독
- 알 아흘리 SC/역대 감독
- 샤바브 알 아흘리 클럽/역대 감독
- 헝가리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참가 선수
-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참가 선수
- 헝가리의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
- 1952 헬싱키 올림픽 메달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