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緣起 / Conditioned Genesis결과에 따른 12가지 원인. 불교에서 '괴로움'의 원인을 잇따라 추측해보는 과정. 따라서 '연기'는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자 하는 모든 승려들의 연구처이기도 하다. 공(空) 사상도 여기에서 나왔다.
2. 상세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독립, 자존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조건, 원인과 결과는 상호 의존적으로 상관하는 관계에 있다는 설이다. 이것이 확장되어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을 이룬다. 즉, 연기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 를 뜻하며, 이것과 저것이라는 상호관계를 통해 독립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를 거부하는 시각이다.
즉, 깨닫지 못한 중생이 겪는 삶과 죽음의 과정을 인과적으로 나열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이 12연기를 다음과 같이 역으로 사유하여 고찰한 끝에[1]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발견했고, 이를 선정 수행을 통해 체험하고 깨달음으로써 마침내 열반을 이루었다.
원래부터 12연기였던 것은 아니며 6연기, 8연기, 10연기, 12연기로 변천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불경으로 추측되는 숫타니파타에서는 6연기로써 '명색 - 접촉 - 쾌불쾌 - 욕망 - 좋아하는 대상(집착) - 투쟁과 논쟁' 순이며, 연기의 첫번째 원인은 명색이다. 명색은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뜻하며, 물질에 의미를 부여하므로서 괴로움[2]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한다. 즉, 어떤 것에 의미를 부여하므로서 싸움과 슬픔이 생기고, 자만하거나 남을 헐뜯게 되어 괴로움에 빠진다는 것이다.
반면, 후대의 불경에서는 대부분 12연기[3]로써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애 - 취 - 유 - 생 - 노사' 순이며, 연기의 첫번째 원인은 '무명과 행'이 된다. 어리석은 생각(무명)과 행동(행)으로 인해서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쌓지 못하게 되므로 괴로워짐을 강조한 것.
그리고 1찰나(刹那)에 12연기를 모두 갖춘다는 학설과,[4] 시간적으로 과거생-현재생-미래생의 삼생에 걸쳐서 펼쳐진다는 학설이 있는데, 후자의 교리가 삼생양중인과설이다. 무명과 행을 '과거의 2인(因)'이라 하고, 식(識)에서 수(受)까지의 다섯을 '현재의 5과(果)'라 하며, 여기까지가 과현일중인과(過現一重因果)가 된다. 이 다음에 애ㆍ취는 과거의 무명과 같은 혹(惑)이요, 유(有)는 과거의 행과 같은 업(業)이니, 이 현재는 3인(因)에 의하여 미래의 생ㆍ노사의 과(果)를 받는다는 것이 현말일중인과(現末一重因果)가 된다.
이렇듯 원인과 결과가 꼬리를 물고 계속 변해가는 것(이는 단순히 원인과 결과라는 필연적 인과 체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결과의 상호관계에 주목한 사유이다)이 이 세상의 원리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할 수 밖에 없다. 용수(나가르주나)보살의 중론은 어떤 것이든 만약 변하지 않는 고정된 자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논리적인 참사(?)가 일어나는지 자세히 논증하고 있다.[5]
3. 순서와 설명
12연기는 불교 인식론의 과정이다. 12연기는 불교에서 매우 중요하므로 차례대로 간단하게 설명해 보면,1. 무명(無明, avidyā)은 '지식(vidyā: 베다 용어로 '학습으로 유전되는 명확한 진리'를 뜻함.)이 없다(a-)'는 것을 말한다.
2. 행(行, saṃskāra)은 '해온 것들(kāra)이 쌓인다(saṃ)'는 뜻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해온 것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업(業: 카르마)을 말하는 것이다.
3. 식(識, vijñāna)은 '구분해서(vi-) 안다(jna)'는 뜻이다. 즉,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분할 줄 아는 것을 말한다.
4. 명색(名色, nāmarūpa)은 '물질(rūpa)에 대한 정신(nāma)의 작용'이다. 마음이 외부 대상에 가는 것을 말한다. 대상에 주의나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한자 名色의 뜻은 '어떤 물질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말한다.
5. 육입[6](六入, ṣaḍāyatana)는 '감각 기관으로써의 몸'을 의미한다. 우리는 몸을 통해 외부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6. 촉(觸, sparśa)은 '접촉'을 말한다.
7. 수(受, vedanā)은 '접촉했을 때의 느낌'이 어땠는가를 말한다. 즉, 좋은 느낌이었는지, 나쁜 느낌이었는지, 아니면 이도저도 아니었는지가 파악된다.
8. 애(愛, tṛṣṇā)는 '갈증'이라는 뜻으로 '(좋은 느낌이 드는 것을) 원한다'를 뜻한다. 욕구나 욕심이 여기에 해당된다.
9. 취(取, upādāna)는 '연료가 불탄다'는 뜻으로, '(원하는 것을 충족시켰는데도) 계속해서 원하는 상태'를 말한다. '집착'을 의미한다.
10. 유(有, bhava)는 '(무엇이) 있다'는 뜻이다. 집착으로 인해 원하는 그것이 실제로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11. 생(生, jāti)은 '태어남'을 말한다. '있다'라고 여기는 생각들로부터 어떤 관념이 태어남을 뜻한다. 나라는 '자아'도 마찬가지 과정으로 태어난다.
12. 노사(老死, jarā-maraṇa)는 오래되어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태어난 모든 관념과 '나'라는 '자아'도,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없어진다. 따라서 '있다'라는 생각은 허상이었음이 밝혀진다.
12연기는 보통 거꾸로 가면서 설명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이에 따라 원인과 결과를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 늙고 죽는 것의 전제가 되는 것은 태어남이다. 우선 태어나야지 이후에 늙고 죽기 때문이다.
- 태어남의 전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있음이다. 뭔가가 있어야 태어나기 때문이다.
- 있음의 전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해서 상기하는 집착이다. 그것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하여 확인하는 그 '집착'에서 '있음'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없다'면 집착할 이유도 없다.
- 집착의 전제가 되는 것은 원함이다. 어떤 것에 대한 갈증이야말로 '집착'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 원함의 전제되는 것은 느낌이다. 좋은 느낌을 받으면 그것을 '원하게' 되고, 나쁜 느낌을 받으면 그것을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 느낌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접촉이다. 실제로 접촉해야 느낄 수 있다.
- 접촉의 전제가 되는 것은 감각기관이다. 감각기관이 있어야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 감각기관의 전제가 되는 것은 물질에 대한 정신의 관심(명색)이다. 그 감각기관에 정신이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야 감각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물질에 대한 정신의 관심의 전제가 되는 것은 구분하는 의식이다. 감각을 받아들이는 정신은 그것을 구분하고 정리하는 의식을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 구분하는 의식의 전제가 되는 것은 이 때까지 해온 것들이다. '구분'하는 대상은 '이 때까지 해온 것들', 즉 경험이다. 우리가 해온 것들에서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 이 때까지 해온 것들이 의식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명확한 지식이란 없다는 것이다. 오직 '변하는' 지식만이 있을 뿐이다.
이를 다시 원래 순서대로 설명해보자.
애초에 절대적이고 변하지 않는 지식은 없었다. 우리는 행위를 통해 경험을 쌓아, 그것들을 의식으로 구분하였고, 이러한 의식의 분별하는 힘은 물체에 대한 정신의 관심을 통해, 감각 기관과 연관되었으며, 감각 기관은 외부의 대상과 접촉하여, 호불호를 느끼고, 느낌에 따라 그것을 원하게 되며, 그러한 '원함'은 직접적으로 필요가 없을 때도 열망으로 남게되어 집착을 만들고, 집착은 반복을 통해 의미를 존재케 하며, 이러한 의미는 나라는 자아를 '탄생'시키고, '나'라는 자아라는 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언젠가 없어진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언젠가 없어짐에 괴로워(苦)하지만, 자아(나), 집착, 호불호, 접촉, 몸, 의식, 업, 절대적 진리 등의 모든 앞선 12연기의 요소들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이것들을 깨달음'없이 반복하게 되므로써 '괴로움' 속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12연기의 과정을 현실에 있는 한 벗어날 수 없지만, 그렇게 진행되는 과정을 이해함으로써 '괴로움'에 대해 통찰할 수 있으며, 이 통찰을 통해 고통을 이해하고, '이 고통이 또다른 고통을 낳는 악순환'[7]에서 벗어날 수 있다.
[1] 실제로 사유할 당시에는 무명과 행을 제외한 10가지 단계까지 사유해 내려갔다고 초기경전(니까야)에서는 언급하고 있다.[2] 이 '괴로움(苦)'은 팔리어로는 dukkha(불만족)라고 불린다.[3] 숫타니파타 4,5장은 근본 불교에 해당하며, 여기에 나오는 연기는 6연기(원시 연기)이고, 숫타니파타1,2,3장은 상좌부 불교의 영향을 받은 연기로 12연기이다. 같은 숫타니파타인데 왜 연기의 개수가 다르냐는 것은 숫타니파타 자체가 여러 불경의 모음집이기 때문이다. 자세한 것은 숫타니파타 참조.[4] 숭산과 틱낫한 등도 이 견해를 지지했다.[5] 재미있는 것은 중론이 어떻게 시간적인 원리인 무상에서 좀 더 상호관계/상대적인 원리인 공으로 전환되는 연결고리로 작용하는가 하는 점.[6] 육처(六處)라고 부르기도 한다.[7] '나는 왜 이리 고통스러울까' 하면서, '고통'에 다시 '고통'을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석가모니는 '두번째 화살'이라고 비유했다. 예를 들면, 12연기를 통해서 '지식과 욕망이 생성되고 사라지는 원리'를 이해한다면, '삶이 고통스럽다고 진리를 이리저리 찾아다니는 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즉, '명확한 진리를 찾아다니 것'이 또다른 고통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통찰했기 때문에 '두번째 화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