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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3:24:45

1927년 화교배척사건

1927년 화교배척폭동에서 넘어옴
일제강점기 화교배척사건
1927년 화교배척사건 만보산사건 오보사건 1931년 화교배척사건 1931년 평양화교 학살

1. 배경
1.1. 한반도 내 갈등1.2. 민족주의 문제
2. 사건의 전개
2.1. 전국 사건의 전개2.2. 인천의 화교배척사건
2.2.1. 배경2.2.2. 전개2.2.3. 경찰 문제
3. 이후


1927년에 발생한 폭동 사건.

1. 배경

1.1. 한반도 내 갈등

일단 먼저 일제강점기 화교배척사건 문서를 볼 필요가 있다.

중국 노동자는 시장경쟁력이 높았다. 낮은 임금에 강한 체력, 인내심, 근면성, 장치적 조합제도 덕분에 일본인 고용주들은 중국인 노동자를 선호했으며 중국인 노동자를 경계하는 조선인들의 심리도 강해졌다.

조선 사회의 불만이 높아진 만큼 조선총독부도 화교 노동자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1927년 경기도와 관내 각 경찰서는 공사장 측에 "중국 노동자가 3분의 1 이상을 초과하지 않게 하라"고 권고했고 10월에는 경기도 내 경찰서장 회의가 열려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입국금지안을 논의했다. 실제로도 중국인 노동자를 적극 규제하기 위해 주거제한규정을 위반한 중국인 노동자 검거 퇴출이 이루어졌다.

이런 규제에는 한중 노동자 간의 마칠이 오래된 점도 배경 이유였으나 조선인 노동자들이 중국인 노동자를 규제할 것을 요구하면서 꾸준히 청원 운동을 한 점이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1]

이러자 화교들은 항의 운동을 하며 맞섰다. 1927년에 열린 베이징관세특별회의(北京關稅特別會議)에서 중국전국상회연합회(中華全國商會聯合會)가 조선원산중화상회(朝鮮元山中華商會)가 내놓은 안건을 건의문으로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화교 입국 제한을 철폐하라는 것으로 "일본인과 한인은 만주에 해마다 수만 명씩 이주하면서 조선의 화교를 규제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비판하며 『이번 우리나라와 일본이 새로 조약을 개정할 때는, 마땅히 양국 인민의 왕래 거주에 대해서 명백한 호혜평등의 조문을 규정하여』 화교의 신분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2]

결국 이런 대립이 격렬해지다가 1927년 말에 배화[3] 사건이 터져 버렸다.[4]

1.2. 민족주의 문제

일본은 일본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중국 관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 각지에 총영사관과 분관을 설치하고 영사관 경찰을 상주시켰으며 재만 조선인을 자기네 관할에 두어 만주에서의 국익을 확대하는데 이용했다.

조선인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일본과 관계를 맺으면서 일본의 만주 침략의 한 부분을 맡았다. 재만 조선인들 중 일부는 일본의 만주 침략에 동조하고 일본의 앞잡이가 되기도 했으며 고의로 중국에 귀화해 농지소유권을 얻은 뒤 일본의 토지저당 회사에 양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동북지(만주)의 중국 당국에게 재만조선인은 점점 부담이 됐다.[5]

1924년 일본 외무대신으로 취임한 시데하라 기주로중국국민당장제스의 북벌이 일어나는 상황을 받아들이며 불간섭정책을 하는 대신 일본인의 주거 문제나 무역 문제를 중시했다. 이런 방침을 일본 여론과 정계에선 '연약한 외교'라고 비판했는데[6] 만주/몽고에 대한 일본의 권익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1927년 4월 20일에는 이전 내각이던 제1차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을 대신해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이 성립했다. 다나카는 1927년 6월 29일부터 7월 4일까지 소집된 동방회의에서 일본의 중국 내 권익을 지키겠다면서 시데하라가 승인한 불간섭주의를 폐기하고 무력 간섭도 불사하겠다고 발표하는 한편 시데하라 외교가 인정한 '만주가 중국의 일부'라는 주장을 버리고 '만몽 분리' 정책을 확립했다.

이 때문에 국민당의 1차 북벌 초기에 장제스와 외교적으로 접촉하면서 국민당의 급진화를 막으려던 기존의 정책에서 변화해 산둥출병을 감행하는 등 폭력적인 정책을 구사했다.

당시 만주를 지배하던 봉천군벌의 수장 장쭤린은 중일친선을 표방하려고 하면서 일본이 남만주철도를 이용하여 동북의 재부를 약탈하려는 것은 제한하려고 했고 이 때문에 불간섭정책을 버린 일본과 격렬하게 대립하게 됐다.

일본의 이런 정책이 전해진 동북 3성에서는 1927년 8월 "다나카 내각의 만몽정책을 저지하자"는 일본 배척 운동이 일어났다. 장쭤린은 만주 권익을 확대하려는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봉천성장(奉天省長)은 동변도(東邊道)에 "이주 조선인은 점점 몰아서 쫒아내며 귀화 희망자는 국적법에 따라 귀화시키고, 법을 어기면 추방하라" 는 내용을 띈 훈령 1284호를 내리고 11월 1일에는 밀령을 내려 개방지는 신속히 거두어들이고 미개방지는 외부인이 토지와 가옥을 빌릴 수 없게 조치하라 지시했다.

재만조선인들을 쫒아내기 위해 중국 관헌은 귀화압박, 출경 권고, 토지 임대차 계약 파기, 농사 거주 방해, 교육기관 압박등 폭압적인 정책을 하고 아예 몰아서 쫒아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부 중국관헌이 폭행이나 불법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도 일어났다.[7]

재만 조선인에 대한 박해와 구축이 심해지자 조선일보동아일보는 사람들에게 직접 행동할 것을 촉구했다.
동아일보는 1927년 12월 9일
『만주 일대에서 비할 수 없는 학대와 멸시를 당하면서도 하등의 대책이 없다면 이는 조선민족이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족이 지척에서 이와 같이 생명과 재산의 위해를 받아도 그대로 좌시한다면 이는 분명히 정신적으로 조선민족의 멸망을 세계에 폭로하는 것』
이란 기사를 썼다.

조선일보는 1927년 12월 6일 사설에서
『민족 단일당의 준비과정에 있는 신간회가 응분의 노력을 함이 옳다. 그러나 반드시 신간회 독자의 힘에 한하지 않고 각 사회단체와 중요한 민간 측의 언론기관이 연합하여 재만 조선인옹호동맹이나 혹은 그와 유사한 임시기관을 만드는 것이 더욱 옳다. 각 방면의 총역량을 결집하고 보폭을 일치하여 이 문제의 해결에 힘써야 할 것이다. 조선 통치의 당국자는 이에 대해 솔선 노력해야지 저해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장작림을 중심으로 한 만주의 당국자들도 합법적인 조선인의 요구에는 해결에 응해야 한다. 문제가 시급하니 조용한 토의에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라 궐기를 고대한다』
고 했다.[8]

재만동포 옹호운동은 좌우합중운동 단체인 신간회 결성과 관계가 있었다. 1927년 신간회가 생겨났고 1927년 6월 이후 각지에서 지회가 결성됐다. 지회는 각지의 청년단, 농민단체, 노동운동 단체가 포함돼서 통합된 민족운동단체였다.

이렇게 모여서 지회를 결성하던 당시 신문을 통해 재만 조선인에 대한 차별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 청년단을 중심으로 재만동포옹호동맹이 결성됐다. 재만동포 옹호운동은 신간회 지부의 중요한 활동 중 하나였다. 또 이런 재만동포 옹호운동은 책임소재를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에도 돌리고 있었고 재만조선인 지원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이라는 성격도 있었다. 이런 재만동포옹호동맹은 오전에 재만동포 박해 규탄대회를 열고 저녁에는 군중들이 화교와 화교 상점들을 공격했고 이런 일은 경찰이 막아서 강제로 해산시킬 때까지 이어졌다. 일본이 강하게 단속하자 집회는 금지됐다.

12월 11일 경성부에서 열린 신간회 제2차 정기총회에서는 신간회가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적극 후원하기로 결의했다.[9][10]

1927년 당시 조선인이 공격했던 조선 화교는 만주 조선인을 배척했던 중국인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국경을 넘은 초국적 존재인 화교들은 본토의 중국인과는 입장이 다른 독립된 행위자였으나 이런 점을 당시 조선인들은 섬세하게 구분하지 않았다.[11]

2. 사건의 전개

2.1. 전국 사건의 전개

화교배척사건 이전 1927년 5월 경성부 태평통이나 용산 등지에서는 화교가 조선인에게 구타당해 부상 입는 사건들이 생겨나서 중국총영사관과 화상총회에서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12]

전라남도전라북도 등지에는 '김림의 조선 농민중 지주가 토지를 거두어 출경을 핍박받은 자가 모두 2만여명에 달한다'는 말들이 전파됐고 전북 이리에서서 처음 재만동포옹호동맹이 활동했다. 1927년 12월 7일 이리에서는 재만동포옹호동맹 결성대회를 열고 해산했다. 그리고 저녁부터 중국인 상점을 습격했다. 어린이 수십 명이 소동을 일으켰고 이후 청년 수백 명이 중국인 상점을 공격했다. 사건은 8일과 9일에 군산시, 전주시, 서천군, 김제시 등지로 퍼졌다. 10일에는 또 군산, 함열, 이리, 장성, 부안군, 김제, 삼례, 강경, 서천 등지에서 화교배척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일들은 신간회 지회나 조선청년단 관련자들이 관련되어 있었다.[13]

왕수선(王守善) 중국총영사는 조선총독부 마츠무라 마츠모리(松村松盛) 외사과장을 만나 각자의 화교배척사건을 막고 경찰이 화교를 보호하도록 강력하게 요청했다. 조선총독부는 12월 10일부터 단속을 적극적으로 하여 신간회 지회, 재만동포옹호동맹 결성과 집회를 금지하고 시위의 대표자를 검속하면서 전라도 지역의 시위가 잦아들었다. 그러나 12월 15일 시위는 인천까지 번졌다.[14]

12월 7일 이리에서는 중국 당국의 만주 거주 조선인 구축과 압박에 대한 여론이 끊어오르고 있었다. 12월 6일 밤부터 7일 오전 11시까지 시민대회를 개최할 준비하고 화교 상점에서 일체의 상품을 사지 않겠다는 '비매동맹'을 결성했다. 7일 11시에 이리의 한 한 유치원에서 시민들이 시민대회를 개최했다. 경찰은 진행을 중지시키고 조명희(趙明熙), 김광우(金匡宇), 정길선(鄭吉善), 정한조(鄭瀚朝)를 경찰서로 연행했다. 경찰은 4명에게 화교 배척은 '국제문제'라는 이유로 시민대회 개최를 못 하게 했다. 시민대회는 무산됐다.[15]

그날 저녁 소년 수십명이 주택과 상점에 돌을 던졌다. 이후 군중 수백명이 화교 상점으로 몰려와 상점의 문과 창문을 때리고 부수면서 상점을 폐점하고 떠날 것을 강요했다. 각 상점들은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교외의 야채 재배 농민은 군중들에게 구타당했고 도움을 요청하면서 사방으로 피신했다. 경찰은 당일 미리 엄격한 경비를 하지 않았고 다음날이 돼서야 군중을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시켰다. 7일 이리에서 일어난 화교배척사건은 다음날 이리시내는 물론 익산군 전체로 퍼졌다. 8일에도 군중들은 화교 주택 및 상점을 부수거나 돌을 던졌고 화교들을 폭행했다. 가만히 걸어가던 체문업(遞文業) 씨와 이리역 대합실에 있던 진학모(陳學謨)씨는 군중들에게 걸려 폭행을 당했다. 익산면의 동산리(銅山里)에서는 주민 30명이, 마동리(馬洞里)에서는 20명, 익산군 황등포(黃登浦)에서는 70명이 집단으로 몰려가 화교 주택에 돌을 던지거나 화교를 구타했다. 오산면(五山面)에서는 주민 50명이, 남전리(南田里)에서는 30명이 화교 주택을 습격하고 화교를 폭행했다.[16]

함열면(咸悅面)의 와리(瓦里)에서는 주민 200명이 화교 주택을 습격하여 화교들을 폭행했다. 함열면에는 화교상인 점포가 4-5개 있었다. 8일 군중 4-5명이 소리를 지르며 화교를 구타하자 화교는 경찰 주재소에 보호를 요청했다. 주재소의 경찰은 겨우 4명이었고 이 중 조선인 경찰 2명은 수수방관하며 군중들을 진압하지 않았다. 경상자 수명, 중상자 4명이었고 중상자 중 1명은 위중했다.[17]

함열(함열면과는 약간 다른걸 가르키는 듯한데 정확히는 모름)에선 사건이 일어났을 때 주재소에서는 경찰이 1명뿐이었다. 경찰은 막기는 커녕 오히려 해당 지역 면장과 작당하여 화교 상인들에게 강제하여 물건을 헐값으로 샀다, 두계에는 경찰주재소가 아예 없었고 조선인 면장 김택수는 당시 화교를 핍박하고 학대했다.[18]

9일에는 익산군과 닿아 있는 전라북도 군산부, 전주군, 김제군, 옥구군으로 퍼졌다. 군산부는 전라도에서도 화교의 인구가 가장 많고 화교경제가 가장 발달한 곳이었다. 이곳의 화교배척사건은 8일 오후 7시에 시작했다. 조선인들은 지나가던 화교를 구타했고 화교들을 습격했다. 4명이 중상을 입고 10여명이 경상을 입었다. 화교 상인들은 이리에서 일어난 소식을 듣기도 했고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하면서 가게를 닫았고 경찰서에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 줄 걸 요청했다. 9일 군산중화상무회(群山中華商務會)는 직원을 경찰서에 파견해서 피난처를 찾다아니고 화교(농촌 벽지의 소점포와 채소밭에 일했던 중국인) 500여명을 시내 전주통(全州通) 일대로 이동시켜 보호했다. 그러던 중 10일 군중 천여명이 모여들더니 고함을 지르며 중화상무회 건물 주변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군중들은 포위공략 형태로 몰려왔으며 주변에 있던 화교 상인 점포의 문과 창문을 파괴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군산경찰서는 무장경찰과 소방대를 급파해서 해산시켰다. 조선인 100여명을 체포하면서 점점 평정을 되찾았다. 군산 화교 상인들은 12월 15일에 영업을 재개했다. 하지만 거래는 한산했고 물건은 헐값에 처분해서 손실이 컸다.[19]

전주는 군산부, 김제군에 이어 거주자가 많은 곳이었다. 전주에서는 화교 상인 점포가 이리에서 소식을 듣고 경찰서장을 만나서 보호를 요청했다. 그래서 시내에서는 큰 피해를 없었으나 시외에 있는 화교들은 피해를 입어 화교 5명이 중상을 입었다. 전주군 12월 9일과 10일 전주읍, 고산(高山), 이등면(伊藤面)에선 화교 손문지(孫文持) 등 총 1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지역 조선청년단은 화교들에게 '이틀 이내 조선을 떠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했다.[20]

8일 삼례의 화교 사회는 8일 군산의 전화를 받고 형세가 매우 위급한 걸 알고 당지의 경찰 주재소에 연락하여 보호를 요청했지만 헛수고였다. 8일 저녁 무렵 군중 수백명이 철도국에 고용된 화교 노자저 백여명을 포위하며 공격했다. 화교 노동자들은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거리로 피하려고 했다. 군중들은 포목상에 근무하는 산둥성 황현(黃縣) 출신의 27세 중국인 능항익(凌恒益)과 산둥성 모평현(牟平縣)[21] 출신으로 만두집을 경영하던 56세의 중국인 학진산(郝珍山)을 살해했다. 7명은 중상을 입었고 경상은 10여명이었다. 3명은 상태가 심각했다. 당시 경찰 주재소 경찰은 4명뿐이라 제지하지 못했다. 한 일본인이 전주에 긴급히 연락하여 무장경찰 6명이 도착해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차여열(車汝悅, 17세)은 머리와 양손 및 양 허벅지에 부상을 입었고 모학시(牟學時, 32세)는 왼쪽 허벅지와 무릎 및에, 이위승(福山縣 출신, 25세)은 머리 및 손에 부상을 입었다.[22]

밀양에서는 화교배척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 경찰 대부분이 방관했다. 해산은 일본인 경찰들이 출동하여 했다. 전남북도 남포에서는 경찰이 중국인을 주재소에 불러서 만주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면서 '중국인은 맞아 죽어도 된다'는 말을 퍼부었다. 피난 갔던 화교 노동자가 돌아오려고 하자 경찰이 뺨을 때린 일도 있다.[23]

대도시와 가까운 작은 도시인 화령, 농암, 중모, 보은에서도 사건이 격렬했다.청년단과 각 단체가 연합하여 거리에서 집단을 이루고 손에 목봉과 큰 돌멩이를 쥐었다. 중국인을 만나면 구타하고 상점에 있는 물건을 약탈했다. 화교 상인을 압박해서 화물을 일정 시간 내에 팔 것을 강요한 일도 일어났다. 화녕의 한 마을에서는 2000원 가치의 물건을 800원에 팔게 하고 농암의 한 마을에서는 700원 가치의 화물을 50여 원에 팔게 하고 침구를 압류했다.[24]

1927년 조선화교배척은 총독부 기준으로 전국에서 총 702건이 일어났다. 경기도는 전체의 36%. 충남이 23%, 전북은 14%, 그 다음이 전남, 황해, 경북 38건, 강원 22건 순이다. 5인 이상의 군중이 벌인 습격 건수는 전북이 36%였고, 충남이 26%, 경기 15%였다. 3개 도가 전체 발생 건수의 77%다. 충북, 경남, 평남, 평북, 함경도는 다 합쳐도 약 10건이 안 된다. 전라도, 충남, 경기도가 전체 사건 건수의 7할 이상을 차지했다. 북부지역보다 남부지역이 사건의 중심지였다.[25]

1931년 화교배척 사건은 13개도 전 지역에서 일어났다. 평남 746건, 경기 308건, 황해 142건, 평북, 98건, 함남 62건 순으로 이들 지역이 중심이었다. 1931년의 조선화교배척은 1927년 화교배척고 비교하면 전국으로 광범위하게 골고루 일어났으며 1927년은 남부지역이 중심이라면 1931년은 북부지역이 중심이었다.[26]

화교배척사건이 퍼지자 조선총독부는 적극적으로 재만동포옹호운동을 단속했다. 이리에서는 이후 경찰이 80여명을 검속했고 가장 인명피해가 컸던 삼례에서는 경찰이 70여명을 검거했고 전북 정읍에서는 각 사회단체가 작성해서 배포하려던 선전문을 인쇄 도중 압수했다. 전남 나주에서는 12월 10일 나주장날에 아침부터 청년회원과 노동조합원들이 배중운동을 일으키려했다. 나주경찰서는 미리 이 사실을 알고 일찍부터 각 중국인 상점을 지켜며 비상경계를 했다. 청년회가 배중연설을 시작하자 경찰은 청년회원 박영목 외 노동자 5명과 학생 1명을 검속했다.[27]

2.2. 인천의 화교배척사건

2.2.1. 배경

한국으로 이주한 화교 노동자들은 대체로 인천항을 이용했다. 1923년 1월부터 3월까지 인천항으로 입국한 노동자는 만 명에 달했다. 1924년에도 인천항으로 입국한 노동자들이 6개월에 2만여명으로 집계됐다. 1925년에는 3월에만 5천여 명이 들어왔다.[28]

인천항은 한 때 한국의 현관이라 불렀다. 다만 경부, 경의선이 완전 개통하자 이후 인천항은 한국의 현관(玄關)이라는 기능은 부산에 넘겨주었다. 그러나 지리에 따른 이점으로 여전히 대중국무역의 중요거점이라는 기능을 유지했다. 인천항의 수출입은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호경기와 인천항 선거(船渠) 준공에 따른 항만의 확충과 해륙연락 설비의 개선에 힘입었다. 수출입액 총액은 해마다 늘어나 1919년에 9,098만원을 기록했는데 1909년 1,667만원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1920년 불황이 있어서 전년보다 감소했지만 대외교역 총액은 1922년에 1억 원을 돌파했다. 인천의 대외교역은 1928년까지 꾸준하게 성장했다.[29][30]

1924년 8월 법률 제24호 「사치품 등의 수입세에 관한 건」67)이 공포되어 중국산 견직물에 대한 관세율이 배나 인상했고 중국산 견직물의 주된 수입항이던 인천항의 대중수입 총액은 전년과 비교하면 감소했다. 이 때문에 중국 견직물 상인들이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화교 상인의 경쟁력은 여전히 위력이 있었다. 수입무역에선 중국산 마포 및 견포 등이 독점수입되다시피 했다. 그리고 화교 상인들은 중국 본국에 본점 혹은 지점 내니 유력한 자본가를 배경으로하여 자본이 풍부해서 다른 타국상인들은 쉽게 지위를 넘볼 수가 없었다. 일본 제품인 면포 및 잡화류 등은 이전에는 재한일본인 상점에서 취급했으나 인천지역 화교 상인들은 한신(阪神)지방에 머무르던 중국 상인에게 위탁을 받아 직접 일본에서 수입하여 팔았다.[31]

인천 화교 상인들이 1930년까지 무역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또 있다. 인천에는 인천의 산둥 출신 화교들로 구성된 북방(北幫)이 기선을 소유하여 인천과 옌타이간에 화물과 승객의 운송에 편리를 제공했다. 종래 인천-옌타이간의 해운권은 일본 阿波國共同汽船株式會社가 장악했다. 이 회사 소속의 공동환(共同丸)은 조선총독부와 관동청의 보조를 받고 인천-옌타이(芝罘, 기항지)-다롄간을 운항했다. 이 항로의 여객과 화물은 거의 전부 중국과 관련됐으나 공동환은 중국인 승객과 화물에 대해 수시로 차별을 가했다. 일본의 항운업 독점에 화교 상인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그러다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화교 상인 중 재력이 있는 몇몇이 공동출차하여 즈푸(芝罘)에 본점(本店)을 둔 윤선회사(輪船會社)를 섭립하고 일본한테 구우선 살마환(舊郵船 薩摩丸)을 사서 이통호(利通號)로 이름을 바꿔서 1922년 9월 다롄-즈푸-인천간을 운행했다. 이통호는 인천-옌타이간을 매주 한번씩 왕복하면서 화인(華人)의 여객과 운송에는 우대조치를 했고 운항 뒤 영업 상태도 양호했다. 이통호는 정부의 보조곰은 한 푼도 받지 못했으나 화교들에게 적극으로 후원을 받았고 공동환과 경쟁할 수 있었다. [32]

일제강점기 인천지역 화교의 상업으로는 크게 직물류 수입, 서양 잡화, 잡화소매, 약재, 양복점 음식점, 환거래상 등을 꼽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영업을 진행하던 대형 직물류수입상은 덕순복(德順福), 영래성(永來盛), 화취공(和聚公), 협태창(協泰昌), 인화복(人和福), 화태호(和泰號), 삼합영(三合永), 취원화(聚源和), 협흥유(協興裕), 동화창(東和昌) 등 11개 상점으로 30명의 점원을 두고 직접 수입한 직물류를 전국 각지에 팔았다. 면포(夏布)는 한인의 옷감으로 애용됐는데 1924년 일제는 이것을 사치품으로 규정해 제재하여 중국산 하포 수입에 타격을 입혔다. 하지만 한국산 하포는 질이 낮고 생산량도 많지 않아 세금을 무섭게 매긴 후에도 중국산 하포 수입은 늘어났다. 인천에는 화교 상인이 운영하던 면포점이 적지 않았는데 源生東․和聚公 등은 전국적인 판매량을 확보한 대규모 면포상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또 화교 상인이 운영하던 잡화소매상, 음식점, 이발관(이발소) 등은 중국인뿐만 아니라 조선인과 일본인도 상대했다.[33]

화교상인들의 인천상권 장악 현상에 대해 인천상공회는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소화 2년(1927) 인천항의 수이출입 무역액 가운데 중국상인의 취급액을 보면 합계 1천 8백만 원 이상으로 당항(인천) 총무역액의 1할 4분에 상당한다. 더구나 이출무역의 대부분은 미곡에 집중되어 있는바, 이를 제외한 기타 수이출입 합계 7천 9백만 원에서 다시 홍삼․엽연초․석유․철도건설제료 및 기계류 등 전매품 및 특허품 합계 1천만 원을 공제한자유상품 대비 비율은 3할에 이르는 것이다. 이 가운데 대중무역은 수입에서는 8할 5분, 수출에서는 6할이 중국상인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인천의 내선상인들은 밖으로는 상권의 황폐화, 안으로는 중국상인에 의한 상권잠식에 시달려 앞뒤로강적을 맞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인천상권을 장악하여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은 화교 상인들은 해마다 엄청난 돈을 물품 대금 혹은 여타 명목으로 본국에 송금했다.[34]

인천에서는 농민들도 다른 곳과 비교하면 안정된 활동을 유지했다. 인천의 농민 인구는 상인 운구보다 많았다. 이 농민들은 1911년부터 인천농업공인회(仁川農業公議會)라는 공동판매기관을 설립하고 인천과 그 주변에서 야채 생산에 종사해 오며 그 유통 과정에도 개입해 야채 재배업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점했다.[35] 이런 한국 화교 사회는 다른 지역 화교 사회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예로 미국과 유럽 화교들은 노동자들이 다수인데 한국은 농업 종사자도 적지않았다.

인천지역은 개항 직후부터 화교가 빽빽하게 모인 데다 일본인들까지 화교 농민들이 만든 소채(蔬菜)를 좋아해서 중국인이 경영하는 농업이 가장 먼저 이루어진 지역이다. 농업생산을 통한 소득도 상당했고 인천의 소채재배업은 종래 중국인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인천과 인근 지역에 머물러 살던 화교상인들은 인천지역 채소시장을 더욱 확실하게 장악하기 위해 1911년 공동판매기관 성격인 인천농업공의회(仁川農業公議會)를 만들었다. 화교상인의 생산은 주로 인천 부근 부평군(富平郡) 주안면(朱安面)에 집중됐는데 생산액은 연 8~10만원에 이르렀다. 주된 소비자는 인천지역 화교였지만 다른 지역에도 공급해서 한국인과 일본인도 주된 소비층이었다.

인천지역 화교 소채재배농은 1호당 평균경지면적이 한국평균 1호당 경지면적의 절반 정도일 뿐이었다. 화교들은 이런 좁은 땅에서 봄·여름·가을·겨울에 각각 제철 채소를 재배했는데 좁은 땅에서 봄부터 겨울 채소를 돌아가면서 재배했다. 그리고 화교 농민들은 채소 재배에서 수요와 공급 관계를 면밀히 연구했다. 예를 들면 겨울철 채소값이 뛰어오를 때는 배추나 무 등을 밭에서 땅을 파고 저장하여 두었다가 다음해 1월경에 시장에 내다팔았다. 인천은 개항 후 항구도시로 발전해 시가지도 넓어져서 부내(府內)에 농경지가 많지 않아 다른 곳과 비교해서 농업은 상대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대신 그 주변인 부평 등지를 중심으로 과수원이 발전하는 상태였다. 인천지역 농업생산은 적고 부진했는데 중국인들은 농업생산에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화교 농민들은 농작물을 팔 때 다음과 같은 방식을 사용했다. 한국인이나 일본인 재배농이 자신들과 같은 상품을 팔 때는 엄청난 염가로 팔았고 그렇지 않으면 이익을 독차지해서 수입을 올렸다. 인천부에서는 필요한 채소의 7할은 화교 농민이 공급했고 이런 채소를 사고파는 일도 화교 농민이 스스로 공동경영하는 시장에서 했다.[36]

이런 이유로 경쟁하던 조선인들은 화교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느꼈으며 인천에서 좋지 않은 분위기가 흘렀다.

2.2.2. 전개

오대 인천영사는 인천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3일 전인 12일에 인천경찰서를 방문하고 경찰서장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오대 영사는 서장에게 "특별 경비를 펼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줄 것을 요청"했다. 서장은 "특별히 주의하여 경계를 하고 있으니 결코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오대 영사는 15일 사건이 벌어지기 1시간 전인 오후 3시 전화로 다시 경찰서에 연락해 "귀관(貴館)은 곧바로 총독부에 군경 파견을 청구할 것"을 요청했다. 경찰서의 경부보(警部補)는 "모든 순경은 이미 출발하여 배치되어있으며 준비가 완료된 상태로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회답했다.[37]

13일 인천에서 멀지 않은 고양군 아현리에서 주민 5명이 화교주택을 습격해서 퇴거를 강요했다. 14일엔 경성부 한강통(漢江通)에서 노동자 20명이 화교 마위남(馬謂南)을 습격하여 폭행했다. 같은 날 경성부 숭일동에서 노동자 8명이 화교 양승지(楊承之)를 습격하여 폭행했다.[38] 화교배척이 전라도에서 점점 북상해서 경기도로 올라오는 조짐이 보였다. 인천경찰서고등계는 13일 오전 11시 조선화교배척의 주동 세력 중 하나인 청년동맹 인천부의 간부인 고익상(高翊詳), 진해룡(陳海龍), 고일(高逸)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 다음부터는 청년동맹상무집행위원회가 결의한재만동포옹호문제에 절대 관계하거나 참여하지 말고 인천 각 사회단체한테도 재만동포학대문제에 대한 집회를 금지시키라고 명령했는데 이것 때문에 인천에서는 재만동포옹호집회를 개최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이상 대책을 세우지는 않았다.[39]

12월 14일 청년 7명이 인천부 지나정(支那町, 현 선린동 인천차이나타운) 근처의 송판정1정목(松坂町1丁目, 현 북성동1가)에서 화교 손수흥(孫壽興)을 습격하여 폭행했다. 인천은 불길한 분위기에서 15일을 맞이했다. 오후 4시~오후 4시 30분 인천부 외리(外里)에서 소년 수십 명이 화교가 경영하는 만두집을 공격했고 화교를 경멸하며 폭행을 가했다. 오후 6시경 내리(內里)와 외리 일대에 군중 2-3천명이 갑자기 늘어났다.무기를 든 군중은 화교 주택과 상점을 무자비하게 습격하고 화교를 폭행했다. 이런 상황은 내리와 외리 인근 부근인 인천역(仁川驛, 현 동인천역), 용강정(龍岡町), 시정(寺町), 본정(本町), 중정(仲町), 화정(花町), 신화수리(新花水里), 송임리(松林里) 등지로도 퍼졌다. 이런 사태는 야채 재배를 하는 화교 농민이 많이 거주하던 경기도 부천군 다주면(多朱面) 지역에도 퍼져나갔다. 인천의 화교들은 주로 오후 6시부터 8시 사이에 이 지역에서 피해를 입었다.

당시 경찰 수십명은 군중들을 탄압하지 않고 군중해산을 맨손으로만 시도했다. 화교는 각지로 흩어져 지나정과 인천경찰서로 피신했다. 오후 8시경 군중 700-1000명은 무기를 가지고 지나정을 습격하려고 했다. 당시 지나정 입구는 경찰 3-4명이 경비하는 상황이라 위험했다. 지나정의 화교 상인 300명과 이곳으로 피난 온 화교 500명이 무기를 들고 지나정에서 입구에서 군중의 습격을 막았다. 이후에도 군중의 지나정 습격 시도는 7번이나 됐으나 화교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고, 밤 11시경 쯤 군중은 완전히 해산했다. 주인천중화민국영사관과 인천중화총상회는 16일 인천경찰서와 교섭하여 화교 보호를 요청하고 인천경찰서에서는 무장 경찰 60여명을 파견하여 경계를 강화했다. 그러자 사태는 진정국면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16일 아침 영사관과 중화총상회는 자동차를 급히 조달해 인천지역의 화교를 영사관 부지와 인천화교소학교로 수송해 피난시켰다. 그날 밤에는 지나정 근처의 주인천영국영사관에 부녀자 및 아동 700여명을 지켜 줄 것을 요청하고 그곳에 피난시켰다. 인천중화총상회는 각지에서 지나정에 피난 온 화교를 인천화교소학교와 중화회관 그리고 피해를 당하지 않은 상점에 흩어지게 해 수용하고 사상자와 부상자를 조사했으며 이런 사람들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했다. 그리고 무술에 능한 화교 60명을 뽑아 지나정 입구에 배치했다. 더불어 인천의 조선인 사회와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고 중화민국 정부에 일본 정부와 교섭하도록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다.

12월 16일 이후 인천에서는 화교배척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인천 화교배척사건은 15일 오후 4시경부터 오후 11시까지 약 7시간이라는 시간 동안 벌어진 사건으로도 볼 수 있다. 인적 피해는 중상 7명, 경상 18명, 총 25명이었으며 이들 피해자의 피해 장소는 내리 10명, 외리 5명, 용강정 4명, 화정 2명, 사정ㆍ우각리(牛角里)ㆍ송현리(松峴里) 각 1개소, 기타 1개소였다. 인천부 거의 전 지역과 인천부 인근 부천군에서 화교 주택 및 상점의 피해가 발생했다.

산둥성 영성현(榮成縣) 출신 농민인 48세 장학보는 15일 오후 5시 상인천역 앞에서 야채 행상을 하다가 하다 습격당해 제8늑골이 부러졌다. 12일간 입원하여 30원의 병원비가 들었고 상태가 심각해 약 반 년간 휴양이 필요했다. 역시 산둥성 영성현 출신 만두 제조자였던 35세 유씨는 15일 오후 6시 용강정 27번지 자택에서 얼굴 찰과상과 다리 타박상이란 중상을 입었다. 유씨는 14일간 입원하여 입원비로 41원이 들었고 약 반 년간 휴양기간이 필요했다. 유씨의 딸 이축녀(5)는 이마에 큰 중상을 입어 14일간 입원하고 42원의 입원비가 들었다. 아들 이맹자(李孟子, 7)도 이마 타박상의 경상을 입었다. 이춘정의 주택은 군중에게 습격받아 만두 제조 원료인 밀가루, 쌀, 설탕, 유리상자까지 피해를 입었다. 산둥성 모평현 출신으로 상업에 종사하던 하문동(何文東, 41)은 시정(寺町)55번지의 자택에서 오후 7시 습격을 받고 배 부위 찰과상 및 타박상이라는 중상을 입어 24일간 입원을 했고 입원비는 7.35원이 들었따. 퇴원 후 20일 간의 치료비로 12원의 추가비용이 들어있다.

경상 피해자 중에는 인천부내의 상업 종사자뿐만 아니라 농민도 있었으며 인천부와 인접한 부천군 다주면 일대의 화교 농민들도 피해를 입었다. 인천부와 부천군 일대에서 화교 농민들의 피해가 많은 원인은 이 지역에 야채를 재배하는 화교농 민이 상대적으로 많이 분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천군 내부에서도 인천부와 인접한 다주면에 화교 농민이 집중거주했다. 화교 주택과 상점 중 물적 피해가 제일 심했던 것은 도산정(桃山町)17번지에 위치한 양말제조공장 덕취항(德聚恒)이었다. 덕취항은 15일 습격당해 공장 제조의 양말, 모자, 양말재조 원료가 군중에게 도둑질당하거나 파괴되었다. 피해물품은 114 종류였고 피해액은 4,154.5원이었다. 이 공장의 경영자인 봉천성[40] 안동현(安東縣) 출신 손동신(孫棟臣, 29)은 오후 5시 우각리에서 습격을 받아 머리를 얻어맞는 부상을 당했다. 조선화교의 양말 제조업은 굉장히 번성했다. 1920년대 평양의 양말제조업을 위협할 정도였다. 신의주가 화교 양말제조업의 중심지였고 인천이 그 다음으로 발전한 곳이었다.[41]

같은 양말 제조 공장인 용리(龍里)238번지에 위치한 영성동(永盛東)도 습격을 당했다. 이 공장은 양말 제조 공장 중에선 생산액, 판매액이 두번째로 많았다. 1928년의 연간 매상액은 도매 3만6,000원, 소매 6천원으로 총 4만 2000원에 달했다. 이 공장은 공장 자체가 아닌 양말 소매상점을 습격당했는데 그 때문인지 피해액은 덕취항과 비교하면 경미했다.(피해액은 376.05원) 영성동은 15일 습격당한 gn 29일까지 13일간 휴업했다. 외리 234번지에 있는 덕원성(德源成)도 습격당해 기계 손상, 현금 및 양말제조 원료 도난 같은 일로 3,351.1원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내리 188번지에 소재한 잡화점 취화성(聚和成)은 97개 품목에 피해를 입어 3,463.62원의 피해를 입었다. 취화성은 피해 정도가 심각해서 31일까지 16일간 영업을 하지 못했다. 취화성에 왔던 사람들도 군중들에게 피해를 입었다. 산둥성 모평현 출신 화상 이광화(李廣和, 20)는 좌측 뺨을 다쳐 살갗이 벗겨졌다, 역시 모평현 출신 화상 왕의선(王義善, 30)은 뒷머리와 팔을 얻어맞아 부상을 당했으며 모평현 출신 화상 손일분(孫日芬, 42)은 손가락과 머리를 맞아 부상당했고 모평현 출신 화상 진상통(陳祥通, 20)은 손가락을 다쳐 살갗이 벗겨지고 무릎을 맞아 부상을 입었다. 취화성에선 일하던 직원들은 더욱 심한 부상을 입었다. 왕보인(32, 산둥성 牟平縣)은 15일 오후 6시 내리의 취화성(聚和成)에서 근무하다 습격받고 다리 관절 타박상이라는 중상을 입었다. 왕보인은 26일 입원했는데 입원비는 65원이 들었고 역시 상택 심각해 1년간의 휴양이 필요했다. 임헌지(58, 牟平縣)도 같은 취화성에서 일하다가 오후 5시에 군중의 습격을 받고 왼쪽 눈과 얼굴에 찰고상이란 중상을 입었다. 6일간 입원하여 입원비 15원이 들었다.

인천부 내리 200번지에 소재한 덕성관(德盛館)도 15일에 습격당해 투숙객들과 함께 27.12원의 피해를 입었다. 모평현 출신 화상인 송서윤(宋書潤, 28) 코를 얻어 부상을 입었고, 역시 같은 모평현 출신의 화상 송서보(宋書寶, 43)는 얼굴을 얻어맞아 부상을 입었다. 가장 부상이 심한 건 왕보전이었다. 왕보전(32, 牟平縣)은 내리의 객잔(客棧)인 덕성관(德盛館)의 객인으로 머물렀다가 당일 오후 5시에 군중의 습격을 받고 머리와 손가락에 타박상을 입고 10일간 입원했고 입원비 35원이 들었다.

인천 외리 167번지에 소재한 이발관(이발소)인 경운당(慶雲堂)도 피해를 입어 회전의자, 이발도구, 거울, 수건 등 48개의 물품이 파괴되거나 사라졌고 피해액은 1,545.15원이었다. 경운당은 15일 습격당한 뒤 28일까지 14일간 휴업했다. 화정 50번지에 소재한 만두집 영빈루(瀛濱樓)도 피해를 입어 탁자, 유리문 등 107.21원 정도의 피해를 입어 15일부터 24일까지 휴업했다. 영빈루는 오후 6시에 습격을 당했고 산둥성 고밀현(高密縣) 출신 화상 왕자경(王子經, 24)은 이마의 살갗이 벗겨지는 부상을 입었다. 인천 외리 218번지 소재의 잡화상 동성태(東盛泰)는 오후 5시에 군중에게 습격받아 89.46원이라는 피해를 입었으며 15일부터 23일까지 휴업했다. 산둥성 영성현 출신 화상 주후림(周厚林, 45)은 동성태에 있었다가 어깨와 허리에 부상을 입었다.[42]

부천군 다주면의 화교 농가들도 군중에게 습격을 당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다주면 사충리193번지의 화농 장육관(張毓寬)은 가재도구, 야채종자를 잃어 157.59원이나 손실됐다. 같은 사충리의 송광태(宋光泰)는 닭 5마리, 채도(야채칼) 등 57.8원을 잃었다. 향인리(向仁里)의 화농 궁법흥(宮法興) 농가는 배추, 쌀 등의 식량과 가재도구를 포함 32.24원을 잃었다. 향인리의 화농 곡덕은(曲德恩)은 25.55원이라는 피해를 입었다. 용정리(龍亭里)의 이균능(李均能)은 채도와 마늘, 톱, 도끼 등을 잃어 총 98.45원을 잃었다. 용정리의 곡지기(曲芝棋)는 농기구, 쌀 등의 식량을 포함해 368.05원의 피해를 입었고 군중들은 곡지기의 주택을 태워 버려 100원을 더 잃게 만들었다. 그 밖에 인천부 도산정17번지의 화농 우가모(于家謨)는 51원, 신화수리의 화농 등수정(滕樹正)은 63.35원, 만석정의 화농 장홍청(張鴻淸)은 72원, 부천군 남동면의 왕의후(王義厚)는 41.95원이라는 피해를 입었다.[43]

인천 화교는 화교 집단거주지인 "지나정"과 새롭게 조성된 삼리채 청국조계 지역 부근인 내리, 외리, 신정 등지에 조선인과 섞여 살았다. 조선인과 섞여 살아서 습격받기 쉬웠고 경찰도 진입이 어려운 지역이기도 했다.[44]

2.2.3. 경찰 문제

인천 경찰의 경계태세도 허술했는데 경성경찰과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경성은 화교의 집단거주지가 현 명동의 중국대사관 주변, 덕수궁 대한문 주변, 그리고 청계천 수표교 주변의 3개소에 형성되어 있었고 화교인구도 1927년 말 기준으로 인천은 2,077명이었데 경성은 4,639명으로 2배 이상 많았다. 하지만 인적 피해는 경상 3명, 폭행당한 인원 61명이었고 물적 피해는 51.16원이었으며 천 명에 달하는 군중이 벌인 습격 사건은 없었다. 경성에서는 경성경찰이 조치하여 "무장경찰은 도로의 순찰을 했으며, 화교를 습격하는 어떤 시도도 즉각 진압"(주경성영국총영사관의 페이튼(Paton) 총영사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했다. 경성경찰서와 다르게 인천경찰서는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6일에야 무장경찰을 투입해 경계 태세를 갖췄다.[45]

3. 이후

사건이 진정된 뒤에도 크고 작은 화교배척은 각지에서 일어났다. 주로 지역 청년회가 주도해서 선전선동하고 불매동맹을 맺어 조선인이 화교상점에 가지 못하게 막고, 화상점문을 주먹으로 두드리거나 발로 차고 욕을 한 뒤 도망가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46]

조선총독경무국은 1927년 화교배척사건에 대해 책임을 회피했다.
『(중국관헌의: 저자) 조선인에 대한 압박 약간 노골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만주 및 조선 내 각 신문에 조선인 압박의 기사가 게재되자 재만조선인과 직접 관계있는 조선내 조선인에게 오른쪽 사실(압박 사실: 저자)의 과장적 정보 등이 제공되었다. 조선인 일반은 중국인(지나인)에 대한 증오와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 근년 조선내 모든 사업의 융성과 중국(지나) 내지의 시국의 영향으로 도래하는 중국인(지나인)이 매우 많고, 노동자는 물론이거니와 잡화상, 포목상, 음식점 등 각 방면에서 조선인 동업자를 압박하는 상태로 인해 일반적으로 기분 좋게 생각하지 않은 때, 재만조선인 압박 상황의 선전이 이뤄졌기 때문에 보복적으로 조선 거주 중국인(지나인)을 박해하는 폭거가 초래되었다.』[47]
조선총독부는 이번 사건의 직접 원인을 중국 당국의 재만조선인 박해이며 간접 원인은 조선 내 화교경제가 발달해서 조선인이 악감정을 갖게 된 것이라 주장했다. 중화민국 외교부가 북경의 주중일본공사관에게 주조선총영사관의 보고를 근거로 이번 사건에 항의하는 문서를 제출하니 일본공사관은 12월 24일 사건의 원인은 중국 당국의 재만조선인 박해에 있다면서 책임을 떠넘겼다.[48]

결국 끝나지 않은 갈등과 경찰의 무책임으로 1931년 화교배척사건이 다시 한 번 터지고 말았다.


[1]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0~111[2]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1[3] 밀칠 배(排)에 중국 화(華). 중국인을 배척하는 뜻이다.[4] 강진아, 조선총독부의 화교 노동자 입국 관리와 중국 언론, 중국근현대사연구 59, 2013.9, 111[5]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08~109[6] 김영숙, 일본관료, 일본사학회 - 네이버 지식백과[7]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09~111[8]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1~112[9]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8~119[10] 다만 이것은 신간회의 중심급 최고지도자들이 선동하거나 조직해서 일으킨 건 아니다. 재만동포옹호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인 안재홍 선생은 화교배척사건이 일어났던 지방을 순회한 후 12월 15일 결과를 발표한 후 '과장된 풍설에 흥분하지 말고 재만동포 문제를 우호적으로 해결하고 조선에 있는 중국인 공격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6)[11]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40, 42[12]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5[13]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3[14]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3[15]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0[16]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3;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290-291[17]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0-292[18]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4[19]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3;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2[20]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3;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2~293[21] 산둥성의 성도 지난시 근처에 있다.[22]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3~114;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2~293[23]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4[24]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4~115[25]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5[26]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5~296)[27]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6[28] 석사학위논문, 김희용, 日帝强占期韓國人의 華僑排斥, 2009, 9~10[29] 다만 세계적인 대공황의 영향으로 1929년 전년보다 1할 가까이 감소했고 이 현상은 1931년까지 이어졌다.[30]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16, 인천학연구 4, 2005.2, 222[31]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1, 인천학연구 4, 2005.2, 227[32]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1~22, 인천학연구 4, 2005.2, 227~228;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3[33]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2, 인천학연구 4, 2005.2, 228[34]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3, 인천학연구 4, 2005.2, 229[35] 김승욱, 20세기 초(1910~1931) 인천화교의 이주 네트워크와 사회적 공간, 중국근현대사연구 47, 2010.9, 33~34[36] 김영신, 日帝時期 在韓華僑(1910~1931) - 仁川地域 華僑를 중심으로, 26, 인천학연구 4, 2005.2, 230~232[37]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09~310[38]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00[39]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11[40] 지금의 선양시 일대의 요령성 지역을 말한다.[41]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05[42]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9~304[43]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07[44]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13[45]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311~312[46] 박정현, 1927년 재만동포옹호동맹의 결성과 화교배척사건, 中國學報 69, 2014, 117[47] 駐朝鮮中華民國總領事館, 「仁川鮮人暴動華人被害報告書」(상동).,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8에서 재인용[48] 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35, 2016.6, 298~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