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독일의 무기들이 대개 다양한 각종 형식과 파생형, 프로토타입, 페이퍼플랜을 가지고 있었으나 4호 전차는 개량의 여지가 많았던 전차라서 특별히 더 다양한 형식의 파생차량을 갖고 있다.
초기 실전투입 이후 발견된 미비사항들, 특히 장갑의 지속적인 증강이 이루어졌던 까닭에 동부전선 개전 이전에만 이미 A에서 F까지 6개의 차량형식이 존재했다. 그러나 독소전의 개전 후에는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고자 대대적인 형식변경을 피하고 월 단위로 생산선에 오른 차량에 지속적인 개량과 보완을 하는 것으로 대체했으므로 형식별로 구분하는 것에 큰 의미가 없어졌다. 같은 G형 차량 2대라도 생산년월도에 따라 서로 세세한 차이가 생기는 까닭인데, 이렇게 생산성 향상에 기를 쓴 덕택에 기존 전차의 차체를 이용해서 다른 용도의 차량을 만들 때도 당장 차대가 부족한 판터나 티거같은 물건들보다는 생산선이 비교적 넉넉하고 독일이 보유한 구형 전차중 가장 큰 몸집을 가져서 개조의 폭이 넓은 4호 전차를 개조하여 만들려고 노력한 것이 많았다. 특히 크루프사는 본디 H형으로 명명되었던 후속형 4호 전차 설계가 43년에 취소된 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44년에는 4호 전차에 판터용 슈말트룸 포탑을 올리는 계획을 독일군에 제안했으나 4호 전차의 생산 자체가 이미 중단될 예정이었으므로 특별한 고려없이 폐기되었다.
Panzerkampfwagen IV Ausf. A(Sd.Kfz. 161 / VK 6.22)
1920년대 대트랙터를 시작으로 75mm급 중형전차개발을 시도했던 독일군은 37mm급과 75mm급을 합치려한 신축차량이 실패하자 1934년 1월, 3,7cm 주포를 탑재한 전차와 7,5cm 주포를 탑재한 지원전차의 분류를 정립하고 그 개발을 추진했다. 전자는 소대장차량(Zugführerwagen, Z.W.)이라는 이름이 붙어 3호 전차의 설계로 이어졌고 후자는 호위차량(Begleitwagen, B.W.)이라는 이름이 붙어 크루프 사와 노이바우파초이크를 제작한 라인메탈 사가 참여했다. 양사의 설계 모두 노이바우파초이크의 설계를 기반으로 시작하여 많은 부품이 유용되었고, 노이바우파초이크의 다포탑형식을 따라 차체 전면에 기관총 포탑을 탑재하였고 이에 따라 탑승원도 6명이었으나, 1936년 4월에 나온 크루프 사의 시제차량에는 부포탑이 없는 상태였다. 반면 부포탑을 포기하지 않은 라인메탈 사의 설계는 여전히 노이바우파초이크의 연장선상에 있었고 5월에 시제차량이 나왔으나, 7월 크루프 사의 차량이 선택되고 경합이 종료되면서 기술시험 및 실증차량으로 전용되었다.
이때 크루프 사는 리프스프링 현가장치를 장착한 B.W. 1과 토션 바 현가장치를 장착한 B.W. 2 두개의 설계를 가지고 시제차량을 제작하였는데, 시험주행에서 B.W. 1과 리프스프링 현가장치가 더 우수한 주행성능을 보여주면서 이후 4호 전차에는 리프스프링 현가장치가 채택되었고 1936년 12월 35량의 생산이 주문되었다. 한편 B.W. 2 설계는 이후 10,5cm 포를 탑재한 연막발사차량(Rauchwagen, R.W.) 개발에 사용되었으나, 이 차량의 주목적은 연막차장을 쳐서 적의 시야를 가리고 아군을 지원하는 것이었고, 비록 해당포의 대전차화력이 확인되기는 하지만 빠른 기동을 요구하는 전투차량과는 거리가 있었다. 해당차량은 1938년에 개발이 종료되었다.
독일군이 4호 전차 A형의 수령을 시작한 것은 주문 1년 뒤인 1937년 11월이었는데, 이 차량은 또 B.W. 1과는 전체적인 형태만 비슷할뿐 2호 전차의 관측창과 3호 전차의 전차장 전망탑(큐폴라)이 설치되는 등 많은 부품이 개량되고 교체되면서 B.W. 1에서 그대로 남은 내부부품이 단 7품종에 불과했다.
1938년 5월 4호 전차 B형부터는 차체 기관총을 삭제하고 전투실의 형태를 육각면체로 수정하였다.[2] 대신 장갑이 14.5mm에서 30mm로 강화되었으며 이후로 계속 탑재될 SSG 76 수동변속기와 특히 3호 전차에도 채용되는 마이바흐 사의 HL 120 엔진이 탑재되었고 여기에서 큰 변화가 없이 후속형인 C형이 1938년 10월부터 출고되었다.
4호 전차의 개발과 성능이 매우 안정적이었고, 3호 전차처럼 차체설계를 4번씩이나 갈아치우는 사태도 없었으나, 독일군은 놀랍게도 4호 전차를 단종시키면서 그 말많고 탈많은 3호 전차에서도 최악의 결함품인 E형의 차체로 통합시킬 궁리를 했으니, 4호 전차의 포탑이 호환되도록 3호 전차 E형을 개수한 다임러-벤츠 표준차체(Daimler-Benz Einheitsfahrgestell)를 개발하고, 4호 전차 B형의 생산이 종료되면 그 자리를 대신해 3호 전차 E형(정확하게는 다임러-벤츠표준차체)에 4호 전차 포탑을 탑재한 전차가 나오도록 예정하였다. 그러나 3호 전차 문서에 간략하게 설명되었듯 E형 차체는 그냥 지뢰도 아니고 대전차지뢰였으며, 3호 전차 대참사로 벌어진 전력공백을 메꾸도록 4호 전차의 단종은 포기되었고 B형과 큰 차이가 없는 C형이 장기간 양산되면서 제2차 세계 대전 개전순간에는 오히려 3호 전차와 4호 전차의 숫자가 각기 98량과 211량으로 4호 쪽이 2배 이상 더 많았다.
그러나 여전히 4호 전차의 분류는 지원전차였다. 강력한 7,5cm 전차포의 화력으로 보병과 아군전차를 지원하고 특히 3호 전차의 화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프랑스군의 기병전차들이나 중전차들을 상대하는것이 주목적이었다. 요컨대 3호 전차의 37mm급 주포로는 상대가 어려운 보병진지나 토치카 뿐만이 아니라 전차도 4호 전차가 대적할 대상 중 하나였다는 얘기이며, "보병지원전차로 개발되어 대전차화력은 고려되지 않았다" 등의 얘기는 일체가 낭설이다. 따라서 4호 전차는 그 편제도 제한적이었다. 1939년 9월 독일군의 기갑사단은 2개 기갑연대로 편제되었고, 이 연대들은 다시 각각 2개 기갑대대로 편제되었다. 1개 기갑대대는 4개 경전차중대로 편제되었는데, 여기서 제1중대에만 4호 전차가 집중편제되었고 나머지 중대에는 1호 전차, 2호 전차, 그리고 3호 전차등이 배속되었다. 이 제1중대는 이후 중형전차중대로 이름이 개명된다.
1939년 10월부터 출고된 4호 전차 D형은 본격적인 생산형식이며, 앞서 기관총을 삭제하고 육각화시켰던 전투실이 다시 A형처럼 한쪽이 파인 형태로 복귀하고 그 자리에 기관총도 재설치되었다. 차체하부의 전면장갑이 50mm로 증가되었으며 측후면장갑도 14.5mm에서 20mm로 증가되었다.
동시기 3호 전차가 전측후 4면에 모두 30mm의 장갑을 둘렀던 점을 고려하면 4호 전차의 방어력이 3호 전차와 큰 차이가 없었으며 오히려 E형에 들어서면 훨씬 더 나았음을 알 수 있다. 4호 전차는 대전차전력으로서 3호 전차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고, 일선에 투입되어 프랑스군의 전차와 직접 교전하는 것이 고려된 전차였다. 특히 7,5cm 24구경장 전차포는 본디 3호 전차가 탑재하였던 3,7cm 45구경장 전차포는 물론이고 프랑스 침공 후에야 탑재가 시작된 5cm 42구경장 전차포와도 엇비슷한 관통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프랑스군의 중전차전력에 어떻게든 비벼볼 만한 매우 귀중한 전력으로 평가되었다. 실전에서의 투입은 이를 뒷받침하는데 1940년 6월 4일 제3기갑사단 예하 제3기갑여단장은 프랑스군의 전차에 효과적인 병기는 오로지 7,5cm 전차포의 철갑탄뿐으로 관통력이 확실한 4호 전차에만 대전차전의 주역할을 맡길 수가 있다고 보고하였다.
Panzerkampfwagen IV Ausf. E
그러나 프랑스 침공 도중 양주력전차의 방어력부족을 절실히 깨달은 독일군은 1940년 6월 당시에 생산 중이었던 3호 전차(F, G, H형)와 4호 전차(D, E형)의 30mm 전투실장갑에 30mm 추가장갑판을 설치하였고, 특별히 4호 전차에는 측면에 20mm의 추가장갑판을 설치하였다. 이 장갑판설치는 과거생산분에도 차례차례 적용되었고, 특히 D형의 이후 생산분은 차량전면장갑이 50mm로 통일되었다.
주포의 교체시도도 이어졌다. 3호 전차에 5cm Pak 38 대전차포를 탑재하여 그 화력을 강화하려던 히틀러의 지시가 탑재불가능을 이유로 독일군과 산업계에 의해 묵살되자, 1941년 2월 히틀러는 3호 전차에 5cm Pak 38 대전차포를 탑재하여 시험차량을 내놓을것과 함께, 3호 전차에 탑재가 불가능하다면 4호 전차에라도 탑재시키겠다는 의도였는지 4호 전차에도 해당 대전차포를 탑재시켜 시험차량을 내놓도록 명령했다. 결과적으로 독일군과 산업계의 주장과는 달리 3호 전차에 5cm Pak 38 대전차포의 탑재가 가능하다는게 밝혀지면서 4호 전차에 5cm 대전차포를 탑재하여 80량 생산한다는 계획은 취소되었다. 한편, 1941년 3월에는 크루프사가 3호 돌격포용으로 개발했던 7,5cm KwK40 43구경장 주포를 4호 전차에 탑재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독일군으로부터 차체의 길이보다 포신이 길면 안 된다는 이유로 34.5구경장으로 줄이도록 요구받아 12월에 가서야 34.5구경장 주포 1문을 완성한다.
E형의 후속형인 F형에서는 무장강화는 없고 다만 포탑과 전투실장갑이 50mm로 강화되었고 측면장갑도 30mm로 강화되었다. 그래서 1941년 독소전쟁의 발발로 동부전선이 개전한 당시 4호 전차는 여전히 7,5cm 24구경장 전차포를 탑재한 상태였으며, 소련의 T-34-76이나 KV-1과 고전할 수 밖에 없었으나, 대부분의 대전차화기가 37mm 수준이었던 당시 독일군의 여건상 여전히 4호 전차는 대전차전의 주력으로 활동하여야만 하였다.
T-34 쇼크가 있은 후인 1941년 11월, 7,5cm PaK 40(당시 Pak 44) 대전차포를 4호 전차에 탑재하는 작업이 시작되어 1942년 3월부터 7,5cm 43구경장 전차포를 탑재한 4호 전차 F형, 흔히 F2라고 부르는 차량이 출고되었고, 이 F2형은 T-34-76, 44년에 등장한 T-34-85와도 화력 측면에서 우세한 전투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 동부전선의 한 중대에서는 4호 전차 장포신형을 인도받은 뒤로의 시간을 "HAPPY TIME"이라 썼을 정도. 1942년 5월부터는 아프리카 전선에도 투입되었는데, 단 1개 중대 규모에 불과했음에도 당시 영국군의 M3 리 전차에 대해 상당한 우위를 점하면서 맹활약했다. 다만 당초 육군에서 우려했던 대로 차체에 상당한 무리가 가기 시작했고, 화력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크게 개선된 부분이 없었다.
1942년 6월에는 모든 7,5cm KwK 40 43구경장 전차포를 탑재한 F형이 G형으로 분류되었다. 즉 F2형이 G형으로 이름이 바뀐것. 비슷한 시기인 5월 생산분부터는 30mm 추가장갑판의 추가가 시작되어 전면장갑이 80mm로 증강되었으며, 약 1년뒤인 1943년 4월 생산분부터는 대전차 소총 대응을 위해 포탑과 차체 측면에 공간장갑 쉬르첸(Schürzen)[5]을 도입했다. 주포도 7,5cm KwK 40 48구경장 전차포로 교체되었다.
상술한 쉬르첸은 상당한 중량 증가를 불렀는데, 안 그래도 4호 전차는 중량에 비해 엔진 출력이 부족한 편이어서 상당한 문제가 되었다. 때문에 1944년 시점이 되면 일선에서는 차체 쉬르첸을 제거하고 운용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난다. 그래서 전쟁 최후반에는 무거운 철판으로 만들어졌던 기존의 쉬르첸을 대신하여 새롭게 철망형 쉬르첸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대전차 소총에 대하여 의미있는 방호력을 주는 가에 대하여와, 결론적으로 무게만 늘린 꼴이 되어서 이 쉬르첸은 결국 있으면 독인 물건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이렇게 포를 강력한 것으로 교체하고 장갑을 강화함에 따라 현가장치에 큰 무리를 주었다. 1942년 12월 50mm 경사전면장갑의 채택 등 대규모 개량을 시도한 후속형 개발이 시작되었으나, 4호 전차의 한계점이 왔다는 점만 확인되었다. 개량의 여지가 없어지면서, 독일군은 4호 전차를 퇴출시킬 준비를 하게 된다.
하지만 독일군에게는 불행하게도 4호 전차의 퇴출은 일어나지 않았다. 42년까지 소련군을 밀어붙이던 나치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라는 겨울의 대참사를 맞이하면서 엄청난 숫자의 기갑전력과 베테랑 병사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를 시작으로 독일군은 점점 패퇴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서 전차의 소모율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신형 전차를 만든다고 4호 전차의 생산을 중지시킬 경우에 새 전차를 만들기도 전에 현재 보유한 기갑전력이 전부 소모된다는 충격적인 계산까지 나온 상황에 결국 독일군은 울며 겨자 먹기로 신형전차의 개발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4호 전차의 생산을 유지, 뽑아먹을수 있을때까지 뽑아먹기로 방향을 잡을수밖에 없었다.[6] 그렇게 원래 H형[7]이 되어야했을 설계안을 폐기하고 생산성 향상에 초점을 두고 나온것이 후술할 4호 전차의 최종개량형인 H형이며, 나중에 가서는 5호 전차 판터가 4호 전차의 역할을 대신해 나가면서 최종적으로 생산형 향상을 위해서 포탑 구동용 모터를 폐지한[8] 개악형인 통칭 J형이 H형과 함께 양산되기 시작했다.[9]
1943년 2월 후속형의 개발은 공식적으로 중지되었고, 생산성 유지를 위해 종전에 생산중이던 G형을 최종구동장치와 구동스프로킷의 교체와 주포를 48구경장 으로 소폭 연장하고 포탑천정장갑을 16mm로 늘리는 변경만 하고 그대로 H형으로 계속 생산하도록 결정되었다. 또한 6월 생산분부터는 생산성강화를 위해 측면관측창이 사라지고 30mm 추가장갑판도 제거되었으며 대신 생산시부터 80mm 전면장갑인 채로 출고되었다, 9월부터는 자기식 흡착지뢰 공격에 대응하기 위한 자성 차단 코팅(일명 치메리트, Zimmerit)이 적용되기 시작했고, 기타 여러 부분에서도 사소한 개선이 이루어졌다.
이 H형은 사실상 4호 전차의 완성형이었다. 4호 전차에는 더이상 무장을 보강하거나 장갑을 증강할 여지가 없었고,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판터 전차와 어두워지는 전황의 영향으로 H형의 생산이 시작된 1943년 4월부터의 개선사항은 대부분 생산성강화와 연결되어있다.
1944년 2월부터 생산된 J형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포탑구동용 모터를 폐지한 것으로, 4호 전차의 퇴출이 초읽기를 앞둔 상황에서 구리를 비롯한 생산물자의 절약과 생산 시간 단축을 위해 이루어진 조치로 보인다. 다만, 방어전 추세에서 미리 조준하는 매복공격과 티타임 각도로 차체조준하는 전술의 변화로 볼 수 있다. 모터폐지후 7월 생산분부터 200L 연료탱크가 장착되었으나, 누유문제가 생기면서 삭제되고 9월분부터 다시 장착되었다(증가연료탱크가 없는 차량도 있다).
최후기형 트랙(홈이 파여있는 형태), 크레인용 후크가 단순한 철근형태, 머즐브레이크가 원형으로 변경. 시기는 불명.
J형은 H형과 함께 병행생산되어 1944년 7월까지 생산되었으며 J형은 종전 이후에도 G형, H형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소재 공장에서 약 150대 이상[10] 재생/생산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군 소속으로 활약했다. 또한 이러한 생산 간략화 과정이 빛을 봤는지 J형은 모든 형식의 4호 전차를 통틀어서 가장 생산량이 많다.
정식 명칭은 Pz.kpfw.IV hydrostatischer 이다. 다른 4호 전차의 차이점은 엔진 부분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 덕분에 전후방 전부 스프로켓이 장착되어 있다. 1대가 4호 전차 G형을 기반으로 제작되었으며 전후 미군에게 노획되어 미국으로 보내졌다. 이후 에버딘 박물관 야외 전시실에 전시되었으나 포트 베닝에 위치한 미 육군 기갑 기병 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경사장갑 H형이 취소되고 나서 44년에 등장한 설계안으로 당시 제작중이던 판터 F형의 슈말투름 포탑을 4호 전차에 장착하여 공격력과 방어력을 높이려는 시도 중 나온 설계안으로, 당시 독일군은 4호 전차를 퇴역시킬 예정이었기에 형식명도 부여받지 못하고 프로젝트는 취소되었다.
<colcolor=black> 성능: 149mm(15cm) sFH 18 버전 / 128mm(12,8cm) Kanone 81 버전
무게
00.0톤
길이
6.15m (차체)
폭
3.16m
높이
2.62m / 2.55m
승무원
6명
장갑
00 ~ 00mm
주포
149mm(15cm) sFH 18×1 (30발)
128mm(12,8cm) Kanone 81×1 (45발)
4호 전차의 차체를 기반으로 포탑을 제거하고 다수 개조를 가해 대구경의 중포를 올린 바펜트레거 다목적 자주포 차대로 써먹으려던 계획안이다. 1943년 후순부터 1944년 초순까지 개발되었다. 149mm(15cm) sFH 18 야전 곡사포를 단 형식과 128mm(12,8cm) Kanone 81 대전차포를 단 형식 2가지가 계획되었으나, 두 사양 모두 시제 차량 제작 단계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사실 1944년즈음에 전차 개발자들은 이 무겁기 짝이 없는 중포들을 4호보다도 가벼운 차대[12]에 올리려는 시도들도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여러 부품들이 이 포들을 견디지 못한다는 당연한 사실때문에 계획안 이상으로 나아가진 못했고, 4호 전차도 이 포들을 감당하기에 맞지 않았다. 차체 내구성은 둘째 치더라도 1944년에는 이미 구형 전차로 전락한 4호 전차는 생산 중단이 계획된 상태였고, 당연하게도 바펜트레거 4호는 시제 차량조차 만들어지지 못한 채로 끝이 났다.
[1] 독일 육군기관지 지그날(Signal)의 표지로 쓰인 유명한 사진이다. 워낙 유명해서 4호 전차가 아니더라도 전차만화에서는 심심치 않게 나오는 구도다. 대표적으로 만화 '사막의 사자'에서도 이 사진을 오마주하였다.[2] 4호 전차의 전투실은 본디 그 정면우측에 기관총 포탑이 있어 그 자리가 움푹 파인 형태였으며, 부포탑의 제거후 그 공간을 채우기는 하였으나 좌측과 균일한 일직선을 이루는 형태가 아니었다. 이것을 좌측과 맞추어 일직선화한 것이다.[3] 위쪽 사진의 433호차는 기동 가능한 상태로 호주 육군 기갑 포병박물관에서 보존 중이다. 아래쪽은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직후 촬영된 사진이다. 뒤에 2호 전차도 보인다.[4] 아프리카 원정군 소속 전차다. 전방 장갑판 위의 야자수 부대마크가 이 부대의 것. 또, 포탑 정면의 직시관측창이 열려있다. 독일은 포수에게 잠망경을 주는 대신에 방탄유리로된 직시 관측창을 주거나 저배율 조준경을 판터에 달았다. 독일 이외의 국가는 잠망경을 더 선호했다.[5] 더도 덜도 아니고 영어의 사이드 스커트(Side skirt)에 해당하는 독일어다. 단, 국방군은 일반적으로 궤도만 감싸는 사이드 스커트 뿐만 아니라 포탑 스커트도 사용했다. 현대 전차들의 경우엔 이런 포탑 스커트 대신 공구상자를 이용하는 편이 더 많다.[6] 이와 비슷하게 단종되기로 계획되어있던 3호 돌격포 시리즈도 종전때까지 계속 생산되었다.[7]T-34와 마찬가지로 경사장갑을 대폭 채용한 디자인이었다.[8] 왜 하필 포탑 구동용 모터를 제거했냐 하면 모터의 경우 전기모터가 주로 쓰였는데 이게 점점 고갈되어가던 구리를 많이 잡아먹는 부품이었다. 안그래도 쓸 곳이 많았는데 보유량은 점점 줄어드니 티거, 티거2, 판터에 들어갈 구리까지 모자랄 지경었다고 한다. 이런 자원상황과 방어전에서 티타임 전술까지 맞물려서 최종적으로 모터를 제거하게 된것이다.[9] 게다가 44년에 가서는 급박해지는 전황으로 인해서 기갑차량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야 했기에 4호 차체에 고정식 전투실을 장착한 4호 구축전차, 3호 돌격포의 전투실을 4호 차체에 얹은 4호 돌격포 같은 차종들까지 만들게 되었다.[10] G형, H형, J형 재생한 대수.[11] 4호전차 형식은 C/D/E형으로 추정[12] 월드 오브 탱크에 나오는 Rhm. -B. WT 처럼 훨씬 가벼운 38(t)의 차대에 올리려는 계획을 실제로 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