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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00:52:00

제6군단 쿠데타 모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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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정황3. 실존 여부

1. 개요

1995년 북한 6군단이 쿠데타를 모의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었다고 알려진 사건.

2. 정황

사건 당시 북한 6군단은 함경북도 지역을 방어하는 향토군단으로서 청진시 라남구역에 사령부를 둔 중국 접경지대의 수비군으로 휘하에 보병 3개 사단, 포병 1개 사단, 방사포 4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94년 여름에 김일성사망하고 김정일의 승계가 안정되던 와중에 북한의 권력이 허점을 보이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정치장교 장성(중장[1])은 체제를 뒤엎기로 결심했다.

사실 공산국가의 정치장교 제도는 지휘관의 반란을 막는 통제제도였으며 거기다가 조선인민군의 지휘 체계는 정치장교를 감시하는 보위국 장교까지 만들어 넣은 이중감시 구조였는데 정작 정치장교와 보위국 장교가 손을 잡고 반란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사실 50년 이상 유지된 체제하에서는 모두 다 북한 정권 아래서 성장하고 교육받은 인물들이었으니 정치장교나 보위국 장교라고 해서 군 지휘관보다 북한 정권에 대해 더 충성심이 높은 게 보장되지 않는다. 애초에 북한이 군 지휘관 + 정치장교 + 보위국 장교 제도를 운용하는 이유는 군의 지휘구조를 복잡하게 하고 이들간의 상호 감시 체제를 구축하여 반란 등의 행동을 위한 의견 일치를 어렵게 만드는 것 자체가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도 2명 사이에는 의견 일치가 이뤄졌지만 3명째가 동의하지 않아서 적발되었다.

1995년 초 국가안전보위부에서 라남구역 라성동을 담당하는 한 요원이 여성 정보원으로부터 한 건의 정보를 받았는데 내용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한 중장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체제를 뒤엎기로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자료를 접수한 라남구역 국가안전보위부 부장은 이 사실을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부장에게 보고했다. 함경북도 국가안전보위부 부장의 지시를 받은 도 국가안전보위부의 반탐[2]처 처장은 현지로 가 그 여성 정보원을 만났지만 쿠데타를 준비한다고 알려진 6군단 정치부 군관의 말이 취중에 한 말로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정보자료가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데다 도 국가안전보위부의 관할 밖인 군 부대라는 점을 고려하여 도 국가안전보위부 반탐처 처장은 '허위보고'로 속단하고 도 국가안전보위부장에게 보고 한 뒤 자료를 서류함에 넣고 잊어버렸다.

한편 정보를 제공한 그 여성 정보원은 분명 뭔가 문제가 있는데 반탐처 처장이 속단했다고 판단하고 이 사실을 조선인민군 보위국에 보고하기로 결심했지만 6군단 보위국이 미심쩍었던 그녀는 평양에 가서 지인들을 통해 어렵사리 조선인민군 보위국에 근무하는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보위국장을 맡고 있던 원응희 중장은 즉시 수사팀을 파견했다.

수사 결과 6군단 정치위원과 군단의 포병부 사령관을 비롯해 정변을 준비하던 군관들은 군수물자 보장을 위한 외화벌이를 명목으로 많은 자금을 마련했고 준비가 완료되면 정변을 일으키려고 했다고 한다. 북한 사회에서는 이 사건이 단순한 외화벌이 빙자 비리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후의 군부대 교체이동과 관련 군관 대부분을 전역시킨 것을 보면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제2의 6군단 사건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국가안전보위부 산하의 국경경비대, 해안 및 철도 경비대와 인민보안부의 일부를 인민무력부에 통합시켜 통일된 지휘체계를 세웠고 주요 군부에 대한 감시를 더욱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다.

물론 쿠데타 주모자들은 모두 처형되고 가족들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사돈의 6촌까지 처벌되었다'는 소문까지 나돌 정도였으니[3] 친척들 역시 정치범수용소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함경북도 당·정·군 책임자 대부분이 가담했다고 하니 처벌자가 300~400명에 달했다고 한다. #

2020년 10월 10일 북한 열병식 때도 6군단이 해체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3. 실존 여부

사실 별 거 없었고 그냥 군단장과 정치장교 사이의 알력 문제였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우선 쿠데타 시도라기에는 동기와 실제 계획이 어땠는지 너무 불분명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추정되는 설로는 6군단이 반란을 일으킨 후 함경북도를 기반으로 평양에 대한 내전을 일으키거나 대한민국 국군이나 미군을 청진항에 끌어들인 다음 특수부대가 평양에 잠입하여 정권을 탈취하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는데 모두 비현실적이다.

6군단의 전력은 인민군 내에서도 열악한 수준인 데다 함경북도의 생산력을 감안하면 전쟁을 벌여도 당연히 평양의 중앙 정권과는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며 쿠데타에서 중요한 것은 언론의 장악과 선전을 통한 지지의 확보인데 북한의 모든 매스미디어는 평양이 장악하고 있으며 설령 국지적인 지지를 확보한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호응이나 혼란을 야기할 역량이 되지 못한다. 한국군이나 미군이 육로로 연결된 강원도(북한)나 황해도도 아니고 해로와 항공로를 동원해야 하는 함경북도에 진입한다는 것은 더더욱 비현실적이다.

게다가 수 년간 나온 탈북자의 증언을 종합해 보면 대규모 반란 사건에 대한 처분치고는 북한 기준으로 허술한 측면이 있다. 당시 전역자들이 탄광으로 끌려갔다는 것은 원래 인민군 전역자를 아무 데나 복불복으로 끌고 가는 인민군 기준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4] 게다가 당시 6군단에 있었고 숙청되어 싹 쓸려야 했던 좌관급 장교들마저도 생존했다는 증언이 있으며 처형당한 경우도 가족들은 함경북도 국경지대로 추방당하는 선에서 끝났고 반란을 모의했다는 정치장교 중장의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반란사건이든 단순 알력사건이든 1개 군단이 해체된 사건에서 주모자에 해당하는 사람이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는 건 이상하다. 더구나 탈북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사람이 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웠다는데 그런 사람이 이름조차 없다는 게 아무리 북한이지만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

자세한 정황은 북한이 붕괴된 후에야 밝혀질 것이지만 현재 확실한 것은 1995년에 모종의 이유로 군단장 살해 사건이 발생했고 그로 인해 김영춘 주도 하에 6군단이 전격적으로 해체되었다는 것 뿐이다.

김길선과 전소현은 6군단 사건은 군사반란이 아니라 단순히 국경지역에서 자본주의를 맛보고 돈을 국가에 바치지 않고 중간에 가로채가는 부대를 해체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하였다.

주성하는 6군단 반란 모의 사건이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군대도 안 갔다 와서 군에 대한 영향력이 매우 약했던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고자 한 조작된 사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링크 하지만 김정일이 군부에 영향력이 약했단 주장은 걸러서 들어야 한다. 김정일은 70년대에 조직지도부를 장악하고 군부의 수장 오진우를 구워삶으면서 군부 요직에 자신의 사람들을 다 심어 놓고 있었고 90년대 초반에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과 국방위원장 자리를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물려받으면서 군 통수권은 김일성이 죽기 전부터 행사하고 있었다. 김평일이야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일개 장교에 불과했다.

[1] 북한 계급 상에서의 중장은 별이 2개의 투스타로 대한민국 국군의 소장에 대응한다.[2] 북에서는 '방첩' 업무를 '반탐'이라고 부른다.[3] 후술할 데일리NK 기사에서도 쿠데타 관련 다른 내용들은 '~다'로 표현했지만 해당 표현은 '~고 한다'고 표현했다.[4] 북한 용어로 무리배치라고한다. 현재까지도 최고지도자의 핵심사업으로 지정되면 제대군인에 대한 무리배치가 이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