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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일

83일
朽ちていった命:被曝治療83日間の記録
파일:83일.jpg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장르 ○○
작가 NHK 도카이무라 임계사고 취재반
이와모토 히로시
번역가 신정원
출판사 뿌리와이파리
발매일 2015년 2월 16일
쪽수 228쪽
ISBN 9788964620502
1. 개요2. 의료진들은 왜?3. 목차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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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미경으로 확대한 골수세포염색체가 찍혀 있어야 할 터였다. 그러나 사진에 담겨 있는 것은, 뿔뿔이 흩어져 있는 까만 물질이었다. 히라이[1]가 지금까지 익히 보아온 인간의 염색체와는 모양이 완전히 달랐다.
염색체는 모든 유전 정보가 모여 있는, 이를테면 생명의 설계도와도 같은 것이다. 통상 23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번부터 22번에 이르는 상염색체여성의 X, 남성의 Y와 같은 성염색체가 번호별로 정해져 있어서 순번에 따라 늘어놓을 수 있다. 그러나 오우치의 염색체는 어느 것이 몇 번 염색체인지 도저히 식별하기 어려웠다. 순번에 맞게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잘린 채 다른 염색체에 달라붙은 것도 있었다.
염색체가 산산이 흩어졌다는 건 앞으로 새로운 세포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뜻이었다.
피폭한 순간, 오우치의 몸은 설계도를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P. 59~60)

정식 제목은 <83일- 어느 방사선 피폭 환자 치료의 기록>. 원제는 '썩어들어간 목숨:피폭치료 83일간의 기록'이다. 영어판 제목은 '느린 죽음: 83일간의 방사선 장애(A Slow Death: 83 Days of Radiation Sickness)'.

도카이 촌 방사능 누출사고의 최대 피해자인 오우치 히사시(大內久)의 치료기록을 바탕으로 2002년에 쓰인 책이다.[2] 이외에도 같은 사고의 피해자인 시노하라 마사토(篠原理人)의 치료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서술하고 있다. 또한 치료하는 과정에서 의료진이 겪었던 심정에 대해서도 잘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NHK ‘도카이무라 임계사고’ 취재반. 이들이 만든 다큐멘터리로 2001년 5월에 방영된 NHK 스페셜 <피폭 치료 83일간의 기록―도카이무라 임계사고>(영상, 영상파일:유튜브 아이콘.svg)를 원작으로 정리한 책이 이것이다. 이 다큐는 제42회 몬테카를로 국제 텔레비전 페스티벌 골드님프상(최우수상)을 수상했다. 번역자는 신정원, 한국판 출판사는 뿌리와이파리다. 취재반 중 이와모토 히로시(岩本裕)는 집필 당시 NHK보도국 과학·문화부 데스크 기자였다.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해설위원을 맡기도 했다. 이후엔 아시아독립영화포럼(AFIC) 회장을 지내는 등 의료·문화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원자력 방재 정책에서 인명은 심각하게 경시당하며 현장에 있는 사람으로서 분노를 느낀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책 중앙 빳빳한 종이 부분에는 실제 사진이 있으므로 볼 때 유의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인 오우치 히사시의 모습인데, 방사선 피폭으로 온 몸이 무너져내리는 끔찍한 모습들이기 때문이다.[3]

치료기록을 날짜별로 구분해서 서술하고 있다.

2. 의료진들은 왜?

사실 사고 피해자인 오우치와 시노하라는 사실상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오우치 본인도 치료 과정에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그만해라, 집에 가고 싶다, 난 모르모트가 아니다"라고 울부짖었다. 이 사건을 접한 이들 중에서는 피해자들을 치료하려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수집하려고, 실험과 연구를 하기 위해서 그 사람들을 그렇게 고통스럽기만 하도록 억지로 살려둔 것이 아니냐는 의심스러운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다만 이 책을 직접 보면 이런 생각은 오해라는 걸 알 수 있다. 의료진 본인들도 정말 자신들이 하는 것이 치료가 맞는지, 살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이렇게 조치를 취해 봤자 결국 고통만 연장시키는 무의미한 것이 아닌지에 대해 심각한 자괴감에 빠지고 미칠 듯이 고뇌하였다고 고백하기 때문. 결코 실험대상을 대하는 눈으로 환자들을 보지 않았다.[4] 난 모르모트가 아니라는 말에 의료진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며 희망을 놓지 않는 오우치의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포기하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평생 잊히지 않고 해결되지 못할 고민이다"라고 말한 간호사도 있다.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환자라는 사실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이렇듯 흔히 마주하기 어려운 환자를 진료하는 데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의사에게 귀중한 경험이라며 격려하는 사람도 주변에 있었다. 하지만 야마구치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가리켜 의료라 할 수 있는지,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이 과연 오우치를 위하는 것인지를 줄곧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눈앞의 오우치의 상태를 받아들이는 것이 고작이었다.(중략)
야마구치는 지금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실제로 누구의 행복이나 기쁨으로 이어질지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오래 살 여지가 지극히 적은 환자다. 누가 봐도 분명한 사실이었다. 살아날 가망이 매우 낮은 상황에서, 환자의 모습은 나날이 무참하게 변해간다. 그리고 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의약품, 혈액을 포함한 의료자원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하는 처치는 환자에게 고통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의료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 이 상황에, 이 치료에, 어디까지 관여할 수 있으며, 또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가.
나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져버린 오우치를 간호하면서 충격을 받았다.(중략)어쩌면 '치료'는 명분일 뿐, 오우치는 지금 상태를 유지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오우치 씨는 이러고 있기 싫을 거야.'
나와는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낫기만 한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울 텐데....이런 상태를 오래오래 견디도록 하는 건 오우치 씨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리라고 생각했어요."
도저히 오우치의 증상이 좋아지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진통제 같은 약을 써가면서까지 힘들기 짝이 없는 치료를 받게 해야 하는 걸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하나구치 자신도 괴로워졌다.
(중략)"여기에 있는 사람은 무엇일까. '누구'냐는 물음이 아니에요. '무엇'일까 싶은 거예요. 몸은 있어요. 그것도 깨끗하고 상처 하나 없는 몸이 아닌, 잔뜩 너덜너덜해진 몸이요. 우리 간호사들은 이 몸을 유지하기 위해, 건조해질지 모르는 각막을 유지하기 위해, 떨어져나갈 것 같은 피부를 덮어씌우기 위해, 온갖 처치를 계속해서 해야만 했습니다. 대체 무얼 위해 이 일들을 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도요. '나는 딱히 각막을 보호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오우치 씨를 지키려는 거다.'라고 여기지 않고서는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처치투성이였어요. 예전의 오우치 씨를 떠올려야만 당시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스즈키 또한 피폭 의료 전문가 입장에서 이 시기가 가장 괴로웠다고 한다.
"지금껏 써보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 치료할 것인가, 아니면 어느 지점에서 물러나야 하는가. 마에카와 교수는 제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치료를 그만둔다는 것은 곧 환자를 그대로 방치해버리는 셈이 됩니다. 의사는 신이 아니잖습니까. 환자의 상태가 불을 보듯 뻔하게 악화하리라고 예상되는 선택은, 저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습니다."
마에카와에게 또 하나의 버팀목이 되어준 것은 오우치의 가족이었다.
(중략)피폭한 지 50일이 지난 오우치의 상태에 대해, 마에카와는 "그 어떤 말도 오우치 씨의 그 모습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가볍다고밖에 말할 도리가 없었습니다."라고 회상한다.
(중략)"가족들은 포기하려는 마음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분들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인턴인 야마구치 가즈마사는 오우치에게 엄청난 양의 수혈을 하면서, 자신이 어떤 의사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 더욱더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오우치는 이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야마구치에게는 치료 행위가 지금까지보다도 더 쓰라리게 다가왔다.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싶어서 의사를 지망했는데, 지금의 치료로 대체 누가 기뻐할까?
그러나 업무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렇게나 깔끔히 해주시다니......"
야마구치로서는, 얼굴에 감겨 있는 붕대를 갈아주었을 때 오우치의 가족이 건네는 이 한마디에 의사로서의 기쁨을 있는 힘껏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다였다.
야마구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중략)"응급의료 분야에 있으면 늘, 앞으로 살날이 길지 않다고 진단받은 환자를 어디까지 치료해야 하는가, 환자의 운명에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저는 오우치 씨의 치료에 3개월가량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렇다할 답은 얻지 못했습니다."
살 가망이 없는 환자의 '생'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어요.
지금까지는 치료를 해도 고통만 느껴지겠지 싶은 환자를 보면, 치료를 한다 한들 환자가 고통받는 시간만 늘릴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치료 따위 그만두고 어서 빨리 편안하게 쉬고 싶어 하지 않을까, 마음 한구석에서 그렇게 여겼지요.
하지만, 오우치 씨를 만나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더는 고통받지 않고 편안히 죽고 싶다고 생각하는 환자는 없다고.
(중략)의식도 없고 상태도 좋지 않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도 겨우겨우 연명만 함으로써 '생명의 질'이 문제가 되는 환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환자는 살고 싶어한다고, 더 힘을 내서 병과 맞서 싸우려고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환자의 그와 같은 마음이 드러나 있는 한, 그 사람은 살아 있는 걸 거예요. 어떠한 상황이라 해도요.
간호사 호소카와 미카
오우치 씨에게 했던 치료의 의미를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오우치 씨의 마음을 알 수가 없으니까요.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갖은 정성을 다해 치료에 치료를 거듭했지만,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 역시 결국 오우치 씨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었던 건 아닌지....돌이켜보아도 모르겠어요.
오우치 씨 본인은 어떤 마음이었는지, 이젠 영원히 알 수 없잖아요. 제가 해온 일들에 대한 후회와 죄악감까지 느끼곤 해요.
어쩌면 오우치 씨는 괴롭지 않았을까, 그런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싶지는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 오우치 씨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우치 씨의 고통과 괴로움 따위 조금도 알지 못하는 타인을 위해 제가 오우치 씨를 살리는 일을 도운 것 같다는, 굉장히 무서운 생각까지 듭니다.
끔찍이도 가족을 생각했던 오우치 씨였으니 가족을 위해 견디고 이겨내려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만 같아요.
저 또한 오우치 씨를 억지로 살아 있게 만든 원인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평생 죄의식을 느낄 것 같고요.
치료팀의 일원으로서 죄악감이라는 표현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답을 찾지 못했어요.
오우치 씨가 그 답을 알려주면 좋겠습니다.
오우치 씨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한, 제가 죽 해왔던 일이 과연 옳았던 건지, 오우치 씨에게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짐을 억지로 짊어지게 한 건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어느 쪽이라도 좋으니, 오우치 씨가 그 답을 들려주면 좋겠어요.
'지독하게 싫었어! 아주 괴로웠다구!'라며 화내도 좋아요. 딱히 고마웠다는 감사 인사 같은 거 받지 않아도 좋아요. 불같이 화를 내도 좋으니까, 오우치 씨가 뭐라도 답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요.
평생, 나이를 더 먹어도.
오우치 씨가 들려주지 않는 한....
간호사 하나구치 마키

안락사 문서에 나오듯이, 더 이상 치료의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그래도 계속 치료를 시도해야 하는지, 아니면 치료를 중단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의료인 스스로도 명쾌하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매우 어려운 문제다.

3. 목차

4. 여담



[1] 담당 의사들 중의 한 사람인 혈액종양내과 전문의(당시 경력 20년) 히라이 히사마루(平井久丸; 1952 ~ 2003)를 말한다. 조혈모세포 이식 분야에서 일본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였다. 2003년 8월 심근경색으로 사망.[2] 이후 2006년 출판사를 바꿔 문고판으로 재출간되었다.[3] 얼굴이나 전신 사진은 없다. 팔과 대장의 변화를 관찰한 부분에서 실제 사진이 사용되었다. 다만 사람에 따라 보기에 혐오스러울 수 있으므로 열람 시 주의를 요한다.[4] 정신적 안정에 도움이 되기 위해 늘 애써 긍정적인 위로와 격려의 말을 했고, 환자의 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의식이 있을지 어떨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많은 음악을 병실에 쭉 틀어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