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Arcaea/스토리
스토리 | |
Act I Creation | Act II Catastroph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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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rcaea 스토리의 Act I: Creation의 첫 번째 파트를 기록한 문서.2. Main Story
2.1. Arcaea
2.1.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0-1 | Arcaea-1 | inkar-usi 클리어 | ||
0-2 | Arcaea-2 | Grimheart 클리어 | ||
0-3 | Arcaea-3 | Shades of Light in a Transcendent Realm 클리어 |
2.1.2. Arcaea
=====# 0-1 #=====—그리고 그들은 잠에 들었다.
...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끝을 맺고,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살아남아 되풀이된다.
하지만, 글로 쓰이지 않은 이야기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듣지 못하지만, 줄곧 전해지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은, 기억을 통해 전해진다.
기억...
기억에는 분별이 없다.
한 사람의 기억이든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기억이든 더럽혀지지 않은 채 형태를 이룬다.
순수하고, 비극적이고, 경이로운 이야기들을 기억은 그대로 간직한다. 기록은 잊을지라도 기억은 잊지 않는다.
그렇게 기억으로만 전해진 이야기들,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결국 바스라져 사라져간다.
그렇게 잊힌 것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몰락과 슬픔과 잠깐의 달콤함, 그 모든 걸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고민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기억의 보관소는 멈추지 않고 커져간다.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기억의 보관소에서 몇 줄기의 실이 풀려나왔다.
두 소녀의 인생에 걸친 운명의 실.
무채색으로 빛나는, 더럽혀지지 않은 이상.
빛과 대립의 실...
...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끝을 맺고,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살아남아 되풀이된다.
하지만, 글로 쓰이지 않은 이야기들.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무도 듣지 못하지만, 줄곧 전해지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은, 기억을 통해 전해진다.
기억...
기억에는 분별이 없다.
한 사람의 기억이든 수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기억이든 더럽혀지지 않은 채 형태를 이룬다.
순수하고, 비극적이고, 경이로운 이야기들을 기억은 그대로 간직한다. 기록은 잊을지라도 기억은 잊지 않는다.
그렇게 기억으로만 전해진 이야기들,
기록되지 않은 이야기들은 결국 바스라져 사라져간다.
그렇게 잊힌 것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몰락과 슬픔과 잠깐의 달콤함, 그 모든 걸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그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고민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기억의 보관소는 멈추지 않고 커져간다.
어느 날, 어느 장소에서...
기억의 보관소에서 몇 줄기의 실이 풀려나왔다.
두 소녀의 인생에 걸친 운명의 실.
무채색으로 빛나는, 더럽혀지지 않은 이상.
빛과 대립의 실...
=====# 0-2 #=====
영업이 시작되려면 아직 몇 시간은 남은 카페에, 한 소녀가 굽은 등을 하고 앉아있다.
잔에서 올라오는 김에 유리창이 뿌옇게 서린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포착되었다.
한 남자가 검을 뽑는다. 그 눈에는 불타는 마을이 비춰지고 있다. 불을 붙인 장본인인 산적들이 등 뒤에서 웃으며 남자를 쳐다본다.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남자는 뒤로 돌아 검을 치켜올려...
꿰메였다.
엘레멘툼을 공부하는 학생이 빛과 불을 엮어 웃긴 장면을 엮어낸다.
고양이와 개의 귀를 한 친구들이 떠들썩하게 웃는다. 그 장면은 또 다른 친구가 실수로...
결정화되었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기억들이 결정화되었다. 수백, 수천개의...
수천개의 기억 조각들이 끝나지 않는 낮의 하늘을 수놓는다.
공중을 가로지르는 빛의 바람. 조각의 강.
이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이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법칙 따위 없이 무작위하게 날아다니는 걸지도 모른다.
어떤 조각들은 다른 조각들과는 달리 한 곳에 줄곧 머물러 있거나,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움직인다. 어느 쪽이든, 이 세계를 정의하는 것은 "유리"다.
하늘에 자리잡은 것은 오로지 구름. 그 위로부터 비치는 빛이 모든 것에 내려앉는다.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눈이 부시다. 억지로 만들어 지나치게 밝은 미소처럼.
그 밑으로는 대지가 펼쳐져 있다. 절반은 텅 빈 평원이며, 나머지 절반은 끝없는 구조물과 산맥이 차지하고 있다.
무채색의 구조물, 무채색의 땅, 이것들은 어째서 존재하는가?
“장소”는 기억과 떼어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가?
눈물을 흘린 장소, 손을 잡았던 장소...
그대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탑과 벽, 이 건물과 성들은 기억을 기념하기 위해서만 세워진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에 그런 시적인 낭만은 없다.
분명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긴 하나, 그건 전혀 심오한 것이 아니다.
존재 이유 그 자체...
그대가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 필요한, 너무나도 단순한 무언가...
잔에서 올라오는 김에 유리창이 뿌옇게 서린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포착되었다.
한 남자가 검을 뽑는다. 그 눈에는 불타는 마을이 비춰지고 있다. 불을 붙인 장본인인 산적들이 등 뒤에서 웃으며 남자를 쳐다본다.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남자는 뒤로 돌아 검을 치켜올려...
꿰메였다.
엘레멘툼을 공부하는 학생이 빛과 불을 엮어 웃긴 장면을 엮어낸다.
고양이와 개의 귀를 한 친구들이 떠들썩하게 웃는다. 그 장면은 또 다른 친구가 실수로...
결정화되었다.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기억들이 결정화되었다. 수백, 수천개의...
수천개의 기억 조각들이 끝나지 않는 낮의 하늘을 수놓는다.
공중을 가로지르는 빛의 바람. 조각의 강.
이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이 어떤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법칙 따위 없이 무작위하게 날아다니는 걸지도 모른다.
어떤 조각들은 다른 조각들과는 달리 한 곳에 줄곧 머물러 있거나,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움직인다. 어느 쪽이든, 이 세계를 정의하는 것은 "유리"다.
하늘에 자리잡은 것은 오로지 구름. 그 위로부터 비치는 빛이 모든 것에 내려앉는다.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다.
눈이 부시다. 억지로 만들어 지나치게 밝은 미소처럼.
그 밑으로는 대지가 펼쳐져 있다. 절반은 텅 빈 평원이며, 나머지 절반은 끝없는 구조물과 산맥이 차지하고 있다.
무채색의 구조물, 무채색의 땅, 이것들은 어째서 존재하는가?
“장소”는 기억과 떼어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닌가?
눈물을 흘린 장소, 손을 잡았던 장소...
그대도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탑과 벽, 이 건물과 성들은 기억을 기념하기 위해서만 세워진 것들이 아니다.
이것들에 그런 시적인 낭만은 없다.
분명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긴 하나, 그건 전혀 심오한 것이 아니다.
존재 이유 그 자체...
그대가 생각하고 느끼기 위해 필요한, 너무나도 단순한 무언가...
=====# 0-3 #=====
또 하나의 이야기, 두 소녀의 이야기, 살아가기 위한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다.
인생을 이끌어주는 이정표 따윈 없다. 삶이 있을 뿐이다.
삶이란 눈부시게 아름다우며, 험하고 가혹하다...
그것만큼은, 두 소녀가 동감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것을 보고 소리높여 울고 싶었던 적이 있는가?
억울함에 눈물을 흘려본 경험은 분명 있으리라.
눈을 떴을 때, 그대는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살아가는 것만으로 만족할 것인가?
세상이, 그대를 행복해지도록 내버려둘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공중을 떠다니는 기억의 조각들.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들이, 희망에 찬 두 소녀들에게 이끌린다.
지금부터 시작될 이야기가 어떻게 풀려나갈 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대를 둘러싼 기억의 풍경들.
미래의 가능성이 아닌, 이미 일어난 사건을 비추는 무한한 세계들의 풍경이다.
일어서서 응시하라.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어라.
그대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머나먼 장소에서부터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 온 세상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그들은 잠에 들었다.
한 소녀는 무너진 벽에서, 또다른 소녀는 무너진 탑에서, 그들은 고요한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깨어날 시간이다.
드물게 드리우는 그림자가 백색의 소녀를 감쌌다.
역설적이게도 밝은 빛이 흑색의 소녀를 비추었다.
소녀들의 눈이 서서히 뜨였다.
...
빛과 대립의 이야기...
그대는 알고 있나?
이 기억은 감정이 뿌린 씨앗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소중한 기억과 미움받는 기억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시간과 같이 계속해 행진한다는 것을.
축복받은 존재와 저주받은 존재의 뒤틀린 운명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은 잊혀지리라.
2.2. 히카리
2.2.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1 | Eternal-1 | 히카리로 Lumia 클리어 | ||
1-2 | Eternal-2 | 히카리로 memoryfactory.lzh 클리어 | ||
1-3 | Eternal-3 | 히카리로 PRAGMATISM 클리어 | ||
1-4 | Luminous-1 | 히카리로 Maze No. 9 클리어 | ||
1-5 | Luminous-2 | 히카리로 Halcyon 클리어 | ||
1-ZR | Luminous-3 | 히카리Zero로 Ether Strike 클리어 | ||
1-7 | Luminous Sky의 Anomaly곡 해금 | |||
1-8 | Luminous-4 | 히카리로 Luminous Sky의 Anomaly곡 클리어 | ||
1-9 | Luminous-5 | 히카리Fracture로 Luminous Sky의 Anomaly곡 클리어 | ||
V-1 | Luminous-6 | 히카리Fracture로 Vicious Labyrinth의 Anomaly곡 클리어 |
2.2.2. Eternal Core
=====# 1-1 #=====소녀가 깨어나자마자 그 눈앞에 보인 것은 유리로 된 나비의 무리였다.
‘너무 예쁘게 날아다닌다. 줄에 달려 떠있는 걸까?’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무릎 꿇고 앉아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유리 나비들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이것들은 나비가 아니라 유리 조각이었으며, 놀랍게도 스스로 떠다니고 있었다.
“아름다워라!” 소녀는 느낀 대로 외쳤다.
유리 조각은 지금 소녀가 보고 있는 이 새하얀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바다, 도시, 화염, 불빛이 차례대로 보였다.
소녀는 손을 뻗어 조각들을 흐트러뜨리며 즐겁게 웃었다.
소녀는 이 유리 조각들에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다.
사실, 이름이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조각들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조각들을 만지고, 휘두르고, 바라보며 즐겼다. 그거면 충분했다.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 왜, 어떻게.
그녀는 이 중 그 무엇도 묻지 않았다.
아르케아의 빛을 쐬고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웠다.
새로운 세계와 소녀는, 그렇게 만났다.
=====# 1-2 #=====
하지만 이윽고 의문은 찾아왔다.
소녀는 유리 조각의 소용돌이 가운데에 서서 자신에게 물었다.
“이 조각들의 정체는 대체 뭘까?”
어디론가 통하는 관문일까? 창문일까? 아니면 기억일까?
기억. 마지막으로 떠오른 그 단어가 뇌리를 스쳐 소녀는 그게 답이라고 느꼈다.
“기억이구나.”라고 조용히 속삭였고, 그렇게 의문은 끝났다.
어째선지 이 장소는 기억들로 가득했다. 어떤 사람의 기억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리 조각들은 소녀를 따라다녔다.
손에 잡히진 않았지만, 조각들은 그녀의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소녀는 조각을 수집해보기로 했다.
한 조각, 또 한 조각씩.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소녀는 유리 조각의 소용돌이 가운데에 서서 자신에게 물었다.
“이 조각들의 정체는 대체 뭘까?”
어디론가 통하는 관문일까? 창문일까? 아니면 기억일까?
기억. 마지막으로 떠오른 그 단어가 뇌리를 스쳐 소녀는 그게 답이라고 느꼈다.
“기억이구나.”라고 조용히 속삭였고, 그렇게 의문은 끝났다.
어째선지 이 장소는 기억들로 가득했다. 어떤 사람의 기억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리 조각들은 소녀를 따라다녔다.
손에 잡히진 않았지만, 조각들은 그녀의 곁을 벗어나지 않았다.
소녀는 조각을 수집해보기로 했다.
한 조각, 또 한 조각씩.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 1-3 #=====
소녀에겐 시계가 없었으므로, 자기가 며칠, 몇 시간을 걸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단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었다.
기억은 아름답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였다. 기억이란 정확하지 않고 시간에 따라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은 과거를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생생한 방법이기도 하다. 달콤한 기억이든 씁쓸한 기억이든, 소녀는 기억에게서 큰 매력을 느꼈다.
소녀는 이 세계와는 다른 장소와 사람들을 비추는 기억들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즐기기로 했다.
이 낯설고 삭막한 세상에서 아르케아는 반짝거리며 빛날 뿐만 아니라, 즐거운 기억을 보여준다.
소녀가 아르케아를 좋아하게 되기란 시간문제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하늘 높이 뻗은 채, 소녀가 온 세계의 기억을 데리고 부서진 길을 걸어갔다.
추하고, 아름다운 세계의 기억들을 데리고서...
“즐거워라...”
소녀가 숨을 내뱉고 미소를 지었다. 평온하다. 어쩌면 지나치게 평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심 따위는 없었다.
이 단순하고 행복한 세계는 계속해서 단순하고 행복하게 있기만 하면 된다.
다만 그뿐이다.
다만 단 하나, 알게 된 것이 있었다.
기억은 아름답다는 것, 그것만은 확실하였다. 기억이란 정확하지 않고 시간에 따라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기억은 과거를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생생한 방법이기도 하다. 달콤한 기억이든 씁쓸한 기억이든, 소녀는 기억에게서 큰 매력을 느꼈다.
소녀는 이 세계와는 다른 장소와 사람들을 비추는 기억들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즐기기로 했다.
이 낯설고 삭막한 세상에서 아르케아는 반짝거리며 빛날 뿐만 아니라, 즐거운 기억을 보여준다.
소녀가 아르케아를 좋아하게 되기란 시간문제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손을 하늘 높이 뻗은 채, 소녀가 온 세계의 기억을 데리고 부서진 길을 걸어갔다.
추하고, 아름다운 세계의 기억들을 데리고서...
“즐거워라...”
소녀가 숨을 내뱉고 미소를 지었다. 평온하다. 어쩌면 지나치게 평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심 따위는 없었다.
이 단순하고 행복한 세계는 계속해서 단순하고 행복하게 있기만 하면 된다.
다만 그뿐이다.
2.2.3. Luminous Sky
=====# 1-4 #=====행복한 풍경. 오랜 시간 동안 소녀는 이 세계를 여행하며 다양한 것들을 찾고 감상했다.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이끌고 다니던 유리 조각의 무리는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이 되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저 휘황찬란한 하늘은 언제나 반짝거리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소녀의 주변엔 즐거움과 행복만이 가득해, 세계가 마치 천국과도 같았다.
소녀는 한때 저택으로 이어졌을 나선 계단을 깡충거리며 내려갔다. 저택의 벽은 모두 무너져 기억의 조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소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였다.
그녀가 뛰어올라 기억의 조각들을 흩뜨리자 아르케아는 공중으로 떠올라 하늘과 하나가 되었다.
소녀는 그것들이 발하는 빛을 온몸으로 쐬며 즐겼다. 황홀했다. 기운찬 웃음이 나왔다.
꽃, 입맞춤, 사랑, 탄생의 기억들.
강처럼 흐르는 유리의 조각들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광경을 소녀의 눈에 비춘 후 다른 조각들과 하나가 되었다. 수없이 본 광경이지만 질리지 않았다.
소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리 조각들이 하늘에 스며들어 가자, 그 빛깔은 더욱 생생해졌다. 만족하며 미소를 짓고 길을 나섰다. 언제나 그랬듯, 행동의 결과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은 채로.
오랜 시간 동안 그녀가 이끌고 다니던 유리 조각의 무리는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이 되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저 휘황찬란한 하늘은 언제나 반짝거리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소녀의 주변엔 즐거움과 행복만이 가득해, 세계가 마치 천국과도 같았다.
소녀는 한때 저택으로 이어졌을 나선 계단을 깡충거리며 내려갔다. 저택의 벽은 모두 무너져 기억의 조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소녀에겐 더할 나위 없는 놀이터였다.
그녀가 뛰어올라 기억의 조각들을 흩뜨리자 아르케아는 공중으로 떠올라 하늘과 하나가 되었다.
소녀는 그것들이 발하는 빛을 온몸으로 쐬며 즐겼다. 황홀했다. 기운찬 웃음이 나왔다.
꽃, 입맞춤, 사랑, 탄생의 기억들.
강처럼 흐르는 유리의 조각들이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광경을 소녀의 눈에 비춘 후 다른 조각들과 하나가 되었다. 수없이 본 광경이지만 질리지 않았다.
소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리 조각들이 하늘에 스며들어 가자, 그 빛깔은 더욱 생생해졌다. 만족하며 미소를 짓고 길을 나섰다. 언제나 그랬듯, 행동의 결과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은 채로.
=====# 1-5 #=====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다. 소녀는 그 말을 몰랐거나, 알아도 신경쓰지 않았다.
소녀는 한때 공연장이던 곳에 도착했다. 이 장소는 어떤 거대한 힘의 작용인지 완벽하게 두 쪽으로 나누어져 있어 예전에 지녔을 장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예술의 무덤에도 기억의 조각이 떠다니고 있었다.
춤의 기억, 공연의 기억, 희망의 기억, 승리의 기억.
소녀의 입이 움찔거렸다. 지루해진 걸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그녀가 손을 들자 아르케아가 모여들어 부드럽게 손바닥 위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은퇴하는 악단의 마지막 외침을 들은 게 몇 번째지? 형제가 기쁨에 얼싸안는 모습을 본 건? 사랑을 너무나 많이 봐버린 소녀는, 잊힌 옛 세계에선 사랑은 당연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억을 놓아주면서도 소녀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조각들이 공중으로 솟아올라 소녀가 만든 하늘에 합류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 조각을 모으기 시작할 때보다 훨씬 밝아졌다. 날이면 날마다, 점점 밝아지는 듯했다...
여태까지 며칠이 지난 거지? 소녀는 그 생각에 표정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휘저었다.
조각을 더 모으면 된다. 그러면 이 공허함이 채워질 것이다.
소녀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고 다시 여행을 떠났다.
뒤를 따라오는 아르케아를 떨쳐낼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나는 자기 자신을 애써 무시한 채로.
소녀는 한때 공연장이던 곳에 도착했다. 이 장소는 어떤 거대한 힘의 작용인지 완벽하게 두 쪽으로 나누어져 있어 예전에 지녔을 장엄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예술의 무덤에도 기억의 조각이 떠다니고 있었다.
춤의 기억, 공연의 기억, 희망의 기억, 승리의 기억.
소녀의 입이 움찔거렸다. 지루해진 걸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그녀가 손을 들자 아르케아가 모여들어 부드럽게 손바닥 위와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은퇴하는 악단의 마지막 외침을 들은 게 몇 번째지? 형제가 기쁨에 얼싸안는 모습을 본 건? 사랑을 너무나 많이 봐버린 소녀는, 잊힌 옛 세계에선 사랑은 당연했던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억을 놓아주면서도 소녀는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조각들이 공중으로 솟아올라 소녀가 만든 하늘에 합류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 조각을 모으기 시작할 때보다 훨씬 밝아졌다. 날이면 날마다, 점점 밝아지는 듯했다...
여태까지 며칠이 지난 거지? 소녀는 그 생각에 표정을 찡그렸다가 고개를 휘저었다.
조각을 더 모으면 된다. 그러면 이 공허함이 채워질 것이다.
소녀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고 다시 여행을 떠났다.
뒤를 따라오는 아르케아를 떨쳐낼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나는 자기 자신을 애써 무시한 채로.
=====# 1-ZR #=====
“천국” 또한 일종의 지옥인 것일까.
게으른 평화와 무질서한 쾌락의 대가는 열정의 죽음이다.
무한히 행복함만을 경험한다면, 이윽고 행복과 평범함 사이의 경계가 흐려져 무엇이 행복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고, 행복해질 목적조차 잃게 된다.
이제 그 무엇도 목적이나 의미가 없었다. 소녀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들이다.
하늘이 눈이 멀 정도로 밝았다.
소녀는 자기가 걷는지 멈춰있는지조차 몰랐다.
안다고 한들 아무 의미 없었다. 그녀의 모든 신경은 자신이 만든 하늘에 쏠려있었다. 그러나 저 하늘을 이루는 각자의 기억은 구분해낼 수 없었다.
흐릿하게 일렁이는 아지랑이 사이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이성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정신이 마모되어가는 소녀는 주변이 점점 종말로 침식되어가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숨막힐 정도로 행복으로 가득찬 새장을 만들어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소녀에게는 이에 절망할 자아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하늘이 밝아질수록 소녀의 정신은 더욱 세차게 무너져내렸다.
앞으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소녀는 기도하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광휘와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이 펼쳐진 하늘.
그곳에서 찬란히 빛나는 기억이 내려와 그녀를 덮쳤다.
소녀의 정신이 새하얀 백지가 되었다.
아무 의미 없이, 빛이 씻겨져 사라졌다.
아무 의미 없이, 시간이 지났다.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녀. 영혼을 잃어버린 채, 그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 1-7 #=====
소녀는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치켜들고 있었다. 이윽고 소녀의 창조물은 그녀를 망각의 빛으로 집어삼킬 것이다.
머리 위에서 저것이 보고 있기에 고통스러운 부드러운 빛을 발하며 박동했다. 마음을 잃은 소녀는 창조물이 자신을 삼키도록 두었다.
그 순간, 드넓은 공허에 등장한 무언가가 소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주변과 확실히 구별되는 이질적인 형태가 시선을 순식간에 잡아챘다. 단 한 개의, 아주 특별한 유리 조각. 그 옅은 붉은색은 다른 조각들과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현실인지, 소녀의 정신이 보여주는 환상인지 확실치 않지만, 그 강렬한 빛에 주변의 색이 바래는 듯했다.
소녀가 생각했다. 세상의 색이 점점 진해졌다.
소녀가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오래동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소녀의 하늘이 일렁이며 뒤틀리더니 곧 표면에 금이 생겼다.
이 세상을 덮은 하늘이 단 하나의 새롭게 생겨난 기억을 중심으로 일그러지며 소용돌이쳤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기억, 저 기억이 창조물로부터 벗어나자, 하늘이 무너졌다.
격렬하면서도 고요하게, 하늘이 무너져내리며 반짝이는 빛으로 공간을 채웠다.
실로 장관이었으나, 소녀의 시선은 붉은 조각에만 꽂혀있었다.
조각은 행복한 기억의 비를 뚫고 소녀의 손으로 사뿐히 내려왔다.
이것 또한 행복한 기억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소녀 자신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내가 언제 이런...”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은 탓에 목소리가 갈라져있었다.
그녀의 손에 내려앉은 것은 영(0)으로부터 태어났던 기억의 조각. 그것에 비치는 것은 소녀가 일어났을 때의 기억, 유리 조각들 사이에서 춤을 추던 기억, 유리의 세계를 여행하던 기억, 행복 그 자체의 기억이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소녀는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행복을 다시 찾아냈다.
머리 위에서 저것이 보고 있기에 고통스러운 부드러운 빛을 발하며 박동했다. 마음을 잃은 소녀는 창조물이 자신을 삼키도록 두었다.
그 순간, 드넓은 공허에 등장한 무언가가 소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주변과 확실히 구별되는 이질적인 형태가 시선을 순식간에 잡아챘다. 단 한 개의, 아주 특별한 유리 조각. 그 옅은 붉은색은 다른 조각들과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현실인지, 소녀의 정신이 보여주는 환상인지 확실치 않지만, 그 강렬한 빛에 주변의 색이 바래는 듯했다.
소녀가 생각했다. 세상의 색이 점점 진해졌다.
소녀가 생각했다. 그리고 아주 오래동안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소녀의 하늘이 일렁이며 뒤틀리더니 곧 표면에 금이 생겼다.
이 세상을 덮은 하늘이 단 하나의 새롭게 생겨난 기억을 중심으로 일그러지며 소용돌이쳤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기억, 저 기억이 창조물로부터 벗어나자, 하늘이 무너졌다.
격렬하면서도 고요하게, 하늘이 무너져내리며 반짝이는 빛으로 공간을 채웠다.
실로 장관이었으나, 소녀의 시선은 붉은 조각에만 꽂혀있었다.
조각은 행복한 기억의 비를 뚫고 소녀의 손으로 사뿐히 내려왔다.
이것 또한 행복한 기억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소녀 자신의 기억이라는 것이다.
“내가 언제 이런...”
오랜 시간 말을 하지 않은 탓에 목소리가 갈라져있었다.
그녀의 손에 내려앉은 것은 영(0)으로부터 태어났던 기억의 조각. 그것에 비치는 것은 소녀가 일어났을 때의 기억, 유리 조각들 사이에서 춤을 추던 기억, 유리의 세계를 여행하던 기억, 행복 그 자체의 기억이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른다.
소녀는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행복을 다시 찾아냈다.
=====# 1-8 #=====
유리의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지며 한때 존재했던 세계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 중심에 서있는 소녀는 새로운 기억, 지금 존재하는 세계의 기억을 보고 있다.
눈물이 흘러 떨어졌다. 하지만 소녀는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녀의 정신은 아직 회복 중이었고, 자신이 여태껏 해온 일이 허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괴로워했으며, 열정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조각은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했던 소녀가 자신이 파놓은 함정으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아를 잃으리라는 결말을 알면서도, 소녀는 또다시 행복해지기 위해 여행을 나설까?
조각 속에 비치고 있는 붉은 옷은 지금 소녀가 입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조각을 꽉 쥐어 붉은 선혈로 조각을 적셨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흐려지고, 반짝이는 표면에는 온기가 흐른다. 소녀는 이전보다 더욱 격렬한 감정을 느꼈다.
그 감정은 너무나도 강한 후회였다.
조각 속 소녀는 자신감 있게, 그러나 아무 의미 없이 여정을 계속했다. 아르케아를 모아 아름다움을 즐기며 목적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스스로 만든 눈부신 감옥에 갇혀 괴로울 정도로 지루한 쾌락의 삶을 살았다. 그 행위에 아무런 의미는 없었다. 그 때문에 소녀는 자아를 잃을 뻔했다.
왜 그랬는지, 소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행복해지기 위함은 아니었다. 소녀는 무릎을 꿇고 기억을 가슴에 꼭 안은 채 목이 메도록 울었다. 자신이 저지른 과실의 무게를 이제야 깨달았다.
너무나 많은 사랑과 생명으로 자신을 감싼 탓에 그것들을 혐오하게 되었다. 그 사실이 슬펐다.
소녀는 비탄에 잠겨 울었다. 울며 열심히 생각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 그리고 이 세계의 의미에 대해.
=====# 1-9 #=====
침묵이 세상을 메웠다.
이따금씩 옛 세계의 조각이 떨어져 이 침묵을 깼다. 다행히도 괴로움은 멎어들었다. 소녀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그저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 사이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눈물이 말라 뺨에 자국을 만들었고, 손에 흐르던 피도 말라 있었다.
두려움, 걱정, 후회는 끝났다. 이제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그녀는 무지한 탓에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
“행복한 기억은 많을수록 좋다”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늘을 좋은 기억으로 뒤덮었다.
이 조각들이 한곳에 모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소녀는 이제서야 창조물이 자신을 집어삼키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가 계속해서 나아가려면, 목적이 필요했다.
예전에 잊어버린 질문의 답을 찾아야 했다. 이 세계엔 무슨 의미가 있으며, 자신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왜 행복한 기억들은 자신 주위로 모이면서, 괴로운 기억들은 도망칠까? 나는 누구일까?
소녀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비틀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소녀가 움직이자 주변의 아르케아도 함께 움직였다.
소녀는 그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올리자 아르케아가 손을 따라왔다. 무언가 다르다. 아르케아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무언가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아르케아는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새장에 갇힐 일은 없을 것이다. 소녀는 피에 젖은 손으로 마른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자아를 되돌려준 기억의 조각들이 뒤를 따라오도록 했다.
과거의 모습은 기억으로 묻어버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이 기묘한 세상과 마주하리라.
그리고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세상의 의미를 찾아내리라.
소녀는 그렇게 맹세했다. 그렇게 확신했다.
이따금씩 옛 세계의 조각이 떨어져 이 침묵을 깼다. 다행히도 괴로움은 멎어들었다. 소녀는 더이상 울지 않았다.
그저 반짝이는 유리 조각들 사이에 앉아 세상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눈물이 말라 뺨에 자국을 만들었고, 손에 흐르던 피도 말라 있었다.
두려움, 걱정, 후회는 끝났다. 이제 앞으로 나아갈 때였다.
그녀는 무지한 탓에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다.
“행복한 기억은 많을수록 좋다”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늘을 좋은 기억으로 뒤덮었다.
이 조각들이 한곳에 모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소녀는 이제서야 창조물이 자신을 집어삼키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가 계속해서 나아가려면, 목적이 필요했다.
예전에 잊어버린 질문의 답을 찾아야 했다. 이 세계엔 무슨 의미가 있으며, 자신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왜 행복한 기억들은 자신 주위로 모이면서, 괴로운 기억들은 도망칠까? 나는 누구일까?
소녀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비틀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소녀가 움직이자 주변의 아르케아도 함께 움직였다.
소녀는 그 유리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손을 들어 올리자 아르케아가 손을 따라왔다. 무언가 다르다. 아르케아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무언가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녀가 원하지 않으면 아르케아는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 새장에 갇힐 일은 없을 것이다. 소녀는 피에 젖은 손으로 마른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자아를 되돌려준 기억의 조각들이 뒤를 따라오도록 했다.
과거의 모습은 기억으로 묻어버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이 기묘한 세상과 마주하리라.
그리고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세상의 의미를 찾아내리라.
소녀는 그렇게 맹세했다. 그렇게 확신했다.
2.3. 타이리츠
2.3.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2-1 | Eternal-1 | 타이리츠로 cry of viyella 클리어 | ||
2-2 | Eternal-2 | 타이리츠로 Essence of Twilight 클리어 | ||
2-3 | Eternal-3 | 타이리츠로 Sheriruth 클리어 | ||
2-4 | Vicious-1 | 타이리츠로 Iconoclast 클리어 | ||
2-5 | Vicious-2 | 타이리츠로 conflict 클리어 | ||
2-D | Vicious-3 | 타이리츠Axium으로 Axium Crisis 클리어 | ||
2-7 | Vicious Labyrinth의 Anomaly곡 해금 | |||
2-8 | Vicious-4 | 타이리츠로 Vicious Labyrinth의 Anomaly곡 클리어 | ||
2-9 | Vicious-5 | 타이리츠Grievous Lady로 Vicious Labyrinth의 Anomaly곡 클리어 | ||
V-1 | Vicious-6 | 히카리Fracture로 Vicious Labyrinth의 Anomaly곡 클리어 |
2.3.2. Eternal Core
=====# 2-1 #=====소녀가 무너진 탑에서 깨어나자마자 눈앞에 보인 것은 떠다니는 유리 조각들이었다.
조각들은 그녀를 탑 밖으로, 새하얀 세계로 인도하였다.
하얀색, 또다시 하얀색, 그리고 유리 조각으로 가득한 세계가 펼쳐졌다. 조각들은 소녀에게 이끌리는 모양이었다.
호기심이 동한 그녀는 조각들을 세심히 관찰하였다.
조각은 시시각각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달리는 기차의 창문으로 보는 바깥 풍경과 같았다.
한순간은 비, 또 다른 순간은 햇살, 그리고 죽음⋯ 소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러났다.
조각들은 소녀를 따라왔으나, 손을 뻗어 조각을 깨부수려 하면 도망치듯 물러났다.
소녀가 찡그린 표정 그대로 창백한 하늘을 바라보자, 이윽고 자신도 모르게 그 표정이 풀어졌다.
입을 벌렸으나. 놀란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유리다. 머리 위로 격렬히 움직이며 반짝이는 저것은 유리의 폭풍이다.
소녀는 하늘을 바라본 것을 후회했다. 폭풍이 그녀를 맞이하려는 듯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2-2 #=====
소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묘사하기란 쉽지 않다.
유리 조각들은 깨지지도, 살을 베지도, 얼굴을 비추지도 않고 그저 강렬한 바람에 실린 듯 재빠르게 휘몰아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잡고 서서 소용돌이를 자세히 관찰했다.
이것들은... 기억...? 추악한 세계의 기억...
“이게 뭐야...?!“ 소녀가 손을 뻗었다. “이건⋯!”
고통, 배신, 질투의 기억.
손을 뻗자 한 조각이 멈춰서고, 다른 조각들도 따라서 공중에 뜬 채 그대로 멈추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부...”
어둡다. 어두운 기억뿐이다. 이 조각들이 비추는 장소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마한 불빛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인, 빛이 없는 풍경이었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고 허탈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무슨 장난이지? 비극으로만 가득 찬 세상이라니...”
그 말을 속삭인 후엔, 그 얼굴에선 쓴웃음마저 사라졌다.
유리 조각들은 깨지지도, 살을 베지도, 얼굴을 비추지도 않고 그저 강렬한 바람에 실린 듯 재빠르게 휘몰아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세를 바로잡고 서서 소용돌이를 자세히 관찰했다.
이것들은... 기억...? 추악한 세계의 기억...
“이게 뭐야...?!“ 소녀가 손을 뻗었다. “이건⋯!”
고통, 배신, 질투의 기억.
손을 뻗자 한 조각이 멈춰서고, 다른 조각들도 따라서 공중에 뜬 채 그대로 멈추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부...”
어둡다. 어두운 기억뿐이다. 이 조각들이 비추는 장소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조그마한 불빛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인, 빛이 없는 풍경이었다.
소녀는 입술을 깨물고 허탈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무슨 장난이지? 비극으로만 가득 찬 세상이라니...”
그 말을 속삭인 후엔, 그 얼굴에선 쓴웃음마저 사라졌다.
=====# 2-3 #=====
소녀에겐 시계가 없었으므로, 기억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 후 정확히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지 못했다.
매우 긴 시간이 지난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가 찾는 것은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 존재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결국 몇 개를 발견하기는 했으나, 자신을 사냥개처럼 쫓아오는 것은 비참한 기억들뿐이었다.
소녀는 그 기억들이 비추는 세계를 혐오하였다.
소녀는 마치 우주와 같은 풍경, 유리 조각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서서 두 가지 가능성을 고려했다.
하나, 이 조각들이 보여주는 세계, 또는 세계들이 그 자체로 끔찍한 곳이다.
둘, 비참한 기억만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으므로, 그 말인즉...
어느 쪽이 정답이든, 그녀는 기억의 조각들을 없애버리기로 했다.
소녀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변했다.
그녀는 어두운 기억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선, 즐거워하며 그 조각들을 모았다.
“이 쓰레기 같은 기억들을 지울 수 있다면, 이 기억들이 비추는 장소들마저도 없애버릴 수 있다면...”
혼돈, 그리고 조금의 빛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들을 없앨 수 있다면,
그녀는 기뻐하며 그리 할 것이다.
매우 긴 시간이 지난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가 찾는 것은 행복한 기억이었다. 그 존재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결국 몇 개를 발견하기는 했으나, 자신을 사냥개처럼 쫓아오는 것은 비참한 기억들뿐이었다.
소녀는 그 기억들이 비추는 세계를 혐오하였다.
소녀는 마치 우주와 같은 풍경, 유리 조각의 소용돌이 그 중심에 서서 두 가지 가능성을 고려했다.
하나, 이 조각들이 보여주는 세계, 또는 세계들이 그 자체로 끔찍한 곳이다.
둘, 비참한 기억만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으므로, 그 말인즉...
어느 쪽이 정답이든, 그녀는 기억의 조각들을 없애버리기로 했다.
소녀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변했다.
그녀는 어두운 기억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선, 즐거워하며 그 조각들을 모았다.
“이 쓰레기 같은 기억들을 지울 수 있다면, 이 기억들이 비추는 장소들마저도 없애버릴 수 있다면...”
혼돈, 그리고 조금의 빛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들을 없앨 수 있다면,
그녀는 기뻐하며 그리 할 것이다.
2.3.3. Vicious Labyrinth
=====# 2-4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시점, 소녀는 자신감으로 차 있었다.
유리와 거울의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을 모았다.
목도리처럼 목 주변에 두른 유리 조각의 덩어리가 끝없이 길게 늘어져 살랑거렸다.
소녀는 폐허가 된 탑 위에 서서 미소를 지은 채 먼 곳을 내다보았다.
등 뒤로 늘어진 끔찍한 기억의 조각들이 늘어져 위협하듯 움찔댔다.
소녀는 쭉 신경 쓰였지만 직접 가보려고 하지는 않았던 장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궁처럼 보이는 건물이 하늘과 이어진 듯한 기형적인 형태의 구조물이었다.
당연하지만, 저 미궁 또한 이 세계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 당연하지만, 그녀는 미궁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추악함이 자신이 있는 곳까지 닿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자세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소녀는 자기를 따라오는 유리 조각들을 모두 없애버릴 심산이었다. 조각들을 모으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이었다.
지금은 적어도 이 추악한 기억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두었다는 데에서 안도했다. 이것들을 없애버릴 때가 왔을 때 일이 훨씬 쉬워질 테니까. 미궁은 그녀가 보아온 어느 것보다 특출나게 추했다. 소녀는 반드시 이 미궁의 조각들도 손에 넣으리라 결심했다.
미궁 주변의 땅은 아름다운 기억들이 바다처럼 파도치며 반짝이는 곳이었다. 조금 전진하자, 그 바다가 갈라지고 조각 몇 개가 목도리로 섞여 들어왔다.
소녀가 아름다운 기억들의 조각을 치우며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망설임이 마음속에서 피어났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것은 절망,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은 희망. 입술을 깨물었다.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유리와 거울의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을 모았다.
목도리처럼 목 주변에 두른 유리 조각의 덩어리가 끝없이 길게 늘어져 살랑거렸다.
소녀는 폐허가 된 탑 위에 서서 미소를 지은 채 먼 곳을 내다보았다.
등 뒤로 늘어진 끔찍한 기억의 조각들이 늘어져 위협하듯 움찔댔다.
소녀는 쭉 신경 쓰였지만 직접 가보려고 하지는 않았던 장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궁처럼 보이는 건물이 하늘과 이어진 듯한 기형적인 형태의 구조물이었다.
당연하지만, 저 미궁 또한 이 세계의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유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또 당연하지만, 그녀는 미궁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추악함이 자신이 있는 곳까지 닿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자세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소녀는 자기를 따라오는 유리 조각들을 모두 없애버릴 심산이었다. 조각들을 모으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이었다.
지금은 적어도 이 추악한 기억들을 모두 한곳에 모아두었다는 데에서 안도했다. 이것들을 없애버릴 때가 왔을 때 일이 훨씬 쉬워질 테니까. 미궁은 그녀가 보아온 어느 것보다 특출나게 추했다. 소녀는 반드시 이 미궁의 조각들도 손에 넣으리라 결심했다.
미궁 주변의 땅은 아름다운 기억들이 바다처럼 파도치며 반짝이는 곳이었다. 조금 전진하자, 그 바다가 갈라지고 조각 몇 개가 목도리로 섞여 들어왔다.
소녀가 아름다운 기억들의 조각을 치우며 길을 따라 걷는 동안 망설임이 마음속에서 피어났다. 그녀의 뒤를 따라오는 것은 절망,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것은 희망. 입술을 깨물었다.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 2-5 #=====
모든 게 다 좋았던 시절도 있었으리라.
소녀에겐 본인의 기억이 없었다. 유리의 세계에서 깨어난 후 다른 세계에 사는 다른 사람의 기억들을 본 것이 전부다.
결국, 소녀는 조각에 비추어지는 기억을 비롯해 이 세계의 어떤 것에도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생각이 흔들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추악함과 비극, 눈물과 고통, 그 사이의 작은 미소, 그리고 죽음의 기억들...
모든 게 무가치하다.
소녀가 처음 이 순수한 행복의 바다에 발을 들였을 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악으로 물든 생활을 너무 오래 지속한 나머지 단순한 선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다.
저 울퉁불퉁한 미궁의 입구를 향해 전진하며 희망의 빛에 시선이 사로잡힐 때마다, 멈추어 서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에 의문을 던졌다.
알고 싶지 않았던 답이, 이 빛과 혼돈에 파묻혀 있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소녀의 생각이 답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녀는 기형적인 미궁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기억 조각의 무리를 향해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중 꽃으로 만연한 초원을 비추는 기억들이 소녀를 에워싸며 따라왔다.
어째서 그랬는지, 이 조각들이 자신을 구원 해줄 것인지,
그 답은 소녀 자신조차도 몰랐다.소녀에겐 본인의 기억이 없었다. 유리의 세계에서 깨어난 후 다른 세계에 사는 다른 사람의 기억들을 본 것이 전부다.
결국, 소녀는 조각에 비추어지는 기억을 비롯해 이 세계의 어떤 것에도 가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 생각이 흔들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추악함과 비극, 눈물과 고통, 그 사이의 작은 미소, 그리고 죽음의 기억들...
모든 게 무가치하다.
소녀가 처음 이 순수한 행복의 바다에 발을 들였을 땐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악으로 물든 생활을 너무 오래 지속한 나머지 단순한 선의 존재조차 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다.
저 울퉁불퉁한 미궁의 입구를 향해 전진하며 희망의 빛에 시선이 사로잡힐 때마다, 멈추어 서서 자신이 아는 모든 것에 의문을 던졌다.
알고 싶지 않았던 답이, 이 빛과 혼돈에 파묻혀 있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소녀의 생각이 답에 도달하기도 전에, 소녀는 기형적인 미궁의 입구에 도착했다.
그녀는 아름다운 기억 조각의 무리를 향해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중 꽃으로 만연한 초원을 비추는 기억들이 소녀를 에워싸며 따라왔다.
어째서 그랬는지, 이 조각들이 자신을 구원 해줄 것인지,
=====# 2-D #=====
소녀에겐 자신도 모르는 이름이 있었다.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면 이 칠흑 같은 미궁까지 올 일은 없었을 것이며, 지금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혹은 어쩌면 더욱 커졌으리라.
하지만 그 이름을 몰랐기에, 소녀는 어금니를 깨물며 결심을 되새겼다. 자신을 둘러싼 빛도, 주변을 맴도는 꽃으로 가득한 초원의 풍경의 소용돌이도, 그녀를 망설이게 할 순 없었다.
소녀는 미궁으로 들어가 보이는 모든 것을 산산이 파괴하기 시작했다.
비극으로 울부짖는 벽, 공포로 가득 찬 천장, 그리고 두려움에 젖은 모서리.
소녀는 모든 것을 뜯어냈다. 이곳은 악으로 세워진 성채. 괴기한, 너무나도 괴기한 장소였다.
소녀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미궁의 벽을 오르고, 복도를 가로질렀다.
애초에 소녀가 지금의 결단을 내리게 한 것이 바로 이 미궁과 같은 역겨운 구조물이었다. 자신이 옳았다. 유리 조각과 거울은 사라져야만 한다.
한창 소녀가 미궁을 무너뜨리는 와중, 그 미소가 뒤틀렸다. 무언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이 미궁의 중심에, 그녀가 여태껏 보아왔던 그 어떤 기억보다 훨씬 끔찍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소녀를 부르고 있었다.
몸을 채우던 광기와 같은 열정이 바닥을 드러내어 행동이 느려지기 시작한 소녀의 앞에 한 기억의 조각이 나타났다.
세상의 끝을 비추는 조각이었다.
소녀는 조각 안의 세계를 응시하며, 아래에 널려있는 아름다운 세계의 기억과 아직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꽃밭 풍경의 조각들을 떠올렸다.
천장이 뜯겨나간 미궁의 벽들이 주변에 쓰러져 있었다. 검은 유리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저 멀리서 아름다운 기억들이 반짝였다.
소녀는 손가락 사이로 종말의 세계를 훔쳐보았다. 침을 삼키고 결의를 다지며, 소녀는 손을 얼굴에서 떼어내 뻗어 그 조각을 가져왔다.
미궁의 폐허를 바라보며 소녀는 강렬한 희열을 느꼈다. 앞으로 볼 기억들이 얼마나 끔찍하든 이에 비견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강해졌다. 모두 부숴버릴 것이다.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소녀는, 꾸밈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지친 웃음을 뱉으며 하늘에서 탑과 함께 강림했다.
온몸에서 힘이 흘러넘치는 소녀는 마치 영웅과 같은 결의를 지니 채, 미궁의 폐허로 만들어진 탑을 뒤로 하고, 앞으로 행진하였다.
=====# 2-7 #=====
소녀의 심장에 갑작스러운 통증이 찾아왔다.
뒷걸음치며 입을 가렸다. 당혹감에 눈이 크게 뜨였다.
거대하고 추악한 미궁의 탑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쓰러지기도 전에 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슬픈 나날의 기억들이 소녀의 주변으로 모여 망토처럼 그녀를 감쌌다. 가랑비처럼 느리게 내리던 유리 조각의 비는 거세져서 폭우가 되었다.
소녀와 함께 탑이 쓰러지고 있었다. 이렇게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음에도 소녀가 느낀 것은 공포가 아니라 혼란뿐이었다.
행복한 세계의 기억이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땅으로 소녀는 엎어졌다. 탑이 무너지며 그 바다에 커다란 파도를 가져왔다.
유리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아름답지만 동시에 추한 광경을 자아냈다. 그 폭풍 한가운데에, 소녀는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갑작스러운 고통. 혼란스러웠다. 모든 게 아팠다.
심장이 터질 듯했다.
여태껏 모아온 기억들로 이루어진 망토는 기괴한 구체가 되어 소녀를 둘러쌌다.
새하얀 세계가 사라지고 끔찍한 기억들만이 소녀의 시야를 채웠다. 소녀는 거친 숨을 내쉬며, 벌벌 떠는 몸을 가까스로 세워 유리 조각, 아르케아를 응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부서져 내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자신의 이성이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전에 보았던 종말의 세계가 서서히 그녀의 시야를 채우기 시작했다.
뒷걸음치며 입을 가렸다. 당혹감에 눈이 크게 뜨였다.
거대하고 추악한 미궁의 탑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쓰러지기도 전에 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슬픈 나날의 기억들이 소녀의 주변으로 모여 망토처럼 그녀를 감쌌다. 가랑비처럼 느리게 내리던 유리 조각의 비는 거세져서 폭우가 되었다.
소녀와 함께 탑이 쓰러지고 있었다. 이렇게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음에도 소녀가 느낀 것은 공포가 아니라 혼란뿐이었다.
행복한 세계의 기억이 바다처럼 넘실거리는 땅으로 소녀는 엎어졌다. 탑이 무너지며 그 바다에 커다란 파도를 가져왔다.
유리 조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아름답지만 동시에 추한 광경을 자아냈다. 그 폭풍 한가운데에, 소녀는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갑작스러운 고통. 혼란스러웠다. 모든 게 아팠다.
심장이 터질 듯했다.
여태껏 모아온 기억들로 이루어진 망토는 기괴한 구체가 되어 소녀를 둘러쌌다.
새하얀 세계가 사라지고 끔찍한 기억들만이 소녀의 시야를 채웠다. 소녀는 거친 숨을 내쉬며, 벌벌 떠는 몸을 가까스로 세워 유리 조각, 아르케아를 응시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부서져 내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자신의 이성이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전에 보았던 종말의 세계가 서서히 그녀의 시야를 채우기 시작했다.
=====# 2-8 #=====
소녀는 이 새하얀 폐허의 세계에서 깨어난 뒤로부터 다양한 감정을 느꼈다. 보통은 분노였으나, 그녀에겐 그 분노를 기묘한 형태의 희망으로 바꾸는 힘이 있었다.
별다른 계획이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저 이 걸음의 끝에 무언가 좋은 게 있겠거니, 하는 막연한 믿음 하나로 그녀는 여기까지 왔다.
그런 희망이 있었다. 이 혼돈이 결국 빛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겪는 이 모든 고통과 공포가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지리라 믿었다.
그렇기에, 감정에 휘둘리기 쉬웠던 소녀는 이 세계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실과 마주했을 때, 고통에 몸부림쳤다.
가장 끔찍한 운명이란 희망이 눈앞에서 부서지는 광경을 보는 것이다.
소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을 둘러싼 죽음의 조각들과 함께 세상의 끝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슬픔을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그 슬픔은 빠르게 절망으로 바뀌었다.
아르케아의 세계엔 의미가 없다. 이곳은 이미 사라진 세상의 모조품일 뿐이었다.
아르케아의 세계엔 본질이 없다. 그 본질을 비추는 거울만이 있을 뿐이었다.
가끔 볼 수 있었던 행복하고 아름다운 기억조차 결국은 과거의 것이었다. 낮이 지나고 밤이 오듯, 아름다웠던 세계는 지금 소녀의 주변을 천천히 회전하는 종말의 풍경이 되었다.
소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깨어난 뒤로부터, 여태까지 너무나 많은 것을 느꼈다.
즐거웠다. 즐거움이 소녀를 떠났다.
두려웠다. 두려움이 소녀를 떠났다.
분노도, 희망도,
슬픔과 절망조차도 소녀를 떠났다.
소녀의 눈이 검게 물들었다. 자신이 유리 조각과 공명하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둘러싼 기억의 조각들에 금이 가며 깨지기 시작한다.
그 껍데기를 깨고 일어나, 찬란한 빛을 쐬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 2-9 #=====
그 저주받을 미궁의 기억들, 그녀가 가져온 기억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아름다운 기억들이 마치 기름으로 얼룩진 바닷물처럼 뒤섞였다.
많은 기억들이 회색 덩어리로 뭉쳤고, 어떤 조각들은 바닥에서 가시처럼 솟아올랐다.
소녀는 그저 가만히 서서 조각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세기 시작했다.
기억의 가시가 눈을 찌를 뻔했을 때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조각을 셌다.
이윽고 소녀는 손가락을 들어, 몇몇 조각을 자신의 위치로 불렀다.
그녀가 생각으로 명령하자 조각들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나비의 모양을 취했다.
그 나비를 하늘로 보내 이 새하얀 세계를 관찰하도록 하였다.
그것이 다시 내려와 소녀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설명하자 소녀는 생각만으로 나비의 날개를 천천히 뜯어내, 공허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소녀는 그 오염된 바다에서 걸어 나오며, 지나간 시대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저 기둥들을 산산이 부수어버렸다.
시간이 지나 소녀는 변했다.
소녀는 더 이상 기억을 모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 목적 없이 그저 걸었다. 이따금 이 세계, 그리고 소녀 자신에 대한 정보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열정을 잃어버린 소녀에겐 의미가 없었다.
소녀는 언젠가 폐허에서 찾은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무너져내린 건물 옆을 지나고 있었다.
추악한 나날의 기억을 비추는 유리 조각이 뭉쳐 만들어진 생물체가 하늘에서 조용히 내려와 소녀의 앞에 섰다.
그 까마귀 같은 생물은 닳아빠진 칼날처럼 울퉁불퉁하며 반짝거리는 유리의 몸을 지니고 있었다.
이 생물은 소녀에게 있어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탑이 무너졌던 그날부터 소녀는 아르케아를 다루는 데에 점점 익숙해져 이런 생물까지 창조할 수 있었다.
까마귀는 이 새하얀 세계에서 소녀가 아직 가보지 못한 장소들을 이야기했다. 소녀가 눈길을 주자 까마귀는 터져나가듯 갈기갈기 찢어졌다.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 걸어갔다.
소녀는 까마귀들이 가져오는 소식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 세계엔 소녀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 까마귀들이 가져오는 소식이란 그게 전부였다.
소녀는 그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직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만나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다.
가슴속에 가득 찬 불만. 그것을 살아있는 것에 쏟고 싶다는 욕망을 위해서였다.
소녀는 사람을 해치고 싶었다.
많은 기억들이 회색 덩어리로 뭉쳤고, 어떤 조각들은 바닥에서 가시처럼 솟아올랐다.
소녀는 그저 가만히 서서 조각들을 바라보며 그것들을 세기 시작했다.
기억의 가시가 눈을 찌를 뻔했을 때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조각을 셌다.
이윽고 소녀는 손가락을 들어, 몇몇 조각을 자신의 위치로 불렀다.
그녀가 생각으로 명령하자 조각들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나비의 모양을 취했다.
그 나비를 하늘로 보내 이 새하얀 세계를 관찰하도록 하였다.
그것이 다시 내려와 소녀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설명하자 소녀는 생각만으로 나비의 날개를 천천히 뜯어내, 공허로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소녀는 그 오염된 바다에서 걸어 나오며, 지나간 시대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저 기둥들을 산산이 부수어버렸다.
시간이 지나 소녀는 변했다.
소녀는 더 이상 기억을 모으려 하지 않았다. 아무 목적 없이 그저 걸었다. 이따금 이 세계, 그리고 소녀 자신에 대한 정보를 발견하기도 했지만, 열정을 잃어버린 소녀에겐 의미가 없었다.
소녀는 언젠가 폐허에서 찾은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며, 무너져내린 건물 옆을 지나고 있었다.
추악한 나날의 기억을 비추는 유리 조각이 뭉쳐 만들어진 생물체가 하늘에서 조용히 내려와 소녀의 앞에 섰다.
그 까마귀 같은 생물은 닳아빠진 칼날처럼 울퉁불퉁하며 반짝거리는 유리의 몸을 지니고 있었다.
이 생물은 소녀에게 있어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탑이 무너졌던 그날부터 소녀는 아르케아를 다루는 데에 점점 익숙해져 이런 생물까지 창조할 수 있었다.
까마귀는 이 새하얀 세계에서 소녀가 아직 가보지 못한 장소들을 이야기했다. 소녀가 눈길을 주자 까마귀는 터져나가듯 갈기갈기 찢어졌다.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 걸어갔다.
소녀는 까마귀들이 가져오는 소식에 진절머리가 났다.
이 세계엔 소녀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 까마귀들이 가져오는 소식이란 그게 전부였다.
소녀는 그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직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만나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운명을 함께 나누기 위함이 아니었다.
가슴속에 가득 찬 불만. 그것을 살아있는 것에 쏟고 싶다는 욕망을 위해서였다.
소녀는 사람을 해치고 싶었다.
===# V-0 #===
이 세계에서 폐허는 흔한 광경이었다. 그럼에도 빛을 두른 소녀는 발을 내딛는 데에 조심스러웠다.
소녀는 이 폐허들이 한때 어떤 건물이었는지, 어째서 여기에 있는건지 궁금해졌다.
자신이 떠도는 이 세계에 과거가 있었을까?
아니면 우연히 처음부터 이렇게 생긴 세계였을까?
소녀는 생각해야만 한다는 강박감이 들었다. 행복한 무지에 잠식되지 않도록.
이 세상을 더 자세히 알면, 의미를 찾는 자신의 여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여긴 다른 세계의 장소를 비추고 있을 뿐 아닐까?
소녀는 아르케아에서 이 폐허와 비슷한 건물을 보았다.
그렇다면, 폐허뿐만 아니라 높이 솟은 탑과 건물도 어딘가에 있는게 아닐까?
아직 찾지, 마주치지 못했을 뿐일지도 모른다.
이 폐허는 한때 커다랗고 장엄한 건물이었을 거야.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아름다운 장소였겠지.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이 모습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광경이었다.
소녀는 혼자였다. 혼자서 긴 의자와 부러진 촛대 사이를 헤쳐나갔다.
소녀는 혼자였다. 눈을 깜빡였다. 혼자가 아니었다. 사람이 있었다.
소녀의 왼편으로 무너진 벽 앞에 사람이 서있다.
과거의 소녀였다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은 채 이 사람에게 화사한 미소를 지어보였을 것이다.
지금의 그녀는 당혹해하며 저 그림자를 둘러싼 여자아이를 관찰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서 피어오르는 행복감은 억누를 수가 없었다.
기억이 아닌,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는 진짜 사람.
혼자서 걸어온 무한한 시간 끝에, 마침내 다른 사람을 만났다.
살아있는, 타인이다!
여자아이는 소녀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우산을 들고 가만히 서서 잠을 청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칠흑 같은 그 모습이 밝게 빛나는 주변의 광경과 강한 대조를 이루었다.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이라 소녀는 한순간 이게 꿈인 줄로만 알았다.
소녀가 말을 걸려 입을 벌리려던 순간, 여자아이가 깨어나 눈을 떴다.
슬프고 사악하며 잊힌 조각을 이끄는 자가 눈을 떠 다시 태어나 새하얀 색을 두른 소녀를 바라보았다.
빛의 소녀가 너무나 반가워했던, 어둠의 소녀가 일순간 숨을 멈추었다.
눈을 찡그리고선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금방 그만두고선, 숨을 들이켜고 눈을 크게 뜨며 우산 손잡이를 강하게 쥐었다.
그 마음속에서 뒤틀린 행복감이 솟구쳤다. 이는 빛의 소녀의 그것과는 달리, 더욱 적극적인 감정이었다.
곧 그 감정은 혼돈의 소녀의 얼굴에 꾸밈없는 미소의 형태로 나타났다.
2.4. Adverse Prelude
2.4.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V-1 | Adverse-1 | 타이리츠로 Saint or Sinner 클리어[스위치판] | ||
V-2 | Adverse-2 | 히카리로 Vindication 클리어 | ||
V-3 | Adverse-3 | 히카리로 Heavensdoor 클리어 | ||
V-4 | Adverse-4 | 타이리츠로 Ringed Genesis 클리어 |
=====# V-1 #=====
벽도 천장도 없이 뼈대가 앙상한 의자와 하얀 촛불만이 남은 교회에서,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또 다른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길고 길었던 그 갈증을 해소해줄, 살과 피로 이루어진 진짜 사람이 드디어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즐겁지 않았다. 얼굴에 드러난 그 미소는, 감출 수 없는 거짓이었다. 그 미소는 마치 하얀 옷을 입은 소녀에게 “만나서 반가워”라 말하는 듯했으나, 그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름이 뭐니?” 검은 옷의 소녀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예전이었다면, 자기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다.
“내... 이름? 나도 잘 모르겠어.” 빛나는 소녀가 말했다. “넌 아니? 그, 자기 이름…”
그녀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이 한마디를 끝으로 말을 흐리며 화려하게 장식된 교회의 벽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얀 옷의 소녀는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기묘한 해후였다. 검은 옷의 소녀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무기력함이 하얀 옷의 소녀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불어온 차가운 바람 앞의 불처럼, 그녀의 희망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불편함, 불안함, 걱정이 그 마음을 채웠다.
둘 사이에 무언가 잘못된 공기가 흘렀다.
마치 세계 자체가 이 만남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빛의 소녀에게 말하는 듯했다.
금이 간 땅 위로 흐트러진 유리 조각들이 마치 이 기묘한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 반짝거렸다.
평소라면 이 유리 조각들은 망설임 없이 두 소녀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행복한 기억”은 하얀 옷의 소녀에게, “불행한 기억”은 검은 옷의 소녀에게.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유리 조각도 움직이지 않았다.
수많은 조각들이 소녀들의 주변을 에워싼 채 한 쪽 면으로 텅 빈 교회의 풍경을 비추었다.
하얀 소녀가 조각을 불러보았으나, 그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끔찍한 기억과 행복한 기억이 함께 늘어서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안함이 그녀의 마음을 엄습했다.
아직 자신을 따라오는 조각은 자신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각, 자신을 자유롭게 해준 그 조각 뿐이었다.
하얀 소녀는 그림자같은 소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서로 비슷한 상황이라면...”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같이 다니지 않을래? 그럼 서, 서로 도울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러다 말을 멈추었다. 상대가 텅 빈 캔버스같은 하늘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검은 옷의 소녀는 모든 말을 듣고 있었다.
“어쩌면.” 검은 소녀가 말했다. 희미하게... 비극 속에서 다시 태어난 뒤로, 그녀의 영혼은 칙칙한 심연과도 같았다.
그러나, 하얀 소녀의 제안을 듣자 그 심연 안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아주 약하고 희미했지만, 다시 각성한 이후로 그녀의 마음을 계속해서 잠식하던 불만의 장막을 꿰뚫기에 충분했다.
소녀의 마음속에 있던 과거의 조각, 이 세계에 처음 깨어났을 때의 ‘타이리츠’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절망감에 대적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번째 기회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같이 애매한 대답은, 하얀 소녀에게 있어서는 부족했다. 아직 긴장된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최근 다시 정신을 차린 소녀, 히카리는 아르케아의 세계가 마냥 예쁘기만 한 장소가 아니며, 안전하지도 않은 장소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소녀는, 상황이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말을 나눌 것이다.
그녀의 길고 길었던 그 갈증을 해소해줄, 살과 피로 이루어진 진짜 사람이 드디어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즐겁지 않았다. 얼굴에 드러난 그 미소는, 감출 수 없는 거짓이었다. 그 미소는 마치 하얀 옷을 입은 소녀에게 “만나서 반가워”라 말하는 듯했으나, 그 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이름이 뭐니?” 검은 옷의 소녀가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예전이었다면, 자기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랐을 것이다.
“내... 이름? 나도 잘 모르겠어.” 빛나는 소녀가 말했다. “넌 아니? 그, 자기 이름…”
그녀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이 한마디를 끝으로 말을 흐리며 화려하게 장식된 교회의 벽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얀 옷의 소녀는 혼란스런 표정을 지었다.
기묘한 해후였다. 검은 옷의 소녀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무기력함이 하얀 옷의 소녀에게 옮겨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불어온 차가운 바람 앞의 불처럼, 그녀의 희망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불편함, 불안함, 걱정이 그 마음을 채웠다.
둘 사이에 무언가 잘못된 공기가 흘렀다.
마치 세계 자체가 이 만남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빛의 소녀에게 말하는 듯했다.
금이 간 땅 위로 흐트러진 유리 조각들이 마치 이 기묘한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 반짝거렸다.
평소라면 이 유리 조각들은 망설임 없이 두 소녀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행복한 기억”은 하얀 옷의 소녀에게, “불행한 기억”은 검은 옷의 소녀에게.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유리 조각도 움직이지 않았다.
수많은 조각들이 소녀들의 주변을 에워싼 채 한 쪽 면으로 텅 빈 교회의 풍경을 비추었다.
하얀 소녀가 조각을 불러보았으나, 그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끔찍한 기억과 행복한 기억이 함께 늘어서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불안함이 그녀의 마음을 엄습했다.
아직 자신을 따라오는 조각은 자신이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조각, 자신을 자유롭게 해준 그 조각 뿐이었다.
하얀 소녀는 그림자같은 소녀를 쳐다보았다.
“우리 서로 비슷한 상황이라면...”
그녀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같이 다니지 않을래? 그럼 서, 서로 도울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러다 말을 멈추었다. 상대가 텅 빈 캔버스같은 하늘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을 듣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사실, 검은 옷의 소녀는 모든 말을 듣고 있었다.
“어쩌면.” 검은 소녀가 말했다. 희미하게... 비극 속에서 다시 태어난 뒤로, 그녀의 영혼은 칙칙한 심연과도 같았다.
그러나, 하얀 소녀의 제안을 듣자 그 심연 안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아주 약하고 희미했지만, 다시 각성한 이후로 그녀의 마음을 계속해서 잠식하던 불만의 장막을 꿰뚫기에 충분했다.
소녀의 마음속에 있던 과거의 조각, 이 세계에 처음 깨어났을 때의 ‘타이리츠’가,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 절망감에 대적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번째 기회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같이 애매한 대답은, 하얀 소녀에게 있어서는 부족했다. 아직 긴장된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최근 다시 정신을 차린 소녀, 히카리는 아르케아의 세계가 마냥 예쁘기만 한 장소가 아니며, 안전하지도 않은 장소임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소녀는, 상황이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말을 나눌 것이다.
=====# V-2 #=====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졌다.
“서로를 부를 이름이 있었으면 좋을텐데.”
타이리츠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은 또다시 생명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히카리는 이를 눈치채고 조금 불안해졌다.
“그러게, 기억으로 가득 찬 세계인데 정작 내 기억은 없다니... 자기 이름도 모르고, 싫지.”
그렇게 말하며 둘은 긴 의자에 같이 앉았다. 가까이 붙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앉은 의자는 대열의 가장 앞에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계단을 몇 개 올라가면 넓고 평평한 단상이었다. 하얀 소녀는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선 걱정으로 물든 표정을 지은 채 새롭게 만난 친구를 바라보았다.
검은 소녀는 앞에 펼쳐진 텅 빈 무대, 하늘, 그리고 먼 풍경을 아루는 장대하지만 무너진 건축물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들에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풍경을 구경하던 타이리츠는 갑작스레 말을 꺼냈다.
“이 유리 조각들. 이름이 뭔지 알고 있어?”
“응? 어... 왠지는 모르는데, ‘아르케아’라는 이름인 건 알고 있어.”
“나도야.” 히카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타이리츠가 말했다. “너랑 나, 다른 점이 뭐지?”
히카리는 대답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외모 말고는...”
“그럼 알아보자. 유리 조각에서 어떤 기억이 보여?”
“거의 항상 행복한 기억만 보여.”
“나랑은 정반대네...” 타이리츠가 한숨을 쉬고선, 발치로 시선을 떨구고 괴로운 듯 말했다.
“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다고 치자. 그럼, 우리가 정반대인 것에 뭔가 의미가 있는 걸지도 몰라.”
“너한테는 아르케아가 행복한 기억을 안 보여줘?”
히카리가 타이리츠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이며 물었다.
“유감이야...”
“뭐, 어떡하겠어.”
검은 소녀가 말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타이리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네 말대로면... 행복한 기억만 쭉 봐온 너조차, 행복해진 것 같진 않은데. 맞아?”
히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깨어나고 나서 고생만 해왔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하늘을 뒤덮을 만큼 조각을 잔뜩 모은 적이 있었어.
그렇게 내가 만든 하늘이 나를 거의 죽일 뻔했지… 빛이 조금씩 내 마음을 갉아먹는 느낌이었어. 내가 한 행동의 결과였지만 말이야.”
두 소녀는 진솔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히카리가 순진함과 위험으로 가득 찬 빛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난 후엔, 타이리츠는 차가운 억양으로 어둠의 폭풍에 맞선 투쟁을 이야기했다.
둘 사이에 차이점은 많았으나, 단 하나, 확실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 무감각한 세계,{에서 감각을 찾고 있었다는 것.} 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아름다운 만큼이나 냉혹했다.
히카리는 구원을 찾았으나, 이 기묘하고 무감각한 세계에게 자아를 잃을 뻔했었다.
타이리츠는 영원한 상처를 입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마치 파도처럼 폭력과 분노를 향한 충동이 쉴 새를 모르고 솟아올랐다.
히카리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 충동을 가슴속에 묻어두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이 살아있는 인간은, 마음속에 가득 찬 이 답답함을 쏟아내기에 최적의 상대였다.
이따금씩 검은 소녀가 불안하게 덜덜 떨릴 정도로 손에 든 우산을 꽉 쥔다는 것을, 하얀 소녀는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였어. 그런데, 그 검은 알을 깨고 나오고 나서부턴, 그렇게 순진한 목표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어. 무고한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어.
내 마음속 공허를 채우는 건 끔찍한 충동들 뿐이야. 역겹도록 뒤틀려버린...”
타이리츠가 마음을 쏟아냈다.
“지금조차, 너를 해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해.”
“괜찮아...”
히카리가 말했다.
“네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나라도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 마음은 그렇게까지 뒤틀리지 않았어.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타이리츠가 히카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 묻는 듯이.
“지금도 그 충동을 잘 참고 있짆아.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그러니까 넌 아직 착하고 강한 사람이야.”
히카리가 미소를 짓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나보다 훨씬.”
밝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선, 그렇게 한마디를 건넸다.
“나는 구원을 받았을 뿐이지만,”
히카리가 말을 이어갔다, 다시 한번 타이리츠의 눈을 바라보고서.
“넌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했잖아.”
검은 소녀의 마음속에서 약하게 일렁이던 반짝임이 희미한 빛으로 바뀌어, 고통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아니야.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야. 타이리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실패했고, 예전의 자신은 그 미궁이 무너졌을 때 함께 죽었다.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겨우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라곤 증오뿐이었다.
히카리와 만났을 때조차, 칼을 잡아 그 몸을 가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니다. 타이리츠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단순히 해칠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실, 그녀는 기적이 내려와 마지막으로 붙잡을 희망의 실 한 가닥을 건네주길 바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히카리는 너무 여리고 우유부단하여 직접 타이리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진 못했지만, 그녀의 존재, 그녀의 적대심 없는 그 모습이, 타이리츠가 찾던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타이리츠의 마음을 찌르는 것은 그 깨달음이었다.
그녀의 자세가 흐트러진다. 히카리가 이를 눈치채고 도와주려 다가오지만, 아직 자신의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손을 건네려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히카리는 반쯤 손을 들고 타이리츠의 앞에 서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검은 소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히카리는 손을 완전히 떨구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움직임에 맞춰 주변의 유리 조각들이 흔들렸다. 그중 하나가 뭔가 다른 빛을 내기 시작한다.
그것이 비추는 것은, 익숙했지만,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 기억.
매우 기묘하고 괴상한, ‘변칙적’인 기억이, 한순간 반짝였다 사라졌다.
“서로를 부를 이름이 있었으면 좋을텐데.”
타이리츠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은 또다시 생명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히카리는 이를 눈치채고 조금 불안해졌다.
“그러게, 기억으로 가득 찬 세계인데 정작 내 기억은 없다니... 자기 이름도 모르고, 싫지.”
그렇게 말하며 둘은 긴 의자에 같이 앉았다. 가까이 붙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앉은 의자는 대열의 가장 앞에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계단을 몇 개 올라가면 넓고 평평한 단상이었다. 하얀 소녀는 구부정한 자세를 하고선 걱정으로 물든 표정을 지은 채 새롭게 만난 친구를 바라보았다.
검은 소녀는 앞에 펼쳐진 텅 빈 무대, 하늘, 그리고 먼 풍경을 아루는 장대하지만 무너진 건축물들을 차례대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들에 흥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풍경을 구경하던 타이리츠는 갑작스레 말을 꺼냈다.
“이 유리 조각들. 이름이 뭔지 알고 있어?”
“응? 어... 왠지는 모르는데, ‘아르케아’라는 이름인 건 알고 있어.”
“나도야.” 히카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타이리츠가 말했다. “너랑 나, 다른 점이 뭐지?”
히카리는 대답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외모 말고는...”
“그럼 알아보자. 유리 조각에서 어떤 기억이 보여?”
“거의 항상 행복한 기억만 보여.”
“나랑은 정반대네...” 타이리츠가 한숨을 쉬고선, 발치로 시선을 떨구고 괴로운 듯 말했다.
“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다고 치자. 그럼, 우리가 정반대인 것에 뭔가 의미가 있는 걸지도 몰라.”
“너한테는 아르케아가 행복한 기억을 안 보여줘?”
히카리가 타이리츠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이며 물었다.
“유감이야...”
“뭐, 어떡하겠어.”
검은 소녀가 말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타이리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네 말대로면... 행복한 기억만 쭉 봐온 너조차, 행복해진 것 같진 않은데. 맞아?”
히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깨어나고 나서 고생만 해왔다는 식으로 말하고 싶진 않지만… 하늘을 뒤덮을 만큼 조각을 잔뜩 모은 적이 있었어.
그렇게 내가 만든 하늘이 나를 거의 죽일 뻔했지… 빛이 조금씩 내 마음을 갉아먹는 느낌이었어. 내가 한 행동의 결과였지만 말이야.”
두 소녀는 진솔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히카리가 순진함과 위험으로 가득 찬 빛의 여정을 이야기하고 난 후엔, 타이리츠는 차가운 억양으로 어둠의 폭풍에 맞선 투쟁을 이야기했다.
둘 사이에 차이점은 많았으나, 단 하나, 확실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 무감각한 세계,{에서 감각을 찾고 있었다는 것.} 그들을 둘러싼 세계는 아름다운 만큼이나 냉혹했다.
히카리는 구원을 찾았으나, 이 기묘하고 무감각한 세계에게 자아를 잃을 뻔했었다.
타이리츠는 영원한 상처를 입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마치 파도처럼 폭력과 분노를 향한 충동이 쉴 새를 모르고 솟아올랐다.
히카리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이 충동을 가슴속에 묻어두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이 살아있는 인간은, 마음속에 가득 찬 이 답답함을 쏟아내기에 최적의 상대였다.
이따금씩 검은 소녀가 불안하게 덜덜 떨릴 정도로 손에 든 우산을 꽉 쥔다는 것을, 하얀 소녀는 놓치지 않았다.
그들이 걸어온 길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었어.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였어. 그런데, 그 검은 알을 깨고 나오고 나서부턴, 그렇게 순진한 목표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어. 무고한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어.
내 마음속 공허를 채우는 건 끔찍한 충동들 뿐이야. 역겹도록 뒤틀려버린...”
타이리츠가 마음을 쏟아냈다.
“지금조차, 너를 해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해.”
“괜찮아...”
히카리가 말했다.
“네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나라도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 마음은 그렇게까지 뒤틀리지 않았어.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해.”
타이리츠가 히카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 묻는 듯이.
“지금도 그 충동을 잘 참고 있짆아. 그런 일을 겪었는데도… 그러니까 넌 아직 착하고 강한 사람이야.”
히카리가 미소를 짓고 의자에서 일어선다.
“나보다 훨씬.”
밝은 하늘을 향해 시선을 보내고선, 그렇게 한마디를 건넸다.
“나는 구원을 받았을 뿐이지만,”
히카리가 말을 이어갔다, 다시 한번 타이리츠의 눈을 바라보고서.
“넌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했잖아.”
검은 소녀의 마음속에서 약하게 일렁이던 반짝임이 희미한 빛으로 바뀌어, 고통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아니야.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야. 타이리츠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실패했고, 예전의 자신은 그 미궁이 무너졌을 때 함께 죽었다.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겨우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라곤 증오뿐이었다.
히카리와 만났을 때조차, 칼을 잡아 그 몸을 가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니다. 타이리츠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녀는 단순히 해칠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실, 그녀는 기적이 내려와 마지막으로 붙잡을 희망의 실 한 가닥을 건네주길 바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히카리는 너무 여리고 우유부단하여 직접 타이리츠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진 못했지만, 그녀의 존재, 그녀의 적대심 없는 그 모습이, 타이리츠가 찾던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
타이리츠의 마음을 찌르는 것은 그 깨달음이었다.
그녀의 자세가 흐트러진다. 히카리가 이를 눈치채고 도와주려 다가오지만, 아직 자신의 마음이 정리되지 않아, 손을 건네려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히카리는 반쯤 손을 들고 타이리츠의 앞에 서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검은 소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히카리는 손을 완전히 떨구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움직임에 맞춰 주변의 유리 조각들이 흔들렸다. 그중 하나가 뭔가 다른 빛을 내기 시작한다.
그것이 비추는 것은, 익숙했지만, 불가능한 광경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 기억.
매우 기묘하고 괴상한, ‘변칙적’인 기억이, 한순간 반짝였다 사라졌다.
=====# V-3 #=====
타이리츠는 가슴을 움켜쥔 채 힘겨운 숨을 몰아쉬었다. 하얀 소녀 덕에, 그녀에게 다시 생기가 돌아왔다.
히카리가 건넨 너무나도 소중한, 안심과 격려의 한마디. 아직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이 새하얀 지옥에서 벗어날 마지막 길이, 단 하나 존재했다.
타이리츠가 숨을 내뱉으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뭔가 해보자. 이 빌어먹을 세계를 파헤쳐보자.”
“그렇게 욕할 정도로 나쁘지는 않은데...”
히카리 또한 아주 약한 미소를 지으며, 그만큼이나 약하게 항의한다.
아직 타이리츠에 대해 모든게 확실하진 않지만, 히카리는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게 있었다.
검은 소녀는 외견과 다르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그 사실만으로 손을 잡을 이유는 충분했다. ‘착한’ 사람... 히카리는 아직 자신이 그 호칭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히카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타이리츠의 기분이 바뀐 듯 했다.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그 말은 질문의 형태를 했으나, 억양 탓으로 비난에 가깝게 들렸다. 히카리를 꿰뚫듯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텅 비어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행복해지려고 했던 너를 먹어치우려고 했던 곳이잖아.”
타이리츠가 호흡을 진정시키며 자세를 똑바로 가다듬으며,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손으로 우산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히카리와 눈을 맞추었다.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강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타이리츠의 기세에 잠시 짓눌린 히카리였지만, 더 이상 그녀는 예전의 근심 없는 순수한 소녀가 아니었다.
조금의 자신감을 끌어모아, 히카리는 허리를 펴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있잖아. 적어도 그 정도는 허락해 주니까, 이 세계가 그렇게까지 나쁘다곤 생각 안 해.”
“뭐어...?”
타이리츠의 눈빛이 더 강렬해졌다.
“살려두고선 고통과 슬픔으로 우릴 고문하고 있을 뿐인데도? 그런 세상이 어떻게 나쁘지 않은 거지?”
“그, 그렇지만, 그래도...”
“그래도 뭐?” 타이리츠가 밀어붙였다.
“그래도 그건 결단이 너무 빨라! 넌 정확히 뭘 하고 싶은건데?”
“전부 부숴버릴 거야. 세계도, 유리 조각도, 전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부숴버릴 거야. 받은 만큼 돌려줘야 공평하지 않겠어?”
타이리츠가 덤덤하게 설명했다.
“너도 동감하지? 너한테도 이 세계는 넓은 감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잖아.”
“부수겠다고...? 부, 부술 수 있다 해도... 그건 종말이야. 우리가 아는 한 존재하고 있는 세계는 여기밖에 없어.
이 세계를 부수면, 우리도 함께 죽는 거 아니야? 여기서 살 바에야… 그냥 죽겠다는 거야? 말도 안 돼!”
“그래, 죽겠어.” 덤덤하게 타이리츠가 대답했다.
그런 대답이 날아올 거라 생각 못 한 히카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타이리츠의 말은 너무나 무섭고, 너무나 슬펐다.
그 침묵을 뚫고, 타이리츠는 계속해서 히카리를 밀어붙였다.
“달리 생각 있어? 계획 있냐고.”
“아니... 없어. 너랑 같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고 싶었어.”
명백히 절망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하얀 소녀가 대답했다.
그리고, 아까 막 희망과 감정을 되찾은 소녀, 타이리츠는 말을 멈추었다.
하얀 소녀에게 화를 내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게 합리적이지 못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다시금 피어난 희망 덕에, 여태까지 자신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새로운 희망을 마주하고서 취하는 행동이 비난이라니. 자신이 이렇게 옹졸한 사람이었던가? 타이리츠의 이 결심은 과거에도 그녀에게 안식이나 만족감, 그리고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목표로 향하는 길은 우울함으로 가득 찬 어두운 가시밭길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타이리츠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던 불길, 타오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던 불길을 사그라뜨렸다. 하얀 소녀와 손을 잡으려면... 그녀의 생각에 동의해야만 했다.
“미, 미안해.”
타이리츠가 사과했다. 아까의 강렬한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잠시 숙였다.
“나도… 그래, 너와 함께, 뭔가 새로운… 계획을 생각해 보고 싶어.”
타이리츠 앞에서 사그라들었던 히카리의 자신감이 조금 활기를 되찾았다.
“괜찮아. 내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오래 이 세계에 갇혀있었던 거지?”
타이리츠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던 그 불이면 충분했다.
섬광처럼 잠시 불타올랐을 뿐이던 불이, 주변에서 잠자고 있던 유리 조각 하나 일으켜 세워 흔들었다.
그것이 조용히, 두 소녀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희망을 잃지 마. 분명 더 나은 내일이 올거야.” 하얀 옷의 소녀가 말했다.
빛바랜 색으로 일렁이는 유리 조각이 날아와 소녀들의 사이에 멈추어 섰다. 둘 다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으나, 그것이 비추는 기억은 검은 옷의 소녀에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히카리가 건넨 너무나도 소중한, 안심과 격려의 한마디. 아직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이 새하얀 지옥에서 벗어날 마지막 길이, 단 하나 존재했다.
타이리츠가 숨을 내뱉으며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뭔가 해보자. 이 빌어먹을 세계를 파헤쳐보자.”
“그렇게 욕할 정도로 나쁘지는 않은데...”
히카리 또한 아주 약한 미소를 지으며, 그만큼이나 약하게 항의한다.
아직 타이리츠에 대해 모든게 확실하진 않지만, 히카리는 단 하나 확신할 수 있는게 있었다.
검은 소녀는 외견과 다르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그 사실만으로 손을 잡을 이유는 충분했다. ‘착한’ 사람... 히카리는 아직 자신이 그 호칭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히카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타이리츠의 기분이 바뀐 듯 했다.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그 말은 질문의 형태를 했으나, 억양 탓으로 비난에 가깝게 들렸다. 히카리를 꿰뚫듯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텅 비어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행복해지려고 했던 너를 먹어치우려고 했던 곳이잖아.”
타이리츠가 호흡을 진정시키며 자세를 똑바로 가다듬으며, 가슴을 움켜쥐고 있던 손으로 우산을 다시 들었다.
그리고 히카리와 눈을 맞추었다.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강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타이리츠의 기세에 잠시 짓눌린 히카리였지만, 더 이상 그녀는 예전의 근심 없는 순수한 소녀가 아니었다.
조금의 자신감을 끌어모아, 히카리는 허리를 펴고 설명을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있잖아. 적어도 그 정도는 허락해 주니까, 이 세계가 그렇게까지 나쁘다곤 생각 안 해.”
“뭐어...?”
타이리츠의 눈빛이 더 강렬해졌다.
“살려두고선 고통과 슬픔으로 우릴 고문하고 있을 뿐인데도? 그런 세상이 어떻게 나쁘지 않은 거지?”
“그, 그렇지만, 그래도...”
“그래도 뭐?” 타이리츠가 밀어붙였다.
“그래도 그건 결단이 너무 빨라! 넌 정확히 뭘 하고 싶은건데?”
“전부 부숴버릴 거야. 세계도, 유리 조각도, 전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부숴버릴 거야. 받은 만큼 돌려줘야 공평하지 않겠어?”
타이리츠가 덤덤하게 설명했다.
“너도 동감하지? 너한테도 이 세계는 넓은 감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잖아.”
“부수겠다고...? 부, 부술 수 있다 해도... 그건 종말이야. 우리가 아는 한 존재하고 있는 세계는 여기밖에 없어.
이 세계를 부수면, 우리도 함께 죽는 거 아니야? 여기서 살 바에야… 그냥 죽겠다는 거야? 말도 안 돼!”
“그래, 죽겠어.” 덤덤하게 타이리츠가 대답했다.
그런 대답이 날아올 거라 생각 못 한 히카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타이리츠의 말은 너무나 무섭고, 너무나 슬펐다.
그 침묵을 뚫고, 타이리츠는 계속해서 히카리를 밀어붙였다.
“달리 생각 있어? 계획 있냐고.”
“아니... 없어. 너랑 같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고 싶었어.”
명백히 절망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하얀 소녀가 대답했다.
그리고, 아까 막 희망과 감정을 되찾은 소녀, 타이리츠는 말을 멈추었다.
하얀 소녀에게 화를 내기란 쉬운 일이었다. 그게 합리적이지 못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다시금 피어난 희망 덕에, 여태까지 자신이 얼마나 차가웠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새로운 희망을 마주하고서 취하는 행동이 비난이라니. 자신이 이렇게 옹졸한 사람이었던가? 타이리츠의 이 결심은 과거에도 그녀에게 안식이나 만족감, 그리고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목표로 향하는 길은 우울함으로 가득 찬 어두운 가시밭길일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타이리츠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던 불길, 타오르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던 불길을 사그라뜨렸다. 하얀 소녀와 손을 잡으려면... 그녀의 생각에 동의해야만 했다.
“미, 미안해.”
타이리츠가 사과했다. 아까의 강렬한 눈빛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잠시 숙였다.
“나도… 그래, 너와 함께, 뭔가 새로운… 계획을 생각해 보고 싶어.”
타이리츠 앞에서 사그라들었던 히카리의 자신감이 조금 활기를 되찾았다.
“괜찮아. 내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오래 이 세계에 갇혀있었던 거지?”
타이리츠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던 그 불이면 충분했다.
섬광처럼 잠시 불타올랐을 뿐이던 불이, 주변에서 잠자고 있던 유리 조각 하나 일으켜 세워 흔들었다.
그것이 조용히, 두 소녀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희망을 잃지 마. 분명 더 나은 내일이 올거야.” 하얀 옷의 소녀가 말했다.
빛바랜 색으로 일렁이는 유리 조각이 날아와 소녀들의 사이에 멈추어 섰다. 둘 다 유리 조각을 바라보았으나, 그것이 비추는 기억은 검은 옷의 소녀에게밖에 보이지 않았다.
=====# V-4 #=====
종말.
그림자로 몸을 감싼 소녀가 깨진 유리창을 통해 다른 시간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 미소가 찾아왔다.
바보같으니.
아니, 하얀 옷을 입은 아이 말고.
나.
이 유리 조각이 비추는 것은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일 수가 없었다.
이것은 미래다. 바보같은 몽상가, 자신이 예상했어야 했을 미래.
유리 조각에 비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자신이었다. 날카로운 유리 기둥에 몸이 꿰뚫려, 상처로부터 새어 나오는 창백한 불꽃에 옷과 몸이 불타는 모습.
그녀의 등 뒤로 텅 비고 황량한 아르케아의 대지가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엔,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눈부시게 불타는 빛을 어깨에 두르고 손으로 기둥을 쥐고 있었다.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으나, 등을 돌린 탓에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지금 자신의 앞에 서있는 이 소녀와 같은 인물이다.
방금 만난 사람.
이건 기억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의 예언이다.
타이리츠는 이를 깨닫고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여태껏 무시해온 진실을 마주했다.
그녀의 결의 따윈 아무 상관 없었다.
이 세계에서 좋은 것 따위 찾을 수 없다.
마지막 희망조차 검게 물들어, 절망의 바다에 빠진 채, 잊혔다
달리 어떻게 됐을 거라 생각했나?
희망은 대체 왜 가졌나?
어리석음이었다. 짜증이 날 정도의 어리석음.
짜증 나는 노력.
짜증 나는 기억.
짜증 나는 존재.
짜증났다, 싫었다. 질렸다. 이제 질렸다. 자신이 질렸다.
이 끝나지 않는 조롱과 같은 연극에 질렸다.
기적 따윈 없다.
스스로도 말하지 않았나. 이 세계는 지옥이라고.
잘 알고 있었다. 조각나버린 다른 세계의 기억에서도 보았다.
천사조차 타락해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빛의 소녀는 그 천사와 같았다.
최후의 순간에, 타이리츠의 가슴을 좀먹던 조그마한 구멍이 점점 넓어졌다.
구멍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먹어치우고선, 차갑고 끝없는 공허만을 남겼다.
그 속에서 어둠이 기어 나와 그녀의 생각조차 뒤덮으려 할 때, 히카리를 보았다.
유리 조각을 보는, 그 당황한 눈빛, 히카리는 이 조각이 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너무나도 잘 알고 있겠지.
그래서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눈을 마주 볼 수 없는 것이다.
분명히 타이리츠의 모습이 보임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당황했나? 불안해졌나? 뻔뻔하다.
용서할 수 없다.
그 분노가 뒤틀려 증오로 바뀌어, 그녀의 시선에서 쏟아져 나온다.
저주받을 배신자. 이 저주받을 세계.
타이리츠는 우산을 꼭 쥐었다.
조각 너머에 아직도 꼼짝도 않고 서있는 히카리를 보았다.
자신의 악의가 들통났다는 사실에, 두려워 움직일 수 없는 것인가?
웃기는군.
타이리츠는 눈을 감고 이렇게 새로 피어오른 감정을 잘라내었다.
그렇게 감정을 비우고 나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거울의 풍경도, 타이리츠의 분노도, 결국 일방적이었다.
히카리는 유리 조각에 무엇이 비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점점 창백해지는 타이리츠의 얼굴을 혼란스러워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키리의 마음에 위기감이 피어올랐다. 이유는 몰랐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대지로부터 그림자가 기어올라와닿는 빛을 모두 없애고 있었다.
어둠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숨이 가빠졌다. 히카리는 한걸음 물러섰다.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눈부신 빛의 하늘에 잡아먹힐 뻔했던 그 위기를 겪고 나서도, 또다시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포가 그녀를 덮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히카리는 살아남았다.
이번에는, 살아남기 위해선 타협 따위 할 여유가 없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히카리는 그걸 명심하고선,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녀는 유리 조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가장 절망해있을 때에 자신에게 안식과 인도를 내려준 그 조각.
히카리가 그 조각을 들고 가슴에 가져다 대자, 타이리츠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공포, 그리고 다시는 비극을 겪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몸이 잠식된 채, 타이리츠는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3. Side Story
3.1. 사야
3.1.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3-1 | Ab.Reason-5 | 파일:arcaea_char_23_icon.png | 사야로 Antithese 클리어 | |
3-2 | Ab.Reason-1 | Antithese 클리어 | ||
3-3 | Ab.Reason-2 | Corruption 클리어 | ||
3-4 | Ab.Reason-3 | 파일:arcaea_char_23_icon.png | 사야로 Black Territory 클리어 | |
3-5 | Ab.Reason-4 | 사야로 Cyaegha 클리어 | ||
3-6 | Ab.Reason-6 | 사야로 Vicious Heroism 클리어 |
3.1.2. Absolute Reason
=====# 3-1 #=====사야가 처음 깨어났던 날.
이 세계에서 깨어나는 이들은 누구도 그전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사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감각은 보통과는 달랐다.
소녀의 마음이, 정열적으로 요동쳤다.
점점 격렬해지는 그 감정에 낮은 신음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자신의 복부를 덮은 옷을 꽉 쥐었다.
잠시 자신의 귀가 멀었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눈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응...?”
소녀는 기침을 한 번 하고 일어섰다. 오른 눈이 있어야 할 자리를 만져보자 장갑 낀 손 너머로 느껴진 것은, 단단한 물체를 감싼 부드러운 무언가였다.
소녀는 그제야 자기가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몸을 살피며, 왜 이런 옷을 입고 있는지 고민했다.
그다음 어째서 자기가 “옷”이라는 게 뭔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소녀는 벽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주변은 그 벽과 같은 모양의, 하지만 심하게 부서진 벽이 3개 더 있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았으나 그곳에 지붕은 없었다.
그리고 소녀는 왜 자신이 저 위에 지붕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궁금해했다.
사실, 소녀는 이 장소를 아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대어 자고 있었던 벽을 따라 터덜터덜 걷다, 넘어갈 수 있을 만한 턱을 발견했다.
그곳에 쌓인 하얀 벽돌들을 넘어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 벽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얀색이었다.
이 세상은 낡고 패배한 인류 사회의 흔적, 또는 여러 사회를 모방한 장소였다.
기묘하다... 그보다 더, 이 세상이 기묘하다고 생각하는 소녀 자신이 기묘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기억의 조각을 찾기 전까지, 소녀는 이 장소와 자기 자신의 정체에 관해 수십 개의 이론을 내놓았다. 혼자서, 자신의 이름조차 모른 채로,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시간이 지나, 특히 그중 하나의 이론을 증명할 증거들을 찾아냈다.
소녀는 천성적으로 끈질기고 호기심이 많았다.
이 새하얀 세계는 수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수일이 지나도, 이 폐허 속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수주가 지나도, 기억의 유리 속에 답은 없었다.
이 세상은 유리 조각으로 가득했다. 소녀를 놀리듯이, 이 세계보다 더욱 생생하고 다채로운 세상을 비추는 유리 조각들.
인류 문명의 모방으로 가득 찬, 현실 세계를 인쇄해낸 듯한 메아리의 세계. 아마 두 달, 어쩌면 그보다 긴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이론에 확신이 생길 것 같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 소녀가 깨어난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계단층 꼭대기에서, 소녀는 하늘의 일부분이 물결치며 조각조각 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음을 관찰했다.
그 무엇도 비추지 않는 깨진 유리 창문 같았다. 그 실상은 수백 개의 아르케아가 모여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그 순간, 소녀는 확신했다.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 증거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관찰만으로 결론을 내릴 순 없었다.
그렇게 소녀는 맹세했다. 질문만 던지고 답은 주지 않는 이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어내어, 존재 목적을 찾아내겠노라고.
이 세계의 유일한 주민으로서, 그것이 소녀의 첫 번째 의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소녀는 아르케아를 받아들였고,
아르케아도 소녀를 받아들였다.
드넓고 무한한 기억의 세계를, 단지 관찰할 뿐 아니라, 살아갈 것이다.
이 세계에서 깨어나는 이들은 누구도 그전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사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가 느끼는 감각은 보통과는 달랐다.
소녀의 마음이, 정열적으로 요동쳤다.
점점 격렬해지는 그 감정에 낮은 신음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자신의 복부를 덮은 옷을 꽉 쥐었다.
잠시 자신의 귀가 멀었다고 생각했다.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눈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응...?”
소녀는 기침을 한 번 하고 일어섰다. 오른 눈이 있어야 할 자리를 만져보자 장갑 낀 손 너머로 느껴진 것은, 단단한 물체를 감싼 부드러운 무언가였다.
소녀는 그제야 자기가 장갑을 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몸을 살피며, 왜 이런 옷을 입고 있는지 고민했다.
그다음 어째서 자기가 “옷”이라는 게 뭔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소녀는 벽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었다. 주변은 그 벽과 같은 모양의, 하지만 심하게 부서진 벽이 3개 더 있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았으나 그곳에 지붕은 없었다.
그리고 소녀는 왜 자신이 저 위에 지붕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궁금해했다.
사실, 소녀는 이 장소를 아주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대어 자고 있었던 벽을 따라 터덜터덜 걷다, 넘어갈 수 있을 만한 턱을 발견했다.
그곳에 쌓인 하얀 벽돌들을 넘어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이 벽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하얀색이었다.
이 세상은 낡고 패배한 인류 사회의 흔적, 또는 여러 사회를 모방한 장소였다.
기묘하다... 그보다 더, 이 세상이 기묘하다고 생각하는 소녀 자신이 기묘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기억의 조각을 찾기 전까지, 소녀는 이 장소와 자기 자신의 정체에 관해 수십 개의 이론을 내놓았다. 혼자서, 자신의 이름조차 모른 채로, 다양한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시간이 지나, 특히 그중 하나의 이론을 증명할 증거들을 찾아냈다.
소녀는 천성적으로 끈질기고 호기심이 많았다.
이 새하얀 세계는 수많은 질문을 던졌으나, 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수일이 지나도, 이 폐허 속에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수주가 지나도, 기억의 유리 속에 답은 없었다.
이 세상은 유리 조각으로 가득했다. 소녀를 놀리듯이, 이 세계보다 더욱 생생하고 다채로운 세상을 비추는 유리 조각들.
인류 문명의 모방으로 가득 찬, 현실 세계를 인쇄해낸 듯한 메아리의 세계. 아마 두 달, 어쩌면 그보다 긴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이론에 확신이 생길 것 같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 소녀가 깨어난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계단층 꼭대기에서, 소녀는 하늘의 일부분이 물결치며 조각조각 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음을 관찰했다.
그 무엇도 비추지 않는 깨진 유리 창문 같았다. 그 실상은 수백 개의 아르케아가 모여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그 순간, 소녀는 확신했다.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다. 증거는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다. 관찰만으로 결론을 내릴 순 없었다.
그렇게 소녀는 맹세했다. 질문만 던지고 답은 주지 않는 이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어내어, 존재 목적을 찾아내겠노라고.
이 세계의 유일한 주민으로서, 그것이 소녀의 첫 번째 의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소녀는 아르케아를 받아들였고,
아르케아도 소녀를 받아들였다.
드넓고 무한한 기억의 세계를, 단지 관찰할 뿐 아니라, 살아갈 것이다.
=====# 3-2 #=====
이른 저녁,
태양이 저물며 붉은 황혼의 빛으로 하늘을 물들였다.
초원을 둘러싼 장치들은 그 빛을 흡수해, 달빛과도 같은 색의 광선으로 탈바꿈시켰다.
파티장에는 어떤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비록 저택 밖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하나, 상류층에게 이미지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여자는 그걸 처음부터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햇빛으로 만들어진 조명이 미치지 않는 어두운 방에 앉아 조용히 그 의미를 곱씹고 있었다.
“라비니아.”
여자가 술잔에서 시선을 돌려 목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약혼자였다. 그는 답답해 보일 정도로 잘 차려입었으나, 몸짓에서 격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늘은 뭐 마시고 있어?”
“안녕… 도노반, 자두 주스야.”
여자가 멀쩡한 쪽의 눈으로 잔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잘 골랐네.”
남자가 미소 지으며 말하고선 방의 전경을 살펴보았다. 여자는 감정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나 친척들은 크랜베리가 더 좋다고 하시더라... 건강에 더 좋다나. 그런데...”
남자가 여자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맛이 써서 난 별로야. 너도 그렇지?”
여자는 잠시 생각하다, 표정을 찡그렸다.
“나도 안 좋아해.”
“그럴 줄 알았어.”
남자가 한 번 웃더니 등을 돌렸다.
“난 모건이랑 이야기하고 있을게. 나중에 와.”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벽난로 옆에 서 있는 소꿉친구에게 다가갔다.
저택의 풍경은 좋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벽난로에서 나오는 불빛은 먼 거리를 가지 못하고 바닥에 설치된 조명장치로 흡수되었다. 이 때문에 방은 조금 어두웠지만 어딘가 포근하고 안도감으로 가득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천장의 조명들은 간신히 책을 읽을 정도, 또는 사람의 표정을 보거나 테이블 위의 음식과 술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빛나고 있었다.
반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방 밖의 풍경은 이른 밤의 푸르름을 감싼 야생화, 바위, 그리고 강이 꾸미고 있었다.
이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은 약 스무 명, 그중 반은 이 방에 있고, 나머지는 홀, 또는 서재에 있을 것이다.
여자는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주스를 음미했다. 자두 주스를 마셔본 적은 별로 없었기에, 단 맛 이외에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 마셨던 더 맛있는 음료가 생각나지만, 혀 위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집중해 보았다.
그럼에도 주스의 맛은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이게 싫은지 좋은지조차 정할 수가 없었다.
여자는 고급스러운 잔 받침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 자리에 앉아서 백색소음과 같은 사람들의 말소리와 방의 풍경을 감상하다가, 불현듯 자신의 오른 눈에서 피어난 꽃의 잎을 만져보았다.
“이미 꽤 진행된 모양이야. 처음 그 소식 들었을 땐 솔직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
도노반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찰스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모건이 아닌 나탈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랍지 않아?” 도노반이 머리 위쪽을 쓸어넘기며 말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다니.” 그가 말한다. “인류는 대단해.”
=====# 3-3 #=====
여자의 시선이 반짝이는 조명의 불빛을 보았다가, 약혼자를 찾았다.
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여전히 지극하게 평범한 맛이었다.
“인공 세계”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별로 없었기에 그다지 이야깃거리로 삼거나, 애초에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라곤 여자에겐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었다.
짜증이 났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인내심이 떨어진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 빛으로 물들어 조금 더 화려해진 홀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아주 조금이지만, 이 저택의 방들을 알고 있었다.
여자는 저택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조명이 꺼진 칠흑 같은 복도, 열쇠구멍이 없지만 잠겨있는 문들. 잠겨있지 않은 방 안에는 남녀 몇 명이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의 존재를 눈치챈 사람들은 한 번 눈길을 슥 주고는 다시 대화로 돌아갈 뿐이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저택은 최신 기술의 보고와 같았으나, 동시에 낡아빠진 계급 의식을 표출하는 출구이기도 하였다. 빛 흡수 장치나 인공 자연도 놀라운 기술이었지만, 여자가 가장 흥미를 가진 것은 정원의 빛 변환 장치였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직접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궁금했다”.
파티 손님들과 한 시간이 천년처럼 느껴질법한 따분하고 시답잖은 대화나 하며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 삶을 둘러싼 생명과 그 창조물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흥미로운 존재들이다. 그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정문으로 걸어가는 순간…
그 손이 문고리에 닿자 마자…
깨달았다.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 그녀가 있을 곳은 여기뿐이다.
여자의 자리는 기계장치들을 감상할 수 있는 초원이 아니라 약혼자의 옆, 이 저택의 방 안이었다.
“바깥”이란건 실체가 없는 개념일 뿐이었다.
이런건 깨닫지 않는 편이 차라리 좋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샹들리에 밑에 섰다. 샹들리에의 조각 하나하나가 지금 이 순간 세계의 다른 장소를 비추고 있었다.
계속해서 변화하며, 그녀가 가볼 수 없는 장소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흐릿한, 거의 우주에서 온 것만 같은 빛이 샹들리에 주변을 감싸며 비현실적인 광경을 자아내었다.
여자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새로이 생겨난 조그마한 불만의 불씨를 가슴에 안은 채, 다시 저택의 깊은 곳으로 돌아갔다.
잔을 들어 한모금 마셨다. 여전히 지극하게 평범한 맛이었다.
“인공 세계”라는 주제에 관심을 가지는 이는 별로 없었기에 그다지 이야깃거리로 삼거나, 애초에 이해하는 사람이 많지가 않았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라곤 여자에겐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것들이었다.
짜증이 났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인내심이 떨어진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녁 빛으로 물들어 조금 더 화려해진 홀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아주 조금이지만, 이 저택의 방들을 알고 있었다.
여자는 저택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조명이 꺼진 칠흑 같은 복도, 열쇠구멍이 없지만 잠겨있는 문들. 잠겨있지 않은 방 안에는 남녀 몇 명이 조용히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의 존재를 눈치챈 사람들은 한 번 눈길을 슥 주고는 다시 대화로 돌아갈 뿐이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저택은 최신 기술의 보고와 같았으나, 동시에 낡아빠진 계급 의식을 표출하는 출구이기도 하였다. 빛 흡수 장치나 인공 자연도 놀라운 기술이었지만, 여자가 가장 흥미를 가진 것은 정원의 빛 변환 장치였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나 직접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궁금했다”.
파티 손님들과 한 시간이 천년처럼 느껴질법한 따분하고 시답잖은 대화나 하며 시간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우리 삶을 둘러싼 생명과 그 창조물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흥미로운 존재들이다. 그것이 그녀의 지론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정문으로 걸어가는 순간…
그 손이 문고리에 닿자 마자…
깨달았다. 이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세상에 그녀가 있을 곳은 여기뿐이다.
여자의 자리는 기계장치들을 감상할 수 있는 초원이 아니라 약혼자의 옆, 이 저택의 방 안이었다.
“바깥”이란건 실체가 없는 개념일 뿐이었다.
이런건 깨닫지 않는 편이 차라리 좋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샹들리에 밑에 섰다. 샹들리에의 조각 하나하나가 지금 이 순간 세계의 다른 장소를 비추고 있었다.
계속해서 변화하며, 그녀가 가볼 수 없는 장소의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흐릿한, 거의 우주에서 온 것만 같은 빛이 샹들리에 주변을 감싸며 비현실적인 광경을 자아내었다.
여자는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새로이 생겨난 조그마한 불만의 불씨를 가슴에 안은 채, 다시 저택의 깊은 곳으로 돌아갔다.
=====# 3-4 #=====
반 유리 벽 너머로 폭풍 바람에 꽃잎들이 휘날렸다.
눈을 사로잡는 백색과 사파이어색의 빛.
파티의 젊은 손님들이 풍경의 변화를 칭찬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마법같이 신기하다.
여자도 라운지로 돌아와 인공 자연 풍경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감상했다.
화려한 연극이다.
저 흩날리는 꽃잎들을 처음 보았던 때를 기억하다가,
이제 “기억” 하는 것조차 질린 듯 눈을 감는다.
여자는 몇 시간 동안 여러 가지를 시험했다.
창문은 잠겼고, 뒷문에는 빗장이 걸려있었으며, 환풍구는 막혀있었다.
이에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누군가 이 통로들을 막은 걸까? 아니면 내가 여기에 갇혀있기 때문에 막힌 걸까?”
비유와 감상은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정말로 그런 건지 알기는 힘들었지만.
저택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구석구석까지 살펴본 후,
여자는 지인 또는 친구로서 알고 있는 손님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날씨가...”
“국왕 전하께서...”
“지난주에...”
지루하고, 아무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
질문을 해도,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의미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처음부터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자의 흥미 분야인 공학, 기술, 진보에 관한 이야기는
손님들에게서 한 조각의 흥미도 끌어내지 못했다.
짜증이 난 여자는 아무 말없이 대화를 듣고 있기로만 했는데, 이윽고 이 말을 들었다.
“지금은 그냥 흙공 같은 모양인데, 곧 테라포밍 할 거라더군.”
그 말에 질문을 던졌지만... 역시나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자는 다시 휴게실로 향했다.
그곳에 서서, 폭풍을 바라보며, 교감했다. 저 폭풍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여자는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약혼자 옆을 지나갔다.
“라비니아, 어디 갔다 왔어.”라고 말한다. 여자는 그의 옷깃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 낌새다.
이 세계의 주민들은 항상 그랬다.
눈에 띄고 특출난 것엔 관심이 없다.
여자가 아무리 대담한 짓을 해도, 언제나 자신들의 루틴을 따를 뿐이었다.
사교 파티라는 좋은 그림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는 묻고 싶어서 더이상 견딜 수가 없는 질문을 내놓기로 했다.
“그 인공 세계란 거... 혹시 유리로 만들어진 거 아니야?”
“음? 그게 무슨... 당연히 아니지. 싸구려 장식도 아니고.”
여자의 눈이 크게 뜨이고, 동공이 작아졌다.
찾았다.
도노반은 여자의 어깨 너머, 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아름답지? 꼭 당신처럼...”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의 답변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행동으로 옮길 때이다.
꽃의 소용돌이가 고요하게 휘몰아치는 동안,
여자는 음식이 올려진 테이블 앞으로 가, 빵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세계에선 이런 멋진 쇼가 끝없는 골짜기에서 펼쳐질 거라더군.
지금은 황량한 폐허이지만 말이야.”
도노반이 계속 말했다.
여자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떤 물건의 손잡이를 잡았다.
“객석을 하나 잡을 수만 있으면, 정말 훌륭한 경험이 될거야.
거기다 그 잠재력을 생각해보라고.”
여자가 숨을 내뱉었다. 이번 여정도 의미가 없었다.
매끈한 나무 손잡이를 꽉 쥐었다.
등을 돌려 약혼자에게 다가가,
그 목으로 손에 쥔 것을 휘둘렀다.
빵칼의 날이 목을 깊숙히 파고들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단 한 줌의 적대감조차 지니지 않은 채, 여자는 말없이 남자의 목을 베고,
그곳에서 나오는 것을 조심히 살펴보았다.
눈을 사로잡는 백색과 사파이어색의 빛.
파티의 젊은 손님들이 풍경의 변화를 칭찬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마법같이 신기하다.
여자도 라운지로 돌아와 인공 자연 풍경이 소용돌이치는 모습을 감상했다.
화려한 연극이다.
저 흩날리는 꽃잎들을 처음 보았던 때를 기억하다가,
이제 “기억” 하는 것조차 질린 듯 눈을 감는다.
여자는 몇 시간 동안 여러 가지를 시험했다.
창문은 잠겼고, 뒷문에는 빗장이 걸려있었으며, 환풍구는 막혀있었다.
이에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누군가 이 통로들을 막은 걸까? 아니면 내가 여기에 갇혀있기 때문에 막힌 걸까?”
비유와 감상은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정말로 그런 건지 알기는 힘들었지만.
저택을 마음껏 돌아다니며 구석구석까지 살펴본 후,
여자는 지인 또는 친구로서 알고 있는 손님들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날씨가...”
“국왕 전하께서...”
“지난주에...”
지루하고, 아무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
질문을 해도,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의미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처음부터 질문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여자의 흥미 분야인 공학, 기술, 진보에 관한 이야기는
손님들에게서 한 조각의 흥미도 끌어내지 못했다.
짜증이 난 여자는 아무 말없이 대화를 듣고 있기로만 했는데, 이윽고 이 말을 들었다.
“지금은 그냥 흙공 같은 모양인데, 곧 테라포밍 할 거라더군.”
그 말에 질문을 던졌지만... 역시나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 충분하다. 여자는 다시 휴게실로 향했다.
그곳에 서서, 폭풍을 바라보며, 교감했다. 저 폭풍이, 자기 자신인 것처럼.
여자는 자신을 향해 미소짓는 약혼자 옆을 지나갔다.
“라비니아, 어디 갔다 왔어.”라고 말한다. 여자는 그의 옷깃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이를 눈치채지 못한 낌새다.
이 세계의 주민들은 항상 그랬다.
눈에 띄고 특출난 것엔 관심이 없다.
여자가 아무리 대담한 짓을 해도, 언제나 자신들의 루틴을 따를 뿐이었다.
사교 파티라는 좋은 그림을 유지하기 위해.
여자는 묻고 싶어서 더이상 견딜 수가 없는 질문을 내놓기로 했다.
“그 인공 세계란 거... 혹시 유리로 만들어진 거 아니야?”
“음? 그게 무슨... 당연히 아니지. 싸구려 장식도 아니고.”
여자의 눈이 크게 뜨이고, 동공이 작아졌다.
찾았다.
도노반은 여자의 어깨 너머, 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아름답지? 꼭 당신처럼...”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의 답변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이제 행동으로 옮길 때이다.
꽃의 소용돌이가 고요하게 휘몰아치는 동안,
여자는 음식이 올려진 테이블 앞으로 가, 빵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 세계에선 이런 멋진 쇼가 끝없는 골짜기에서 펼쳐질 거라더군.
지금은 황량한 폐허이지만 말이야.”
도노반이 계속 말했다.
여자는 그의 말을 들으며 어떤 물건의 손잡이를 잡았다.
“객석을 하나 잡을 수만 있으면, 정말 훌륭한 경험이 될거야.
거기다 그 잠재력을 생각해보라고.”
여자가 숨을 내뱉었다. 이번 여정도 의미가 없었다.
매끈한 나무 손잡이를 꽉 쥐었다.
등을 돌려 약혼자에게 다가가,
그 목으로 손에 쥔 것을 휘둘렀다.
빵칼의 날이 목을 깊숙히 파고들었다.
아무런 감정 없이, 단 한 줌의 적대감조차 지니지 않은 채, 여자는 말없이 남자의 목을 베고,
그곳에서 나오는 것을 조심히 살펴보았다.
=====# 3-5 #=====
피가 아니다.
그 무엇도 아니다.
남자의 목이 끔찍하게 잘렸으나… 이 기억에는 “끔찍함”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여자의 눈앞엔 피로 흥건한 끔찍한 광경이 아니라, 잘려서 구겨진 종이와 같은 모습을 한, 남자의 목이 있었다.
그 안은 “그림자”가 아닌 “무공간”, 아무것도 없는 공허가 채우고 있었다. 상처의 끝부분은 희미하게 하얀색으로 빛났고, 여자가 든 칼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조각들이 부유했다.
도노반을 포함한 파티 손님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사람들이 쓰러지고, 여자들은 기절하며, 도노반은 자신의 목을 만졌다.
몇몇 남자가 여자에게 달려들어 팔과 목을 잡아 제압했다. >여자는 칼을 강하게 쥐고, 무표정으로 약혼자의 놀란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구속하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은 여자는, 도노반 뒤에서 쓰러져 비명을 지르는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뒤틀리다가, 시끄러워졌다. 조용해졌다. 그 순간에 이미, 이 기억은 망가져있던 것이다.
이 기억의 원본은 이렇지 않았다. 시간의 풍파에 매우 달라져버린 기억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평화로운 파티에서, 예비 신부가 자신의 약혼자를 공격하다니...
여자는 어떤 형태로든 반응을 이끌어내고자 했으므로, 지금 상황에 만족했다.
방 안의 어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인지조차 못했고, 어떤 사람들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이 정도의 기억 변조는 처음이었다.
최소한 성공이라 부를 수는 있을 정도의 성과였다.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바스러졌다. 공간이 구겨져 보일 정도로.
“휴양을 위해 세계를 하나 통째로 만들다니... 그것보다 훨씬 좋을 쓰임새가 있었을 텐데.”
여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손에 쥔 빵칼이 공중에 뜬 채 움직일 생각을 않자, 여자는 한숨을 쉬며 손을 놓았다.
“‘기억’도, ‘메아리’도, ‘반사상’도, 가장 중요한 ‘유리’도... 언급이 전혀 없었어.”
방이 줄어들었다.
“또 쓸모없는 꿈이었던 모양이네.”
행성이 갈라졌다.
풍경이 무너지며 하얀 빛이 사방에 나타나 눈을 쏘아붙였다. 이 기억에 존재했던 모든 소리가 한 번에 재생되었다.
여자는 그 유리 조각에서 눈을 감고 서서, 빛과 소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눈을 뜨자 보인 것은 희미하게 빛나는 텅 빈 세계였다.
마음속으로 명하자,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의 파도가 그녀를 덮치고, 이윽고 소녀의 앞에 펼쳐진 것은 가장 익숙하고, 가장 경멸스러웠던 세계.
하얀색 폐허의 세계. 아르케아, 기억의 세계였다.
“이번엔 예감이 좋았는데.” 소녀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회전하는 유리 조각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기억에도 이 세계의 창조에 관련된 단서는 없었어. 기억을 볼 수 있다면, 없애버릴 수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소녀가 유리 조각을 떠나보내자 그것이 땅 위에 흐르는 반짝이는 강으로 돌아갔다. 사야라는 이름의 소녀는 아무것도 없는 지평선을 쳐다보고서, 무의식적으로 입술에 손을 대고는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방금 전 기억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생각하며, 그전에 방문했던 수천 개의 기억과 비교했다.
그 무엇도 아니다.
남자의 목이 끔찍하게 잘렸으나… 이 기억에는 “끔찍함”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여자의 눈앞엔 피로 흥건한 끔찍한 광경이 아니라, 잘려서 구겨진 종이와 같은 모습을 한, 남자의 목이 있었다.
그 안은 “그림자”가 아닌 “무공간”, 아무것도 없는 공허가 채우고 있었다. 상처의 끝부분은 희미하게 하얀색으로 빛났고, 여자가 든 칼 주변으로 형형색색의 조각들이 부유했다.
도노반을 포함한 파티 손님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은 공포에 질려있었다. 사람들이 쓰러지고, 여자들은 기절하며, 도노반은 자신의 목을 만졌다.
몇몇 남자가 여자에게 달려들어 팔과 목을 잡아 제압했다. >여자는 칼을 강하게 쥐고, 무표정으로 약혼자의 놀란 눈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구속하는 사람들에게 별다른 저항을 보이지 않은 여자는, 도노반 뒤에서 쓰러져 비명을 지르는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뒤틀리다가, 시끄러워졌다. 조용해졌다. 그 순간에 이미, 이 기억은 망가져있던 것이다.
이 기억의 원본은 이렇지 않았다. 시간의 풍파에 매우 달라져버린 기억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평화로운 파티에서, 예비 신부가 자신의 약혼자를 공격하다니...
여자는 어떤 형태로든 반응을 이끌어내고자 했으므로, 지금 상황에 만족했다.
방 안의 어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인지조차 못했고, 어떤 사람들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져버리긴 했지만. 이 정도의 기억 변조는 처음이었다.
최소한 성공이라 부를 수는 있을 정도의 성과였다.
세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바스러졌다. 공간이 구겨져 보일 정도로.
“휴양을 위해 세계를 하나 통째로 만들다니... 그것보다 훨씬 좋을 쓰임새가 있었을 텐데.”
여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손에 쥔 빵칼이 공중에 뜬 채 움직일 생각을 않자, 여자는 한숨을 쉬며 손을 놓았다.
“‘기억’도, ‘메아리’도, ‘반사상’도, 가장 중요한 ‘유리’도... 언급이 전혀 없었어.”
방이 줄어들었다.
“또 쓸모없는 꿈이었던 모양이네.”
행성이 갈라졌다.
풍경이 무너지며 하얀 빛이 사방에 나타나 눈을 쏘아붙였다. 이 기억에 존재했던 모든 소리가 한 번에 재생되었다.
여자는 그 유리 조각에서 눈을 감고 서서, 빛과 소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눈을 뜨자 보인 것은 희미하게 빛나는 텅 빈 세계였다.
마음속으로 명하자,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빛의 파도가 그녀를 덮치고, 이윽고 소녀의 앞에 펼쳐진 것은 가장 익숙하고, 가장 경멸스러웠던 세계.
하얀색 폐허의 세계. 아르케아, 기억의 세계였다.
“이번엔 예감이 좋았는데.” 소녀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회전하는 유리 조각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기억에도 이 세계의 창조에 관련된 단서는 없었어. 기억을 볼 수 있다면, 없애버릴 수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소녀가 유리 조각을 떠나보내자 그것이 땅 위에 흐르는 반짝이는 강으로 돌아갔다. 사야라는 이름의 소녀는 아무것도 없는 지평선을 쳐다보고서, 무의식적으로 입술에 손을 대고는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방금 전 기억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다시 생각하며, 그전에 방문했던 수천 개의 기억과 비교했다.
=====# 3-6 #=====
“이 세계들에선 인간은 거의 신과 같아.”
소녀는 그걸 깨달았다.
오른 눈에 꽃이 핀 소녀가 머릿속에서 재생시키던 기억의 표지를 다시 덮었다. 완전히 무의미했던 여정은 아니었다.
거의 무의미했을 뿐.
처음엔 짜증이 났다. 그 세계는 아주 시시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 시시함 덕분에 인류의 잠재성에 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방법”에 대한 이론보다,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이 그녀의 원동력이었다. 이번 여정 또한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한,
적어도 그 일부라도 붙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언제나 그녀를 앞으로 향하게 만들어주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기억을 200개쯤 보았을 때, 다른 목적이 생겨났다.
“이론을 재구축해버릴 만큼 새로운 건 없었어.”
소녀가 유리 조각의 강으로부터 한 조각을 불러오며 속삭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정보는 얻었지.”
소녀는 그 조각의 빛을 바라보며, 그 너머에 비추어지고 있는 과거의 영상을 살폈다.
“거의 다 왔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속삭였다.
소녀는 손 위에 조각을 올리고서, 이젠 익숙해진 다리를 건넜다. 왼쪽으로는 한때 도시였을 건물들이 중구난방으로 무너져있고, 오른쪽으로는 유리와 돌이 혼란스럽게 섞여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따라 “태어났던” 장소로 돌아갔다.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는 상관없었다.
소녀는 오랫동안 걷다, 네 개의 무너진 벽 사이로 반짝이는 커다란 유리 구체가 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그 구체는 만들어지다 만 듯, 깨진 조개껍질과 같이 부서져있었다. 웃음, 눈물, 죽음, 그리고 축제의 기억이 구체의 일부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꽃과 들판, 사막과 바다, 동물과 사람, 그리고 기계... 그런 기억들이 구체를 채웠다.
기억을 서로 이어 붙인다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지는 소녀도 몰랐다. 이렇게 갖다 붙인다고 해서 기억끼리 “연결”되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새로 가져온 조각의 빛을 보았다.
“너는 얼마나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을까.” 소녀가 말한다.
그렇게 조각이 열리고, 소녀는 새로운 시간대로 들어갔다. 곧, 인공조명과, 저녁놀로 물든 하늘에 뜬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탑과, 공중을 나는 차량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마주했다.
불쾌한 공기가 폐를, 불협화음이 귀를 엄습했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 새로운 과거를 지니게 된 소녀는, 감정 없이 앞에 펼쳐진 광경을 살폈다.
수백 개의 질문이 떠올랐다.
무슨 대가를 치르든, 무슨 일을 해야 하든, 반드시 그 답을 찾으리라.
소녀는 그걸 깨달았다.
오른 눈에 꽃이 핀 소녀가 머릿속에서 재생시키던 기억의 표지를 다시 덮었다. 완전히 무의미했던 여정은 아니었다.
거의 무의미했을 뿐.
처음엔 짜증이 났다. 그 세계는 아주 시시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 시시함 덕분에 인류의 잠재성에 대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지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방법”에 대한 이론보다, “이유”를 설명하는 이론이 그녀의 원동력이었다. 이번 여정 또한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한,
적어도 그 일부라도 붙잡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언제나 그녀를 앞으로 향하게 만들어주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기억을 200개쯤 보았을 때, 다른 목적이 생겨났다.
“이론을 재구축해버릴 만큼 새로운 건 없었어.”
소녀가 유리 조각의 강으로부터 한 조각을 불러오며 속삭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가치 있는 정보는 얻었지.”
소녀는 그 조각의 빛을 바라보며, 그 너머에 비추어지고 있는 과거의 영상을 살폈다.
“거의 다 왔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속삭였다.
소녀는 손 위에 조각을 올리고서, 이젠 익숙해진 다리를 건넜다. 왼쪽으로는 한때 도시였을 건물들이 중구난방으로 무너져있고, 오른쪽으로는 유리와 돌이 혼란스럽게 섞여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다리를 따라 “태어났던” 장소로 돌아갔다.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는 상관없었다.
소녀는 오랫동안 걷다, 네 개의 무너진 벽 사이로 반짝이는 커다란 유리 구체가 있는 장소에 도달했다.
그 구체는 만들어지다 만 듯, 깨진 조개껍질과 같이 부서져있었다. 웃음, 눈물, 죽음, 그리고 축제의 기억이 구체의 일부분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꽃과 들판, 사막과 바다, 동물과 사람, 그리고 기계... 그런 기억들이 구체를 채웠다.
기억을 서로 이어 붙인다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을지는 소녀도 몰랐다. 이렇게 갖다 붙인다고 해서 기억끼리 “연결”되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충분했다.
소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새로 가져온 조각의 빛을 보았다.
“너는 얼마나 많은 걸 보여줄 수 있을까.” 소녀가 말한다.
그렇게 조각이 열리고, 소녀는 새로운 시간대로 들어갔다. 곧, 인공조명과, 저녁놀로 물든 하늘에 뜬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이 솟아오른 탑과, 공중을 나는 차량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마주했다.
불쾌한 공기가 폐를, 불협화음이 귀를 엄습했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 새로운 과거를 지니게 된 소녀는, 감정 없이 앞에 펼쳐진 광경을 살폈다.
수백 개의 질문이 떠올랐다.
무슨 대가를 치르든, 무슨 일을 해야 하든, 반드시 그 답을 찾으리라.
3.2. 레테
3.2.1. 해금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5-1 | Ambivalent-1 | 레테로 Genesis 클리어 | ||
5-2 | Ambivalent-2 | 레테로 Moonheart 클리어 | ||
5-3 | Ambivalent-3 | 레테로 Romance Wars 클리어 | ||
5-4 | Ambivalent-4 | 레테로 Blossoms 클리어 | ||
5-5 | Ambivalent-5 | 레테로 corps-sans-organes 클리어 | ||
5-6 | Ambivalent-6 | 레테로 Lethaeus 클리어 |
3.2.2. Ambivalent Vision
=====# 5-1 #=====절벽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생의 굴레에서 벗어난 이들은 소라게가 껍질을 버리듯 영혼을 두고 가는 법이며, 새로운 생명이 그로 말미암아 태어난다. 그들의 정신은 머리 위에서 찬란한 광채를 발하는 연못으로 승천한다.
마치 물처럼, 정해진 형태가 없는 영혼들. 그 새하얀 영혼들이 하늘을 꿰뚫은 강렬한 색채의 연못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회색으로만 가득 찬 세계에 비추는 형형색색의 빛깔.
이를 혹자가 보았다면 경이로운 광경이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소녀에게 이는 일상의 풍경이자, 일감에 지나지 않았다.
“방금 왼쪽에서 뭔가 흔들렸나?”
소녀의 뒤쪽에서 동료가 물어왔다. 소녀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가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을 보았다.
동료의 무릎 위에 얹혀 있는 넓고 얕은 검은색 그릇에는 물이 담겨있었다.
물 위에 물체를 떨어뜨려 그 파문으로 운명을 점치는, 일종의 주술에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아직 물 표면에 파문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막 점을 친 참이었다.
“아니, 왜? 뭔가 이상해?”
소녀가 가볍게 대답했다.
“땅이 조금 흔들린 것 같아.” 남자가 말했다.
“이런... 좋지 않은데. 더 가까이 다가가볼까?”
“흠... 균열이 벌어졌을 수도 있겠는데, 한 번 가봐.”
“그래.”
소녀는 그렇게 대답하고선, 절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빽빽하게 들어찬 영혼들 덕에 소녀는 천천히 낙하할 수 있었다. 소녀가 자신의 옷을 꽉 맞게 조이던 실을 찾아내 당기자 옷이 헐렁해지며 약한 빛을 발했다.
옷이 큰 소리를 내며 펄럭거리자 영혼들의 영향이 적어져 소녀의 낙하가 빨라졌다.
소녀는 착지함과 동시에 허리춤에서 낫을 꺼내들어 펼쳤다. 그리고 날을 위로 향하게 뒤집은 뒤 밑동 위에 올라타,
멀리 있는 목적지까지 미끄러지듯 날아갔다.
균열 내에 갇힌 영혼들을 구슬려 빼낸 후 균열을 닫는 것.
다시 절벽으로 돌아와 또다른 이상이 생기는지 감시하는 것.
그것이 소녀의 임무였다. 매일이 이런 일의 반복이었다.
임무를 수행하다 자신의 때가 오면 소녀 또한 영혼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다.
사실, 소녀의 때는 이미 왔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미... 소녀가 알던 세상과 삶은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있었다.
=====# 5-2 #=====
죽음이라는 게 이래서는 안된다.
죽음이란 결말이다. “다음 생” 따위는 없다. 태어나, 살아가고, 죽은 세계가 전부다.
소녀가 살아있을 적엔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천국이니, 지옥이니, 연옥이니, 모두 고대적 사람들이나 믿던 교훈적 허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 장소는 도대체 뭘까? 소녀는 어째서 이 정체불명의 세계에서 깨어나게 된 걸까? 대체 뭘까? 대체 뭘까...
이제 와서 그 질문에 의미가 있긴 한가?
“흠...”
소녀는 등대 위에서 무릎을 감싸고 앉아 사막을 살펴보았다. 하얀색, 하얀색, 끝없는 하얀색... 그 사이에 반짝이는 유리 조각.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붙은 물건이었다.
소녀는 턱을 괴고 나른하게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다리가 있었다.
“휴우...”
소녀는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일어서서 허리춤에서 낫을 꺼냈다. 낫은 소녀가 살아있을 때만큼 효과적이진 않았지만, 여전히 훌륭한 이동 수단이었다.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앞머리를 가르마의 반대편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손가락 끝이 소녀의 왼쪽 뿔에 닿았다.
그래, 나에겐 뿔이 있었지...
여태껏 아르케아에서 본 어떤 기억에서도, 뿔이 달린 인간은 본 적 없었다.
이 황량한 세계에서 유희라고는 그 유리 조각들이 비추는 기억밖에 없었기에, 소녀는 아르케아를 들여다보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그들을 분류했다. 마치 기록처럼.
그러나 그 어디에도 그녀와 같은 모습의 사람이 등장하는 기억은 없었다.
소녀와 같은 종족... 종족... 종족? 종족이라 해도 되는 걸까? 소녀는 살아있을 적 어떤 “민족”의 일원이었던 걸까?
살아있을 때에도 지금처럼 영혼들을 관리하는 민족의 일원이던 걸까? 이제 와서 의미 없는 질문이지만, 생전의 기억을 좀 더 떠올린다면 예전의 자신에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소녀가 집으로 삼은 장소에서 어떤 유리 조각이 사라졌고, 남았으며, 새로 생겼는지 기록해야 한다.
소녀는 등대에서 내려와, 또 다른 일과를 준비했다.
죽음이란 결말이다. “다음 생” 따위는 없다. 태어나, 살아가고, 죽은 세계가 전부다.
소녀가 살아있을 적엔 한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천국이니, 지옥이니, 연옥이니, 모두 고대적 사람들이나 믿던 교훈적 허구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이 장소는 도대체 뭘까? 소녀는 어째서 이 정체불명의 세계에서 깨어나게 된 걸까? 대체 뭘까? 대체 뭘까...
이제 와서 그 질문에 의미가 있긴 한가?
“흠...”
소녀는 등대 위에서 무릎을 감싸고 앉아 사막을 살펴보았다. 하얀색, 하얀색, 끝없는 하얀색... 그 사이에 반짝이는 유리 조각.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붙은 물건이었다.
소녀는 턱을 괴고 나른하게 왼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디로 이어지는지 모를 다리가 있었다.
“휴우...”
소녀는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일어서서 허리춤에서 낫을 꺼냈다. 낫은 소녀가 살아있을 때만큼 효과적이진 않았지만, 여전히 훌륭한 이동 수단이었다.
소녀는 무의식적으로 앞머리를 가르마의 반대편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면서 손가락 끝이 소녀의 왼쪽 뿔에 닿았다.
그래, 나에겐 뿔이 있었지...
여태껏 아르케아에서 본 어떤 기억에서도, 뿔이 달린 인간은 본 적 없었다.
이 황량한 세계에서 유희라고는 그 유리 조각들이 비추는 기억밖에 없었기에, 소녀는 아르케아를 들여다보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그들을 분류했다. 마치 기록처럼.
그러나 그 어디에도 그녀와 같은 모습의 사람이 등장하는 기억은 없었다.
소녀와 같은 종족... 종족... 종족? 종족이라 해도 되는 걸까? 소녀는 살아있을 적 어떤 “민족”의 일원이었던 걸까?
살아있을 때에도 지금처럼 영혼들을 관리하는 민족의 일원이던 걸까? 이제 와서 의미 없는 질문이지만, 생전의 기억을 좀 더 떠올린다면 예전의 자신에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소녀가 집으로 삼은 장소에서 어떤 유리 조각이 사라졌고, 남았으며, 새로 생겼는지 기록해야 한다.
소녀는 등대에서 내려와, 또 다른 일과를 준비했다.
=====# 5-3 #=====
낫은 여전히 잘 날았다.
마녀가 빗자루를 타듯 낫의 손잡이 위에 올라탄 소녀는 파괴된 거리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날은 그녀의 뒤에 위를 향한 채 꼿꼿이 서있다가, 모서리를 돌 때마다 기울어졌다.
소녀는 낫을 타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는 모양새였다.
소녀는 날아가는 도중 한 유리 조각의 무리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강처럼 도로를 따라 흐르는 모습이었는데, 적어도 이 무리를 발견한 이후로 그 어떤 조각도 벗어나거나 새로 합류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는 매우 특이한 일이었기에, 소녀는 매일 이 조각의 무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도 무리를 이루는 유리 조각에 변화는 없었다.
연극, 노래, 슬픔, 기묘하고 거대하며 재빠른 기계에 대한 기억들.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실로 특이한 조합이다.
그 사실이 소녀에겐 매우 흥미로웠다.
소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기억을 찾으려 눈을 굴렸다.
물론 기억의 무리에서 특정한 기억 하나를 찾아내는 일은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일과 같다. 하지만 그 기억은, 소녀에게 특별히 이끌리고 있었다.
한 유리 조각이 무리에서 벗어나 소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선, 낫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 기억에는 조그만 수제 피리가 만들어지는 최종 공정이 담겨 있었다. 악기를 완성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장인은 이 마지막 한순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다.
악기가 소리를 내는 그 순간을 위해.
장인이 플루트를 불어보았다. 그리고선 음이 안 맞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소리는 났다.
이 기억은 한 기나긴 여정의 끝이기도 했고, 더욱 장대한 여정의 시작이기도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순간을 포착한 기억이다.
무리 속의 다른 기억들 또한 특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녀가 빗자루를 타듯 낫의 손잡이 위에 올라탄 소녀는 파괴된 거리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날은 그녀의 뒤에 위를 향한 채 꼿꼿이 서있다가, 모서리를 돌 때마다 기울어졌다.
소녀는 낫을 타는 것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는 모양새였다.
소녀는 날아가는 도중 한 유리 조각의 무리로 시선을 옮겼다. 마치 강처럼 도로를 따라 흐르는 모습이었는데, 적어도 이 무리를 발견한 이후로 그 어떤 조각도 벗어나거나 새로 합류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는 매우 특이한 일이었기에, 소녀는 매일 이 조각의 무리를 확인하고 있었다. 오늘도 무리를 이루는 유리 조각에 변화는 없었다.
연극, 노래, 슬픔, 기묘하고 거대하며 재빠른 기계에 대한 기억들.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실로 특이한 조합이다.
그 사실이 소녀에겐 매우 흥미로웠다.
소녀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기억을 찾으려 눈을 굴렸다.
물론 기억의 무리에서 특정한 기억 하나를 찾아내는 일은 백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일과 같다. 하지만 그 기억은, 소녀에게 특별히 이끌리고 있었다.
한 유리 조각이 무리에서 벗어나 소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선, 낫을 잡고 있던 오른손을 들어 올려 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그 기억에는 조그만 수제 피리가 만들어지는 최종 공정이 담겨 있었다. 악기를 완성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장인은 이 마지막 한순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낸다.
악기가 소리를 내는 그 순간을 위해.
장인이 플루트를 불어보았다. 그리고선 음이 안 맞는지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소리는 났다.
이 기억은 한 기나긴 여정의 끝이기도 했고, 더욱 장대한 여정의 시작이기도 했다.
참으로 흥미로운 순간을 포착한 기억이다.
무리 속의 다른 기억들 또한 특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 5-4 #=====
그 기억은 소중하다.
사실, 소녀가 "소중하다"라고 생각하던 기억은 적어도 한 번쯤 그녀에게로 날아온 적이 있는 것들이다.
첫 반려동물의 기억, 생존과 희생의 기억, 첫 말의 기억, 용기를 주는 연설의 기억, 중요하고 개인적인 대화의 기억...
가끔, 소녀가 기억의 무리 옆을 지나갈 때면, 이런 소중한 기억들이 그녀를 따라오곤 했다.
그럴 때면 기분이 썩 괜찮았다. 이렇게 특별한 기억들이 한 장소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쁘기까지 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훨씬 더 좋은 일은 따로 있었다.
아르케아의 세계는 기억의 보관소다. 충치의 기억, 맛있는 식사의 기억, 승마의 기억, 우유를 엎지른 기억, 무엇이든, 기억되었다면 이 장소로 오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런 평범하거나 특별한 기억 하나하나가 사람을 이룬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억이란 어떤 사람이 살아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이다.
사람들은 기억을 남기기 위해 기념비와 묘비를 세우기도 한다. 잊힌다는 것은...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소녀가 경험하고 있듯, 어쩌면 죽음보다 더 비극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
소녀는 말없이 멈추어 서서 한때 광장이었을 장소에 발을 디뎠다. 이곳에선, 셀 수도 없이 많은 수의 유리 조각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소녀가 생각하기에, 이 장소는 마치... 정원과 같았다. 정원을 이루는 “식물”들은 여기서 자라난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것이긴 했지만.
소녀는 어찌 됐든 이 정원을 가꾸었다. 이 조각들은 소녀가 이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집”으로 여기는 장소 주변에서 찾아낸 것들이다.
이 조각들은 소녀가 깨어났을 때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흘러들어온 것들이다.
“흐음...”
그녀가 콧소리를 내며 유리 조각들을 모았다. 조각들은 보통 떠나진 않지만, 가끔 무리에서 벗어날 때가 있다.
소녀는 그게 걱정이었다.
...아르케아가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형태를 한 것에 이유는 있는 걸까?
...생전에, 소녀는 질문은 많이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깨달았었다.
사실, 소녀가 "소중하다"라고 생각하던 기억은 적어도 한 번쯤 그녀에게로 날아온 적이 있는 것들이다.
첫 반려동물의 기억, 생존과 희생의 기억, 첫 말의 기억, 용기를 주는 연설의 기억, 중요하고 개인적인 대화의 기억...
가끔, 소녀가 기억의 무리 옆을 지나갈 때면, 이런 소중한 기억들이 그녀를 따라오곤 했다.
그럴 때면 기분이 썩 괜찮았다. 이렇게 특별한 기억들이 한 장소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기쁘기까지 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훨씬 더 좋은 일은 따로 있었다.
아르케아의 세계는 기억의 보관소다. 충치의 기억, 맛있는 식사의 기억, 승마의 기억, 우유를 엎지른 기억, 무엇이든, 기억되었다면 이 장소로 오게 되어있다.
그리고 그런 평범하거나 특별한 기억 하나하나가 사람을 이룬다.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뿐만 아니라, 기억이란 어떤 사람이 살아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이다.
사람들은 기억을 남기기 위해 기념비와 묘비를 세우기도 한다. 잊힌다는 것은...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소녀가 경험하고 있듯, 어쩌면 죽음보다 더 비극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
소녀는 말없이 멈추어 서서 한때 광장이었을 장소에 발을 디뎠다. 이곳에선, 셀 수도 없이 많은 수의 유리 조각이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소녀가 생각하기에, 이 장소는 마치... 정원과 같았다. 정원을 이루는 “식물”들은 여기서 자라난 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것이긴 했지만.
소녀는 어찌 됐든 이 정원을 가꾸었다. 이 조각들은 소녀가 이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집”으로 여기는 장소 주변에서 찾아낸 것들이다.
이 조각들은 소녀가 깨어났을 때 원래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흘러들어온 것들이다.
“흐음...”
그녀가 콧소리를 내며 유리 조각들을 모았다. 조각들은 보통 떠나진 않지만, 가끔 무리에서 벗어날 때가 있다.
소녀는 그게 걱정이었다.
...아르케아가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형태를 한 것에 이유는 있는 걸까?
...생전에, 소녀는 질문은 많이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걸 깨달았었다.
=====# 5-5 #=====
“음?”
아르케아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 왜 생전의 기억이 떠올랐지...?
소녀의 머릿속에 마치 손님처럼 나타난 것은, 조그만 기억의 편린이었다.
처음엔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것이 자신의 기억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억이 난다. 어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래된 나무 두 그루 밑에 조용히 앉아있던 소녀와 동료. 영혼의 강은 아래로 떠내려갔고, 밤이 하늘을 뒤덮었다.
“모순이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고? 이 일을 반복해 봐. 매일매일...
영혼은 숫자로밖에 안 보이지. 많냐, 적냐. 그게 다라고. 그런데 그게 우리가 인간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니야.
오히려... 인간성에 너무 매달려서,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지.”
“하지만 이런 걸 너무 신경 쓰지 마.” 남자가 영혼의 강을 보며 소녀를 다독이듯 말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면 정신이 먼저 망가져버릴 테니까.
너, 글렌(Glen)에 갔을 때 이 길을 걷고 싶은 이유가 뭐라고 설명했지?”
소녀가 대답했다.
“역시, 다들 똑같이 대답한다니까.” 남자가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대답만 기억해. 그럼 괜찮을 거야.”
기억은 그렇게 끝났다.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소녀의 정신이 현재로 돌아왔다. 대답을 기억하라고?
대답... 대답... 내가 뭐라고 답했었지?
“기억이... 안나.”
소녀가 약하게, 그러나 무겁게, 속삭였다.
남자가 욿았다. 소녀는 그걸 이제야 느꼈다. 슬픈 사실을 깨달아버린 소녀의 눈이 흐릿하고 따스한 애도의 색으로 차올랐다.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너무 크게 조각나버린 기억은, 멋대로 질문을 던지고서 그 답은 주지 않았다. 소녀는 낙심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자신이 온전한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의 고통. 이를 어떻게 말로 설명할까?
유리의 구름 아래에서 소녀는 눈을 감고서, 고개를 숙이고 손을 얼굴에 갖다 댔다. 울지 않을 것이다.
울 수는 없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무시하기로 했던 현실이 자신을 덮쳐올 것만 같아서. 소녀는 가만히, 그 자세로 앉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않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
새하얀 세계에 홀로 웅크려앉은 사신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껴안았다.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한다.
돌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진정시키는 동안, 피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고개를 든다. 만약, 이곳이 죽음 이후의 세계라면...
소녀는 차라리 모든 것을 망각하길 바랄 것이다.
아르케아를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이 흔들렸다.
... 왜 생전의 기억이 떠올랐지...?
소녀의 머릿속에 마치 손님처럼 나타난 것은, 조그만 기억의 편린이었다.
처음엔 자신의 기억이 맞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것이 자신의 기억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기억이 난다. 어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래된 나무 두 그루 밑에 조용히 앉아있던 소녀와 동료. 영혼의 강은 아래로 떠내려갔고, 밤이 하늘을 뒤덮었다.
“모순이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모든 생명이 중요하다고? 이 일을 반복해 봐. 매일매일...
영혼은 숫자로밖에 안 보이지. 많냐, 적냐. 그게 다라고. 그런데 그게 우리가 인간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니야.
오히려... 인간성에 너무 매달려서, 차가운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지.”
“하지만 이런 걸 너무 신경 쓰지 마.” 남자가 영혼의 강을 보며 소녀를 다독이듯 말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면 정신이 먼저 망가져버릴 테니까.
너, 글렌(Glen)에 갔을 때 이 길을 걷고 싶은 이유가 뭐라고 설명했지?”
소녀가 대답했다.
“역시, 다들 똑같이 대답한다니까.” 남자가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대답만 기억해. 그럼 괜찮을 거야.”
기억은 그렇게 끝났다.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소녀의 정신이 현재로 돌아왔다. 대답을 기억하라고?
대답... 대답... 내가 뭐라고 답했었지?
“기억이... 안나.”
소녀가 약하게, 그러나 무겁게, 속삭였다.
남자가 욿았다. 소녀는 그걸 이제야 느꼈다. 슬픈 사실을 깨달아버린 소녀의 눈이 흐릿하고 따스한 애도의 색으로 차올랐다. 새로운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너무 크게 조각나버린 기억은, 멋대로 질문을 던지고서 그 답은 주지 않았다. 소녀는 낙심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자신이 온전한 자신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의 고통. 이를 어떻게 말로 설명할까?
유리의 구름 아래에서 소녀는 눈을 감고서, 고개를 숙이고 손을 얼굴에 갖다 댔다. 울지 않을 것이다.
울 수는 없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무시하기로 했던 현실이 자신을 덮쳐올 것만 같아서. 소녀는 가만히, 그 자세로 앉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울지 않을 거야. 절대로. 절대로!
새하얀 세계에 홀로 웅크려앉은 사신은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껴안았다. 생각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한다.
돌리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진정시키는 동안, 피하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고개를 든다. 만약, 이곳이 죽음 이후의 세계라면...
소녀는 차라리 모든 것을 망각하길 바랄 것이다.
=====# 5-6 #=====
소녀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혼란은, 침묵을 가져왔다.
원래 말이 없던 그녀지만, 그 정도가 더 심해져 며칠이고 이어졌다.
그 기억의 가장 중요한 부분, 질문은 많이 하지 않는 게 좋다는 것. 소녀가 깨달은, 여태껏 지키려던 철칙이었다.
그러나 이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옛 기억의 맛은 너무나 달콤했다. 소녀는 그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해낸 것보다 그렇지 못한 것이 압도적으로 많았기에, 자신이 반쪽짜리 인간임을 다시 깨닫게 될 뿐이었다.
이젠 그냥 잊어버리자.
소녀는 오늘도 형형색색의 기억들을 마을 광장으로 인도했다. 이 행위를 일과로, 습관으로, 결국은 본능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어쩌면 단순한 일만 반복하다 보면 마음속에서 자신을 잡아먹으려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절망의 구덩이로부터 멀어질지도 모른다.
감정을 가져서 느낄 수 있는 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뿐이라면, 차라리 모든 걸 잊어버리는 망각을 택하겠다.
아르케아 조각들을 이끄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하늘에서 반짝이던 어떤 조각에 눈이 갔다. 소녀는 별생각 없이, 그 조각을 가까이 끌어왔다.
그것에 비친 것은 길가에 쭈그려앉아 손으로 무언가를 감싼 아이의 모습이었다. 개미들이 아이의 손을 피해 갔다.
하지만 그 손이 감싸고 있는 것에는 관심이 있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사신은 좀 더 집중해서 이 기억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숨기고 있던 것은 다친 딱정벌레였다. 잠시 생각한 후, 아이는 두 손에 딱정벌레를 담아 올렸다.
그게 기억의 전부였다.
소녀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이 얼마나... 아무런 의미도 없는 기억인가.
딱정벌레는 살아났나? 아이는 얼마나 오래 살았을까? 언제까지 이 일을 기억했을까?
바보같다...
소녀는 웃음을 내뱉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기억을 떠올림으로 자신이 이 세계에 있는 목적을 잊어버리게 되다니.
아르케아는 기억의 세계다. 죽은 자의 기억인지, 산 자의 기억인지. 그런 건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아르케아는 모두가 잊어버려도 좋을 법한 이야기들을 기록한 곳이다.
영혼이, 몸이, 기념비가, 대지 그 자체가 소멸해버릴지라도,
어떻게든, 아르케아는 그들을 기록한다.
소녀는 여기선 혼자다. 동료도 곁에 없다. 깨어났을 때 무얼 하라고 시키는 이도 없었다. 그렇다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소녀는 지금 이 세계에 살고 있다. 옛 삶은 끝났다. 결말이 지어진 이야기다.
하지만 소녀에겐 아직 주체성이 남아있다. 아직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왜 영혼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아직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의 반쪽짜리 자신도, 당시의 완전했던 자신과 같은 답을 내놓았을 거란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도 기억도 한순간에 사라져버릴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선 다르다. 소녀 자신의 기억은 잊어버렸을지 몰라도, 이 기억들은 그렇지 않다.
“영혼의 관리자”에서 “기억의 관리자”로. 나쁘지 않은 울림이다.
그대들은, 내가 여기에 있는 한, 기억될 것이다.
영원히.
3.3. 코우
3.3.1. 해금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4-1 | Crimson-1 | Paradise 클리어 | ||
4-2 | Crimson-2 | 코우로 Party Vinyl 클리어 | ||
4-3 | Crimson-3 | 코우로 Flashback 클리어 | ||
4-4 | Crimson-4 | 코우로 Paradise 클리어 | ||
4-5 | Crimson-5 | Flyburg and Endroll 클리어 | ||
4-6 | Crimson-6 | 코우로 Nirv lucE 클리어 | ||
4-7 | Crimson-7 | 코우로 Diode 클리어 | ||
4-8 | Crimson-8 | 코우로 GLORY : ROAD 클리어 |
3.3.2. Crimson Solace
=====# 4-1 #=====낮이 끝없이 이어진다면 결국 질리기 마련이다.
내려갈 생각을 않는 태양 아래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면 누구든지 제발 달을 보여달라고 빌게 될 것이다.
소녀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낮이 80일동안 쭉...”
“아니... 7개월인가?”
“1년이던가...?”
그녀가 집이라 부르는 건물의 벽 틈새로 햇빛이 또 새어들어왔다. 잠꼬대가 고약한 소녀는 자는 사이에 바닥을 굴러 마침 햇빛이 비치는 곳에 딱 들어맞게 누워버린 모양이다.
소녀는 낮은 신음을 냈다
“제발 누가 불좀 꺼줘...”
소녀는 마지못해 일어났다.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폈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문을 찾아, 끝없이 넓은 아르케아의 세계에서 일과를 시작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소녀의 모험은 즐거운 일만 가득한 건 아니었고, 긴 여정의 끝에 언제나 대단한 발견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가 완전 백지의 상태로 이 세계에 깨어난 이후로 단 두가지, 절대로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하늘, 그리고 소녀의 열정. 이 둘은 계속해서 빛나고 있다.
“좋았어... 우선 준비운동부터 할까!” 혼잣말로 속삭였다.
소녀가 앞으로 손을 뻗자 커다란 유리가 소녀 쪽으로 날아왔다.
기억의 조각, “아르케아”가 아니다.
크기가 많이 클 뿐인 평범한 유리판이다. 소녀는 유리판에 올라다 또다른 유리판을 불러냈다.
이 세계를 수놓은 폐허 도시들과는 멀리 떨어진 섬의 해변에 있는 외딴 건물. 그것이 소녀의 집이었다.
해변이라고 해봐야 바다는 없었고, 그녀의 집과 같은 건물이 마치 가재가 버린 껍질처럼 해변 곳곳에 세워져있을 뿐이었다.
섬의 중심부는 하얗고 커다란 기괴한 나무가 울창하게 자란 숲이었다.
소녀의 손에 집들은 성한 곳이 없었다. 손가락질 한 번에 벽과 창문은 임시 계단이 되었다가, 경주로가 되었다가, 터널이 되었다.
소녀는 반짝이는 터널을 순식간에 내달렸다. 이것이 준비운동이었다.
깨어난 후로 며칠이 되지 않아 소녀는 빠르게도 이 세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르케아의 세계는 그녀의 변덕에 맞춰 움직여주었다.
그 와중, 텅 빈 바다의 모래 위에서 무언가가, 한때 바다였던 드넓은 땅 위에 흩어져 있는 무언가가 반짝였다.
소녀는 그것에 한 번 눈길을 주고선 숨을 들이쉬고,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 4-2 #=====
소녀는 자신이 올라탄 유리판은 얼마든지 조종할 수 있었지만 아르케아만큼은 다룰 수 없었다.
이 기억의 세계에서 소녀를 따라오는 기억의 조각은 없었다. 관찰하거나 방문할 수 있는 게 고작이었다.
과장된 기합 소리를 내며 소녀는 유리판에서 뛰어내렸다. 소녀의 뒤에 있던 터널은 어느새 무너진 채였다.
그녀는 공중에서 오른손을 뻗어, 침대에 있던 이불을 불러와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러고는 무겁고 푹신한 어떤 물건을 불러냈다. 색이 바랜 커다란 흔들의자가 날아와 아직 공중에 있던 그녀를 받았다. 나태한 자의 옥좌와 같았다.
그렇게 소녀는 옥좌에 앉은 채 집 위로 날아가, 묘비와 같은 고층건물로 가득 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숨을 내쉬었다.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오늘의 “아침”도 완벽했다. 그러나 수평선을 바라보는 소녀의 마음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 세계는 얼마나 큰 걸까? 대체 뭐가 있는 걸까? 내가 여태껏 보아왔던 게 전체의 3분의 1은 될까? 16분의 1일까?
이 세계는 거대하고, 거대한 만큼 흩어져 있는 기억의 조각도 많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평화로운 날씨를 만끽하며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부드럽게 앞뒤로 흔들던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여긴 무지막지하게 거대한데다 이치를 알 수 없는 세계다. 이 경이로운 세계가 소녀, 자신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소녀가 눈을 떴다. 하늘을 여전히 빛으로 반짝였다.
세상 반대편 어딘가의 하늘은 별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 하늘 아래에선 다른 소녀가 태양을 보고 싶다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붉은 옷의 소녀는 이불을 잡아끌어 어깨까지 덮었다.
낮이 끝나지 않는다는 건, 매일매일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이다.
이 여정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기억의 세계에서 소녀를 따라오는 기억의 조각은 없었다. 관찰하거나 방문할 수 있는 게 고작이었다.
과장된 기합 소리를 내며 소녀는 유리판에서 뛰어내렸다. 소녀의 뒤에 있던 터널은 어느새 무너진 채였다.
그녀는 공중에서 오른손을 뻗어, 침대에 있던 이불을 불러와 자신의 몸을 감쌌다.
그러고는 무겁고 푹신한 어떤 물건을 불러냈다. 색이 바랜 커다란 흔들의자가 날아와 아직 공중에 있던 그녀를 받았다. 나태한 자의 옥좌와 같았다.
그렇게 소녀는 옥좌에 앉은 채 집 위로 날아가, 묘비와 같은 고층건물로 가득 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숨을 내쉬었다.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오늘의 “아침”도 완벽했다. 그러나 수평선을 바라보는 소녀의 마음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 세계는 얼마나 큰 걸까? 대체 뭐가 있는 걸까? 내가 여태껏 보아왔던 게 전체의 3분의 1은 될까? 16분의 1일까?
이 세계는 거대하고, 거대한 만큼 흩어져 있는 기억의 조각도 많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평화로운 날씨를 만끽하며 흔들의자에 앉아 몸을 부드럽게 앞뒤로 흔들던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여긴 무지막지하게 거대한데다 이치를 알 수 없는 세계다. 이 경이로운 세계가 소녀, 자신 한 사람만을 위해 존재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소녀가 눈을 떴다. 하늘을 여전히 빛으로 반짝였다.
세상 반대편 어딘가의 하늘은 별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 하늘 아래에선 다른 소녀가 태양을 보고 싶다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붉은 옷의 소녀는 이불을 잡아끌어 어깨까지 덮었다.
낮이 끝나지 않는다는 건, 매일매일이 새로운 시작이라는 뜻이다.
이 여정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 4-3 #=====
“흐음... 그런데...”
소녀가 안락의자로 몸을 더 파묻으며 혼잣말로 속삭였다.
“저 위에 태양이 있긴 한 건가?”
소녀가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쳐다보고선 조용히 생각한다.
태양이라 할 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이리도 고르게 빛이 퍼지는 이유가 뭘까?
여태껏 소녀는 땅 위에서만 움직였다... 하늘로 올라가 보는 건 어떨까?
악동같은 미소가 소녀의 얼굴에 퍼졌다.
소녀는 의자 위에 서서 이불을 내던졌다. 떨어지는 이불 옆으로 나무 기둥이 날아올라왔다.
소녀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날아오던 기둥에 달린 조그만 철막대를 잡았다. 기둥의 옆면에 단단히 발을 고정하고,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소녀는 이 기둥이 다른 세계에선 전기를 전달하는 용도로 쓰였던 구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밑 쪽에 있는 다른 철막대에 소녀가 발을 갖다 대자, 기둥에 한 발, 한 손으로 매달린 모양새가 되었다. 옛 세계의 흔적에 매달려있는 소녀에게 두려움은 없어 보였다.
소녀는 한 번 더 수평선 너머의 도시를 바라보고선,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타고 오를 것이 필요하다 느꼈다.
소녀의 집을 제외한 해변의 건물들이 또 해체되기 시작했다. 벽, 침대 뼈대, 수납장, 무너진 터널의 파편들이 모래를 박차고 일제히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것들이 한곳에 모여, 서서히 어떤 물체의 모양이 되어갔다. 그러나 소녀는 건축에 재능이 없었다.
소녀가 만든 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으며, 서서히 하늘을 향해 쌓아 올려지다가 이따금씩 이상한 각도로 뒤틀렸다.
아쉽게도 소녀가 사는 섬에 자원이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재가 모두 쓰고도 반밖에 완성되지 않은 탑을 보며 소녀는 표정을 구겼다. 아직 높이가 1킬로미터도 되지 않았다.
소녀는 짜증을 내며 수평선 너머의 도시를 바라보고선 손을 뻗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잡아당겼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소녀는 강력했지만 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녀가 안락의자로 몸을 더 파묻으며 혼잣말로 속삭였다.
“저 위에 태양이 있긴 한 건가?”
소녀가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쳐다보고선 조용히 생각한다.
태양이라 할 것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이리도 고르게 빛이 퍼지는 이유가 뭘까?
여태껏 소녀는 땅 위에서만 움직였다... 하늘로 올라가 보는 건 어떨까?
악동같은 미소가 소녀의 얼굴에 퍼졌다.
소녀는 의자 위에 서서 이불을 내던졌다. 떨어지는 이불 옆으로 나무 기둥이 날아올라왔다.
소녀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날아오던 기둥에 달린 조그만 철막대를 잡았다. 기둥의 옆면에 단단히 발을 고정하고,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소녀는 이 기둥이 다른 세계에선 전기를 전달하는 용도로 쓰였던 구조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밑 쪽에 있는 다른 철막대에 소녀가 발을 갖다 대자, 기둥에 한 발, 한 손으로 매달린 모양새가 되었다. 옛 세계의 흔적에 매달려있는 소녀에게 두려움은 없어 보였다.
소녀는 한 번 더 수평선 너머의 도시를 바라보고선,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타고 오를 것이 필요하다 느꼈다.
소녀의 집을 제외한 해변의 건물들이 또 해체되기 시작했다. 벽, 침대 뼈대, 수납장, 무너진 터널의 파편들이 모래를 박차고 일제히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것들이 한곳에 모여, 서서히 어떤 물체의 모양이 되어갔다. 그러나 소녀는 건축에 재능이 없었다.
소녀가 만든 탑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했으며, 서서히 하늘을 향해 쌓아 올려지다가 이따금씩 이상한 각도로 뒤틀렸다.
아쉽게도 소녀가 사는 섬에 자원이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자재가 모두 쓰고도 반밖에 완성되지 않은 탑을 보며 소녀는 표정을 구겼다. 아직 높이가 1킬로미터도 되지 않았다.
소녀는 짜증을 내며 수평선 너머의 도시를 바라보고선 손을 뻗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잡아당겼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소녀는 강력했지만 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 4-4 #=====
소녀는 힘없이 손을 다시 떨구고 다른 해결책을 강구하기로 했다. 그래, 탑 대신 나선 계단은 어떨까? 한 시간이 지났다.
또 한 시간, 또다시 한 시간, 마지막으로 두 시간이 더 지났다.
마침내 완성된 작품을 소녀는 자랑스레 바라보았다.
아직 뒤틀리고 뒤죽박죽인 생김새지만 아까 전의 탑보다는 훨씬 괜찮은 만듦새였다. 적어도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소녀는 지체 없이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떨어질 때를 대비해 안락의자를 옆에 동행시킨 채로, 소녀는 한 걸음 한 걸음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일정 높이에 다다를 때마다, 소녀는 가장 밑에 있는 계단을 뜯어내 위에 붙였다.
영원히 파괴와 재조립을 반복하는 무한 계단의 완성이었다. 안개를 뚫고 세상의 정점을 향하는 계단을 소녀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여정의 끝은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밤”이 되어 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4일 정도 지났을 때 즈음, 마침내 “천상”이 소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소녀는 “천상”이란 뚫을 수 없는 거대한 구름의 천장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소녀가 계단을 그 위로 올려보려 해도 구름은 뚫리지 않았다. 소녀는 일단 계단을 물렀다.
곧, 소녀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계단의 가장 윗단까지 올라갔다.
소녀는 계단의 가장 윗단을 해체해 커다란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서서 손을 위로 들어 구름을 밀어내려 했다.
아무리 밀어도 구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까치발을 들고 밀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구름 너머의 광경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소녀는 실패했다.
“말이 되냐고...”
소녀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렇게 낙담하던 와중, 무언가가 그녀의 시선을 빼앗았다.
소녀의 오른편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마치 나무를 흔들었을 때 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소녀가 힘껏 밀었던 구름의 천장에서 반짝이는 물체들이 떨어졌다.
아르케아다. 어림잡아 스무개의 아르케아가 소녀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
그리고 붉은 옷을 입은 소녀는 깨달았다.
태양이 없는 아르케아의 하늘까지 와서야, 마침내 자신에게 이끌리는 기억의 조각을 찾아냈다는 것을.
또 한 시간, 또다시 한 시간, 마지막으로 두 시간이 더 지났다.
마침내 완성된 작품을 소녀는 자랑스레 바라보았다.
아직 뒤틀리고 뒤죽박죽인 생김새지만 아까 전의 탑보다는 훨씬 괜찮은 만듦새였다. 적어도 소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소녀는 지체 없이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떨어질 때를 대비해 안락의자를 옆에 동행시킨 채로, 소녀는 한 걸음 한 걸음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일정 높이에 다다를 때마다, 소녀는 가장 밑에 있는 계단을 뜯어내 위에 붙였다.
영원히 파괴와 재조립을 반복하는 무한 계단의 완성이었다. 안개를 뚫고 세상의 정점을 향하는 계단을 소녀는 계속해서 올라갔다.
여정의 끝은 보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간중간 앉아 휴식을 취하거나, “밤”이 되어 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4일 정도 지났을 때 즈음, 마침내 “천상”이 소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소녀는 “천상”이란 뚫을 수 없는 거대한 구름의 천장임을 깨달았다.
아무리 소녀가 계단을 그 위로 올려보려 해도 구름은 뚫리지 않았다. 소녀는 일단 계단을 물렀다.
곧, 소녀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짓고 계단의 가장 윗단까지 올라갔다.
소녀는 계단의 가장 윗단을 해체해 커다란 바닥을 만들고 그 위에 서서 손을 위로 들어 구름을 밀어내려 했다.
아무리 밀어도 구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까치발을 들고 밀었다. 조금이라도 좋으니 구름 너머의 광경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소녀는 실패했다.
“말이 되냐고...”
소녀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그렇게 낙담하던 와중, 무언가가 그녀의 시선을 빼앗았다.
소녀의 오른편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마치 나무를 흔들었을 때 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소녀가 힘껏 밀었던 구름의 천장에서 반짝이는 물체들이 떨어졌다.
아르케아다. 어림잡아 스무개의 아르케아가 소녀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
그리고 붉은 옷을 입은 소녀는 깨달았다.
태양이 없는 아르케아의 하늘까지 와서야, 마침내 자신에게 이끌리는 기억의 조각을 찾아냈다는 것을.
=====# 4-5 #=====
향이 타는 냄새가 고르게 퍼진 공기.
널리 울려퍼지는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의 목소리.
밝고 활기찬 분위기.
거리로 새어 나오는 향기로운 요리의 냄새까지, 소녀는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텅 빈 푸른 하늘에 태양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소녀가 본 적 없는 기억의 세계다. 소녀는 가만히 서서 이 모든 것을 만끽했다.
이 기억은 한 장인의 조수가 지녔던 기억이다. 이 아이는 지금 심부름 중이었다.
소녀는 이 아이가 아직 무엇을 만드는 장인의 조수인지는 몰랐으나, 딱히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 세계는,
“멋져...!”
마치 환상과 같았다.
눈을 반짝거리며 입을 헤벌레 벌린 소녀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머리 위로는 색색의 종이와 천이 묶여 옥상과 옥상을 이었다. 마치 전깃줄에 장식을 해놓은 모양새였다.
축제 같은 분위기를 풍겼기에 전깃줄은 아니겠지만. 판석으로 포장된 길, 붉은 벽돌로 지은 집, 검은 연기를 뿜어대는 굴뚝을 보아하니 이곳은 오래된 마을이거나 도시겠구나
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가판대의 상인들이 신기하게 생긴 장신구를 팔고 있다. 태양을 모티브로 한 목걸이, 부적, 반지들이 길을 수놓고 있다.
어떤 가판대는 다른 기억의 책에서 본 적 있는 생물의 인형을 팔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복장은 소녀의 것과 비슷했다.
마치 축제 의상과도 같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는 않은 느낌의 의상. 따뜻한 계열의 색으로 가득 찬 세계지만 이따금씩 보이는 푸른색이 눈을 사로잡았다.
소녀는 돌아다니다 한 무리의 음유시인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노래는 청자들에게 교훈과 경고를 번갈아 주다, 마지막으로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소녀는 거리를 활보하며 과자를 마구 시식했다. 너무 큰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하며, 눈에 보이는 과자 매대의 시식품을 모두 입에 넣었다.
그렇게 시식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이에 특히나 소녀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한 붉고 매혹적인 조각 과자였다. 딸기 타르트, 그렇게 불리는 듯했다.
조수가 지니고 있던 동전으로 소녀는 타르트를 사 한 입 베어 물었다. 그와 동시에 소녀는 실감했다.
이 세계는 실로 경이롭다! 경이롭도록 멋진 세계다! 달콤한 간식이 인생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환상적인 세계다.
소녀는 이 기억의 세계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의욕이 충만해진 소녀는 더욱 빠른 걸음으로, 거의 깡총깡총 뛰어다니며, 가끔씩 빙글빙글 돌기도 하며 거리의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널리 울려퍼지는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의 목소리.
밝고 활기찬 분위기.
거리로 새어 나오는 향기로운 요리의 냄새까지, 소녀는 모두 느낄 수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텅 빈 푸른 하늘에 태양이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소녀가 본 적 없는 기억의 세계다. 소녀는 가만히 서서 이 모든 것을 만끽했다.
이 기억은 한 장인의 조수가 지녔던 기억이다. 이 아이는 지금 심부름 중이었다.
소녀는 이 아이가 아직 무엇을 만드는 장인의 조수인지는 몰랐으나, 딱히 흥미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 세계는,
“멋져...!”
마치 환상과 같았다.
눈을 반짝거리며 입을 헤벌레 벌린 소녀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머리 위로는 색색의 종이와 천이 묶여 옥상과 옥상을 이었다. 마치 전깃줄에 장식을 해놓은 모양새였다.
축제 같은 분위기를 풍겼기에 전깃줄은 아니겠지만. 판석으로 포장된 길, 붉은 벽돌로 지은 집, 검은 연기를 뿜어대는 굴뚝을 보아하니 이곳은 오래된 마을이거나 도시겠구나
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가판대의 상인들이 신기하게 생긴 장신구를 팔고 있다. 태양을 모티브로 한 목걸이, 부적, 반지들이 길을 수놓고 있다.
어떤 가판대는 다른 기억의 책에서 본 적 있는 생물의 인형을 팔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복장은 소녀의 것과 비슷했다.
마치 축제 의상과도 같지만, 지나치게 화려하지는 않은 느낌의 의상. 따뜻한 계열의 색으로 가득 찬 세계지만 이따금씩 보이는 푸른색이 눈을 사로잡았다.
소녀는 돌아다니다 한 무리의 음유시인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노래는 청자들에게 교훈과 경고를 번갈아 주다, 마지막으로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소녀는 거리를 활보하며 과자를 마구 시식했다. 너무 큰 주의를 끌지 않도록 조심하며, 눈에 보이는 과자 매대의 시식품을 모두 입에 넣었다.
그렇게 시식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이에 특히나 소녀의 시선과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한 붉고 매혹적인 조각 과자였다. 딸기 타르트, 그렇게 불리는 듯했다.
조수가 지니고 있던 동전으로 소녀는 타르트를 사 한 입 베어 물었다. 그와 동시에 소녀는 실감했다.
이 세계는 실로 경이롭다! 경이롭도록 멋진 세계다! 달콤한 간식이 인생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환상적인 세계다.
소녀는 이 기억의 세계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의욕이 충만해진 소녀는 더욱 빠른 걸음으로, 거의 깡총깡총 뛰어다니며, 가끔씩 빙글빙글 돌기도 하며 거리의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 4-6 #=====
달리면 안 된다. 달렸다가는 이 거리의 사소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감상할 수 없게 될 테니까.
소녀는 광장의 건물앞에 세워진 간판들을 읽었다. 이곳 사람들은 미신을 믿고 있었다.
신, 악마, 요괴 따위의 정령과 요정을 믿고 있었다. 무대에 선 예술가들은 “허구적이고”, “기묘하고”, “불가능한” 공연을 펼쳤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마법”을 행하고 있다 믿고 있었다. “주문 외우기”는 손에 색색의 가루를 쥐고 불꽃과 연기를 내는 트릭이고, “운명 점치기”는 고인 물에 말을 건 뒤 파문을 해석하는 점치기고, “다른 존재와의 소통”은 조명을 이용한 어떤 마술인데 소녀가 한눈에 봐서는 트릭을 알 수 없었다.
이러한 믿음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놀랍고 경이로운 마법과 신앙의 세계. 그 누구도 의심 한 톨 없이 그 모든 게 사실이라 믿고 있다.
이런 진기함으로 가득 찬 거리를 걸어가던 소녀는 이윽고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일종의 공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가치 있는 전통이지만, 절대로 사실은 아니다.
소녀는 도시의 외곽에 다다랐다. 이는 이 기억의 한계선이기도 했다. 이 선을 넘는 것은 몇 번을 시도해도 불가능했다.
낮은 나무 울타리 너머로, 푸르른 언덕과 몇 개의 떡갈나무, 그리고 반짝이는 호수가 보였다. 소녀는 어떻게 이 세계의 주민들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지 이제서야 이해했다. 그녀 자신도 유리가 날아다니는 기묘한 세계에서 왔다.
이런 세계에 요정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자연과 논리를 뛰어넘는 존재가 있다 한들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소녀는 지금 한 장인의 조수가 지녔던 기억 속에 들어와있다. 그 장인은 자칭 마법사로, 요정과 같은 환상의 존재를 연구하는 자다.
소녀가 빌리고 있는 몸의 주인은 그 마법사의 연구가 모두 마땅한 결과를 내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소녀가 생각하길, 장인의 목적은 환상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신앙을 더 굳게 하고, 그로 인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그것이 마법사의 목적이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녀는 미소 지으며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생각에 빠졌다. 참 웃기네. 기둥에 손을 기대고 머릿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던 소녀는, 서쪽에 있는 아주 오래된 숲을 보았다.
심부름 한 번의 분량에 불과한 기억에 들어온 지금은 멀리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직접 가볼 순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다른 기억을 통해 이 세계로 돌아오리라 소녀는 다짐했다. 이 마법과 눈속임의 세계는 소녀의 성미에 아주 잘 맞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찾아낸 아르케아의 무리는 분명 이 세계의 다른 장소들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소녀는 드레스의 앞자락을 쥐었다.
너무 좋아서 믿을 수가 없다. 소녀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움찔거렸다. 여태껏 이렇게나 큰 기쁨을 소녀는 느낀 적이 없었다.
소녀는 광장의 건물앞에 세워진 간판들을 읽었다. 이곳 사람들은 미신을 믿고 있었다.
신, 악마, 요괴 따위의 정령과 요정을 믿고 있었다. 무대에 선 예술가들은 “허구적이고”, “기묘하고”, “불가능한” 공연을 펼쳤다.
그들은 자신들이 실제로 “마법”을 행하고 있다 믿고 있었다. “주문 외우기”는 손에 색색의 가루를 쥐고 불꽃과 연기를 내는 트릭이고, “운명 점치기”는 고인 물에 말을 건 뒤 파문을 해석하는 점치기고, “다른 존재와의 소통”은 조명을 이용한 어떤 마술인데 소녀가 한눈에 봐서는 트릭을 알 수 없었다.
이러한 믿음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놀랍고 경이로운 마법과 신앙의 세계. 그 누구도 의심 한 톨 없이 그 모든 게 사실이라 믿고 있다.
이런 진기함으로 가득 찬 거리를 걸어가던 소녀는 이윽고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일종의 공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가치 있는 전통이지만, 절대로 사실은 아니다.
소녀는 도시의 외곽에 다다랐다. 이는 이 기억의 한계선이기도 했다. 이 선을 넘는 것은 몇 번을 시도해도 불가능했다.
낮은 나무 울타리 너머로, 푸르른 언덕과 몇 개의 떡갈나무, 그리고 반짝이는 호수가 보였다. 소녀는 어떻게 이 세계의 주민들이 그렇게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지 이제서야 이해했다. 그녀 자신도 유리가 날아다니는 기묘한 세계에서 왔다.
이런 세계에 요정이 있다고 한들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자연과 논리를 뛰어넘는 존재가 있다 한들 어떻게 부정하겠는가?
소녀는 지금 한 장인의 조수가 지녔던 기억 속에 들어와있다. 그 장인은 자칭 마법사로, 요정과 같은 환상의 존재를 연구하는 자다.
소녀가 빌리고 있는 몸의 주인은 그 마법사의 연구가 모두 마땅한 결과를 내지 못했음을 알고 있다.
소녀가 생각하길, 장인의 목적은 환상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신앙을 더 굳게 하고, 그로 인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그것이 마법사의 목적이다.
붉은 옷을 입은 소녀는 미소 지으며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생각에 빠졌다. 참 웃기네. 기둥에 손을 기대고 머릿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하던 소녀는, 서쪽에 있는 아주 오래된 숲을 보았다.
심부름 한 번의 분량에 불과한 기억에 들어온 지금은 멀리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직접 가볼 순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다른 기억을 통해 이 세계로 돌아오리라 소녀는 다짐했다. 이 마법과 눈속임의 세계는 소녀의 성미에 아주 잘 맞았다.
그리고 하늘에서 찾아낸 아르케아의 무리는 분명 이 세계의 다른 장소들을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소녀는 드레스의 앞자락을 쥐었다.
너무 좋아서 믿을 수가 없다. 소녀의 얼굴에 번진 미소가 움찔거렸다. 여태껏 이렇게나 큰 기쁨을 소녀는 느낀 적이 없었다.
=====# 4-7 #=====
스무 번인지, 그보다 많은지, 소녀는 진작에 세기를 그만두었다.
“영...차...”
소녀는 아직 마무리가 덜 된 목재로 만들어진 상자 앞에 쭈그려 앉아, 상자를 위로 손을 스윽 흘려보았다.
먼지 무리가 휘날려 땅으로 가라앉았다.
곧 자물쇠를 풀어, 상자를 열어보았다.
소녀는 이번엔 고고학자의 몸에 들어와, 홍수로 망해버린 고대의 성을 탐험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상자 안에 들어있던 종이들은 상자의 방수 기능 덕에 젖지 않고 살아남아있었다.
오래된 경첩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자, 소녀의 동료가 무엇을 찾았냐 물었다. 소녀는 제4시대의 두루마리들을 찾았다며 대답했다.
하나를 꺼내 펼쳐보자,
그곳에는 소녀의 민족과 언실리(Unseelie) 사이에 있었던 대립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소녀는 이런 이야기들에서 큰 즐거움을 느꼈다.
과거의 사람들이 무엇을 요정과 같은 환상의 존재로 착각했는지 추측하는 것은 특히나 재미있었다.
어제의 소녀는 이야기꾼이 되어서 조상들에게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이야기를 풀어냈다.
한 남자가 머나먼 해변에서 수많은 보물을 모았는데, 집으로 돌아가려 호수를 건너던 와중 바람의 요정 실프가 남자의 쪽배를 바람으로 흔들고, 지나가던 물의 요정 나이아데스가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에 결국 쪽배가 뒤집어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두 요정이 보물을 모두 가져가버렸다고 한다. 그냥 배의 조작이 서툴렀다고 하면 될 것을, 참으로 장대한 변명이다.
그래도 소녀는 그렇게 못돼먹은, 또는 착한 요정이 실제로 있다 믿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고고학자로서의 하루가 끝나고 소녀는 아르케아의 세계로 돌아와, 이제는 임시 숙소가 된 발판 위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 후 학교 선생의 기억으로 들어가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이 혼돈스럽고 위협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쳤다.
사람들이 마법의 존재를 믿으니, 이러한 수업들은 소녀에게 매우 흥미로웠다. 참으로 즐겁고 매력적인 세계다.
매번의 방문이 즐겁다.
아르케아를 방문할 때마다 점점 익숙해지는 사람들의 얼굴, 이제는 기억에 확실히 새겨진 장소들,
소리와 풍경, 모든 것이...
놀랍도록 아름다우며, 그립다.
하늘에서 찾은 모든 조각을 방문해, 적어도 그녀가 생각하기에 갈 수 있는 모든 장소를 들러본 후, 소녀는 마지막으로 사람으로 가득 차 떠들썩한 축제의 밤을 비추는 조각으로 들어갔다.
악한 정령들을 몰아내고, 신들께 탄생과 추수에 감사드리는 축제다.
소녀는 란캐스터와 시아라는 이름의 주민을 발견했다. 신사스러운 건축가들이었다. 소녀가 마지막으로 그들과 만난 기억에서 몇 년 정도 나이를 더 먹은 모습이었다.
그들이 소녀에게 사과 사탕을 건네주자 그녀는 그 무엇을 받았을 때보다 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신사들이 하늘을 보라며 손가락을 뻗었다. 수천 가지 아름다운 빛깔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신과 삶에게 보내는 헌사였다.
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서도, 소녀는 감동하지 않았다.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았다. 소녀의 표정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즐거움도, 사색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어딘가 그리운 기억들이 보여주는 마지막 밤에, 소녀는 만족한 채 불꽃놀이를 바라보았다.
눈물을 머금고, 가슴 한 편에 아픔을 안은 채,
소녀는 기쁘게 불꽃놀이를 바라보았다.
=====# 4-8 #=====
그 세계의 기억들은 소녀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친숙한 곳처럼 편안했다. 소녀는 기억들 안에서 몇 개월을 지냈다.
떠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끝이 있음을 알면서도, 보고싶지 않았다.
기억 속에 미래는 없었다.
다시는 기억 속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소녀는 이 새하얀 세계로 돌아왔다.
지나간 세월이란 그런 것이다.
결말이 지어진 이야기이며, 끝난 삶이며, 헤어진 사랑이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소녀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가며, 다시 한번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 기억 속에서 보냈던 모든 순간,
매분 매초가 그녀에게 값진 선물이었다.
그녀가 품지도 않았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은 듯한 기분이었고, 그것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한순간 마치 하늘이 무너지고 있는 듯했다.
소녀가 잠시간 머물렀던 숙소가 무너지며 땅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소녀는 가슴에 약간의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그때, 하늘이, 진짜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유리판 위에 선 소녀의 머리칼이 얼굴 옆으로 휘날렸다. 반짝이는 기억의 조각들은 아직 제자리에 있었다.
그 조각들의 뒤로, 소녀가 본 적 없는 새로운 밤하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반짝거리는 점의 무리가 수놓은 어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끝없이 펼쳐진 어둡고 비단결 같은 풍경을 짙은 보랏빛 파도가 넘실거리며 빛냈다.
별이다.
낮이 끝났다.
소녀의 가슴이 갑자기 아파왔다.
이름을 속삭여보았다.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이름. 소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소녀가 울라탄 유리판이 구름층을 뚫고 낙하했다. 복잡한 회색 지형이, 시야가 닿는 곳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이것이 소녀의 새로운 삶이다. 소녀는 손을 뻗었다. 언젠가, 저 지평선 너머에 있는 누군가가, 이 손을 잡아주리라 믿을 것이다.
언젠가, 그 손으로 위대한 일을 이룩할 것이다.
그때까지, 소녀는 앞을 바라볼 것이다.
아르케아에서, “현재”를 살아갈 것이다.
떠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끝이 있음을 알면서도, 보고싶지 않았다.
기억 속에 미래는 없었다.
다시는 기억 속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소녀는 이 새하얀 세계로 돌아왔다.
지나간 세월이란 그런 것이다.
결말이 지어진 이야기이며, 끝난 삶이며, 헤어진 사랑이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았다. 소녀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가며, 다시 한번 구름을 바라보았다.
그 기억 속에서 보냈던 모든 순간,
매분 매초가 그녀에게 값진 선물이었다.
그녀가 품지도 않았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은 듯한 기분이었고, 그것이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한순간 마치 하늘이 무너지고 있는 듯했다.
소녀가 잠시간 머물렀던 숙소가 무너지며 땅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소녀는 가슴에 약간의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그때, 하늘이, 진짜 하늘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유리판 위에 선 소녀의 머리칼이 얼굴 옆으로 휘날렸다. 반짝이는 기억의 조각들은 아직 제자리에 있었다.
그 조각들의 뒤로, 소녀가 본 적 없는 새로운 밤하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구름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반짝거리는 점의 무리가 수놓은 어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끝없이 펼쳐진 어둡고 비단결 같은 풍경을 짙은 보랏빛 파도가 넘실거리며 빛냈다.
별이다.
낮이 끝났다.
소녀의 가슴이 갑자기 아파왔다.
이름을 속삭여보았다. 마지막으로 불러보는 이름. 소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소녀가 울라탄 유리판이 구름층을 뚫고 낙하했다. 복잡한 회색 지형이, 시야가 닿는 곳에 끝없이 펼쳐져 있다.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이것이 소녀의 새로운 삶이다. 소녀는 손을 뻗었다. 언젠가, 저 지평선 너머에 있는 누군가가, 이 손을 잡아주리라 믿을 것이다.
언젠가, 그 손으로 위대한 일을 이룩할 것이다.
그때까지, 소녀는 앞을 바라볼 것이다.
아르케아에서, “현재”를 살아갈 것이다.
[스위치판] Nintendo Switch 에디션에서는 Saint or Sinner가 수록되지 않아 Vindication으로 대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