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Arcaea/스토리
스토리 | ||||
Act I Creation | Act II Catastroph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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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rcaea 스토리의 Act I: Creation의 세 번째 파트를 기록한 문서.2. Side Story
2.1. 라그랑주
2.1.1. 해금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9-1 | Esoteric-1 | Paper Witch 클리어 | ||
9-2 | Esoteric-2 | Crystal Gravity 클리어 | ||
9-3 | Esoteric-3 | Far Away Light 클리어 | ||
9-4 | Esoteric-4 | Löschen 클리어 | ||
9-5 | Esoteric-5 | 라그랑주로 Aegleseeker 클리어 | ||
9-6 | Esoteric-6 | 라그랑주로 Far Away Light 클리어 |
2.1.2. Esoteric Order
=====# 9-1 #=====풍경이 바뀌었다.
매 걸음마다 풍경이 변했다. 라그랑주의 걸음이 땅을... 그리고 공간을 움직였다. 태피스트리로 다가갔다.
실이 완전히 꿰여 있지 않았다. 유리 조각이 그녀를 소리 없이 지나쳤다가 놀란 듯이 갑작스럽게 웁직였다.
주변의 세계는 백색이 아닌 흑색이었다. 허공에 별들이 걸려있었다. 가야 할 길은 조각이 나있었다.
기억으로 만들어진 태피스트리, 아르케아. 그 실은 풀려 닳아가고 있었다. 방치되고 잊힌 실가닥.
그 앞에, 그리고 그 안에 서있는 소녀는 이의 첫 번째 목격자였다.
진정으로, 혼자인 소녀.
"아무래도," 라그랑주가 속삭였다. 사실을 다시 확인하듯이.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도달하려면..." 그녀가 먼지투성이의 뒤틀린 길을 밟으며 말했다.
"나와는 다른 길을 걷겠군. 내가 걸었던 길은 부서져버렸고, 앞에 난 길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마침 그 말대로 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하얀 나선형의 길이 위로, 그리고 아래로 움직이다 작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 조각들이 허공에 둥둥 떠서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조각들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또 하나." 라그랑주가 말했다.
"너는 할 말 없니?" 그녀가 카론에게 물었다.
카론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해봐." 소녀가 카론의 쓸모없는 머리를 토닥이며 명령했다.
답이 없는 카론의 주변으로 삼각형의 광륜이 둥둥 떠다녔다.
"그런건가…" 그녀가 스스로 대답했다.
라그랑주는 카론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돌려 텅 비어버린 세계를 바라보았다.
“이⋯ ‘가장 낮은 세계’에 오면 네 기억이 돌아오거나, 최소한 성격 같은 게 생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구나, 카론.”
실패한 실험의 결과물은 천천히 꼬리를 흔들며 S 모양을 그렸다. 생각에 잠긴 듯이 귀가 움직인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귀여우니 됐나."
라그랑주는 카론에게서 손을 떼며 인정하듯 말했다. 일견 장난스러워 보였지만, 라그랑주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세계가 완전히 백색이었던 적에 라그랑주가 만들었던 유리 사역마, 카론은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벌써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특이하게도 그 길은 라그랑주가 여태 보아온 길보다 훨씬 넓었다. 길이라기보다는 한 구획에 가까울 정도로.
아르케아 몇 개가 라그랑주의 오른쪽으로 옹기종기 모였다. 마치 라그랑주가 자신들의 것인지 확인이라도 하는 양.
그녀가 조각들을 지나가니, 그렇지 않음을 깨달은 듯 흩어졌다.
라그랑주의 목적은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의 땅은 과거의 것이다. 경계를 넘어선 공간에, 새로이 연구하고, 새로이 발견할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닳아빠진 태피스트리의 끝자락, 그녀는 이 끝없이 바뀌는 길을 따라가며, 언젠가 이 태피스트리를 짠 장인을 만나길 바랐다.
그 손으로 하여금 다시 이 천을 만지게 하도록.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세계로 걸어나아갔다. 흑색의 세계로, 공허 속으로...
매 걸음마다 풍경이 변했다. 라그랑주의 걸음이 땅을... 그리고 공간을 움직였다. 태피스트리로 다가갔다.
실이 완전히 꿰여 있지 않았다. 유리 조각이 그녀를 소리 없이 지나쳤다가 놀란 듯이 갑작스럽게 웁직였다.
주변의 세계는 백색이 아닌 흑색이었다. 허공에 별들이 걸려있었다. 가야 할 길은 조각이 나있었다.
기억으로 만들어진 태피스트리, 아르케아. 그 실은 풀려 닳아가고 있었다. 방치되고 잊힌 실가닥.
그 앞에, 그리고 그 안에 서있는 소녀는 이의 첫 번째 목격자였다.
진정으로, 혼자인 소녀.
"아무래도," 라그랑주가 속삭였다. 사실을 다시 확인하듯이.
"다른 누군가가 이곳에 도달하려면..." 그녀가 먼지투성이의 뒤틀린 길을 밟으며 말했다.
"나와는 다른 길을 걷겠군. 내가 걸었던 길은 부서져버렸고, 앞에 난 길은 계속해서 변하고 있으니까."
그녀가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리자 마침 그 말대로 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하얀 나선형의 길이 위로, 그리고 아래로 움직이다 작은 조각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 조각들이 허공에 둥둥 떠서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조각들은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또 하나." 라그랑주가 말했다.
"너는 할 말 없니?" 그녀가 카론에게 물었다.
카론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해봐." 소녀가 카론의 쓸모없는 머리를 토닥이며 명령했다.
답이 없는 카론의 주변으로 삼각형의 광륜이 둥둥 떠다녔다.
"그런건가…" 그녀가 스스로 대답했다.
라그랑주는 카론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돌려 텅 비어버린 세계를 바라보았다.
“이⋯ ‘가장 낮은 세계’에 오면 네 기억이 돌아오거나, 최소한 성격 같은 게 생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구나, 카론.”
실패한 실험의 결과물은 천천히 꼬리를 흔들며 S 모양을 그렸다. 생각에 잠긴 듯이 귀가 움직인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귀여우니 됐나."
라그랑주는 카론에게서 손을 떼며 인정하듯 말했다. 일견 장난스러워 보였지만, 라그랑주는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세계가 완전히 백색이었던 적에 라그랑주가 만들었던 유리 사역마, 카론은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벌써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특이하게도 그 길은 라그랑주가 여태 보아온 길보다 훨씬 넓었다. 길이라기보다는 한 구획에 가까울 정도로.
아르케아 몇 개가 라그랑주의 오른쪽으로 옹기종기 모였다. 마치 라그랑주가 자신들의 것인지 확인이라도 하는 양.
그녀가 조각들을 지나가니, 그렇지 않음을 깨달은 듯 흩어졌다.
라그랑주의 목적은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의 땅은 과거의 것이다. 경계를 넘어선 공간에, 새로이 연구하고, 새로이 발견할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닳아빠진 태피스트리의 끝자락, 그녀는 이 끝없이 바뀌는 길을 따라가며, 언젠가 이 태피스트리를 짠 장인을 만나길 바랐다.
그 손으로 하여금 다시 이 천을 만지게 하도록.
그렇게, 그녀는 스스로 선택한 세계로 걸어나아갔다. 흑색의 세계로, 공허 속으로...
=====# 9-2 #=====
이 세계에는 상식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이곳 공허뿐 아니라, 아르케아의 세계 그 자체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이러한 경계 밖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아니, 라그랑주가 깨어난 후 보아온, 아르케아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우선, 라그랑주는 깨어난 후 자신이 누군지 알기도 전에, 아르케아의 개념을 먼저 깨우쳤다. 그리고 아직도 라그랑주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아르케아는 완고하게 자신의 존재를 라그랑주에게 밀어붙였다. 마치 ‘안녕. 넌 이 세계에 갇혔고, 여긴 이런 곳이야.’ 라고 말하듯이.
이 세계는 기억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서관이었다. 마구잡이로 이어지는 폐허와 의미 없는 이름, 이름 없는 외로운 소녀만이 존재하는 도서관.
그리고 도서관에 왔을 때 우선해야 하는 일은 비치된 장서를 읽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유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책 사이에 공통된 주제는 없었다. 그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었다. 제대로 된 도서관이란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그녀가 봐온 기억들을 통해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반면 아르케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책, 기억들은 놓여있는 위치도, 둥둥 떠다니는 모습조차 제멋대로였다.
이 세계 속 그녀의 존재 역시 너무 우연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깨어남과 동시에 아르케아가 무엇인지는 깨달았어도,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정말," 라그랑주가 갑자기 말을 내뱉었다, "내가 봐온 세계들을 떠올려봐, 카론."
그 말에 카론은 라그랑주를 바라보았다. 카론의 눈동자 안에서는, 지성의 조각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과 반려⋯유리는 공허 속을 걸어나갔다.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길을.
"너를 구성하는 세계들을 떠올려봐," 라그랑주가 반려 유리의 귀를 살짝 만지며 계속해 이야기했다.
"그 기억들에선 ‘존재’가 어떤 개념이었지? 여기 공허는 내가 보아온 그 어떤 세계와도, 너를 이루는 그 어떤 기억과도 달라… 만들어진 목적이 있으면서도, 아무런 목적이 없는 듯한…”
그녀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어떻게 생각해?" 라그랑주가 물었다.
카론의 시선은 앞에 놓인 하얗게 굽이진 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라그랑주는 품에서 카론을 놓아주었다.
"난 너무 애매하다고 생각해."
라그랑주가 말했다. 카론이 자기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고 멋대로 생각하고선, 말없이 길을 따라 걸어갔다.
과거의 풍경을 생각하며…
그러자 과거가 라그랑주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면 현재인가...?
"뭐...?"
소녀가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구름이다.
둥둥 떠다니는 길만 있던 곳에 구름이 나타났다.
허공에 어른거리는 꿈같은 형상이 경고 없이 라그랑주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다시금 보였다. 새하얀 폐허와 부유하는 유리 조각의 세계. 라그랑주가 기억하는 유일한 세계.
그녀가 뒤로 놓고 온 세계가…
단지 이곳 공허뿐 아니라, 아르케아의 세계 그 자체에 해당되는 말이었다.
이러한 경계 밖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아니, 라그랑주가 깨어난 후 보아온, 아르케아 세계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상식을 벗어나 있었다.
우선, 라그랑주는 깨어난 후 자신이 누군지 알기도 전에, 아르케아의 개념을 먼저 깨우쳤다. 그리고 아직도 라그랑주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아르케아는 완고하게 자신의 존재를 라그랑주에게 밀어붙였다. 마치 ‘안녕. 넌 이 세계에 갇혔고, 여긴 이런 곳이야.’ 라고 말하듯이.
이 세계는 기억만을 위해 존재하는 도서관이었다. 마구잡이로 이어지는 폐허와 의미 없는 이름, 이름 없는 외로운 소녀만이 존재하는 도서관.
그리고 도서관에 왔을 때 우선해야 하는 일은 비치된 장서를 읽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유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책 사이에 공통된 주제는 없었다. 그 어떠한 연결고리도 없었다. 제대로 된 도서관이란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그녀가 봐온 기억들을 통해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반면 아르케아의 세계에 존재하는 책, 기억들은 놓여있는 위치도, 둥둥 떠다니는 모습조차 제멋대로였다.
이 세계 속 그녀의 존재 역시 너무 우연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깨어남과 동시에 아르케아가 무엇인지는 깨달았어도,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는 도통 알 수 없었다.
"정말," 라그랑주가 갑자기 말을 내뱉었다, "내가 봐온 세계들을 떠올려봐, 카론."
그 말에 카론은 라그랑주를 바라보았다. 카론의 눈동자 안에서는, 지성의 조각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과 반려⋯유리는 공허 속을 걸어나갔다.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는 길을.
"너를 구성하는 세계들을 떠올려봐," 라그랑주가 반려 유리의 귀를 살짝 만지며 계속해 이야기했다.
"그 기억들에선 ‘존재’가 어떤 개념이었지? 여기 공허는 내가 보아온 그 어떤 세계와도, 너를 이루는 그 어떤 기억과도 달라… 만들어진 목적이 있으면서도, 아무런 목적이 없는 듯한…”
그녀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어떻게 생각해?" 라그랑주가 물었다.
카론의 시선은 앞에 놓인 하얗게 굽이진 길에 고정되어 있었다.
라그랑주는 품에서 카론을 놓아주었다.
"난 너무 애매하다고 생각해."
라그랑주가 말했다. 카론이 자기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고 멋대로 생각하고선, 말없이 길을 따라 걸어갔다.
과거의 풍경을 생각하며…
그러자 과거가 라그랑주의 앞에 나타났다.
...아니면 현재인가...?
"뭐...?"
소녀가 혼란스러워하며 말했다.
구름이다.
둥둥 떠다니는 길만 있던 곳에 구름이 나타났다.
허공에 어른거리는 꿈같은 형상이 경고 없이 라그랑주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사이로 다시금 보였다. 새하얀 폐허와 부유하는 유리 조각의 세계. 라그랑주가 기억하는 유일한 세계.
그녀가 뒤로 놓고 온 세계가…
=====# 9-3 #=====
이 풍경은 현재다.
만약 이것이 기억이라면, 그녀가 깨어나서 봐온 기억들과는 전혀 다르다. ‘차지’할 수 있는 시점이 없었다.
단지 오래되고 척박할 뿐인 세게.
“...”
라그랑주는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장소가 나를 놀리는 걸지도 모르겠군..." 소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계속해 나아갔다.
라그랑주는 처음으로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기억은 스스로 라그랑주의 앞에 나타났다.
그래, 그런 건가. 라그랑주는 공허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길을 더 나아가자 백색의 세계로 향하는 창문이 더 많이 생겨났다. 대부분 텅 빈 광경을 비출 뿐이었지만, 이따금씩 다른 소녀의 모습이 비치기도 하였다.
예상했지만, 시시했다. 라그랑주는 시험 삼아 창문에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역시나 보이지 않는 장막에 가로막혀 창문을 통해 저 세계로 다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굳이 아르케아의 세계를 떠올리거나 그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면, 그냥 거기 머무르지 않았겠나?
그러한 내면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라그랑주는 잠시 자신의 삶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았다.
소녀는 많은 기억들을 보아왔다. 세계의 진실을 밝힐만한 기억이 있으리라 짐작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주로 찾은 것들은 매우 평범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저 평범한 일상.
이미 사라져버린, 반복되던 일상들. 많은 것을 배웠지만 자신이 깨어난 이 세계에 대해서는 단 한 가지도 배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경계를 넘어가 더 많은 것을 알아내고자 결심했을 때, 처음으로 본 세계의 일부를 자신과 함께 가져가기로 했다. 그 기억에 어떤… 의미를 주고 싶었다.
라그랑주는 카론을 바라보았다. 두고 온 세계의 창문이 주변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단지 카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론을 만든 것도,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나?
“만약에”가 머릿속을 스쳤다. 만약에 사람도 도시도 사라져버린 이 기억의 세계를 이용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면?
그녀는 아르케아의 조각들을 끌어다가 온 노력과 의지, 그리고 바람을 쏟았다. 그리하여 카론이 탄생했다.
“...”
카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
그럼에도 카론은 마치 위성이 모성 옆을 지키듯 그녀의 주변에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르케아의 세계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카론은, 그 의미 없는 세계를 나타내는 거울이었다.
만약 이것이 기억이라면, 그녀가 깨어나서 봐온 기억들과는 전혀 다르다. ‘차지’할 수 있는 시점이 없었다.
단지 오래되고 척박할 뿐인 세게.
“...”
라그랑주는 그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장소가 나를 놀리는 걸지도 모르겠군..." 소녀가 말했다.
그러고는 계속해 나아갔다.
라그랑주는 처음으로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기억은 스스로 라그랑주의 앞에 나타났다.
그래, 그런 건가. 라그랑주는 공허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길을 더 나아가자 백색의 세계로 향하는 창문이 더 많이 생겨났다. 대부분 텅 빈 광경을 비출 뿐이었지만, 이따금씩 다른 소녀의 모습이 비치기도 하였다.
예상했지만, 시시했다. 라그랑주는 시험 삼아 창문에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역시나 보이지 않는 장막에 가로막혀 창문을 통해 저 세계로 다시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굳이 아르케아의 세계를 떠올리거나 그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면, 그냥 거기 머무르지 않았겠나?
그러한 내면의 지적에도 불구하고 라그랑주는 잠시 자신의 삶이 어땠는지 생각해 보았다.
소녀는 많은 기억들을 보아왔다. 세계의 진실을 밝힐만한 기억이 있으리라 짐작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주로 찾은 것들은 매우 평범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저 평범한 일상.
이미 사라져버린, 반복되던 일상들. 많은 것을 배웠지만 자신이 깨어난 이 세계에 대해서는 단 한 가지도 배울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경계를 넘어가 더 많은 것을 알아내고자 결심했을 때, 처음으로 본 세계의 일부를 자신과 함께 가져가기로 했다. 그 기억에 어떤… 의미를 주고 싶었다.
라그랑주는 카론을 바라보았다. 두고 온 세계의 창문이 주변에서 빛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단지 카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카론을 만든 것도, 단순한 변덕이 아니었나?
“만약에”가 머릿속을 스쳤다. 만약에 사람도 도시도 사라져버린 이 기억의 세계를 이용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면?
그녀는 아르케아의 조각들을 끌어다가 온 노력과 의지, 그리고 바람을 쏟았다. 그리하여 카론이 탄생했다.
“...”
카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
그럼에도 카론은 마치 위성이 모성 옆을 지키듯 그녀의 주변에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아르케아의 세계를 그리워하지 않았다.
카론은, 그 의미 없는 세계를 나타내는 거울이었다.
=====# 9-4 #=====
말없는 소녀는 말없는 파트너와 함께 어둠 속으로 전진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일이 떠올랐다.
그 끈질긴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을 만든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적어도 신이라 불림에 부족함이 없는 어떤 존재.
그것이 그녀가 여행하는 이유였다.
신을 찾고 싶었다.
“흔히들 지적 설계라고 하지...” 라그랑주는 어떤 기억에서 보고 배웠던 것을 다시 되새겼다.
“하지만…” 무언가 말하려다 말을 흐렸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게의 뒤틀림이 극심해졌다. 가로선이 사선으로 변했고, 수평은 뒤집혔다.
나아가려면 가고 싶은 곳으로 발을 내디디면 되었지만, 걷다가 잠시라도 집중이 풀리면 어디론가 떨어져 버리거나, 위로 떠오를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마치 창조자를 대신해, 라그랑주의 바람대로 세계가 움직이는 듯했다. 투명한 땅 위에 밟히는 투명한 발자국을 터덜거리며 말했다.
이로 인해 그녀가 생각한 것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위를 쳐다보았다.
"이 세상은, 감정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어."
이토록 분별없이 만들어진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곳에도 태양이 있다. 백색의 세계에서는 하늘 그 자체가 빛났지만, 이곳에서는 어둠 속에 숨은 태양이 잊힐 정도로 약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르케아의 끝나지 않는 낮에게 빛을 빼앗겨버린 걸지도.
"뭐, 그 영원한 낮도 최근에 끝나버렸지만." 그녀는 앞에 놓인 광경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구름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별빛은 언제나 그렇듯 하늘에 가득했다.
몇 시간 전부터, 어쩌면 며칠 전부터, 소용돌이가 공허 속 현실을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구름 대신 시선을 사로잡는 새롭고 기이한 현상이었다.
잊히고 만 태양과 미완성의 세계에는 무언가 의미가 있었다. 소용돌이도 마찬가지며 구름도 그렇다. 이 공간 전체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백색의 세계에서도 때때로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도 있고, 모든 곳에 있었다. "그것"이 나타나면 존재 그 자체가 뒤틀린다.
‘이상현상Anomaly’이었다.
그녀는 백색의 세계에서도 이상 현상과 몇 번 조우한 적이 있었다. 아까 전까지 존재하던 창문을 통해서도 이상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이상 현상이라는 이름의, 모든 것을 뒤틀어버리고 파괴하는 현상은, 라그랑주에게 있어 일상이었다.
이 공간은 그 현상들이 집중된 장소였다. 그녀가 보기로는 이상 현상에겐 전혀 의도나 목적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만든 신은...
“...”
라그랑주가 검은 소용돌이 앞에 멈추어 섰다. 이 공간에 몇 남지 않은 기억의 유리조각이 미끄러지듯 그 속을 통과하며 몇몇 조각은 얇아지거나 갈라졌다.
이 태피스트리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라그랑주는 손을 들어 올렸다...
단지 인격과 세상에 대한 단순한 상식만을 지닌 채, 라그랑주는 선입견도, 기억도, 사상조차 없이 깨어났다.
...그 사실이 구역질났다.
여태껏 말하고 생각해온 것들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아르케아의 세계가 무의미할 리 없다고, 라그랑주는 그렇게 짐작했다.
그 세계엔 의미가 있다. 넘쳐흐를 정도로.
의미뿐만 아니다. 기억도, 건물도, 유리도 있다.
그리고, 소녀들도...
어째서일까?
"...카론."
그녀는 자신이 만든 위성에게 말을 걸었다. 말을 알아들은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라그랑주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 말했다.
"아직 스스로는 아무 생각도 못 하는 거야? 그러면서도 나는 잘 따라다니네... 날 주인으로 여겨주는 거니, 카론?"
소녀가 카론의 이름을 다시 부르자 그 머리에 박힌 눈이 반짝였다.
"너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나 역시 그래. 그리고… 그 사실 덕분에 무언가 깨달은 것 같아."
별일 아니라는 듯, 라그랑주는 눈앞의 소용돌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 카론은, 라그랑주의 팔이 유리의 실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 어때? 이건 마술일까, 카론? 아니면 너와 나는 같은 존재일까? 네 안에는 피가 없지. 나한테는 있을까?"
라그랑주의 몸이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 그녀에겐 심장이 있고, 박동한다.
그녀에겐 생각이 있고, 존재한다.
그렇다면 라그랑주는 왜 이 세계에 있는 걸까? 다른 소녀들은 왜 있는 것일까?
... 소녀의 현관 속에 피가 흐를지 몰라도, 볼 수는 없었다.
라그랑주의 “몸”은 기억에서 보았던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한때 팔이었던, 한때 자신의 가슴이었던 은색 실가닥...
드디어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 이 육체는 창조된 것이다.
“...!?”
카론이 라그랑주의 옆구리를 치자 소녀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순식간에 실이 다시 모여 그녀의 몸을 이루었다.
라그랑주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고서. 카론을 슬쩍 쳐다보았다. 여전히 말이 없다.
...개의치 않으며 그녀는 가슴을 폈다.
...카론의 주인은 자신이니까.
카론과 눈을 마주치며, 소녀는 말했다.
"...끝자락을 보러 갈까?"
그 끈질긴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이 모든 것을 만든 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사실.
적어도 신이라 불림에 부족함이 없는 어떤 존재.
그것이 그녀가 여행하는 이유였다.
신을 찾고 싶었다.
“흔히들 지적 설계라고 하지...” 라그랑주는 어떤 기억에서 보고 배웠던 것을 다시 되새겼다.
“하지만…” 무언가 말하려다 말을 흐렸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놓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게의 뒤틀림이 극심해졌다. 가로선이 사선으로 변했고, 수평은 뒤집혔다.
나아가려면 가고 싶은 곳으로 발을 내디디면 되었지만, 걷다가 잠시라도 집중이 풀리면 어디론가 떨어져 버리거나, 위로 떠오를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었다.
마치 창조자를 대신해, 라그랑주의 바람대로 세계가 움직이는 듯했다. 투명한 땅 위에 밟히는 투명한 발자국을 터덜거리며 말했다.
이로 인해 그녀가 생각한 것이 사실임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위를 쳐다보았다.
"이 세상은, 감정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어."
이토록 분별없이 만들어진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다.
이곳에도 태양이 있다. 백색의 세계에서는 하늘 그 자체가 빛났지만, 이곳에서는 어둠 속에 숨은 태양이 잊힐 정도로 약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르케아의 끝나지 않는 낮에게 빛을 빼앗겨버린 걸지도.
"뭐, 그 영원한 낮도 최근에 끝나버렸지만." 그녀는 앞에 놓인 광경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구름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별빛은 언제나 그렇듯 하늘에 가득했다.
몇 시간 전부터, 어쩌면 며칠 전부터, 소용돌이가 공허 속 현실을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구름 대신 시선을 사로잡는 새롭고 기이한 현상이었다.
잊히고 만 태양과 미완성의 세계에는 무언가 의미가 있었다. 소용돌이도 마찬가지며 구름도 그렇다. 이 공간 전체가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었다.
백색의 세계에서도 때때로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에도 있고, 모든 곳에 있었다. "그것"이 나타나면 존재 그 자체가 뒤틀린다.
‘이상현상Anomaly’이었다.
그녀는 백색의 세계에서도 이상 현상과 몇 번 조우한 적이 있었다. 아까 전까지 존재하던 창문을 통해서도 이상 현상을 볼 수 있었다.
이상 현상이라는 이름의, 모든 것을 뒤틀어버리고 파괴하는 현상은, 라그랑주에게 있어 일상이었다.
이 공간은 그 현상들이 집중된 장소였다. 그녀가 보기로는 이상 현상에겐 전혀 의도나 목적이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세계를 만든 신은...
“...”
라그랑주가 검은 소용돌이 앞에 멈추어 섰다. 이 공간에 몇 남지 않은 기억의 유리조각이 미끄러지듯 그 속을 통과하며 몇몇 조각은 얇아지거나 갈라졌다.
이 태피스트리의 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라그랑주는 손을 들어 올렸다...
단지 인격과 세상에 대한 단순한 상식만을 지닌 채, 라그랑주는 선입견도, 기억도, 사상조차 없이 깨어났다.
...그 사실이 구역질났다.
여태껏 말하고 생각해온 것들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아르케아의 세계가 무의미할 리 없다고, 라그랑주는 그렇게 짐작했다.
그 세계엔 의미가 있다. 넘쳐흐를 정도로.
의미뿐만 아니다. 기억도, 건물도, 유리도 있다.
그리고, 소녀들도...
어째서일까?
"...카론."
그녀는 자신이 만든 위성에게 말을 걸었다. 말을 알아들은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라그랑주는 아랑곳 않고 계속해 말했다.
"아직 스스로는 아무 생각도 못 하는 거야? 그러면서도 나는 잘 따라다니네... 날 주인으로 여겨주는 거니, 카론?"
소녀가 카론의 이름을 다시 부르자 그 머리에 박힌 눈이 반짝였다.
"너는 이곳에서 태어났고, 나 역시 그래. 그리고… 그 사실 덕분에 무언가 깨달은 것 같아."
별일 아니라는 듯, 라그랑주는 눈앞의 소용돌이로 팔을 집어넣었다.
... 카론은, 라그랑주의 팔이 유리의 실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 어때? 이건 마술일까, 카론? 아니면 너와 나는 같은 존재일까? 네 안에는 피가 없지. 나한테는 있을까?"
라그랑주의 몸이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 그녀에겐 심장이 있고, 박동한다.
그녀에겐 생각이 있고, 존재한다.
그렇다면 라그랑주는 왜 이 세계에 있는 걸까? 다른 소녀들은 왜 있는 것일까?
... 소녀의 현관 속에 피가 흐를지 몰라도, 볼 수는 없었다.
라그랑주의 “몸”은 기억에서 보았던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한때 팔이었던, 한때 자신의 가슴이었던 은색 실가닥...
드디어 확실한 증거를 찾았다. 이 육체는 창조된 것이다.
“...!?”
카론이 라그랑주의 옆구리를 치자 소녀는 깜짝 놀라 뒤로 넘어졌다. 순식간에 실이 다시 모여 그녀의 몸을 이루었다.
라그랑주는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고서. 카론을 슬쩍 쳐다보았다. 여전히 말이 없다.
...개의치 않으며 그녀는 가슴을 폈다.
...카론의 주인은 자신이니까.
카론과 눈을 마주치며, 소녀는 말했다.
"...끝자락을 보러 갈까?"
=====# 9-5 #=====
언제 일어난 일일까?
언제 어둠이 떨어져 나가... 이것이 됐지?
어둠이 떨어져 나갔다. 세상이 떨어져 나갔다.
아르케아 바깥에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입을 움직여도 말소리를 전할 대기가 없다.
이곳에선 그 무엇도 진동하지 않았다. 완벽한 침묵만이 공간을 채웠다.
라그랑주의 눈에 희미하고 기이한 평면이 비치었다.
마치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공간이 새어나가는 듯했다.
마치 내가 이 모든 걸 보지 못하도록 막는 듯해...
잠시 돌아갈까 생각도 했었어. 여기에 와서 얼마 안 됐을 때 좀 더 그 가능성을 고려했으면, 탈출할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이제 난 길을 잃어버렸어.
아니...
길을 "잃는다"라는 건 “장소”가 존재한다는 말이잖아?
위, 아래, 왼쪽, 오른쪽... 방향.
더 이상 그런 건 존재하지 않아. 오래전에 사라져버렸지. 아직 나는 실감이 잘 안 나… 사실, “나”라는 존재 자체도 사라져버린 것 같아.
봐, 손도 없고, 발도 없고, 다리도 없고, 혀도 없어.
나에게 남은 건 두 눈과, 희미하게 일렁이는 뇌의 흔적뿐이 아닐까?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움직임도 감각도 모두 빼앗겨버린 사람의 정신은 얼마 안 가 갈가리 찢겨버려. 집중해야 해.
이 세계를 만든 신은 집중하지 않았으니까.
......
...흠.
그래... 이 세계는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진 거야. 설계도 없는 건물과 같지. 두루뭉술한 인상뿐.
땅이 있고, 햇볕이 있지. 태양이 저문 후엔 별을 머금은 밤하늘이 찾아와. 밤하늘마저 떠난 후엔?
아무도 몰라. 잘난 신께서도 모르는 모양이지?
솔직히 말할게.
너. 뭘 하겠다고 이런 세계를 만들었어? 왜 날 여기로 데려왔어? 왜 내가 예전엔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주지 않았어?
나한텐 삶이 있었어. 네가 빼앗아가버린 삶이.
......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죽은 거야?
오빠를 좋아하던 그 아이처럼? 아니면 붉은 옷을 입은 그 아이처럼?
내가 그 사실을 무서워할까 봐?
이... 하아.
이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응?
네 이기심으로 만들어낸 이 세계에 갇혀서 내가 뭘 해야 하냐고. 너 자신을 위해 만든 세계잖아, 아니야?
네가 도피할 낙원이잖아. 어떻게 만든 거야? 아니, 그게 중요한가?
중요한 게 뭔데?
또 몸이 풀려나가.
어이가 없어.
그 아이가 왜 이 세계를 그토록 싫어하는지 드디어 이해했어.
진실을 알게 되면 누구든지 이 세계를 없애버리고 싶어 할걸.
날 구원한 거라고 생각해? 틀렸어. 설령 그렇다 해도... 난 다시 파멸했어. 이 모든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대체 어떡하면 좋냐는 말이야?
카론...
여기에 카론은 없지? 내 몸은? 나...
나를...
나를 없애줘... 카론은 그때 왜 나를 막은 거지? 되돌아보면...
나 지금 되돌아보고 있는 건가?
내 눈이 어디갔지?
아무것도 안 보여.
여기가 어디였지?
아니... 아냐... 아니야...
아니, 안돼. 정말 되돌아갈 수 없다고?
벗어날 수 없다고?
움직일 수조차 없다고?
아니, 정말로, 아무것도 못 한다고?
아직 손톱이 있었으면 뿌리까지 닳도록 씹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야.
있지...
비록 너는 껍데기를 모아 날 만들었을지는 몰라도...
나는 고작 껍데기가 아니야!
나한텐 감정이 있어. 이런 일 따위 원하지 않아.
들려? 내 생각이?
이런 건 싫다고!
나는 알고 싶었을 뿐이야.
그 대가가 이거야?
아무것도 없잖아…
......
...모든게 무의미하다는 걸 알고 나니...
가슴 속에 찌꺼기가 쌓이는 느낌이야... 가슴, 가슴 어디갔지...? 또 내 손은?
맞아… 사라졌지…
——
이건 빛이 아니야.
말로 설명할 수가 없어.
그 새하얀 폐허의 세계를 떠나 공허에 도착했을 때엔, 어둠이 반가웠어.
모든 게 달랐어. 눈부시지도 않았고. 그 무엇도 “당연” 하지 않았지.
빛, 어둠, 수많은 세계에서 보아온 아주 기초적인 개념. 빛은 따뜻하고 상냥하며, 어둠은 무섭고 불가사의하지.
그래도, 나는 어둠을 알고 싶었어.
......
대략적으로 느끼고는 있었어. 그리고 그 느낌은 확신으로 바뀌었지. 이 세계는 약한 마음을 지닌 자들의 피난처라는 것.
하지만 난 달라.
난 이 피난처를 만든 겁쟁이와는 달라.
내가 만들었으면 이것보단 훨씬 좋은 곳이었겠지.
카론이 보여줬듯... 보여주고 있듯.
모든 게 괜찮을 거라는, 그런 더 나은 진실을 찾고 싶어서 난 어둠 속으로 전진했어.
하지만 결국 찾아낸 진실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 씁쓸하고 무자비했어.
이 상태로 너무 오래 있었어. 시간의 개념조차 잃어버렸어.
그리고 가끔, 저 멀리에서 반짝이는 게 보여.
빛, 진정한 빛이.
......
저 빛이 나를 인도해온 걸지도 몰라.
아무한테도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평생 비판해온 것에 몸을 맡기는 건 지는 기분이 들어.
하지만 분명 저 빛은 나를 부르고 있어.
내가 두고 온 세계의 빛이, 나를 원하고 있어.
그 빛 속에서, 나는 구원받아...
......
알았어, 손을 잡을게.
빛에 가까워지니, 손가락에 감각이 돌아와. 입김마저 보이는 듯해.
돌아가는구나.
그렇다면, 이 진실은 두고 갈게.
절대로 잊진 않겠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하도록 여기에 두고 갈 거야. 난 진심으로 생각해.
신보다 내 솜씨가 더 좋을 거란 거.
그런데 뭔가 만들려면 일단 손부터 되찾아야지.
말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길 거야. 정말로 할 거야. 무언가 창조할 거야.
하지만... 이 감정은 자신감이 아니야.
복수심에 가깝지.
이 세계를 바꾸겠어. 더 나은 곳으로.
네가 망가뜨린 채 내버려둔 세계잖아. 뭐든 가능하지 않겠어?
아마도 그럴 거야.
아니...
그럴거라 확신해.
——
=====# 9-6 #=====
아르케아의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라그랑주는 아르케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으나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점은 많았으나, 별문제는 아니었다.
온전한 몸으로 돌아온 라그랑주는 다시 카론과 함게 공허로 찾아왔다.
그 끝자락에 어떻게 도달했었는지, 아직 자신도 몰랐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진실은 확실했다. 연약한 영혼이 만들어낸 이 기묘하고 망가진 감옥에선… 그 어떤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끝자락에서 돌아오는 것도. 공허에서 돌아오는 것도.
다른 소녀들을 만나는 것도. “창문” 너머로 건너가는 것조차도.
존재가 불가능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면, 그 무엇이든 가능하지 않겠나?
라그랑주가 두 손으로 카론을 들어 올렸다. 카론의 눈이 반짝였다.
"... 네가 나의 등대였던 거야?" 소녀가 카론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아둔한 카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 그러나 그녀는 미소 지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았냐’같은 표정이네. 아무 말도 안 하는 주제에.”
그 말에 카론은 귀를 씰룩씰룩 움직였다.
"하하..."
라그랑주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카론을 놓자 날아올라 그녀의 어깨 위에 자리 잡았다.
이제 그들은 아르케아를 향해 걸었다. 길을 수놓는 빛의 구름을 바라보며.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른 구름들과는 다른 특이한 반짝임. 일렁이는 표면. 그 안에 비추는 세계의 시간은 뒤로 돌아갔다가 다시 앞으로 뛰는 등 혼란스러웠다.
현실의 분열이다. 또다시 하늘이 갈라진다. 하지만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일으킨 그 사건과는 다르다.
그림자에게 쫓기는 소녀...
그리고 빛으로 감싸인 소녀.
그렇다...
또다른 “끝자락”이 나타날 것이다.
저 틈새 사이로 빠져버릴 것 같다는 느낌을 안은 채, 라그랑주는 그 끝을 바라보았다.
결말을 향해가는 소녀들을. 몰락해가는 이야기를.
소멸을.
라그랑주는 또다시 미소 지었다. 그 끝이 비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은 빛과 대립의 춤.
아르케아다.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점은 많았으나, 별문제는 아니었다.
온전한 몸으로 돌아온 라그랑주는 다시 카론과 함게 공허로 찾아왔다.
그 끝자락에 어떻게 도달했었는지, 아직 자신도 몰랐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았다. 하지만...
단 하나의 진실은 확실했다. 연약한 영혼이 만들어낸 이 기묘하고 망가진 감옥에선… 그 어떤 일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끝자락에서 돌아오는 것도. 공허에서 돌아오는 것도.
다른 소녀들을 만나는 것도. “창문” 너머로 건너가는 것조차도.
존재가 불가능한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면, 그 무엇이든 가능하지 않겠나?
라그랑주가 두 손으로 카론을 들어 올렸다. 카론의 눈이 반짝였다.
"... 네가 나의 등대였던 거야?" 소녀가 카론과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아둔한 카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 그러나 그녀는 미소 지었다.
"표정이 왜 그래? ‘내가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았냐’같은 표정이네. 아무 말도 안 하는 주제에.”
그 말에 카론은 귀를 씰룩씰룩 움직였다.
"하하..."
라그랑주는 앞을 향해 걸어갔다.
카론을 놓자 날아올라 그녀의 어깨 위에 자리 잡았다.
이제 그들은 아르케아를 향해 걸었다. 길을 수놓는 빛의 구름을 바라보며.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른 구름들과는 다른 특이한 반짝임. 일렁이는 표면. 그 안에 비추는 세계의 시간은 뒤로 돌아갔다가 다시 앞으로 뛰는 등 혼란스러웠다.
현실의 분열이다. 또다시 하늘이 갈라진다. 하지만 붉은 옷을 입은 소녀가 일으킨 그 사건과는 다르다.
그림자에게 쫓기는 소녀...
그리고 빛으로 감싸인 소녀.
그렇다...
또다른 “끝자락”이 나타날 것이다.
저 틈새 사이로 빠져버릴 것 같다는 느낌을 안은 채, 라그랑주는 그 끝을 바라보았다.
결말을 향해가는 소녀들을. 몰락해가는 이야기를.
소멸을.
라그랑주는 또다시 미소 지었다. 그 끝이 비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은 빛과 대립의 춤.
아르케아다.
2.2. 에토/루나
2.2.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0-1 | Binary-1 | 에토로 next to you 클리어 | ||
10-2 | Binary-2 | 루나로 Silent Rush 클리어 | ||
10-3 | Binary-3 | 에토로 Strongholds 클리어 | ||
10-4 | Binary-4 | 루나로 next to you 클리어 | ||
10-5 | Binary-5 | 루나로 Memory Forest 클리어 | ||
10-6 | Binary-6 | 에토로 Singularity 클리어 |
2.2.2. Binary Enfold
=====# 10-1 #=====잠들었구나.
잠든 네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네.
이 세계에서 우리가 만든 추억을 수정에 담을 수 있다면, 난 지금 이 순간과 같은 기억만을 모을 거야.
이 얘길 들으면 넌 웃을까? 유리 조각을 주울 때마다 항상 날 놀리곤 하잖니. 아마 이해할 수 없는 거겠지.
그래도 괜찮아.
너를 기억 속에 완전히 담을 수는 없는 거겠지. 지금도 앞으로도, 너는 영원히 너 일 테니까.
하지만… 잠든 네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네.
기억 속의 그 공연장과, 그 연주회…
너는 매서운 화염, 강렬한 폭풍이었어.
네가 발을 구를 때마다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했지.
대기가 진동하고, 땅이 요동쳤어.
그런 너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벅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어.
네가 연주하는 멜로디로 공연장이 가득 채워진 것 같았어.
그 놀라운 노력과 집념… 감탄스러웠어.
울리는 박자, 환한 너의 미소… 현을 켜는 네 모습, 이마에 맺힌 땀, 터져 나오는 웃음…
그 순간 떠올렸어.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영광의 순간에도, 투쟁의 순간에도,
나는 언제나 널 사랑했어, 루나야.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연주가 끝났어. 상대방 연주자는 명예롭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너는 악기를 들어 올리고선 허리 숙여 인사했어.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 무언가 말을 했지. 박수 소리에 묻혀 들리진 않았지만, 입술 모양으로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어.
“언니보다 내가 잘하지?”
나는 미간을 구기고 눈을 한 번 굴렸어. 기억은 거기서 끝나.
백색의 세계가 주변의 광경을 감쌌어. 네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어. 네 손에 들려있는 건 악기가 아니라 검이었지.
나는 너를 바라보며 말했어.
“한 번 이긴 걸로 그렇게 좋아할 일이니?”
“이긴 건 이긴 거지. 자, 얼른 세봐.”
“숫자 적을 곳도 없는데 어떻게 세?”
“직접 세면 되잖아.” 너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어. “머리로 세.”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루나야.
세 번이네. 네가 나보다 더 멋진 연주를 한 횟수. 세 번… 굳이 내가 알려줄 필요도 없겠지만.
내가 이긴 횟수는… 음, 그래. 다섯 번이군. 머릿속에서 셈을 끝낸 나는 한 손을 완전히 펼치고, 다른 쪽 손으론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어.
그리고 넌 네 손을 내 손바닥에 짝 하고 부딪혔지.
“다섯 번?!” 어찌나 신이 났는지 아주 소리를 지르며 네가 말했어. “별로 차이도 안 나는구만!” 그렇지.
넌 그래도 손가락을 접어 내 손에 겹쳤어.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힌 너는 여전히 미소가 번진 얼굴과 작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지.
“한 판 더?”
나는 거절했어. 좀 슬프잖니. 검을 가리켜서 주변에 있는 아무 기억에나 들어가도 너보다 내가 훨씬 잘할 텐데.
하지만 넌 어찌나 신이 나는지 그것조차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넌 내 손을 더욱 꽉 쥐었어.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겨우 진정했지.
평소의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너는 나에게 물었어.
“그럼 다음은 어디로 갈까?”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저번에 말했던 탑을 가리켰지.
그래, 맞아. 루나야.
난 네가 알면서도 굳이 물어봐주는 게 기뻐.
잠든 네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네.
이 세계에서 우리가 만든 추억을 수정에 담을 수 있다면, 난 지금 이 순간과 같은 기억만을 모을 거야.
이 얘길 들으면 넌 웃을까? 유리 조각을 주울 때마다 항상 날 놀리곤 하잖니. 아마 이해할 수 없는 거겠지.
그래도 괜찮아.
너를 기억 속에 완전히 담을 수는 없는 거겠지. 지금도 앞으로도, 너는 영원히 너 일 테니까.
하지만… 잠든 네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네.
기억 속의 그 공연장과, 그 연주회…
너는 매서운 화염, 강렬한 폭풍이었어.
네가 발을 구를 때마다 건물이 통째로 흔들리는 듯했지.
대기가 진동하고, 땅이 요동쳤어.
그런 너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벅차올라 견딜 수가 없었어.
네가 연주하는 멜로디로 공연장이 가득 채워진 것 같았어.
그 놀라운 노력과 집념… 감탄스러웠어.
울리는 박자, 환한 너의 미소… 현을 켜는 네 모습, 이마에 맺힌 땀, 터져 나오는 웃음…
그 순간 떠올렸어.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영광의 순간에도, 투쟁의 순간에도,
나는 언제나 널 사랑했어, 루나야.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연주가 끝났어. 상대방 연주자는 명예롭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지.
너는 악기를 들어 올리고선 허리 숙여 인사했어.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 무언가 말을 했지. 박수 소리에 묻혀 들리진 않았지만, 입술 모양으로 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었어.
“언니보다 내가 잘하지?”
나는 미간을 구기고 눈을 한 번 굴렸어. 기억은 거기서 끝나.
백색의 세계가 주변의 광경을 감쌌어. 네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어. 네 손에 들려있는 건 악기가 아니라 검이었지.
나는 너를 바라보며 말했어.
“한 번 이긴 걸로 그렇게 좋아할 일이니?”
“이긴 건 이긴 거지. 자, 얼른 세봐.”
“숫자 적을 곳도 없는데 어떻게 세?”
“직접 세면 되잖아.” 너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말했어. “머리로 세.”
그 정도는 나도 알아, 루나야.
세 번이네. 네가 나보다 더 멋진 연주를 한 횟수. 세 번… 굳이 내가 알려줄 필요도 없겠지만.
내가 이긴 횟수는… 음, 그래. 다섯 번이군. 머릿속에서 셈을 끝낸 나는 한 손을 완전히 펼치고, 다른 쪽 손으론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어.
그리고 넌 네 손을 내 손바닥에 짝 하고 부딪혔지.
“다섯 번?!” 어찌나 신이 났는지 아주 소리를 지르며 네가 말했어. “별로 차이도 안 나는구만!” 그렇지.
넌 그래도 손가락을 접어 내 손에 겹쳤어.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힌 너는 여전히 미소가 번진 얼굴과 작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지.
“한 판 더?”
나는 거절했어. 좀 슬프잖니. 검을 가리켜서 주변에 있는 아무 기억에나 들어가도 너보다 내가 훨씬 잘할 텐데.
하지만 넌 어찌나 신이 나는지 그것조차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넌 내 손을 더욱 꽉 쥐었어.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겨우 진정했지.
평소의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너는 나에게 물었어.
“그럼 다음은 어디로 갈까?”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저번에 말했던 탑을 가리켰지.
그래, 맞아. 루나야.
난 네가 알면서도 굳이 물어봐주는 게 기뻐.
=====# 10-2 #=====
깨어났니?
난 꿈속에 있는 것 같아. 하다 하다 이젠 언니 꿈을 꾸는 지경이 됐는지.
언니의 얼굴, 언니와의 기억, 언니의 모습이 무수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내 넋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연주.
세세한 움직임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통제하는 절제력. 언니를 생각하면, ‘완벽하다’라는 말이 떠오르곤 해.
짜증 나는 건, 언니의 면면을 보면 도저히 ‘완벽하다’고는 또 못 하겠다는 거야.
길도 잘 못 찾아서 곧잘 헤매고, 틈만 나면 어디 걸려 넘어지고… 그리고 솔직히 있잖아. 언니는… 좀 이상한 사람이야.
있지, 난 이 세계에서 깨어난 게 너무 싫었어.
그도 그럴게, 언니랑 나에게는 너무 일렀잖아. 삶의 종착역이 이런 곳일 거란 걸 누가 알았겠어? 학교도, 책도, 부모님도, 그 무엇도 유리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는 사실 따위는 가르쳐 주지 않았단 말이야.
이 세계의 새하얀 빛을 쬐며 깨어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언니였어.
“이거 전부 유리잖아!” 언니는 그렇게 말하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어.
그리고 잠시 동안, 내가 울지 않도록 달래려는 건지, 언니는 온갖 바보 같은 말을 늘어놓았어. 자매 간에는 뭔가 통하는 게 있어서, 내 마음속 근심을 사라지게 하려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언니는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러다가 갑자기 언니는 팔을 마구 흔들며 그 유리 조각들이 언니를 따라오게 만들려고 했어.
정말 나를 달래려고 한 건지 아닌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걸로 다시 깨달았어. 언니는 항상 그랬다는 걸.
그리고 언니가 내 손을 잡을 때면, 자기는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 맹세하는 것 같다는 걸. 그리고…
내가 언니를 사랑한다는 걸.
곁에 있을 때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나,
언제나 사랑해, 에토 언니.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진 않을 거지만.
저 탑에 갔을 때 기억해? 이 세계의… 절반쯤 봤을 때였나. 언니는 왜인지 저 탑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
그러고 보니 또 기억나네. 탑으로 향하는 길에 내가 언니한테 물었잖아.
“저 탑이 뭐가 그렇게 특별해?”
“우리가 여기서 눈 뜨고 처음 본 게 저거잖아!” 언니는 그렇게 대답했지.
…난 좀 어이가 없었어.
“...그게 다야? 굳이 저 탑으로 가는 이유란 게… 그냥 보이니까?”
“나만 본 게 아니야. 우리 둘 다 봤잖아.” 언니는 내 말을 고치듯 말했어.
“기억 안 나.” 난 시치미를 뗐지. “언니, 벌써 정신줄 놓은 거야?”
언니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고선 내게 물었어. “정신줄 놓은 게 정확히 뭔데?”
뭐긴 뭐야, 언니지. 언니는 유리 조각이 아니었으면 조약돌이나 나뭇잎으로 모았을 테고, 악기가 아니었으면 붓을 들었을 테고, 여행에 목적지가 없어도 어딘가 갈 곳을 찾아냈을 거잖아.
나 보고 ‘무모하다’더니, 언니 모습을 보라고.
그 탑은… ‘탑’조차 아니었어. 등대였지. 텅 빈 바다를 바라보며 외로이 서있는, 등대.
걸어오느라 지친 나는 잠시 바닥에 앉았어. 언니도 앉았지. 이유는 내가 앉았으니까.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중에, 문득 하나 발상이 떠올랐어. 나는 바로 언니에게 물었지.
“잠깐, 잠깐만… 어쩌면… 여기 어딘가에 소라고둥이 묻혀있지 않을까?”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는 너도 알잖아, 루나야.”
“맞아, 하지만 세상에 소라고둥 없는 바다는…”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언니의 등에 기댔어.
“소라고둥 찾으러 가자! 바다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언니는 그런 날 보고 ‘어린애 같다’고 말했어. 아, 예. 어린애 같아서 미안하네요.
그런데 기억해? 모래사장으로 날 데려간 건 결국 언니였다는 거.
그곳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우리는 기억을 조금 되찾을 수 있었어.
난 꿈속에 있는 것 같아. 하다 하다 이젠 언니 꿈을 꾸는 지경이 됐는지.
언니의 얼굴, 언니와의 기억, 언니의 모습이 무수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내 넋을 빼놓을 만큼 아름다운 연주.
세세한 움직임 하나까지도 완벽하게 통제하는 절제력. 언니를 생각하면, ‘완벽하다’라는 말이 떠오르곤 해.
짜증 나는 건, 언니의 면면을 보면 도저히 ‘완벽하다’고는 또 못 하겠다는 거야.
길도 잘 못 찾아서 곧잘 헤매고, 틈만 나면 어디 걸려 넘어지고… 그리고 솔직히 있잖아. 언니는… 좀 이상한 사람이야.
있지, 난 이 세계에서 깨어난 게 너무 싫었어.
그도 그럴게, 언니랑 나에게는 너무 일렀잖아. 삶의 종착역이 이런 곳일 거란 걸 누가 알았겠어? 학교도, 책도, 부모님도, 그 무엇도 유리로 이루어진 세계가 있다는 사실 따위는 가르쳐 주지 않았단 말이야.
이 세계의 새하얀 빛을 쬐며 깨어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언니였어.
“이거 전부 유리잖아!” 언니는 그렇게 말하고선,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어.
그리고 잠시 동안, 내가 울지 않도록 달래려는 건지, 언니는 온갖 바보 같은 말을 늘어놓았어. 자매 간에는 뭔가 통하는 게 있어서, 내 마음속 근심을 사라지게 하려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언니는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러다가 갑자기 언니는 팔을 마구 흔들며 그 유리 조각들이 언니를 따라오게 만들려고 했어.
정말 나를 달래려고 한 건지 아닌 건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그걸로 다시 깨달았어. 언니는 항상 그랬다는 걸.
그리고 언니가 내 손을 잡을 때면, 자기는 영원히 변치 않을 거라 맹세하는 것 같다는 걸. 그리고…
내가 언니를 사랑한다는 걸.
곁에 있을 때나, 멀리 떨어져 있을 때나,
언제나 사랑해, 에토 언니.
절대로 입 밖으로 내진 않을 거지만.
저 탑에 갔을 때 기억해? 이 세계의… 절반쯤 봤을 때였나. 언니는 왜인지 저 탑에 정신이 팔려 있었지.
그러고 보니 또 기억나네. 탑으로 향하는 길에 내가 언니한테 물었잖아.
“저 탑이 뭐가 그렇게 특별해?”
“우리가 여기서 눈 뜨고 처음 본 게 저거잖아!” 언니는 그렇게 대답했지.
…난 좀 어이가 없었어.
“...그게 다야? 굳이 저 탑으로 가는 이유란 게… 그냥 보이니까?”
“나만 본 게 아니야. 우리 둘 다 봤잖아.” 언니는 내 말을 고치듯 말했어.
“기억 안 나.” 난 시치미를 뗐지. “언니, 벌써 정신줄 놓은 거야?”
언니는 작게 웃음소리를 내고선 내게 물었어. “정신줄 놓은 게 정확히 뭔데?”
뭐긴 뭐야, 언니지. 언니는 유리 조각이 아니었으면 조약돌이나 나뭇잎으로 모았을 테고, 악기가 아니었으면 붓을 들었을 테고, 여행에 목적지가 없어도 어딘가 갈 곳을 찾아냈을 거잖아.
나 보고 ‘무모하다’더니, 언니 모습을 보라고.
그 탑은… ‘탑’조차 아니었어. 등대였지. 텅 빈 바다를 바라보며 외로이 서있는, 등대.
걸어오느라 지친 나는 잠시 바닥에 앉았어. 언니도 앉았지. 이유는 내가 앉았으니까.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중에, 문득 하나 발상이 떠올랐어. 나는 바로 언니에게 물었지.
“잠깐, 잠깐만… 어쩌면… 여기 어딘가에 소라고둥이 묻혀있지 않을까?”
“이 세계가 어떤 곳인지는 너도 알잖아, 루나야.”
“맞아, 하지만 세상에 소라고둥 없는 바다는…” 나는 그렇게 말하고서 언니의 등에 기댔어.
“소라고둥 찾으러 가자! 바다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언니는 그런 날 보고 ‘어린애 같다’고 말했어. 아, 예. 어린애 같아서 미안하네요.
그런데 기억해? 모래사장으로 날 데려간 건 결국 언니였다는 거.
그곳에서 보낸 시간 덕분에, 우리는 기억을 조금 되찾을 수 있었어.
=====# 10-3 #=====
루나야, 결국 우리가 찾은 건 유리 조각들 뿐이었던 거 기억하니? 소라고둥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 당연한 일이지만.
뭐, 그래도 난 즐거웠어. 게다가, 바다를 비추는 기억까지 발견했잖니.
거기서 찾은 소라고둥에서도 훌륭한 바다 소리가 났지.
그 기억의 주인은 해변에서 금방 떠나버렸지만 우리는 아랑곳 않고 계속 해변에 머물렀지.
“헤엄도 칠 수 있을까…?” 너는 소라고둥을 귀에 댄 채로, 눈을 찡그리고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어.
“같이는 못 하겠지만… 너는 헤엄칠 수 있지 않을까?”
“아, 맞다. 그랬지!”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너는 날 바라보고 말했어. 내 표정은 이미 그 시점에서 구겨져 있었지.
“언니 수영 못하지!”
“그 이상 말하면 머리카락에 모래 뿌려버린다.” 난 손가락질하며 위협했어.
“이 기회에 배워보자!” 네가 바다를 가리키며 소리쳤지.
난 수영복이 없다며 항의했어. 넌 여긴 기억일 뿐이니 괜찮을 거라며, 내가 눈치채기도 전에 내 손을 잡아 바다쪽으로 끌고 가고 있었지.
물, 차가운 감촉, 그 모든 게 진짜 같았어. 너는 나를 바다로 이끌었어. 벌벌 떠는 나의 다리를 인도했어.
수영은 네가 나보다 잘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지. 아주 즐거워 보이는구나.
있지, 그때 내 머리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 정신 산만하면서도, 조금은 무섭고, 조금은 즐거운…?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인지 수백 번, 수만 번 고민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런 의문은 의식의 저 너머로 밀려났어.
기억이 끝난 후에 넌 날 모래사장 위로 넘어뜨려 마구 간지럽혔어. 이 장난꾸러기에 무자비한 동생 같으니.
애써 웃음을 참았지만, 결국은 미소가 얼굴에 번졌어.
그러다가, 내 쪽이 언니라는 걸 떠올렸지.
난 네 볼을 꼬집어 쭈욱 늘렸어.
“그만해, 이 꼬맹이 녀석!”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지.
그러자 넌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날 내려다보더니 내 코를 꼬집었어.
“악! 거긴 안 돼!” 네 간지럼 공격을 받으며 소리쳤어. 소리 지른다고 멈출 네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말이야.
그런데 있지, 난 애초에 네가 멈추길 바라지 않았어.
뭐, 그래도 난 즐거웠어. 게다가, 바다를 비추는 기억까지 발견했잖니.
거기서 찾은 소라고둥에서도 훌륭한 바다 소리가 났지.
그 기억의 주인은 해변에서 금방 떠나버렸지만 우리는 아랑곳 않고 계속 해변에 머물렀지.
“헤엄도 칠 수 있을까…?” 너는 소라고둥을 귀에 댄 채로, 눈을 찡그리고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며 말했어.
“같이는 못 하겠지만… 너는 헤엄칠 수 있지 않을까?”
“아, 맞다. 그랬지!” 가까스로 웃음을 참으며 너는 날 바라보고 말했어. 내 표정은 이미 그 시점에서 구겨져 있었지.
“언니 수영 못하지!”
“그 이상 말하면 머리카락에 모래 뿌려버린다.” 난 손가락질하며 위협했어.
“이 기회에 배워보자!” 네가 바다를 가리키며 소리쳤지.
난 수영복이 없다며 항의했어. 넌 여긴 기억일 뿐이니 괜찮을 거라며, 내가 눈치채기도 전에 내 손을 잡아 바다쪽으로 끌고 가고 있었지.
물, 차가운 감촉, 그 모든 게 진짜 같았어. 너는 나를 바다로 이끌었어. 벌벌 떠는 나의 다리를 인도했어.
수영은 네가 나보다 잘하는 몇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지. 아주 즐거워 보이는구나.
있지, 그때 내 머리는 의문으로 가득 차 있었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 정신 산만하면서도, 조금은 무섭고, 조금은 즐거운…?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인지 수백 번, 수만 번 고민할 수도 있었지만 결국 그런 의문은 의식의 저 너머로 밀려났어.
기억이 끝난 후에 넌 날 모래사장 위로 넘어뜨려 마구 간지럽혔어. 이 장난꾸러기에 무자비한 동생 같으니.
애써 웃음을 참았지만, 결국은 미소가 얼굴에 번졌어.
그러다가, 내 쪽이 언니라는 걸 떠올렸지.
난 네 볼을 꼬집어 쭈욱 늘렸어.
“그만해, 이 꼬맹이 녀석!” 그리고 단호하게 말했지.
그러자 넌 재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날 내려다보더니 내 코를 꼬집었어.
“악! 거긴 안 돼!” 네 간지럼 공격을 받으며 소리쳤어. 소리 지른다고 멈출 네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말이야.
그런데 있지, 난 애초에 네가 멈추길 바라지 않았어.
=====# 10-4 #=====
에토 언니. 언니 항상 이렇게 가벼웠던가?
한바탕 난투 끝에 지쳐버린 언니를 들쳐메고 등대를 올라가야 하는 건 바로 나였지.
언니를 등에 업은 나. 반대였으면 좋았을 텐데. 언니 몸이 나보다 더 푹신하잖아. 불공평해.
백색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지만, 창문이 하나도 없는 이 등대의 나선 계단은 너무나도 어두웠어.
게다가 언니는 잠에 들었으니… 음, 이렇게까지 혼자가 된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지.
들리는 건 오로지 언니의 숨소리와 메아리치는 내 발소리. 보이는 건 계단 끝에 희미하게 비치는 빛…
…우리 어릴 적에는… 잠자기 전에 항상 언니가 노랠 불러주지 않았나? 어떤 노래더라…
“흠흠…흠흠…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언니의 목소리가 가사를 이었어.
계속해서 계단은 올랐지만, 노래는 그만뒀어.
“이 나이에 자장가라…” 언니가 말했어. 목소리에 조금 나른한 느낌은 있었지만, 분명히 깨어 있었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얼굴과 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어. 절대로 보지 마, 언니.
“다음은 안 불러?” 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언니가 물었어.
“시끄러.” 난 간결하게 대답했지.
언니는 킥킥대며 웃었어. 날숨이 머리카락 사이로 느껴졌어.
“어차피 이 세계엔 밤도 안 오잖아.” 내가 쏘아붙였어. “그나까 됐어.”
“그 노래, 가사에 달은 안 나오잖아?” 언니가 말했어.
나는 다시 말했지. “됐다니까.”
“그런데… 언제까지 업고 올라갈 셈이야?” 언니가 물었어.
나는 “정말 한 번 물면 놓을 생각을 안 하는구나…” 하고 중얼댔어.
안 봐도 알아. 분명 얼굴에 잔뜩 웃음기를 머금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등 쪽으로 언니의 가슴이 눌리는 게 느껴져서…
그래, 참을 만큼 참았다. 내려와.
나는 언니를 그대로 내려놓았어.
그런데 언니가 갑자기 내 등이랑 머리를 쓰다듬는 거야.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눈을 돌리고 표정을 구기기만 했어.
“가자, 루나.” 언니는 그렇게 달래듯 나에게 말했어. 내 턱을 잡아 고개를 부드럽게 들어 올리기까지 하면서 말이야.
“꼭대기까지 거의 다 온 것 같아… 아마도!”
그래. 내가 동생이라 이거지.
이번만이야. 이번만큼은 져 주겠어.
한바탕 난투 끝에 지쳐버린 언니를 들쳐메고 등대를 올라가야 하는 건 바로 나였지.
언니를 등에 업은 나. 반대였으면 좋았을 텐데. 언니 몸이 나보다 더 푹신하잖아. 불공평해.
백색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지만, 창문이 하나도 없는 이 등대의 나선 계단은 너무나도 어두웠어.
게다가 언니는 잠에 들었으니… 음, 이렇게까지 혼자가 된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지.
들리는 건 오로지 언니의 숨소리와 메아리치는 내 발소리. 보이는 건 계단 끝에 희미하게 비치는 빛…
…우리 어릴 적에는… 잠자기 전에 항상 언니가 노랠 불러주지 않았나? 어떤 노래더라…
“흠흠…흠흠…작은 별… 아름답게 비치네. 동쪽 하늘에서도…”
“서쪽 하늘에서도?”
…언니의 목소리가 가사를 이었어.
계속해서 계단은 올랐지만, 노래는 그만뒀어.
“이 나이에 자장가라…” 언니가 말했어. 목소리에 조금 나른한 느낌은 있었지만, 분명히 깨어 있었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얼굴과 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어. 절대로 보지 마, 언니.
“다음은 안 불러?” 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파묻으며 언니가 물었어.
“시끄러.” 난 간결하게 대답했지.
언니는 킥킥대며 웃었어. 날숨이 머리카락 사이로 느껴졌어.
“어차피 이 세계엔 밤도 안 오잖아.” 내가 쏘아붙였어. “그나까 됐어.”
“그 노래, 가사에 달은 안 나오잖아?” 언니가 말했어.
나는 다시 말했지. “됐다니까.”
“그런데… 언제까지 업고 올라갈 셈이야?” 언니가 물었어.
나는 “정말 한 번 물면 놓을 생각을 안 하는구나…” 하고 중얼댔어.
안 봐도 알아. 분명 얼굴에 잔뜩 웃음기를 머금고 있겠지. 그 생각을 하고 있자니, 등 쪽으로 언니의 가슴이 눌리는 게 느껴져서…
그래, 참을 만큼 참았다. 내려와.
나는 언니를 그대로 내려놓았어.
그런데 언니가 갑자기 내 등이랑 머리를 쓰다듬는 거야.
그만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눈을 돌리고 표정을 구기기만 했어.
“가자, 루나.” 언니는 그렇게 달래듯 나에게 말했어. 내 턱을 잡아 고개를 부드럽게 들어 올리기까지 하면서 말이야.
“꼭대기까지 거의 다 온 것 같아… 아마도!”
그래. 내가 동생이라 이거지.
이번만이야. 이번만큼은 져 주겠어.
=====# 10-5 #=====
우리는 등대의 정상에 다다랐어. 조명이 있어야 할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우리 중 한 명은 무릎에 손을 올린 채 조명의 틀에 걸터 앉았고, 다른 한 명은 그 틀을 두드리며 들어본 적 없는 리듬의 곡을 흥얼거렸어.
우리는 다른 것보다 먼저 서로를 바라봤어. 그리고 할 일 없는 손으로 서로의 손가락을 만졌지.
한 개, 어쩔 때는 두 개씩. 규칙 없는 놀이를 하는 것처럼.
“언젠가 내가 정말 언니보다 더 대단해지면 어떡할 거야?” 동생이 물었어.
“내가 받는 박수 소리가 더 커지거나, 카드 게임에서 언니에게 지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꿈이 크네.” 언니가 대답했어. “전부 만약의 이야기잖아. 가능성도 낮은.”
“음…” 동생 쪽이 우리 뒤의 부서진 조명을 맹하게 바라보며 생각하듯 신음을 냈어. “그렇네.”
우리는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규칙 없는 놀이를 계속했지.
“그래도 포기하지는 마. 아, 굳이 내가 말해줄 필요도 없나?”
…우린 그 말에 미소만 지었지.
우린 서로의 손을 잡고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았어.
이 세계는 황량했어. 지금까지 만난 생명이라고는 서로밖에 없었지. 보이지 않는 태양은 만물을 무자비하게 비추고 있었어.
손을 잡은 우리. 바깥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어.
“정원 가꾸기, 다시 도전해 보고 싶네…”
“응, 그러게…”
조용히, 갑작스럽게, 우리는 서로의 뜻에 동의했어.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드넓은 아르케아를 바라보았어.
하늘을 가로지르는 붉은 혜성.
우리가 바라보고 있던 낮의 하늘에,
밤이 번지기 시작했어.
=====# 10-6 #=====
모두 오래 전에 일어났던 일이다.
밤의 장막이 내려오던 날, 하늘이 또다시 부서지기 전…
자매는 검을 쥐면서 생각했다.
이 세계가 죽음 이후의 세상일지라도, 이곳에서조차 ‘끝’은 존재할 것이라는 것.
그들은 항상 어렴풋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아르케아는 변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그리고 끔찍하게.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자매는 절망하지 않았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에게 많은 말은 필요 없으니까.
“남은 시간은 신나게 놀면서 보낼까?”
“아니면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 쳐볼까?”
“...아니, 앞으로 얼마나 남았든,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바로 마지막 순간까지 너와 함께하는 거야.”
자매는 지금, 또다시 여행을 떠난다.
“루나, 가자.” 언니 쪽이 말했다.
동생 쪽이 망가진 계단을 내려가며, 무너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계단이 무너져 내렸다.
뛰어내린 동생을 언니가 받았다. 지면이 갈라지며 뒤틀렸다.
자매는 서로를 껴안으며, 무너져내리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하늘, 부서진 대지. 이 세계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깨져버렸다.
그리고 모든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자매는 나아갔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어. 언제든지.
붕괴하는 백색의 세계의 파편을 뛰어넘으며, 자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한 번 더 걷고, 한 번 더 떠나고,
한 번 더 보고, 한 번 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자매는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미소를 지은 채, 자매는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열쇠’를 하늘을 향해 겨누었다.
아직 잔해 사이를 헤엄치는 아르케아를 향해.
빛이 두 소녀를 감쌌다. 또다른 기억으로 떠나는 여정.
언제나 그렇게 했듯이,
한 번 더, 춤을 춰보자.
밤의 장막이 내려오던 날, 하늘이 또다시 부서지기 전…
자매는 검을 쥐면서 생각했다.
이 세계가 죽음 이후의 세상일지라도, 이곳에서조차 ‘끝’은 존재할 것이라는 것.
그들은 항상 어렴풋이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아르케아는 변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그리고 끔찍하게.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하지만 자매는 절망하지 않았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에게 많은 말은 필요 없으니까.
“남은 시간은 신나게 놀면서 보낼까?”
“아니면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 쳐볼까?”
“...아니, 앞으로 얼마나 남았든, 내가 정말로 원하는 건 바로 마지막 순간까지 너와 함께하는 거야.”
자매는 지금, 또다시 여행을 떠난다.
“루나, 가자.” 언니 쪽이 말했다.
동생 쪽이 망가진 계단을 내려가며, 무너지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계단이 무너져 내렸다.
뛰어내린 동생을 언니가 받았다. 지면이 갈라지며 뒤틀렸다.
자매는 서로를 껴안으며, 무너져내리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부서진 하늘, 부서진 대지. 이 세계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깨져버렸다.
그리고 모든게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자매는 나아갔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어. 언제든지.
붕괴하는 백색의 세계의 파편을 뛰어넘으며, 자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한 번 더 걷고, 한 번 더 떠나고,
한 번 더 보고, 한 번 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자매는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미소를 지은 채, 자매는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열쇠’를 하늘을 향해 겨누었다.
아직 잔해 사이를 헤엄치는 아르케아를 향해.
빛이 두 소녀를 감쌌다. 또다른 기억으로 떠나는 여정.
언제나 그렇게 했듯이,
한 번 더, 춤을 춰보자.
3. Archive Story
3.1. 비타
3.1.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2-1 | Unseeing-1 | Snow White 클리어 | ||
12-2 | Unseeing-2 | Sakura Fubuki 클리어 | ||
12-3 | Unseeing-3 | NEO WINGS 클리어 |
3.1.2. Unseeing Eyes
=====# 12-1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눈으로 보는 것인가? 피부로 느끼는 것인가? 귀로 듣는 것인가?
오감으로 감지한 것은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맞아.
본인의 오감, 또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감지한 것을 "안다"고 해.
아이에게는 특히나 잘 들어맞는 정의지.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해. 만난 적 없는 사람... 그럼에도 낯이 익은 사람.
그녀의 기억을 모두 모아 시간 순서대로 세워본 적이 있거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해.
머나먼 우주 저 너머에 흔하디흔한 행성이 존재했어.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행성이었지.
그 행성의 어떤 아이들은 10살이 되는 해부터 타고났을 지도 모르는 능력을 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만약 발현된다면, 그 능력은 17세가 되는 해까지 지니고 있을 수 있었지. 생각과 소망대로 현실을 주무를 수 있는 능력.
평범한 세계 속 비범한 능력이었어.
아이들은 신이라기보다는 기묘한 설계자에 가까웠어. 그 굉장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행성을 지킬 수 있었지.
그 특별한 소년 소녀의 무리 사이에, 우리의 주인공이 있어.
그 나라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 그 행성의 이름... 역시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단 하나 기억나는 것,
그녀의 이름은... "비타"였어.
어느 날, 비타는 방에서 깨어난 후 어둑어둑해진 창문 너머로 밤 하늘을 보았어. 비타의 친구들도 하나둘씩 깨어났어.
서로에게 “좋은 아침”이라 인사했지만, 깨어난 시간은 저녁이었지. 지난 2년 동안 매일 저녁이 이와 같았어.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고, 즐겨듣는 라디오 드라마를 이야기하고, 읽고 있는 책과 만화를 이야기하고, 미래의 꿈을 이야기했지.
비타와 친구들은 군복을 챙겨 입고 지휘실로 향하며 수다스럽게 대화했어.
이 우주는 전쟁 중이었어.
아이들의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노리고 다른 나라가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곤 했거든. 보통은 자기들끼리 말솜씨를 이용하는 어른들도 있었어.
이 폭력과 부패의 시대 속에서 가능한 한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외인부대와 외교관들도 있었지. 그리고…
신경망-정신 통로-격자 네트워크(Nerve/Mind Pathway/Grid Measure)라는 것도 있었어.
소규모 운용 시 적을 견제하는 데에서 그치지만, 대규모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고, 다른 행성의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는 존재…
상세한 설명은 줄일게.
중앙 정보 통신실에 입장한 비타는 그 장엄함에 익숙한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어. 이 거대한 공간에서 휘몰아치는 생각과 욕망의 소용돌이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걸어나갔어.
그녀와 친구들에겐 해야 할 역할이 있었거든. 자신들의 지정석에 다가갈수록 자연스레 수다는 줄어들었어. 그런 하찮은 잡담 대신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는 소리만이 서로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지.
그들이 사는 이 아름다운 행성을 위하여. 우주의 그 어느 행성보다 풍요로운 번영과 평화를 위하여.
비타는 NMPGM(Nerve-Mind Pathway-Grid Measure)에 접속했어.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를 지우고,
자신 몫의 통로를 가다듬었어.
그 무엇도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온 집중을 다했어.
알 수 없는 신호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 12-2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눈으로 보는 것인가? 피부로 느끼는 것인가? 귀로 듣는 것인가?
오감으로 감지한 것은 "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인가?
맞아.
본인의 오감, 또는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감지한 것을 "안다"고 해.
아이에게는 특히나 잘 들어맞는 정의지.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려 해. 만난 적 없는 사람... 그럼에도 낯이 익은 사람.
그녀의 기억을 모두 모아 시간 순서대로 세워본 적이 있거든.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지.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해.
머나먼 우주 저 너머에 흔하디흔한 행성이 존재했어.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조화롭게 살아가는 행성이었지.
그 행성의 어떤 아이들은 10살이 되는 해부터 타고났을 지도 모르는 능력을 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만약 발현된다면, 그 능력은 17세가 되는 해까지 지니고 있을 수 있었지. 생각과 소망대로 현실을 주무를 수 있는 능력.
평범한 세계 속 비범한 능력이었어.
아이들은 신이라기보다는 기묘한 설계자에 가까웠어. 그 굉장한 능력으로 자신들의 행성을 지킬 수 있었지.
그 특별한 소년 소녀의 무리 사이에, 우리의 주인공이 있어.
그 나라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 그 행성의 이름... 역시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단 하나 기억나는 것,
그녀의 이름은... "비타"였어.
어느 날, 비타는 방에서 깨어난 후 어둑어둑해진 창문 너머로 밤 하늘을 보았어. 비타의 친구들도 하나둘씩 깨어났어.
서로에게 “좋은 아침”이라 인사했지만, 깨어난 시간은 저녁이었지. 지난 2년 동안 매일 저녁이 이와 같았어. 욕실에 가서 샤워를 하고, 즐겨듣는 라디오 드라마를 이야기하고, 읽고 있는 책과 만화를 이야기하고, 미래의 꿈을 이야기했지.
비타와 친구들은 군복을 챙겨 입고 지휘실로 향하며 수다스럽게 대화했어.
이 우주는 전쟁 중이었어.
아이들의 머리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노리고 다른 나라가 국경을 넘어 쳐들어오곤 했거든. 보통은 자기들끼리 말솜씨를 이용하는 어른들도 있었어.
이 폭력과 부패의 시대 속에서 가능한 한 안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외인부대와 외교관들도 있었지. 그리고…
신경망-정신 통로-격자 네트워크(Nerve/Mind Pathway/Grid Measure)라는 것도 있었어.
소규모 운용 시 적을 견제하는 데에서 그치지만, 대규모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고, 다른 행성의 사람들에겐 공포의 대상이 되는 존재…
상세한 설명은 줄일게.
중앙 정보 통신실에 입장한 비타는 그 장엄함에 익숙한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어. 이 거대한 공간에서 휘몰아치는 생각과 욕망의 소용돌이에도 아랑곳 않고 계속 걸어나갔어.
그녀와 친구들에겐 해야 할 역할이 있었거든. 자신들의 지정석에 다가갈수록 자연스레 수다는 줄어들었어. 그런 하찮은 잡담 대신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정신을 가다듬는 소리만이 서로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지.
그들이 사는 이 아름다운 행성을 위하여. 우주의 그 어느 행성보다 풍요로운 번영과 평화를 위하여.
비타는 NMPGM(Nerve-Mind Pathway-Grid Measure)에 접속했어.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를 지우고,
자신 몫의 통로를 가다듬었어.
그 무엇도 자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온 집중을 다했어.
알 수 없는 신호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전날 밤의 일이야.
비타와 친구들은 이번 주의 브리핑을 받고 있었지.
혼돈에 휘말려가는 다른 행성, 타국의 영공권에서 탈취당한 함선, 그리고 이번 주에 계획된 위문 공연까지.
아이들은 보통 죽음과 관련된 소식은 무시하고 위문 공연이나 자기 공적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어.
비타가 있는 곳으로부터 네 번째로 먼 행성 옆에 자리한 체제는 그나마 우호적이었어. 자급자족하는 사회였지.
비타의 행성은 그 행성과 간단한 합의를 보았어. 그들도 NMPGM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대신, 격동하는 대기에 감싸인 그 위험천만한 행성의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었지.
비타의 나라는 너그러웠어.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그런 관계를 잘 이용했지. 사적인 목적을 위해 네트워크를 뚫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비타는 아는 게 많지 않았어.
하지만 적어도 원하는 게 있다면 그냥 요구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비타는 브리핑에서 들은 “혼돈에 휘말린 다른 행성”에 대해 묻곤 했어.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혼돈에 빠지게 되었는지 궁금했거든. 쉽게 잊힐 만한 원한 때문에 그런 끔찍한 다툼을 시작하다니, 비타는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
비타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는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이 말을 잘 기억해둬.
비타가 알 수 없는 신호를 발견한 그날…
자신의 담당 통로를 강화하던 비타에게 목소리가 들려왔어. "서쪽. 도움이 필요하다. 좌표는..."
비타는 움찔한 뒤 주변에 앉아있는 다른 아이들을 바라봤어. 하지만 이 목소리는 다른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어.
비타는 들은 좌표를 컴퓨터에 입력하며 마음을 단단히 한 후 생각을 내보냈어:
"관등성명을 대십시오. 공병부대입니까, 통신부대입니까? 행성 외부에서 뭘 하는 겁니까?"
질문의 답은 없고 침묵만 돌아왔어. 긴장한 채 비타는 계속해 송신의 출처를 생각하며 작업을 진행했어.
곧, 마침내 대답이 돌아왔어.
"들립니까? 잠깐. 이거 진짜 되는 건가?"
"잘 들립니다. ‘말하는 법’은 알고 있는 모양인데, 능력자가 아닌가요?"
비타는 잠시 말을 멈추었어. 능력자가 아닌 사람…?
마음에 조그마한 불안감이 드리웠지.
비타는 말을 이어나갔어.
"신호를 지휘관들에게 연결하겠…"
"잠깐! 당신 NMPGM의 설계자지?! 그 중립국의...!"
"당연하지 않습니까." 비타가 대답했어. 조금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어. "지금 지휘관에게 신고하도록 하겠..."
"신고하겠다고? 그럴 줄 알았어! 당신네들 같은 오만한 작자들한테 뭘 기대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왜 나한테 다 떠넘긴 거냐고…."
비타는 무심코 의자의 팔받침대를 꽉 쥐었어.
"저는 오만하지 않습니다." 비타가 대답했어.
"어떤 방식으로 네트워크에 들어온 건지는 몰라도 곧 들통날 겁니다. 우리나라의 네트워크와 국민들을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치면 큰 대가를 치를 겁니다. 저희의 중립을 끝내려 하는 즉시 저희가 먼저 당신들을 끝내버릴 테니까... 아, 알겠어요?"
"중립을 끝내는 게 당신들이라면?" 목소리가 물었어.
비타의 대답은 날카로운 "뭐라고요?"였지.
"당신들이 중립을 먼저 끝낸다면 어떻게 되는데?"
"벌어진 적 없는 일이고, 벌어질 리 없는 일이죠."
"페토르의 이야기를 들은 적 없는 모양이군."
대답을 하려던 찰나에 비타는 진정 페토르에 대해 들은 적 없음을 깨달았어.
"일단 통신은 종료할게. 하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올 거야. 그 넓디넓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페토르'를 검색해 봐.
거기는 검열 같은 거 안 하잖아? 좋은 나라니까. 또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통신은 종료됐어.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비타는 두근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다시 자신의 작업으로 돌아갔어.
페토르에 대해 들은 적은 없으나 해가 다시 뜨는 대로 조사해 볼 예정이었지.
비타와 친구들은 이번 주의 브리핑을 받고 있었지.
혼돈에 휘말려가는 다른 행성, 타국의 영공권에서 탈취당한 함선, 그리고 이번 주에 계획된 위문 공연까지.
아이들은 보통 죽음과 관련된 소식은 무시하고 위문 공연이나 자기 공적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어.
비타가 있는 곳으로부터 네 번째로 먼 행성 옆에 자리한 체제는 그나마 우호적이었어. 자급자족하는 사회였지.
비타의 행성은 그 행성과 간단한 합의를 보았어. 그들도 NMPGM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대신, 격동하는 대기에 감싸인 그 위험천만한 행성의 자원을 제공하는 것이었지.
비타의 나라는 너그러웠어.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는, 그런 관계를 잘 이용했지. 사적인 목적을 위해 네트워크를 뚫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비타는 아는 게 많지 않았어.
하지만 적어도 원하는 게 있다면 그냥 요구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
비타는 브리핑에서 들은 “혼돈에 휘말린 다른 행성”에 대해 묻곤 했어.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혼돈에 빠지게 되었는지 궁금했거든. 쉽게 잊힐 만한 원한 때문에 그런 끔찍한 다툼을 시작하다니, 비타는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
비타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어.
"이 세상에서 행복을 찾는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이 말을 잘 기억해둬.
비타가 알 수 없는 신호를 발견한 그날…
자신의 담당 통로를 강화하던 비타에게 목소리가 들려왔어. "서쪽. 도움이 필요하다. 좌표는..."
비타는 움찔한 뒤 주변에 앉아있는 다른 아이들을 바라봤어. 하지만 이 목소리는 다른 아이들에겐 들리지 않는 듯했어.
비타는 들은 좌표를 컴퓨터에 입력하며 마음을 단단히 한 후 생각을 내보냈어:
"관등성명을 대십시오. 공병부대입니까, 통신부대입니까? 행성 외부에서 뭘 하는 겁니까?"
질문의 답은 없고 침묵만 돌아왔어. 긴장한 채 비타는 계속해 송신의 출처를 생각하며 작업을 진행했어.
곧, 마침내 대답이 돌아왔어.
"들립니까? 잠깐. 이거 진짜 되는 건가?"
"잘 들립니다. ‘말하는 법’은 알고 있는 모양인데, 능력자가 아닌가요?"
비타는 잠시 말을 멈추었어. 능력자가 아닌 사람…?
마음에 조그마한 불안감이 드리웠지.
비타는 말을 이어나갔어.
"신호를 지휘관들에게 연결하겠…"
"잠깐! 당신 NMPGM의 설계자지?! 그 중립국의...!"
"당연하지 않습니까." 비타가 대답했어. 조금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어. "지금 지휘관에게 신고하도록 하겠..."
"신고하겠다고? 그럴 줄 알았어! 당신네들 같은 오만한 작자들한테 뭘 기대하면 안 된다고 말했는데! 왜 나한테 다 떠넘긴 거냐고…."
비타는 무심코 의자의 팔받침대를 꽉 쥐었어.
"저는 오만하지 않습니다." 비타가 대답했어.
"어떤 방식으로 네트워크에 들어온 건지는 몰라도 곧 들통날 겁니다. 우리나라의 네트워크와 국민들을 상대로 이런 장난을 치면 큰 대가를 치를 겁니다. 저희의 중립을 끝내려 하는 즉시 저희가 먼저 당신들을 끝내버릴 테니까... 아, 알겠어요?"
"중립을 끝내는 게 당신들이라면?" 목소리가 물었어.
비타의 대답은 날카로운 "뭐라고요?"였지.
"당신들이 중립을 먼저 끝낸다면 어떻게 되는데?"
"벌어진 적 없는 일이고, 벌어질 리 없는 일이죠."
"페토르의 이야기를 들은 적 없는 모양이군."
대답을 하려던 찰나에 비타는 진정 페토르에 대해 들은 적 없음을 깨달았어.
"일단 통신은 종료할게. 하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올 거야. 그 넓디넓은 네트워크를 활용해 '페토르'를 검색해 봐.
거기는 검열 같은 거 안 하잖아? 좋은 나라니까. 또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통신은 종료됐어.
누군가 눈치채기 전에 비타는 두근 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다시 자신의 작업으로 돌아갔어.
페토르에 대해 들은 적은 없으나 해가 다시 뜨는 대로 조사해 볼 예정이었지.
=====# 12-3 #=====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란...
..."진실"과 "지식"이 항상 같지는 않다는 것이야.
비타가 신호를 받은 건 느긋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이 오기 하루 전이었어. 주말 동안 그녀는 기지 도서관에서 암호화 신호로 내부망을 뒤지는 데 모든 여가 시간을 썼어.
그 암호화 신호는 비타와 친구들이 함께 금지된 게임, 이미지와 비디오를 몰래 찾는 데 사용하던 것이었지. 진지한 용도로는 이용한 적이 전혀 없었어.
하지만 페토르의 이야기를 찾고 나자, 고작 장난감으로 여겼던 이 암호화 신호를 감사히 여기게 되었어.
이토록 위험하고 심각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
이쯤에서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난 내가 어디 출신인지 몰라. 아르케아와 공허를 떠도는 타인의 경험들을 "기억" 하고 있을 뿐이지.
그럼에도, 나는 아주 쉽게 깨달아버리고 말았어.
어떤 세상이든 절망을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비타가 태어나기 20년 전, NMPGM의 확장 중에 페토르라는 아주 작은 행성이 발견된 후 내버려졌어.
그보다 400년 전에, 대기가 사라져버린 모 행성에서 도망쳐 나온 엑소더스급 함선이 그 작은 행성을 발견했어.
그 함선은 행성에 착륙한 후, 행성의 이름을… “페토르”라고 지었지. 비공식적으로 말이야.
페토르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다른 행성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어. 게다가 페토르는 황량한 우주 속에서 불규칙적인 궤도를 돌았기에, 잊혔다기보다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비타의 행성이 페토르를 발견했을 때엔, 정착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NMPGM의 힘으로 행성의 절반을 날려버렸어.
마치… 광산을 다이너마이트로 개통하는 것과 같았지. 행성의 반이 증발했고 정착민의 3분의 2가 사라졌어.
페토르인들은 비타의 행성과 대화를 시도했어. 하지만 비타의 행성엔 그 간청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었어.
정부의 비밀 조직이 페토르인들의 청원을 모두 묵살시켰다는 음모론이 다른 행성들 사이에 돌았지. 페토르인들은 한 제국 행성과 동맹을 맺었어. 자신들에게 항복하는 행성을 관용적으로 대하기로 유명한 제국이었지.
이 사건은 비타의 기억에 남아있어. 우주 끝자락 머나먼 곳에서 자신의 행성과 제국이 소규모 교전을 벌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거든. 비타가 들은 바로는 제국의 선제 공격이었어.
하지만, 다른 행성들의 자료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어.
“...그들은 미등록 정착민들이 제국과 동맹을 맺자, 자신들의 ‘실수’를 지우기 위해 NMPGM을 이용해 우주의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뜨려 남은 페토르인을 모두 몰살하고, 수많은 제국민들을 살해했다.”
수많은 출처의 자료들이 이 이야기를 뒷받침했어.
비타가 이를 진실로 받아들인 건, 자기 행성의 내부망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는 두 페이지짜리 기록을 보았을 때였어.
비타의 행성이 지키는 중립이란 단순한 가면이라는 것. 진실은 그렇게 시작했어. ‘평화’를 이룬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행성이 페토르와 같은 운명을 맞았어.
심지어 대부분은 ‘실수’가 아니었고, 어떤 이들은 페토르 사건 또한 ‘실수’가 아니라 믿었지.
당연히 비타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당연히 비타는 일이 시작됨과 동시에 직장으로 돌아갔어.
당연히 비타는 알 수 없는 신호와 다시 통신을 연결했어.
"우리는 페토르인의 마지막 후손들이야." 목소리가 말했어.
“우리는 벗어나고 싶을 뿐이야.”
결국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린 동맹으로부터.
이 은하에 휘몰아치는 혼돈으로부터,
그리고, 비타의 행성과 그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정신 통로를 관리하는 건 아이들이라고 들었는데, 나… 아니, 우리는…" 목소리가 말을 더듬었어.
"아이라면 이해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어. 높은 곳에 있는 어른들은 생각조차 해주지 않을 것을…"
"원하는 게 뭐죠?" 비타가 물었어.
"탈출구를 원해. NMPGM 안에서도 여기, 이 구역은… 아주 조용하고 먼 곳이라 들었어. 함선은 충분히 있으니 다른 행성에 정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아니면…” 이에 목소리가 대답했어.
제국의 동맹... 아니... 노예가 되어있던 사이에 페토르인들은 제국이 NMPGM을 유지시키는 이들의 정신 속을 염탐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페토르인들은 그 기술을 훔쳐, 절박한 심정으로 비타에게 이를 알렸어. 의무상 비타는 이 정보를 보고해야만 했지.
그러나 페토르인과 제국의 동맹은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없었어. 신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단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고 말하는 피난민들일 뿐이었어.
비타는 이 요청을 쉽게 들어줄 수 있었어. 현대의 우주선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초광속 점프도 가능했으니까.
아주 짧은 시간만 길을 만들어 그 사이로 재빨리 페토르인들을 점프시키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그래...
비타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어.
그런데… 알고 있어? 이 하나의 진실을.
비타의 행성은 정말로 NMPGM을 이용해 우주의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뜨려 마지막 페토르인들을 죽였어.
단. 한 명도. 남김 없이.
정신 통로 바깥으로 뻗은 “시야”로 비타는 우주선이 기다리고 있는 걸 확실히 보았어.
하지만, 비타의 능력으로 그 우주선들이 어떤 배들인지 알 수 있었을까? 그 진정한 형태를? 그 크기를?
아니, 알지 못했어.
무슨 수로 알았겠어?
비타는 “페토르인”들을 위해 길을 열었어.
…길을 통해 제국의 함대가 쏟아져들어왔어.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우주선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 이야기했던가?
또 하나의 “진실”을 알려줄게.
현대의 우주선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초광속 점프도 가능했어.
NMPGM을 타고 들어온 전함들은 신속하게 행성에 포격을 쏟아부었고, 비타의 행성은 이를 막을 수단이 없었어.
제국은 능력자 기지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어. 그 기지들부터 먼저 파괴되었거든.
행성의 표면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어. 반응할 시간도 없이, 몇 시간 안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어.
물론, 모두가 노력은 했지.
맞서 싸우려고, 다른 행성에 신호를 보내려고, 최대한 많은 전함을 격추하려고…
하지만, 그들에게 내려앉은 것은 절망 뿐이었어.
두려움…
자기 증오…
포격의 업화 속에 공포와 지옥이 현현했어.
첫 수부터 패배가 정해져버린 판이었어.
하늘에서부터 대포가 비타의 기지를 향했고…
비타와, 그녀의 상관들과, 친구들의 목숨을 빼앗아갔어.
그 후 소녀는 백색의 세상에서 눈물을 가득 머금고 깨어났어.
그러나 왜 눈물이 나는지 알지 못하였고, 가슴이 아픈 이유도 알 수 없었지.
비타는 죽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우리처럼.
비타는 자기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비타가 눈물을 닦고 일어났을 때 슬픔 외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죄책감일까? 아니면 책임감일까?
그 어느 쪽도 아닐 거야.
그런 감정을 느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타는 이제… 아무것도 “알지” 못해.
그리고… 비타의 이야기를 끝맺으며, 그녀가 일어나 유리의 세계를 마주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질문이 하나 있어.
...
애초에 비타는, 하나라도 아는 게 있었던 걸까?
..."진실"과 "지식"이 항상 같지는 않다는 것이야.
비타가 신호를 받은 건 느긋하게 쉴 수 있는 주말이 오기 하루 전이었어. 주말 동안 그녀는 기지 도서관에서 암호화 신호로 내부망을 뒤지는 데 모든 여가 시간을 썼어.
그 암호화 신호는 비타와 친구들이 함께 금지된 게임, 이미지와 비디오를 몰래 찾는 데 사용하던 것이었지. 진지한 용도로는 이용한 적이 전혀 없었어.
하지만 페토르의 이야기를 찾고 나자, 고작 장난감으로 여겼던 이 암호화 신호를 감사히 여기게 되었어.
이토록 위험하고 심각한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
이쯤에서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난 내가 어디 출신인지 몰라. 아르케아와 공허를 떠도는 타인의 경험들을 "기억" 하고 있을 뿐이지.
그럼에도, 나는 아주 쉽게 깨달아버리고 말았어.
어떤 세상이든 절망을 찾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걸.
비타가 태어나기 20년 전, NMPGM의 확장 중에 페토르라는 아주 작은 행성이 발견된 후 내버려졌어.
그보다 400년 전에, 대기가 사라져버린 모 행성에서 도망쳐 나온 엑소더스급 함선이 그 작은 행성을 발견했어.
그 함선은 행성에 착륙한 후, 행성의 이름을… “페토르”라고 지었지. 비공식적으로 말이야.
페토르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은 다른 행성에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어. 게다가 페토르는 황량한 우주 속에서 불규칙적인 궤도를 돌았기에, 잊혔다기보다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지.
비타의 행성이 페토르를 발견했을 때엔, 정착지가 있는 줄도 모르고 NMPGM의 힘으로 행성의 절반을 날려버렸어.
마치… 광산을 다이너마이트로 개통하는 것과 같았지. 행성의 반이 증발했고 정착민의 3분의 2가 사라졌어.
페토르인들은 비타의 행성과 대화를 시도했어. 하지만 비타의 행성엔 그 간청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없었어.
정부의 비밀 조직이 페토르인들의 청원을 모두 묵살시켰다는 음모론이 다른 행성들 사이에 돌았지. 페토르인들은 한 제국 행성과 동맹을 맺었어. 자신들에게 항복하는 행성을 관용적으로 대하기로 유명한 제국이었지.
이 사건은 비타의 기억에 남아있어. 우주 끝자락 머나먼 곳에서 자신의 행성과 제국이 소규모 교전을 벌였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거든. 비타가 들은 바로는 제국의 선제 공격이었어.
하지만, 다른 행성들의 자료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어.
“...그들은 미등록 정착민들이 제국과 동맹을 맺자, 자신들의 ‘실수’를 지우기 위해 NMPGM을 이용해 우주의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뜨려 남은 페토르인을 모두 몰살하고, 수많은 제국민들을 살해했다.”
수많은 출처의 자료들이 이 이야기를 뒷받침했어.
비타가 이를 진실로 받아들인 건, 자기 행성의 내부망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져있는 두 페이지짜리 기록을 보았을 때였어.
비타의 행성이 지키는 중립이란 단순한 가면이라는 것. 진실은 그렇게 시작했어. ‘평화’를 이룬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행성이 페토르와 같은 운명을 맞았어.
심지어 대부분은 ‘실수’가 아니었고, 어떤 이들은 페토르 사건 또한 ‘실수’가 아니라 믿었지.
당연히 비타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어.
당연히 비타는 일이 시작됨과 동시에 직장으로 돌아갔어.
당연히 비타는 알 수 없는 신호와 다시 통신을 연결했어.
"우리는 페토르인의 마지막 후손들이야." 목소리가 말했어.
“우리는 벗어나고 싶을 뿐이야.”
결국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린 동맹으로부터.
이 은하에 휘몰아치는 혼돈으로부터,
그리고, 비타의 행성과 그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정신 통로를 관리하는 건 아이들이라고 들었는데, 나… 아니, 우리는…" 목소리가 말을 더듬었어.
"아이라면 이해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어. 높은 곳에 있는 어른들은 생각조차 해주지 않을 것을…"
"원하는 게 뭐죠?" 비타가 물었어.
"탈출구를 원해. NMPGM 안에서도 여기, 이 구역은… 아주 조용하고 먼 곳이라 들었어. 함선은 충분히 있으니 다른 행성에 정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아니면…” 이에 목소리가 대답했어.
제국의 동맹... 아니... 노예가 되어있던 사이에 페토르인들은 제국이 NMPGM을 유지시키는 이들의 정신 속을 염탐하기 위한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페토르인들은 그 기술을 훔쳐, 절박한 심정으로 비타에게 이를 알렸어. 의무상 비타는 이 정보를 보고해야만 했지.
그러나 페토르인과 제국의 동맹은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없었어. 신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단지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한다고 말하는 피난민들일 뿐이었어.
비타는 이 요청을 쉽게 들어줄 수 있었어. 현대의 우주선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초광속 점프도 가능했으니까.
아주 짧은 시간만 길을 만들어 그 사이로 재빨리 페토르인들을 점프시키고, 그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그래...
비타는, 그 정도는 할 수 있었어.
그런데… 알고 있어? 이 하나의 진실을.
비타의 행성은 정말로 NMPGM을 이용해 우주의 한 구획을 통째로 무너뜨려 마지막 페토르인들을 죽였어.
단. 한 명도. 남김 없이.
정신 통로 바깥으로 뻗은 “시야”로 비타는 우주선이 기다리고 있는 걸 확실히 보았어.
하지만, 비타의 능력으로 그 우주선들이 어떤 배들인지 알 수 있었을까? 그 진정한 형태를? 그 크기를?
아니, 알지 못했어.
무슨 수로 알았겠어?
비타는 “페토르인”들을 위해 길을 열었어.
…길을 통해 제국의 함대가 쏟아져들어왔어.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우주선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지 이야기했던가?
또 하나의 “진실”을 알려줄게.
현대의 우주선은 엄청난 속도로 이동할 수 있었고, 정신 통로를 이용하면 초광속 점프도 가능했어.
NMPGM을 타고 들어온 전함들은 신속하게 행성에 포격을 쏟아부었고, 비타의 행성은 이를 막을 수단이 없었어.
제국은 능력자 기지에 대한 정보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어. 그 기지들부터 먼저 파괴되었거든.
행성의 표면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어. 반응할 시간도 없이, 몇 시간 안에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어.
물론, 모두가 노력은 했지.
맞서 싸우려고, 다른 행성에 신호를 보내려고, 최대한 많은 전함을 격추하려고…
하지만, 그들에게 내려앉은 것은 절망 뿐이었어.
두려움…
자기 증오…
포격의 업화 속에 공포와 지옥이 현현했어.
첫 수부터 패배가 정해져버린 판이었어.
하늘에서부터 대포가 비타의 기지를 향했고…
비타와, 그녀의 상관들과, 친구들의 목숨을 빼앗아갔어.
그 후 소녀는 백색의 세상에서 눈물을 가득 머금고 깨어났어.
그러나 왜 눈물이 나는지 알지 못하였고, 가슴이 아픈 이유도 알 수 없었지.
비타는 죽었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 우리처럼.
비타는 자기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비타가 눈물을 닦고 일어났을 때 슬픔 외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죄책감일까? 아니면 책임감일까?
그 어느 쪽도 아닐 거야.
그런 감정을 느껴선 안 된다고 생각해.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비타는 이제… 아무것도 “알지” 못해.
그리고… 비타의 이야기를 끝맺으며, 그녀가 일어나 유리의 세계를 마주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생각해봐야 하는 질문이 하나 있어.
...
애초에 비타는, 하나라도 아는 게 있었던 걸까?
3.2. 이리스
3.2.1.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13-1 | Dark-1 | Crimson Throne 클리어 | ||
13-2 | Dark-2 | Lucifer 클리어 | ||
13-3 | Dark-3 | Anökumene 클리어 | ||
13-4 | Dark-4 | Crimson Throne 클리어 |
3.2.2. Dark Ambition
=====# 13-1 #=====그림자가 스며들어, 그 끈적한 추악함으로 모든 존재를 더럽힌다.
잠시 나타난 빛조차, 그림자에 삼켜지고 만다.
이곳은 부서진 마음이 빚어낸 광야.
어두운 적막 한가운데에서 소녀가 눈을 떴다.
암흑 사이로 진한 붉은색이 반짝였다.
그 공허 속에서 이리스는 깨어났다.
자신에게 달라붙는 “무(無)”를 떼어내며,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마치 타르처럼 “무”가 이리스에게 엉겨 붙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끈적한 덩어리들을 떼어냈다.
머리카락, 몸, 옷에서 “무”를 털어낸 후, “땅”에 두 발을 딛고 일어섰다.
방금까지는 없었던 “땅”, 빛의 발판이 발밑에 나타났다. 그녀는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어깨에 두른 코트가 몸을 감쌌다.
이리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몰랐다.
일어서서 미간을 찡그리며 주변에 만연한 공허를 바라보았다.
한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어떤 장소의 이름, “아르케아”... 그리고 이곳은 아르케아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르케아”는 낙원이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은 낙원.
혼돈 속으로 이리스는 발을 내디뎠다.
그 발밑으로 길이 나타났다.
세상이 뒤틀리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걷는 길이 구부러지는 와중에도 이리스의 마음은 평온했다.
자신의 운명이 이 세계에 있다면…
그렇다면, 이곳은 이리스의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나타난 빛조차, 그림자에 삼켜지고 만다.
이곳은 부서진 마음이 빚어낸 광야.
어두운 적막 한가운데에서 소녀가 눈을 떴다.
암흑 사이로 진한 붉은색이 반짝였다.
그 공허 속에서 이리스는 깨어났다.
자신에게 달라붙는 “무(無)”를 떼어내며,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마치 타르처럼 “무”가 이리스에게 엉겨 붙었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끈적한 덩어리들을 떼어냈다.
머리카락, 몸, 옷에서 “무”를 털어낸 후, “땅”에 두 발을 딛고 일어섰다.
방금까지는 없었던 “땅”, 빛의 발판이 발밑에 나타났다. 그녀는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어깨에 두른 코트가 몸을 감쌌다.
이리스는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몰랐다.
일어서서 미간을 찡그리며 주변에 만연한 공허를 바라보았다.
한 이름이 뇌리를 스쳤다. 어떤 장소의 이름, “아르케아”... 그리고 이곳은 아르케아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르케아”는 낙원이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은 낙원.
혼돈 속으로 이리스는 발을 내디뎠다.
그 발밑으로 길이 나타났다.
세상이 뒤틀리며 자신의 기분에 따라 걷는 길이 구부러지는 와중에도 이리스의 마음은 평온했다.
자신의 운명이 이 세계에 있다면…
그렇다면, 이곳은 이리스의 세계나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13-2 #=====
낙원으로 향하는 길은 분명히 있다. 빛으로 밝게 비추어진 길은 아니지만,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리스에겐 낙원에서 살고 싶은 욕망이 없었다.
“아르케아”가 있는 곳으로 이리스는 향했다. 하지만 이는 낙원을 향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여정 도중에 그녀는 그 세계의 과거를 보게 되었다.
“아르케아”는 어리석은 소녀들이 모이는 세계이다. 빛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순진한 소녀, 또 다른 하나는 비상한 용기를 지녔으나 가시밭길을 걷는 소녀…
물론, 이 둘 이외에도, 목적 없이 방랑하며, 텅 빈 미소를 지은 채, 춤추는 유리조각을 바라보는 소녀는 수없이 더 있었다.
미소를 지을 거면, 선명하게, 사악하게 지어야 하는 것을.
이리스는 새하얀 세상의 창문을 통해 그 소녀들을 알아가며, 그들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모든 것이 말이 되는 아르케아의 세계에서조차 그들은 방랑하고 있다. 공허에 오면 얼마 못 가 꺾이고 말겠지.
이리스는 아주 긴 시간을 공허에서 보내며, 공허와 “아르케아”에 연결됨을 느꼈다.
자신은 특별했다. 다른 소녀들과는 달랐다.
저들은 각성했을 때 빛이 맞이하러 와주었으니까.
“마치 이 애처럼…”
소녀는 빛나는 창문 옆을 느리게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전에 본 적이 있는 단안경의 소녀였다.
“오늘은 뭘 할 거니? 또 혼잣말?”
창문이 이리스를 따라왔다. 할 일도 없어 따분하던 이리스는 계속해서 창문을 바라보기로 했다.
단안경을 쓴 소녀는 이리스와 비슷한 시간에 각성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혼자서 떠벌대는 것뿐이었다.
“...”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
소녀가 손을 들자, 유리가 조그마한 “생물”로 변했다.
잠시 말없이 멈추어있던 이리스는, 창문이 떠나가고 나서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음… 방금 저거…”
잠시 숨을 고른다.
“왜 저걸 해볼 생각을 안 했지?”
동료를 만들 생각은 없다.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이리스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공허의 일부가 조금 부서지는 데에 그쳤다.
“그렇지…”
이리스가 작게 속삭이고선 웃음을 뱉었다.
“이 모든 게 전부 내 거잖아.”
이 세계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준다.
공허에서라면 무언가 다를 거라 생각하다니 어리석었다.
자신의 발밑에서 길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자신의 의지만으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길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지평선을 보고 잡으려 손을 뻗듯이,
산을 보고 오르려 발을 내딛듯이,
불을 지르면 마음속에서 불길이 솟듯이…
한순간, 악의로 가득 찬 염원이 이리스의 마음에 피어올랐다.
“힘”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오로지 그 의문 하나만을 위하여, 그녀는 다짐했다.
어둠에서 태어난 자신이, 끝없는 태양의 땅에 밤을 가져다주겠노라고.
“아르케아”가 있는 곳으로 이리스는 향했다. 하지만 이는 낙원을 향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여정 도중에 그녀는 그 세계의 과거를 보게 되었다.
“아르케아”는 어리석은 소녀들이 모이는 세계이다. 빛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순진한 소녀, 또 다른 하나는 비상한 용기를 지녔으나 가시밭길을 걷는 소녀…
물론, 이 둘 이외에도, 목적 없이 방랑하며, 텅 빈 미소를 지은 채, 춤추는 유리조각을 바라보는 소녀는 수없이 더 있었다.
미소를 지을 거면, 선명하게, 사악하게 지어야 하는 것을.
이리스는 새하얀 세상의 창문을 통해 그 소녀들을 알아가며, 그들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모든 것이 말이 되는 아르케아의 세계에서조차 그들은 방랑하고 있다. 공허에 오면 얼마 못 가 꺾이고 말겠지.
이리스는 아주 긴 시간을 공허에서 보내며, 공허와 “아르케아”에 연결됨을 느꼈다.
자신은 특별했다. 다른 소녀들과는 달랐다.
저들은 각성했을 때 빛이 맞이하러 와주었으니까.
“마치 이 애처럼…”
소녀는 빛나는 창문 옆을 느리게 걸어가며 중얼거렸다.
전에 본 적이 있는 단안경의 소녀였다.
“오늘은 뭘 할 거니? 또 혼잣말?”
창문이 이리스를 따라왔다. 할 일도 없어 따분하던 이리스는 계속해서 창문을 바라보기로 했다.
단안경을 쓴 소녀는 이리스와 비슷한 시간에 각성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혼자서 떠벌대는 것뿐이었다.
“...”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
소녀가 손을 들자, 유리가 조그마한 “생물”로 변했다.
잠시 말없이 멈추어있던 이리스는, 창문이 떠나가고 나서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음… 방금 저거…”
잠시 숨을 고른다.
“왜 저걸 해볼 생각을 안 했지?”
동료를 만들 생각은 없다.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이리스가 손을 들었다. 하지만 공허의 일부가 조금 부서지는 데에 그쳤다.
“그렇지…”
이리스가 작게 속삭이고선 웃음을 뱉었다.
“이 모든 게 전부 내 거잖아.”
이 세계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준다.
공허에서라면 무언가 다를 거라 생각하다니 어리석었다.
자신의 발밑에서 길이 나타나지 않았던가? 자신의 의지만으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길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지평선을 보고 잡으려 손을 뻗듯이,
산을 보고 오르려 발을 내딛듯이,
불을 지르면 마음속에서 불길이 솟듯이…
한순간, 악의로 가득 찬 염원이 이리스의 마음에 피어올랐다.
“힘”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오로지 그 의문 하나만을 위하여, 그녀는 다짐했다.
어둠에서 태어난 자신이, 끝없는 태양의 땅에 밤을 가져다주겠노라고.
=====# 13-3 #=====
물론, 이렇게 규모가 큰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리스는 우선은 현재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갈고닦기로 하고, 아주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이리스는, 유리 조각 무리 옆에 섰다.
“...이얍!”
손을 앞으로 뻗자, 멀리 떨어진 창문이 “닫혔다”.
하얀 관문이 안쪽으로부터 무너져내려 빛을 잃고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좋았어…”
이리스가 중얼거렸다.
이 혼돈스러운 공허에조차, 규칙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곳은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력이 없기에 방향이란 개념은 일시적이다.
생각으로부터 구조물이 만들어진다. 무의식에 잠깐 스쳐간 생각일지라도 사람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끝이 있다. 그 모서리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관문, “창문”을 통해 아르케아가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절박한 것처럼.
이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꿈틀댔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보고, 집중했다.
“...”
손을 펴자, 손바닥 위로 유리 조각이 떠올랐다.
“흠…”
저 새하얀 세계에 “닿는” 것과 손에서 유리 조각이 생겨나는 것에 뭔가 관련이 있는 걸까?
이리스는 궁금했다. 매번 이러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저 세계에 닿을 때마다 “느껴졌다”. 마치 축복과 같은 따뜻함이 팔을 타고 흐르는 감각.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그 느낌. 그럴 때면, 손바닥에 기억의 조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 일 없이 그 감각이 사라지는 때도 있었다.
지금 나타난 조각은 어떤 반려동물의 기억이었다. 이리스는 고개를 돌려 그 유리 조각이 떠나가도록 두었다.
그녀에겐 공허를 조종할 힘이 있었지만, 단안경을 쓴 소녀가 아르케아를 다루는 힘만큼 자유자재는 아니었다.
이리스는 이를 깨물었다.
이리스는 이 힘에 대해 생각하던 것이 있었고, 결국 그게 옳았다. 그녀의 힘은 자신의 의지로 공허를 마음껏 다루는 힘이라기보다는, 마치 폭풍을 움직이는 힘과 같았다.
이미 스스로 존재하는 폭풍.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그 폭풍을 살짝 밀거나, 흡수하거나, 다른 곳으로 향하게 만드는 힘.
이리스는 사람을 해칠 정도로 강력한 돌풍이나 거대한 태풍의 기억을 몇 개 본 적이 있었기에, 이 비유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 공허는 태풍의 눈과 같았다. 이 장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장대한 힘이 있음을 그녀는 항상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힘의 촉매였다.
이리스는 창문을 닫는 방법을 깨쳤다. 공기 중에 떨림이 느껴질 때, 공허의 일부를 “부술” 수 있었다. 부수고 나면, 이리스는 “어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스스로 창문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 기회는 놓쳤지만, 그 기회를 잡기만 한다면 가능했다. 그렇게 확신했다.
이리스는 아르케아까지 걸어가기보다 강제로 지름길을 뚫고 싶었다.
공허가 소용돌이쳤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리스는 주변의 어둠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멈추었다가, 갑작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어둠의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걸까?
이리스가 손을 들어 허공을 붙잡자 마치 천 조각처럼 손에 쥐어졌다.
그 공기를 옆으로 확 젖히자, 그 미소 지은 얼굴에 새하얀 빛이 비치자 동공이 수축했다.
창문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공허를 찢으면, 새하얀 세계가 나타난다. 그 세계 전부가.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빛이 밝았다. 갑작스레 공기가 빠져나갔다. 공허가 뒤척이며 신음을 냈다.
여기에 바로 새하얀 세계가 있다. 지나갈 수 없는 창문을 통해 보기만 할 수 있었던 그 세계가.
결코, 지나갈 수 없었던 창문.
그것도 오늘까지다.
“자…!”
이리스가 공허를 불렀다. 어둠이 마치 혈관 같은 형상으로 그녀의 팔을 기어가다 뒤틀려, 손안의 폭풍이 되었다.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소녀는 팔을 들어, 손에 든 어둠을 빛의 세계에 부딪쳤다.
그렇게, 창문이 깨지며 빛과 그림자가 유리 조각처럼 흐트러지고, 이리스는 세계의 경계를 지났다.
이리스는 우선은 현재 자신이 가진 능력을 갈고닦기로 하고, 아주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이리스는, 유리 조각 무리 옆에 섰다.
“...이얍!”
손을 앞으로 뻗자, 멀리 떨어진 창문이 “닫혔다”.
하얀 관문이 안쪽으로부터 무너져내려 빛을 잃고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져갔다.
“좋았어…”
이리스가 중얼거렸다.
이 혼돈스러운 공허에조차, 규칙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곳은 존재함과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 “어둠”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력이 없기에 방향이란 개념은 일시적이다.
생각으로부터 구조물이 만들어진다. 무의식에 잠깐 스쳐간 생각일지라도 사람이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끝이 있다. 그 모서리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영혼을 빼앗기고 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 관문, “창문”을 통해 아르케아가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마치 절박한 것처럼.
이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무언가가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서 꿈틀댔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보고, 집중했다.
“...”
손을 펴자, 손바닥 위로 유리 조각이 떠올랐다.
“흠…”
저 새하얀 세계에 “닿는” 것과 손에서 유리 조각이 생겨나는 것에 뭔가 관련이 있는 걸까?
이리스는 궁금했다. 매번 이러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따금, 저 세계에 닿을 때마다 “느껴졌다”. 마치 축복과 같은 따뜻함이 팔을 타고 흐르는 감각.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그 느낌. 그럴 때면, 손바닥에 기억의 조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었다. 아무 일 없이 그 감각이 사라지는 때도 있었다.
지금 나타난 조각은 어떤 반려동물의 기억이었다. 이리스는 고개를 돌려 그 유리 조각이 떠나가도록 두었다.
그녀에겐 공허를 조종할 힘이 있었지만, 단안경을 쓴 소녀가 아르케아를 다루는 힘만큼 자유자재는 아니었다.
이리스는 이를 깨물었다.
이리스는 이 힘에 대해 생각하던 것이 있었고, 결국 그게 옳았다. 그녀의 힘은 자신의 의지로 공허를 마음껏 다루는 힘이라기보다는, 마치 폭풍을 움직이는 힘과 같았다.
이미 스스로 존재하는 폭풍.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그 폭풍을 살짝 밀거나, 흡수하거나, 다른 곳으로 향하게 만드는 힘.
이리스는 사람을 해칠 정도로 강력한 돌풍이나 거대한 태풍의 기억을 몇 개 본 적이 있었기에, 이 비유가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이 공허는 태풍의 눈과 같았다. 이 장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장대한 힘이 있음을 그녀는 항상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힘의 촉매였다.
이리스는 창문을 닫는 방법을 깨쳤다. 공기 중에 떨림이 느껴질 때, 공허의 일부를 “부술” 수 있었다. 부수고 나면, 이리스는 “어둠”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스스로 창문을 만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항상 그 기회는 놓쳤지만, 그 기회를 잡기만 한다면 가능했다. 그렇게 확신했다.
이리스는 아르케아까지 걸어가기보다 강제로 지름길을 뚫고 싶었다.
공허가 소용돌이쳤다.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이리스는 주변의 어둠을 둘러보았다.
모든 게 멈추었다가, 갑작스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좋은 타이밍이었다. 지나칠 정도로. 어둠의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걸까?
이리스가 손을 들어 허공을 붙잡자 마치 천 조각처럼 손에 쥐어졌다.
그 공기를 옆으로 확 젖히자, 그 미소 지은 얼굴에 새하얀 빛이 비치자 동공이 수축했다.
창문은 이렇게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공허를 찢으면, 새하얀 세계가 나타난다. 그 세계 전부가.
이 창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빛이 밝았다. 갑작스레 공기가 빠져나갔다. 공허가 뒤척이며 신음을 냈다.
여기에 바로 새하얀 세계가 있다. 지나갈 수 없는 창문을 통해 보기만 할 수 있었던 그 세계가.
결코, 지나갈 수 없었던 창문.
그것도 오늘까지다.
“자…!”
이리스가 공허를 불렀다. 어둠이 마치 혈관 같은 형상으로 그녀의 팔을 기어가다 뒤틀려, 손안의 폭풍이 되었다.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소녀는 팔을 들어, 손에 든 어둠을 빛의 세계에 부딪쳤다.
그렇게, 창문이 깨지며 빛과 그림자가 유리 조각처럼 흐트러지고, 이리스는 세계의 경계를 지났다.
=====# 13-4 #=====
“소원”은 정직하고 아름다운 단어이다. 희망의 빛과, 결국 다가올 승리를 말하는 단어. 그러나…
어둠에서 태어난 소녀의 마음은 무엇이 지배하는가? 정직함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다. 그렇다면 질투인가? 절망인가?
아니다. 그녀의 “소원”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죄는 긍지였다.
낙하하는 이리스를 공허와 빛이 동시에 붙잡아 감쌌다. 수많은 공간의 조각들이 그녀와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지면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창문이 닫힌다. 그림자가 이리스를 감싸며 절박하게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그녀는 어둠이 주변을 맴돌도록, 자신에게 흡수되도록 하였다.
낙하하는 이리스의 모습은 마치 땅으로 떨어지는 폭풍우와 같았다.
그녀는 어둠의 별똥별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밝았으며, 마음도 충만했다. 어둠이 그녀를 떠나기 전에 붙잡아, 자신을 어둠으로 물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소녀는 자신의 옆에서 함께 떨어지며 미소 짓고 있는 붉은 혜성을 보지 못했다. 설령 보았다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황홀했기 때문이다.
그림자로 싸인 이리스는 지면으로 낙하하며 마음껏 웃었다. 실로 황홀했다.
공허의 힘으로 충만해 움찔대는 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 힘이 손으로부터 채찍처럼 솟아 나왔지만 구름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힘은 구름을 잡고 싶었다. 이리스는, 구름을 잡고 싶었다. 그녀는 그 기분을 곱씹은 뒤, 다시 어둠을 방출시켰다.
수많은 그림자가 촉수처럼 하늘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렇게, 구름을 잡았다.
곧, 하늘마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이리스는 손을 꽉 쥐고, 현란하게 팔을 옆으로 젖혔다. 밑에서는 그림자가 이리스를 안전하게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붉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떨어진 날, 밤도 내려앉았다.
빛이 물러서고 구름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새로운 하늘이 새어 나와 순식간에 세상의 반을 그림자로 뒤덮었다.
흑요석 같은 공허의 방울이 떨어지고, 붉은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렇게, 밤은 낮을 만났다.
어둠에서 태어난 소녀의 마음은 무엇이 지배하는가? 정직함도 아니고, 희망도 아니다. 그렇다면 질투인가? 절망인가?
아니다. 그녀의 “소원”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죄는 긍지였다.
낙하하는 이리스를 공허와 빛이 동시에 붙잡아 감쌌다. 수많은 공간의 조각들이 그녀와 함께 떨어지고 있었다.
지면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다.
창문이 닫힌다. 그림자가 이리스를 감싸며 절박하게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그녀는 어둠이 주변을 맴돌도록, 자신에게 흡수되도록 하였다.
낙하하는 이리스의 모습은 마치 땅으로 떨어지는 폭풍우와 같았다.
그녀는 어둠의 별똥별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밝았으며, 마음도 충만했다. 어둠이 그녀를 떠나기 전에 붙잡아, 자신을 어둠으로 물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소녀는 자신의 옆에서 함께 떨어지며 미소 짓고 있는 붉은 혜성을 보지 못했다. 설령 보았다 하더라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이 황홀했기 때문이다.
그림자로 싸인 이리스는 지면으로 낙하하며 마음껏 웃었다. 실로 황홀했다.
공허의 힘으로 충만해 움찔대는 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 힘이 손으로부터 채찍처럼 솟아 나왔지만 구름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힘은 구름을 잡고 싶었다. 이리스는, 구름을 잡고 싶었다. 그녀는 그 기분을 곱씹은 뒤, 다시 어둠을 방출시켰다.
수많은 그림자가 촉수처럼 하늘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렇게, 구름을 잡았다.
곧, 하늘마저 자신의 것이 될 것이다.
이리스는 손을 꽉 쥐고, 현란하게 팔을 옆으로 젖혔다. 밑에서는 그림자가 이리스를 안전하게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붉고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떨어진 날, 밤도 내려앉았다.
빛이 물러서고 구름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새로운 하늘이 새어 나와 순식간에 세상의 반을 그림자로 뒤덮었다.
흑요석 같은 공허의 방울이 떨어지고, 붉은빛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렇게, 밤은 낮을 만났다.
4. Main Story
4.1. 히카리/타이리츠
히카리/타이리츠 스토리 순서 | ||
Black Fate Main : VS-1 ~ VS-8 | → | Final Verdict Main : F-1 ~ ? |
4.2. 해금 조건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F-1 | Final-1 | Final Verdict의 첫 번째 Terminal곡 해금 | |||||||
F-2 | Final-2 | Final Verdict의 두 번째 Terminal곡 해금 | |||||||
F-3 | Final-3 | Final Verdict의 3/4번째 Terminal곡 해금[1] | |||||||
F-4 | Final-4 | ||||||||
F-5 | Final-5 | Final Verdict의 Fatal Choice 곡 진입 | |||||||
F-6 | Final-6 | Final Verdict의 Fatal Choice 곡 플레이 | |||||||
F-7 | Final-7 | F-6 스토리 열람 | |||||||
{{{#!folding And... {{{#!wiki style="margin: -6px -1px -16px" | 스토리 # | 진행 순서 | 해금 조건 | ||||||
마지막 꿈 | Silent-1 | Silent Answer의 Last에서 운명을 거부하기 | |||||||
완벽한 소망 | Silent-2 | 히카리Fatalis를 봉인한 채로 Silent Answer의 Last에서 Arcaea를 받아들이기 |
4.2.1. Final Verdict
=====# F-1 #=====단 한 순간, 세계가 소녀를 기억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새하얀 불꿏에 감싸인 붉게 물든 소녀, 히카리를 향해 이 세계가 결의를 표하듯 머리를 조아렸다.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불꽃을 손에 넣은 히카리.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는 본인도 몰랐다. 두 소녀 간의 결투는 멈췄다. 위에, 하늘에 변화가 생겼기에.
이미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 마음을 히카리가 다시 떠올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려워하지 않을 뿐, 죽고 싶지는 않았다. 히카리는 죽음에 전력으로 저항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계곡, 찢어발겨진 하늘 아래. 소녀의 핏방울이 뚝, 뚝, 하고 떨어지나 땅에 닿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보이는 것은 오로지 탑 하나. 텅 빈 교회의 종탑이 이곳에 균열이 있다고 알리기라도 하듯 우뚝 서 있었다.
이 투쟁의 결말이 다가온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이것이 운명이었던 걸까?
별빛이 하늘을 수놓았다. 장막은 찢어지고, 그 뒤를 채우던 어둠은 빛으로 반짝였다.
히카리는 이를 알고 있었을까?
안다 해도 의미가 있는 걸까?
그 모든 풍경이 느려지다가, 이윽고 멈추었다. 무너지던 하늘이 속도를 늦추다가 멈추었다.
히카리의 피가 뜨겁다. 눈은 멍하다.
타이리츠는 알고 있다. 저 멍한 눈은 “종말”을 예언하고 있다. 타이리츠는, 알고 있다.
바싹바싹 타는 혀와 목.
타이리츠는 얼마 남지 않은 침을 삼키고서 히카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 눈이 말하는 미래를 거부하리라 맹세하는 데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히카리의 마음을 위협하는 것은 ‘공허함’. 하지만 눈에 비치는 종류의 공허함이 아니었다. 그 마음속에서 또 하나 피어오르는 것은 ‘의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결코 굴복하지 않을 삶의 의지가 히카리의 영혼에서 꿈틀댔다.
살아남으리라 맹세하는 데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타이리츠가 용과 같이 매섭게 전진했다.
세계가 그녀를 붙잡았다. 마치 사나운 맹수처럼 타이리츠는 매섭게 저항했다. 공기 그 자체와 같은 어떤 기묘한 힘이 그녀의 피부를 찢어발기는 듯했다.
그럼에도 타이리츠는 앞으로 나아갔다.
저기 서있는 진짜 “짐승”을 향해.
저 “짐승”이 고개를 돌렸다.
세계가 옆으로 뒤집어지는 듯했다. 순식간에 타이리츠는 땅으로 고꾸라졌다. 유리 조각이 시끄럽게 쨍그랑대며 땅에 떨어져 깨지고 부서지고 흩날렸다.
한쪽 팔에 감각이 없었다. 정신을 집중해 다시 감각을 되찾았다. 타이리츠는 무릎으로 땅을 기었다.
발밑의 조각에서 새하얀 불의 기둥이 반짝, 하고 솟아오르는 순간, 검은 소녀는 뒤로 날아갔다.
대지가 불꽃에 휩싸였다.
다시 세상이 뒤집혔다.
뒤틀리며 꿈틀대는 속을 애써 억누르고, 타이리츠는 자세를 고쳐잡아 섰다.
그리고 아무런 전조도 없이, 눈앞에 서 있었다.
어깨너머로 창백하게 타오르는 색과 같은 불꽃을 목도리처럼 두른 백색의 소녀가.
다시 한번 타이리츠는 후퇴했다.
유리 조각이 날아올라 거대한 새장을 이루며 타이리츠를 가두었다. 타이리츠의 몸이 잠시 떨리다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타이리츠는 히카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히카리는 타이리츠를 보지 않았다. 자신이 만들어낸 새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속삭였으나...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듣고 싶은 말은 없었다.
타이리츠의 손이 거친 유리 감옥을 부수고 히카리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히카리는 고개를 들어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곱 빛깔의 색채가 일렁이더니, 시간이 멈추었다.
새하얀 불꿏에 감싸인 붉게 물든 소녀, 히카리를 향해 이 세계가 결의를 표하듯 머리를 조아렸다.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불꽃을 손에 넣은 히카리.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는 본인도 몰랐다. 두 소녀 간의 결투는 멈췄다. 위에, 하늘에 변화가 생겼기에.
이미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 마음을 히카리가 다시 떠올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두려워하지 않을 뿐, 죽고 싶지는 않았다. 히카리는 죽음에 전력으로 저항했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계곡, 찢어발겨진 하늘 아래. 소녀의 핏방울이 뚝, 뚝, 하고 떨어지나 땅에 닿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보이는 것은 오로지 탑 하나. 텅 빈 교회의 종탑이 이곳에 균열이 있다고 알리기라도 하듯 우뚝 서 있었다.
이 투쟁의 결말이 다가온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이것이 운명이었던 걸까?
별빛이 하늘을 수놓았다. 장막은 찢어지고, 그 뒤를 채우던 어둠은 빛으로 반짝였다.
히카리는 이를 알고 있었을까?
안다 해도 의미가 있는 걸까?
그 모든 풍경이 느려지다가, 이윽고 멈추었다. 무너지던 하늘이 속도를 늦추다가 멈추었다.
히카리의 피가 뜨겁다. 눈은 멍하다.
타이리츠는 알고 있다. 저 멍한 눈은 “종말”을 예언하고 있다. 타이리츠는, 알고 있다.
바싹바싹 타는 혀와 목.
타이리츠는 얼마 남지 않은 침을 삼키고서 히카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 눈이 말하는 미래를 거부하리라 맹세하는 데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히카리의 마음을 위협하는 것은 ‘공허함’. 하지만 눈에 비치는 종류의 공허함이 아니었다. 그 마음속에서 또 하나 피어오르는 것은 ‘의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결코 굴복하지 않을 삶의 의지가 히카리의 영혼에서 꿈틀댔다.
살아남으리라 맹세하는 데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타이리츠가 용과 같이 매섭게 전진했다.
세계가 그녀를 붙잡았다. 마치 사나운 맹수처럼 타이리츠는 매섭게 저항했다. 공기 그 자체와 같은 어떤 기묘한 힘이 그녀의 피부를 찢어발기는 듯했다.
그럼에도 타이리츠는 앞으로 나아갔다.
저기 서있는 진짜 “짐승”을 향해.
저 “짐승”이 고개를 돌렸다.
세계가 옆으로 뒤집어지는 듯했다. 순식간에 타이리츠는 땅으로 고꾸라졌다. 유리 조각이 시끄럽게 쨍그랑대며 땅에 떨어져 깨지고 부서지고 흩날렸다.
한쪽 팔에 감각이 없었다. 정신을 집중해 다시 감각을 되찾았다. 타이리츠는 무릎으로 땅을 기었다.
발밑의 조각에서 새하얀 불의 기둥이 반짝, 하고 솟아오르는 순간, 검은 소녀는 뒤로 날아갔다.
대지가 불꽃에 휩싸였다.
다시 세상이 뒤집혔다.
뒤틀리며 꿈틀대는 속을 애써 억누르고, 타이리츠는 자세를 고쳐잡아 섰다.
그리고 아무런 전조도 없이, 눈앞에 서 있었다.
어깨너머로 창백하게 타오르는 색과 같은 불꽃을 목도리처럼 두른 백색의 소녀가.
다시 한번 타이리츠는 후퇴했다.
유리 조각이 날아올라 거대한 새장을 이루며 타이리츠를 가두었다. 타이리츠의 몸이 잠시 떨리다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타이리츠는 히카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히카리는 타이리츠를 보지 않았다. 자신이 만들어낸 새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속삭였으나...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듣고 싶은 말은 없었다.
타이리츠의 손이 거친 유리 감옥을 부수고 히카리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히카리는 고개를 들어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일곱 빛깔의 색채가 일렁이더니, 시간이 멈추었다.
=====# F-2 #=====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전에도 이처럼 완강히 저항한 적이, 몸부림친 적이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
멈춘 시간 속에서, 모든 것을 그만두고픈 욕구가 솟아올랐다. 그 욕구는 이윽고 짜증으로 변했다.
왜냐하면, 그만두고자 하는 이 마음은 결코 상냥함에서 온 게 아니기 때문이다. 무심함. 히카리가 항상 지녀왔던, 마음 아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공포스러울 정도의 무심함. 이 심오할 정도의 무심함... 전에도 느낀 적이 있다.
히카리의 영혼 속에서는 두 의지가 부딪히고 있었다.
할 수 없어, 히카리가 생각했다.
해야만 해, 히카리가 생각했다.
이 생각들이 “해야 한다”, “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부딪히고 있었다.
하지만 히카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또 다른 불꽃이 타올랐다. 그녀의 진짜 염원은, 꺼지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히 타올랐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타이리츠의 앞에, 히카리가 서있었다.
주변은 무지개의 색채로 얼룩지고 있었다. 타이리츠도 히카리도,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히카리의 안에서, 희망이 제안했다.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한 후에, 이 애를 저 멀리 옮겨버리는 건 어떨까?”
히카리의 살고자 하는 의지가 그 제안을 고려했다.
그것도 괜찮겠네. 히카리가 결론을 내렸다. 희망도 어딘가에는 쓸모가 있었다.
세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이리츠는 순식간에 교회의 대문 앞으로 옮겨졌다.
타이리츠가 절박하게 뻗은 손은 히카리의 목이 아닌 대문의 쇠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유리 조각이 날아와 손잡이를 대문에서 뜯어내버렸다.
그 순간, 타이리츠는 “짐승”의 계획을 이해했다. 검은 소녀는 주변에 남은 유리 조각을 모두 긁어모아 공중으로 내던졌다.
조각들이 반짝이며 다양한 풍경을 비추었다. 이윽고 타이리츠는 히카리를 찾아냈다. 그리고, 대지를 움직였다.
대지 밑에서 만물이 뒤틀렸다. 반역의 의지로 불타오르는 히카리가 조용히 세계의 현실 구조 위에 발을 딛었다.
그리고 하얀 소녀는, 여전히 타이리츠가 이 모든 것을 빼앗아갈 심산임을, 그리고 그렇게 할 수단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다.
갑작스럽고도 두려운 깨달음.
그래, 희망이 뭐 어쨌다고?
히카리는 웃었다.
희망 따윈 없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두 소녀 사이의 공간이 뒤틀린다. 둘 중 누가 한 짓인지는 자신들조차 몰랐다.
무너져내린 대문 앞에서, 교회의 그림자에 덮인 채, 히카리와 타이리츠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미소를 입에 건 채, 히카리는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아주 쉽게, 그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말은,
“말했잖아... 이런 짓 하지 않아도 된다고.”
검은 소녀는 단 한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
=====# F-3 #=====
“그럼 ‘해야 하는 일’은 뭔데? 지금 말장난해?” 타이리츠가 말했다.
“너도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지? 나 말고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긴 할까?
해야 하는 일 따윈 없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이 세계엔 아무 의미도 없어. 너는... 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어?
아무것도 모르지?
난 충분히 참았어. 내가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 이 망할 이야기 속의 내가 영웅인지, 악당인지조차 모르겠단 말이야.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지. 그래, 부질없는 고민이야. 다만... 네가 죽어야만 한다는 건 알겠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짓은 안 해도 돼.
그걸 네가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날카로운 말이, 타이리츠의 입에서 부드럽게 쏟아져 나와 무거운 돌처럼 히카리를 짓눌렀다.
히카리에게 있어 타이리츠의 말은 광기와 같았다. 드디어 히카리는 타이리츠를 이해한 기분이 들었다. 저 소녀의 머릿속은, 광기로 가득 차 있다.
타이리츠는 자신이 미쳐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미쳤다고 해서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타이리츠가 입을 열었다.
“살고 싶다면 날 죽여.”
“하지만 명심해...”
“나는, 죽고 싶다는 걸.”
타이리츠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된 마음과 독기가, 마음속에서 투지가 되어 손끝으로 퍼져나갔다.
어떻게든 이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무슨 결말로 치닫더라도.
그렇게 마음먹은 타이리츠는 주인 없는 유리 조각을 불러 모았다.
주인 없는, 부서진 하늘의 조각을. 지평선에 어둠이 드리웠다.
“너도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르지? 나 말고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긴 할까?
해야 하는 일 따윈 없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이 세계엔 아무 의미도 없어. 너는... 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있어?
아무것도 모르지?
난 충분히 참았어. 내가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 이 망할 이야기 속의 내가 영웅인지, 악당인지조차 모르겠단 말이야.
하지만... 그런 건 아무 상관 없지. 그래, 부질없는 고민이야. 다만... 네가 죽어야만 한다는 건 알겠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짓은 안 해도 돼.
그걸 네가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날카로운 말이, 타이리츠의 입에서 부드럽게 쏟아져 나와 무거운 돌처럼 히카리를 짓눌렀다.
히카리에게 있어 타이리츠의 말은 광기와 같았다. 드디어 히카리는 타이리츠를 이해한 기분이 들었다. 저 소녀의 머릿속은, 광기로 가득 차 있다.
타이리츠는 자신이 미쳐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미쳤다고 해서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타이리츠가 입을 열었다.
“살고 싶다면 날 죽여.”
“하지만 명심해...”
“나는, 죽고 싶다는 걸.”
타이리츠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진실된 마음과 독기가, 마음속에서 투지가 되어 손끝으로 퍼져나갔다.
어떻게든 이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무슨 결말로 치닫더라도.
그렇게 마음먹은 타이리츠는 주인 없는 유리 조각을 불러 모았다.
주인 없는, 부서진 하늘의 조각을. 지평선에 어둠이 드리웠다.
=====# F-4 #=====
히카리가 모든 것을 조종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가지고 있던 권능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마치 줄다기리... 아니, 몸부림...
아니,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하늘의 조각이 땅으로 떨어지며 교회의 일부분을 무너뜨렸다. 거대한 먼지 바람이 일어나 모든 것을 뒤덮었다.
조각이 떨어진 위치는 히카리에게서 아주 가까웠다. 우연일 리가 없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웠다.
더 많은 하늘의 조각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히카리는 타이리츠가 하늘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터무니없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땅과 공기, 유리와 바람. 모든 것이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가, 뒤집어졌다가, 날아갔다. 히카리는 그 재앙의 일부를 사라지게 할 수는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이 일시적으로 창백한 불꽃으로 타올랐다가 사라졌다.
하늘의 일부를 떼어내 부릴 수도 있었다. 타이리츠가 자신에게 세계의 조각을 던지면, 그걸 잡아서 다시 되돌려줄 수 있었다.
천재지변. 마치 거인이 내려와 땅을 짓밟는 듯한, 종말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휘몰아치는 백색 한 가운데에 히카리가 닿을 수 없는 흑색이 있다. 타이리츠가 멀리서 불러온,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조각들이. 그것들이 모든 것을 차지할 기세로 소용돌이쳤다.
땅과 대문, 그리고 건물들조차 흔들리는 한 가운데에, 히카리는 맞서싸웠다. 진동에 턱이 흔들려 이가 맞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히카리는 발을 단단히 땅에 고정했지만, 여전히 진동이 손끝까지, 머리끝까지, 뼛속 깊숙한 곳까지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들 위로 서있던 거대한 교회도 하늘에서 떨어진 조각에 얹어맞으며 신음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히카리 또한, 무너지지 않으리라.
...기회가 있을 때 모든 걸 끝냈어야 했다.
히카리의 심장이 뛰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조금.
다음에 부서지는 것은, 이 세계의 핵일까? 저 검은 소녀가 원하는 바는 그게 아니던가?
히카리는 무너져가는 대지를 가까스로 붙들어매며 생각했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를 막을 방법을...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아르케아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사슬이 날아와 히카리의 가슴을 옭아맸다.
히카리는 재빨리 창백한 화염으로 사슬을 불태웠으나, 순식간에 다른 사슬이 날아와 또다시 가슴을 속박했다.
그 다음은 팔이었다. 히카리는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이미 다리, 발, 허벅지가 모조리 속박당한 후였다.
그 다음은 배였다. 히카리의 몸이 다시 불타올랐다. 그리고 다시 묶였다.
이... 그림자들. 이 고통의 기억들이 히카리를 구속하고 있었다.
마치 잔인한 농담처럼.
타이리츠가 다가왔다. 히카리는 다리를 묶은 사슬들을 불태우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히카리의 등 뒤로 끔찍한 형태의 유리 가시가 다리를 향해 솟아올랐다.
히카리는 가시를 바라보고서, 불태우려고 했다.
하지만 가시는 불타오르길 거부했다.
히카리는 다시 묶이고, 잡아당겨져, 무릎이 꿇렸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또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고개를 들자 히카리의 눈에 보인 것은, 미동 없이 서있는 타이리츠의 모습이었다.
오히려 가지고 있던 권능을 순식간에 잃어버리기에 이르렀다.
마치 줄다기리... 아니, 몸부림...
아니, 일방적인 폭력이었다.
하늘의 조각이 땅으로 떨어지며 교회의 일부분을 무너뜨렸다. 거대한 먼지 바람이 일어나 모든 것을 뒤덮었다.
조각이 떨어진 위치는 히카리에게서 아주 가까웠다. 우연일 리가 없다. 우연이라기에는 너무나도 가까웠다.
더 많은 하늘의 조각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히카리는 타이리츠가 하늘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터무니없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땅과 공기, 유리와 바람. 모든 것이 떠올랐다가, 다시 내려앉았다가, 뒤집어졌다가, 날아갔다. 히카리는 그 재앙의 일부를 사라지게 할 수는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부분이 일시적으로 창백한 불꽃으로 타올랐다가 사라졌다.
하늘의 일부를 떼어내 부릴 수도 있었다. 타이리츠가 자신에게 세계의 조각을 던지면, 그걸 잡아서 다시 되돌려줄 수 있었다.
천재지변. 마치 거인이 내려와 땅을 짓밟는 듯한, 종말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휘몰아치는 백색 한 가운데에 히카리가 닿을 수 없는 흑색이 있다. 타이리츠가 멀리서 불러온,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조각들이. 그것들이 모든 것을 차지할 기세로 소용돌이쳤다.
땅과 대문, 그리고 건물들조차 흔들리는 한 가운데에, 히카리는 맞서싸웠다. 진동에 턱이 흔들려 이가 맞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히카리는 발을 단단히 땅에 고정했지만, 여전히 진동이 손끝까지, 머리끝까지, 뼛속 깊숙한 곳까지 전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들 위로 서있던 거대한 교회도 하늘에서 떨어진 조각에 얹어맞으며 신음했다.
하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히카리 또한, 무너지지 않으리라.
...기회가 있을 때 모든 걸 끝냈어야 했다.
히카리의 심장이 뛰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아주 조금.
다음에 부서지는 것은, 이 세계의 핵일까? 저 검은 소녀가 원하는 바는 그게 아니던가?
히카리는 무너져가는 대지를 가까스로 붙들어매며 생각했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를 막을 방법을...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아르케아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사슬이 날아와 히카리의 가슴을 옭아맸다.
히카리는 재빨리 창백한 화염으로 사슬을 불태웠으나, 순식간에 다른 사슬이 날아와 또다시 가슴을 속박했다.
그 다음은 팔이었다. 히카리는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이미 다리, 발, 허벅지가 모조리 속박당한 후였다.
그 다음은 배였다. 히카리의 몸이 다시 불타올랐다. 그리고 다시 묶였다.
이... 그림자들. 이 고통의 기억들이 히카리를 구속하고 있었다.
마치 잔인한 농담처럼.
타이리츠가 다가왔다. 히카리는 다리를 묶은 사슬들을 불태우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히카리의 등 뒤로 끔찍한 형태의 유리 가시가 다리를 향해 솟아올랐다.
히카리는 가시를 바라보고서, 불태우려고 했다.
하지만 가시는 불타오르길 거부했다.
히카리는 다시 묶이고, 잡아당겨져, 무릎이 꿇렸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또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있었을 지도 모른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고개를 들자 히카리의 눈에 보인 것은, 미동 없이 서있는 타이리츠의 모습이었다.
=====# F-5 #=====
침묵...
그것을 마주하는 것은, 또 다른 침묵.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의 시선은 단단히 마주치고 있었다. 미동 없이, 두 소녀는 끝난 싸움의 소리가 메아리치는 공간에서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서진 대지의 신음이, 흩어진 바람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와도, 무너져내린 건물들에서 먼지와 파편이 불어와도, 두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로지,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히카리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타이리츠의 눈동자 너머에 아직 투지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이것은 싸움을 그만하자는 제안이 아니라, 조용한 협박이라는 것을.
히카리는 침을 삼켰다. 타이리츠는 히카리의 목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증오스러운 그 목. 너무나도 증오스러운 그 목소리.
히카리는 그 불타는 의지와 욕망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히카리는 시간을 멈추려고 했다. 멈추지 않았다.
히카리는 자신을 묶은 사슬을 불태우려고 했다. 불타오르지 않았다.
대지도, 하늘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수가 떨어진 히카리는, 어느새 숨을 참고 있었다.
“...”
하늘은 무너지길 멈추었으나, 교회는 아직도 쓰러져가고 있었다.
두 소녀의 주변으로 먼지바람이 일었다,
타이리츠의 눈은 여전히 악의로 가득 찬 의지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이 천천히 예리해졌다. 그 순간만큼은, 무너진 세상조차 평온했다.
타이리츠가 옛 기억을 떠올리고 코웃음을 쳤다. 히카리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다시 이렇게 됐군.”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타이리츠가 말했다. “또 빌 거야? 또 기적이 일어나길 빌어볼 거냐고.”
히카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적이란 건 말이지. 너무나 완벽한 순간에, 너무나 편리하게 모든 걸 해결해버려. 그래서 일어나지 않는 거고, 그래서 기적인 거야. 이 조각들... 무너져버린 세계의 기억은 아르케아를 통해서 수없이 봐왔겠지?
그럼 너도 알 거 아니야. 기적이란 건 ‘희망’과 같은 거라고.
그리고, 넌 어차피 기적 따위 있든 없든… 살아가고, 죽을 거잖아.”
히카리가 숨을 내쉬었다. 타이리츠가 부드럽게 허리를 펴 자세를 고쳤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말을 이어갔다.
“사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아? 잊어버리는 거. 모든 걸 다.”
히카리는 다시 한번 몸을 움직이려 시도했지만 자신의 몸이 얼마나 단단히 묶여있는지 다시금 깨달을 뿐이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발가락이 움츠러들었다.
“널 죽여버릴 거야.” 타이리츠가 말했다. “그러면 이 세계... [ruby(「네 세계」, ruby=아르케아)]도 함께 죽겠지.”
다시 한번 타이리츠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억지로 웃음을 내뱉었다.
그리고 타이리츠는 한 손으로 히카리의 뺨을 잡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네가 옳았어.” 히카리에게 다른 쪽 손을 가져가며 타이리츠가 말했다.
“이런 짓을 할 필요는 없지... 적어도 널 위해서는.”
몸을 앞으로 숙이는 타이리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타이리츠의 눈은…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후회, 그리고 연민.
등 뒤로 뻗은 칠흑 같은 날개는 접혀 있었다.
머리 위에서는 밤의 하늘이 계속해서 반짝였다.
격렬한 싸움은 이미 끝난 후임에도, 히카리의 심장은 계속해서 요동쳤다.
히카리는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리츠를 제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타이리츠가 왼손을 들어 천천히 뒤로 뺐다.
...그 손바닥 위에 검고 뾰족한 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듯, 타이리츠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알려줄게. 이 세계에서 내 이름은 타이리츠였고, 네 이름은 히카리였어.”
“제발...”
히카리가 애원을 쥐어짜냈다.
“제발 멈춰...” 거의 쇳소리였다.
타이리츠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또 비는 거냐?” 타이리츠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을 덧붙였다.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을 거야.”
눈부신 빛과 함께 히카리를 구속하던 사슬이 타올라 사라졌다. 히카리는 일어서서 무기를 바라며 손을 뻗었지만...
손목, 허리, 다리가 구속되어 다시 땅을 기었다.
그럼에도 히카리는 바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손에 검 한 자루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로운’ 물건. ‘창조된’ 검이다. 유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기억이 아닌 물질.
존재할 수 없는 검... 그 도신을 따라 공간이 뒤틀리며 빛을 발했다. 아르케아가 스스로의 법칙을 다시 써, 이 무기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하였다.
타이리츠에게는 웃긴 일이었다.
저 검은, 어디선가 보았던 기둥이 아닌가.
순식간에 히카리는 구속을 풀고 다시 일어서서, 검을 역수로 쥐고 땅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강한 바람이 불어와 타이리츠를 날려보냈다. 아주 멀리.
히카리는 검을 다시 들고서 타이리츠를 향해 겨누었다. 시야에 자신의 떨리는 손이 들어왔다.
바람에 계속 밀리면서도 타이리츠는 가까스로 착지했다. 그 시선은 히카리의 검을 향했다.
검을 바라보았다.
계속.
...이가 갈렸다.
히카리의 얼굴을 보았다.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우유부단함. 머뭇거림.
타이리츠는 저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다.
지면에서 유리의 벽이 솟아올라 히카리를 감쌌다. 그 벽면에 타이리츠가 다가오는 모습이 비치었다.
반사된 상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무언가 이상했다. 여러 명의 타이리츠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습.
검은 소녀의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는 칼날을 보자 히카리의 몸에 공포의 감정이 스며들었다.
저 높이 치켜든 손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자신의 목에 직격할 것이다.
벌벌 떠는 두 손으로 백색의 소녀는 검을 강하게 쥐었다.
히카리의 머릿속에서 어떤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아주 고통스러운 소리가. 그 뒤를 심장이 박동하는 소리가 이었다.
히카리의 이성이 판단한다. 원한다면... 싸움을 끝내는 대신 영원히 이어가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다시 검을 역수로 쥐고 땅에 박아 넣으면 이 유리 벽들은 날아갈 것이고, 타이리츠 또한 쉽게 날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 F-6 #=====
히카리의 이성이 판단한다. 원한다면... 싸움을 끝내는 대신 영원히 이어가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다시 검을 역수로 쥐고 땅에 박아 넣으면 이 유리 벽들은 날아갈 것이고, 타이리츠 또한 쉽게 날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터였는데, 어째서?
타이리츠의 손이 부드럽게 오른쪽 뺨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자...
검은 옷을 입은 소녀의 것임이 분명한 육체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어째서, 검을 위로 들어 그 가슴을 찔러버린 것일까?
격렬하게 타오르는 감정이 검을 밀어 넣었다. 시야의 한편으로 타이리츠의 손에서 검은 물체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타이리츠의 오른팔이 고통에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천천히, 눈부신 광채가 그 빛을 더해갔다. 현실을 벗어난 듯 기묘한 빛깔.
살고 싶다 울부짖는 듯한 비명이 소녀의 생명력을 앗아갔다.
대지를 울리는 그 외침이 타이리츠의 몸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침묵했다.
소리와 함께, 소녀의 생명이 멎었다.
유리의 검이 소녀의 몸을 꿰뚫어 파고들자마자 타이리츠의 피와 생명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 자신을 채우더니,
이윽고 갈라지고 깨지며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타이리츠의 생명이 완전히 꺼지고, 그 몸이 쓰러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반사적으로 히카리는 자신의 뺨 위에 올려져있던 타이리츠의 손을 잡았다.
그곳에 타이리츠는 없었다. 싸늘한 주검만이 남아있을 뿐.
그럼에도... 부서져가는 검을 잡은 히카리의 손끝에 온기가 감돌았다.
다른 쪽 손을 잡은 타이리츠의 손에서 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검은 소녀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그 차가운 몸을 지탱하는 것은 히카리의 따뜻하고 축축한 손뿐.
감은 눈. 이제는 풀려버린 찡그렸던 미간...
그렇게, 평화를 찾지 못한 채, 타이리츠는 죽었다.
그리고, 아직 뜨인 눈과 뛰는 심장을 지닌 히카리는, 이제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이리츠를 받치던 왼손을 천천히 빼자 시체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이제는 생기가 감돌지 않는 그 손을 세게 꽉 잡았다.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되었다.
움직이지 않는 타이리츠의 가슴에 손을 대자, 다시 온기가 느껴졌다.
히카리는 자신이 낸 상처로 시선을 옮겼다.
히카리는 이 땅에도, 하늘에도 상처를 입혔다.
모든 것이 무너져 평평해진 세계.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눈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엄청난 힘으로 뚫어버린 그 구멍을.
대지는 평탄했고, 하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교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검은 소녀의 등 뒤로는 폭발에 휩쓸려 반쯤 무너져내린 벽이 있었다.
타이리츠의 몸이 막아준 덕에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무사하지 못했다.
어리석은 히카리는 자신의 얼굴을 타이리츠의 얼굴 가까이 대고 결코 내쉬지 않을 숨을 부질없이 기다렸다.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타이리츠의 손은 힘이 풀린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화가 난 듯 손을 내팽개친 히카리는 손톱을 검은 소녀의 옷으로 파묻었다.
무언가 따뜻한 게 느껴졌다. 자신의 손 위로 떨어진 눈물이었다.
눈물보다 앞서 이 손을 적셨던 온기가 무엇이었는지 히카리는 잘 알고 있었다.
히카리의 손은 그 액체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붉은색 표면을 눈물이 붓질하듯 가로질렀다.
차마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붉은색에 뒤덮인 스스로의 손을 보자...
히카리는 극심한 공포에 빠졌다.
두려움에 질려 등을 꼿꼿이 세우는 바람에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표정이 뒤틀리고 입술이 벌벌 떨렸다.
깨끗한 쪽의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더 울었다.
그렇게 히카리는 타이리츠와 함께 땅 위로 쓰러졌다.
백색의 소녀는 붉게 물든 손을 드레스로 갖다 대었다.
자신의 위에 엎드려있던 시체가 교회의 잔해 위로 쓰러졌다.
자기 자신이 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자기 자신이 내뱉었던 그 냉소적인 질책이.
이런 짓은 하지 않아도 됐다.
...정말, 하나도 재미없다.
더 이상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어.
그래, 평생 그 시체에 손 올려놓고 있어봐.
그러면 네 피부를 태우는 듯한 그 열이, 그 검처럼 사라지기라도 할 것 같아?
그 아이는 죽었어. 너 때문에. 네가 죽인 거야.
그 애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 정말 이해하려고 해보긴 했어?
“이제 어떡해야 하냐”라고...? 아니, 정말 모르겠어?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야.
다시 일어서서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고?
이 세계가 네가 한 짓을 모두 지켜봤는데도?
그런데 어디 갔어? 승리의 희열은 어디 갔냐고.
이겼잖아? 살아남았잖아?
그래도 싫어?
그 애도 살아있길 싫어했지.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한 짓이 정당했던 걸까?
정당했다고 해도 과연 네 마음이 편해질까?
너, 제정신이야?
지금조차...
너는 아직 너만 생각하고 있짆아.
그 생각과 함께, 히카리의 마음은 종이로 지은 집처럼 무너져내렸다.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왼손은 여전히 시체에 올린 채.
자책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자기를 향한 책망. 자기, 자기, 또다시 자기 자신.
수면 밑에서 맴돌던 생각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항상 이렇지 않았나?
소녀가 깨어나자마자 그녀의 눈앞에 보인 것은 유리로 된 나비의 무리였다.
‘너무 예쁘게 날아다닌다. 줄에 달려 떠있는 걸까?’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무릎 꿇고 앉아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유리 나비들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이것들은 나비가 아니라 유리 조각이었으며, 놀랍게도 스스로 떠다니고 있었다.
“아름다워라!” 소녀는 느낀 대로 외쳤다.
유리 조각은 지금 소녀가 있는 이 새하얀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바다, 도시, 화염, 불빛이 차례대로 보였다.
소녀는 손을 뻗어 조각들을 흐트러뜨리며 즐겁게 웃었다.
나는 이 유리 조각들에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어.
사실, 이름이 무엇이든 나에겐 상관없었어. 조각들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조각들을 만지고, 휘두르고, 바라보며 즐겼어.
그거면 충분했어.
...충분했을까?
사실 알고 있었잖아. 경험으로 알고 있었잖아.
사람이 진정으로 변하는 일 따윈 없다는 걸.
여태껏 쭉, 알고 있던 사실이잖아.
평생 암막은 내려오지 않을 거야. 이 이야기에 ‘끝’은 없으니까.[2]
이 세계엔 의미가 없거든. 네가 원하던 바잖아?
망자의 세계에서 외로이 눈물을 흘리는 소녀가 있을 뿐이야.
그래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실.
이 세계에서 너를 내보낼 수도 있었던 소녀의 피와 함께 너에게 스며든 단 하나의 진실을 위안 삼길 바래.
그래.
이 세계는 낙원이 되었어.
다시 검을 역수로 쥐고 땅에 박아 넣으면 이 유리 벽들은 날아갈 것이고, 타이리츠 또한 쉽게 날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터였는데, 어째서?
타이리츠의 손이 부드럽게 오른쪽 뺨을 어루만지는 것을 느끼자...
검은 옷을 입은 소녀의 것임이 분명한 육체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자...
어째서, 검을 위로 들어 그 가슴을 찔러버린 것일까?
격렬하게 타오르는 감정이 검을 밀어 넣었다. 시야의 한편으로 타이리츠의 손에서 검은 물체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타이리츠의 오른팔이 고통에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천천히, 눈부신 광채가 그 빛을 더해갔다. 현실을 벗어난 듯 기묘한 빛깔.
살고 싶다 울부짖는 듯한 비명이 소녀의 생명력을 앗아갔다.
대지를 울리는 그 외침이 타이리츠의 몸을 타고 흘렀다.
그리고 침묵했다.
소리와 함께, 소녀의 생명이 멎었다.
유리의 검이 소녀의 몸을 꿰뚫어 파고들자마자 타이리츠의 피와 생명력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워 자신을 채우더니,
이윽고 갈라지고 깨지며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타이리츠의 생명이 완전히 꺼지고, 그 몸이 쓰러질 때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반사적으로 히카리는 자신의 뺨 위에 올려져있던 타이리츠의 손을 잡았다.
그곳에 타이리츠는 없었다. 싸늘한 주검만이 남아있을 뿐.
그럼에도... 부서져가는 검을 잡은 히카리의 손끝에 온기가 감돌았다.
다른 쪽 손을 잡은 타이리츠의 손에서 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느껴졌다.
검은 소녀의 발이 땅에 닿았다. 그 차가운 몸을 지탱하는 것은 히카리의 따뜻하고 축축한 손뿐.
감은 눈. 이제는 풀려버린 찡그렸던 미간...
그렇게, 평화를 찾지 못한 채, 타이리츠는 죽었다.
그리고, 아직 뜨인 눈과 뛰는 심장을 지닌 히카리는, 이제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이리츠를 받치던 왼손을 천천히 빼자 시체가 쓰러지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이제는 생기가 감돌지 않는 그 손을 세게 꽉 잡았다.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무릎을 꿇은 자세가 되었다.
움직이지 않는 타이리츠의 가슴에 손을 대자, 다시 온기가 느껴졌다.
히카리는 자신이 낸 상처로 시선을 옮겼다.
히카리는 이 땅에도, 하늘에도 상처를 입혔다.
모든 것이 무너져 평평해진 세계.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눈을 돌리기가 힘들었다.
자신도 모르는 엄청난 힘으로 뚫어버린 그 구멍을.
대지는 평탄했고, 하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교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검은 소녀의 등 뒤로는 폭발에 휩쓸려 반쯤 무너져내린 벽이 있었다.
타이리츠의 몸이 막아준 덕에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무사하지 못했다.
어리석은 히카리는 자신의 얼굴을 타이리츠의 얼굴 가까이 대고 결코 내쉬지 않을 숨을 부질없이 기다렸다.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타이리츠의 손은 힘이 풀린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화가 난 듯 손을 내팽개친 히카리는 손톱을 검은 소녀의 옷으로 파묻었다.
무언가 따뜻한 게 느껴졌다. 자신의 손 위로 떨어진 눈물이었다.
눈물보다 앞서 이 손을 적셨던 온기가 무엇이었는지 히카리는 잘 알고 있었다.
히카리의 손은 그 액체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붉은색 표면을 눈물이 붓질하듯 가로질렀다.
차마 모를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그럼에도 붉은색에 뒤덮인 스스로의 손을 보자...
히카리는 극심한 공포에 빠졌다.
두려움에 질려 등을 꼿꼿이 세우는 바람에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표정이 뒤틀리고 입술이 벌벌 떨렸다.
깨끗한 쪽의 손으로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더 울었다.
그렇게 히카리는 타이리츠와 함께 땅 위로 쓰러졌다.
백색의 소녀는 붉게 물든 손을 드레스로 갖다 대었다.
자신의 위에 엎드려있던 시체가 교회의 잔해 위로 쓰러졌다.
자기 자신이 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자기 자신이 내뱉었던 그 냉소적인 질책이.
이런 짓은 하지 않아도 됐다.
...정말, 하나도 재미없다.
더 이상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어.
그래, 평생 그 시체에 손 올려놓고 있어봐.
그러면 네 피부를 태우는 듯한 그 열이, 그 검처럼 사라지기라도 할 것 같아?
그 아이는 죽었어. 너 때문에. 네가 죽인 거야.
그 애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 정말 이해하려고 해보긴 했어?
“이제 어떡해야 하냐”라고...? 아니, 정말 모르겠어?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야.
다시 일어서서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고?
이 세계가 네가 한 짓을 모두 지켜봤는데도?
그런데 어디 갔어? 승리의 희열은 어디 갔냐고.
이겼잖아? 살아남았잖아?
그래도 싫어?
그 애도 살아있길 싫어했지.
그렇다고 해서 네가 한 짓이 정당했던 걸까?
정당했다고 해도 과연 네 마음이 편해질까?
너, 제정신이야?
지금조차...
너는 아직 너만 생각하고 있짆아.
그 생각과 함께, 히카리의 마음은 종이로 지은 집처럼 무너져내렸다.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왼손은 여전히 시체에 올린 채.
자책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자기를 향한 책망. 자기, 자기, 또다시 자기 자신.
수면 밑에서 맴돌던 생각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항상 이렇지 않았나?
소녀가 깨어나자마자 그녀의 눈앞에 보인 것은 유리로 된 나비의 무리였다.
‘너무 예쁘게 날아다닌다. 줄에 달려 떠있는 걸까?’라고 소녀는 생각했다.
무릎 꿇고 앉아 드레스의 매무새를 가다듬고 유리 나비들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이것들은 나비가 아니라 유리 조각이었으며, 놀랍게도 스스로 떠다니고 있었다.
“아름다워라!” 소녀는 느낀 대로 외쳤다.
유리 조각은 지금 소녀가 있는 이 새하얀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바다, 도시, 화염, 불빛이 차례대로 보였다.
소녀는 손을 뻗어 조각들을 흐트러뜨리며 즐겁게 웃었다.
나는 이 유리 조각들에 “아르케아”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아직 몰랐어.
사실, 이름이 무엇이든 나에겐 상관없었어. 조각들은 그 자체로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조각들을 만지고, 휘두르고, 바라보며 즐겼어.
그거면 충분했어.
...충분했을까?
사실 알고 있었잖아. 경험으로 알고 있었잖아.
사람이 진정으로 변하는 일 따윈 없다는 걸.
여태껏 쭉, 알고 있던 사실이잖아.
평생 암막은 내려오지 않을 거야. 이 이야기에 ‘끝’은 없으니까.[2]
이 세계엔 의미가 없거든. 네가 원하던 바잖아?
망자의 세계에서 외로이 눈물을 흘리는 소녀가 있을 뿐이야.
그래도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실.
이 세계에서 너를 내보낼 수도 있었던 소녀의 피와 함께 너에게 스며든 단 하나의 진실을 위안 삼길 바래.
그래.
이 세계는 낙원이 되었어.
=====# F-7 #=====
낙원.
사후 세계, “천국”, 망자의 나라.
삶을 다 한 이들이 잠시, 또는 조금 오랫동안 머무는 장소. 더러는 그 위에 남기도 하지.
너와 내가 있는 이 장소는 그런 곳이야.
“...정말 이게 끝인가? 히카리의 뺨에 손을 올린 내가 유리의 검으로 찔리는 걸로...?
이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저 애의 뺨에 닿은 내 손조차도...
...
...이제 날 놓아줘.”
왜? 아직 죽지 않았잖아. 아직... 그 안에 꿈틀대는 의지가 있잖아. 아직 숨이 붙어있잖아. 아직... 좀 더 나아갈 수 있잖아.
“아니야...”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 말을 듣고... 떠올려봐.
네가 누군지...
오래 살아왔잖아. 이것보다 더 끔찍한 일도 목격했잖아.
그러니 일어나서 싸워. 다시 한번 더…
“그만해.”
...그래.
그럼 싸우지 말고, 이야기만...
“내 말을 듣긴 한 거야? 이야기고 싸움이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나는... 나는...”
나는 네가 다시 기억을 떠올렸으면 좋겠어.
“...슬슬 짜증이 나려 하네.
넌 기억해? 그럼 내가 왜 이러는지...
...으윽.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아.
원하지 않아도 마구 떠올라.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이 기억들이 맞다면, 하… 이게 무슨 재미없는 장난인지.”
...
“내 전생에선... 난 살아가고 싶었어. 살아있는 게 좋았어. 하지만... 삶은 끔찍했지.
수없이 쓰러지고, 수없이 모욕당하고... 어딜 가나 증오만이 우리를 맞이해줬어.
우린 그저... 그 힘으로...
사람들을 도우고 싶었을 뿐인데...”
그 사람들은 우리가 두려웠던 거야.
“‘우리’? 넌 누군데?”
그러는 너는 누구야?
“...웃기기도 하지. 내가 누군지, 그것만은 기억나지 않아.
...
그냥, ‘타이리츠’라고 불러.”
그럼... 나도 그렇게 불러줘.
“...말도 안 돼. 지금 장난해? 내가... 결국 내가 옳았다는 거야?”
뭐가?
“그 애가 아무 생각 없이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거!
만약 네가... 여기서의 내 생명이...
...끔찍한 녀석 같으니...”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그렇다고 그 애를 동정하고 싶지는 않아. 나와는 다른 세계 출신이지만, 적어도 자기 능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었을 거 아니야? 분명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러고도 일부러 아무 생각도 안 한 거라고. 그러니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그건 변명거리가 안 돼. 날 봐. 조형자들이 내게 가르친 그 모든 게 지금 무슨 쓸모가 있지?
그 애와 내가 다른 건 배움의 차이가 아니야. 인간으로서의 차이라고. 내게 같은 힘이 있었다면... 정말 모든 걸 바꿀 힘이 있었다면...세계를 위해...”
썼겠지. 하지만 없었어.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내 두 번째 삶이 시작되어 버린거야. 그 아이가 두 번째 삶을 원했으니까. 하지만 멍청하게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환생의 기회를 줘버렸으니까. 정말... 질리도록 바보같아. 웃겨, 안 그래? 웃어봐. 어서, 웃어보라고!”
...
“왜, 안 웃겨? 못 웃겠어? 그렇겠지. 무슨 두 번째 기회가 이런 식이냐고.
전생과 똑같은 삶을 끔찍하고 뒤틀린 방식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잖아.
난 온몸이 갈갈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버티며 힘겹게 살아갔어.
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난 다시 일어섰어. 그게 내 인생이었다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일어나 싸웠어!
왜 이런 삶을 또 겪게 만든 거야? 대답해! 왜냐고! 나는...!
나는... 이번만큼은 다르길 바랬어…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래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
“...그래.
...
있지...
나도 이제 죽기 직전인 거 알아. 하지만 하나 알려줄래? 죽기 전에 바깥을 볼 수 있을까?
나의 ‘새’들로… 그 아이가 만들어낸 이 작은 감옥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어.
“좋아.
...
아무도 모르는 조그마한 장소들이 수없이 많아. 그 안에 갇혀 방황하는 영혼들도...
아니, 영혼이라고 부르면 안되겠지. 여기에 있는 건 기억뿐이니까. 우리들조차 그저 기억의 잔재일 뿐이니까.
저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조각을 엿보았을 때도 내게 모든 걸 알려주진 않았거든.
대부분은 아주, 아주 행복해.
“...악랄하네, 하핫…
나... 나 울고 싶어. 그냥… 울고 싶어. 대체 나는 여태까지 뭘 해온 거지? 난 왜 죽은 거지?”
...
“표정이 볼 만하네. 넌 알아? 대답할 수 있어? 내가 왜 죽은 건지?
...으윽, 아파. 모든 게 다 아파. 드디어… 모든 걸 이해했어. 이 세계의 모든 게 다 끔찍하다는 사실을... 그런데... 난 울지도 못해.”
그거야.
“...?”
죽고 싶지 않았잖아. 그런데 왜 죽었어?
“...내 전생에선, 내 삶이 어떻게 될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어.
미래는 수없는 갈림길의 연속이었지.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었어. 그래, 그중에는 죽음도 있겠지.
하지만 길을 잘 고르기만 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가능했던 거야.
여기서는 달라. 바보같이 여기도 전생과 같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지. 구역질이 나와.
이 세계의 길은 끝이 없는 황무지야.
누가 어떤 길을 걷든, 목적 없이 영원히 걸어가다 결국 지쳐 쓰러지고 진리를 알게 돼.
이 세계에서는 어디서 어떤 선택을 하든, 모든 길은 결국 허무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이 세계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
“여기에 갇혀서 죽은 사람하고만 얘기할 수 있는 주제에 왜 그렇게 생각해?
바보야? 여태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긴 했어?”
...너처럼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
나는... 네 말을 믿고 싶지 않아.
“내 말이 그거라고. 진리에서 눈을 돌리지 마. 이 세계에 의미 따위는 없어.”
아니.
그건 진리가 아니야.
진리가 되도록 두지 않겠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만약 그게 진리라면 너무... 역겹지 않을까? 너무 슬프지 않을까?
“...
기억해, 전생에서는 나도 너처럼 생각했지. 그렇게 살아가려는 의지를 곱씹었어.
너는 정말 나구나. 나는 그 아이가 만들어낸... ‘나’의 복사본.
그래... 우린 결국 텅 비어버린, 복제품 영혼에 불과했어.
그렇구나...
그 아이는 살아있고, 우린 모두 죽은 거구나.”
...
“그런데... 너는 왜 여기에 있지? 다른 아이들의 ‘원본’은? 영혼은?”
...나도 잘 모르겠네, 바보라서.
“그래, 그럼... 말 돌리지 말고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해줘. 너는 ‘진짜’ 나이자, 나의 영혼인 거야?”
그래... 맞아. 줄곧 이 장소에서 홀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나도 이제 슬슬 짜증이 나려 하네.
타이리츠야, 너는 ‘진짜’가 아니니? 나도, 너도, 그 세계의 모두가 생각하며 존재하고 있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난 죽어서 없지만.”
또, 짜증나는 소릴.
그렇게 사람 신경 긁는 재주가 있는 네가 어떻게 가짜겠니.
“하핫...
...
고마워.”
두 번째 삶에서조차 끔찍한 운명을 맞이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게다가 이렇게 바뀌어버리다니...
“뭐가 어떻게 바뀌었는데?”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포기했다고.
나는... 음...
좋은 쪽으로 바뀌길 원했는데...
...
정말 어떻게 안될까? ‘악당’은 죽었잖아.
“...‘악당’이라... 농담인 건 알지만, 미안해.
화가 많이 났었나 봐.
나도 완전히 포기하기는 싫었어.
전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네가 있잖아? 어쩌면 내가 사라지고 나서도 넌 여기 남아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없어지고 나서도 계속 이 세계를 지켜볼 생각이라면...
...나처럼 희망을 놓지 않아줬으면 해.
그럼, 어쩌면...
아니, 확실히,
이 세계에 남아있는 아이들도 구원받을 거야. 그렇게 믿고 싶어.
네가 말한 대로 뭔가 바뀌는 것...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야.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게 다 끝나고 나서도 날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게 이루어졌을 때 알려주길 바래.”
약속할게.
“생각해 보니 웃기네.
살아있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곧잘 나 자신에게 말을 걸곤 했어.
그런데도, 혼자인 느낌은 들지 않았지.”
그 누구도 진정으로 혼자인 사람은 없어.
“그래...
그렇게 되뇌이곤 했지.
...다시 이 세계를 보고 싶어.
무너진 탑. 하늘을 떠다니는 유리 조각. 드넓은 백색의 세계.
하얀색, 하얀색, 망자의 영혼에 이끌리는 유리...
이제는 알아.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어.
저 아이들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을 거라는 걸.
정말? 누구 잊은 사람 없어?
“잊은 사람...?
아, 그렇지. 히카리... 여기서도 보여. 상심이 엄청 큰 모양인데.
...하지만 저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분개하고, 상처받고...
아무것도 없는 허무보다는, 저게 나아.”
그렇지.
“히카리가 앞으로도 잘해나갈지는 몰라. 하지만 저 순간은 분명 영원히 기억에 남겠지.
솔직히... 히카리에게 사과하고 싶어. 분명 나는 옳은 일을 했어. 하지만...”
그게 무슨 소리니? 네가 한 일에 어디 옳은 게 있다고.
“풉...! 하핫. 그래. 하지만... 정말로, 잘못된 일은 하지 않았다고 믿어.
히카리에게 사과하고 싶어. 우리가 진짜고, 히카리도 진짜라면...
저 애도 아무것도 모른 채 이유없이 벌을 받은 또다른 멍청한 영혼에 불과한걸.
...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네.”
유감이지만, 그런 것 같아...
...
떠나지 말아줘.
“유감이지만, 그럴 수는 없어... 나는 겨우겨우... 여기 존재하고 있을 뿐이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잖아.
“그렇지...
...히카리...
미안해. 후회는 하지 않지만, 내가 느꼈던 증오는... 너를 향한 게 아니었어.
또다른... 너는... 아직... 있어... 살...아있어...
그 아이는... 여전히 싫...지만...
너는...
...
너는... 그 녀석보다 강해… 너도 알고 있잖아...
히카리, 그러니까...
나는 네가 다시 일어서리라 믿어.”
눈을 감자.
“이미 감았어.”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
“걱정 따위 없어.”
다시 만나자.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아.
그래도 괜찮아.
받아들였으니까.
난 끔찍한 삶을 살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꿈꿨어...
그 어떤 벽과 마주치더라도, 나에게는 이상이 있었어. 그래서 싸웠어.
얼마나 잘못되었다 해도… 길을 잃어버렸다 해도...
...
죽음을 택해버려서 미안해.
포기해버려서 미안해.
...이렇게 낭비해버렸지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 건 행운이었어.
그러니까... 받아들였어.
응.
“히카리...나는...한심...
바보같… 끝으로만… 내가 기억되질 않았... 좋겠어...
...내 말이 들린다면, 꼭 명심해줘, 히...히카리...
정말로. 잊지... 마...
...
...
내가... 이 삶을 받아들였다는 걸.”
소녀는 타이리츠의 주검 앞에서 울었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비애로 가득 찬 히카리는, 마지막으로 타이리츠가 지은 미소를 놓치고 말았다.
이 이야기의 일부분은 아직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완전히 전해지지 않은 채 끝을 맺는 법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조각만이 남아, 다시 하나가 되어 전해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이곳은 조각의 세계.
조각을 줍는 것은 남겨진 소녀들.
조각에 비치는 것에 의미가 있고, 삶이란 존재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소녀들.
상처받고 외로운 하얀 옷의 소녀가 땅 위로 쓰러졌다.
하지만 언젠가는 일어서, 다시 조각을 찾아 나설 것이다.
기억들은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끝의 순간. 그 너머까지,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소녀들은 나아갈 것이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잊지 않으리라.
끝.
사후 세계, “천국”, 망자의 나라.
삶을 다 한 이들이 잠시, 또는 조금 오랫동안 머무는 장소. 더러는 그 위에 남기도 하지.
너와 내가 있는 이 장소는 그런 곳이야.
“...정말 이게 끝인가? 히카리의 뺨에 손을 올린 내가 유리의 검으로 찔리는 걸로...?
이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저 애의 뺨에 닿은 내 손조차도...
...
...이제 날 놓아줘.”
왜? 아직 죽지 않았잖아. 아직... 그 안에 꿈틀대는 의지가 있잖아. 아직 숨이 붙어있잖아. 아직... 좀 더 나아갈 수 있잖아.
“아니야...”
아니, 아직 끝나지 않았어...
내 말을 듣고... 떠올려봐.
네가 누군지...
오래 살아왔잖아. 이것보다 더 끔찍한 일도 목격했잖아.
그러니 일어나서 싸워. 다시 한번 더…
“그만해.”
...그래.
그럼 싸우지 말고, 이야기만...
“내 말을 듣긴 한 거야? 이야기고 싸움이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나는... 나는...”
나는 네가 다시 기억을 떠올렸으면 좋겠어.
“...슬슬 짜증이 나려 하네.
넌 기억해? 그럼 내가 왜 이러는지...
...으윽.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아.
원하지 않아도 마구 떠올라.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이 기억들이 맞다면, 하… 이게 무슨 재미없는 장난인지.”
...
“내 전생에선... 난 살아가고 싶었어. 살아있는 게 좋았어. 하지만... 삶은 끔찍했지.
수없이 쓰러지고, 수없이 모욕당하고... 어딜 가나 증오만이 우리를 맞이해줬어.
우린 그저... 그 힘으로...
사람들을 도우고 싶었을 뿐인데...”
그 사람들은 우리가 두려웠던 거야.
“‘우리’? 넌 누군데?”
그러는 너는 누구야?
“...웃기기도 하지. 내가 누군지, 그것만은 기억나지 않아.
...
그냥, ‘타이리츠’라고 불러.”
그럼... 나도 그렇게 불러줘.
“...말도 안 돼. 지금 장난해? 내가... 결국 내가 옳았다는 거야?”
뭐가?
“그 애가 아무 생각 없이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거!
만약 네가... 여기서의 내 생명이...
...끔찍한 녀석 같으니...”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
“그렇다고 그 애를 동정하고 싶지는 않아. 나와는 다른 세계 출신이지만, 적어도 자기 능력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었을 거 아니야? 분명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러고도 일부러 아무 생각도 안 한 거라고. 그러니까...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해도 그건 변명거리가 안 돼. 날 봐. 조형자들이 내게 가르친 그 모든 게 지금 무슨 쓸모가 있지?
그 애와 내가 다른 건 배움의 차이가 아니야. 인간으로서의 차이라고. 내게 같은 힘이 있었다면... 정말 모든 걸 바꿀 힘이 있었다면...세계를 위해...”
썼겠지. 하지만 없었어.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내 두 번째 삶이 시작되어 버린거야. 그 아이가 두 번째 삶을 원했으니까. 하지만 멍청하게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환생의 기회를 줘버렸으니까. 정말... 질리도록 바보같아. 웃겨, 안 그래? 웃어봐. 어서, 웃어보라고!”
...
“왜, 안 웃겨? 못 웃겠어? 그렇겠지. 무슨 두 번째 기회가 이런 식이냐고.
전생과 똑같은 삶을 끔찍하고 뒤틀린 방식으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잖아.
난 온몸이 갈갈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버티며 힘겹게 살아갔어.
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난 다시 일어섰어. 그게 내 인생이었다고!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시 일어나 싸웠어!
왜 이런 삶을 또 겪게 만든 거야? 대답해! 왜냐고! 나는...!
나는... 이번만큼은 다르길 바랬어…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래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
“...그래.
...
있지...
나도 이제 죽기 직전인 거 알아. 하지만 하나 알려줄래? 죽기 전에 바깥을 볼 수 있을까?
나의 ‘새’들로… 그 아이가 만들어낸 이 작은 감옥을, 마지막으로 한 번 볼 수 있을까?”
...볼 수 있어.
“좋아.
...
아무도 모르는 조그마한 장소들이 수없이 많아. 그 안에 갇혀 방황하는 영혼들도...
아니, 영혼이라고 부르면 안되겠지. 여기에 있는 건 기억뿐이니까. 우리들조차 그저 기억의 잔재일 뿐이니까.
저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조각을 엿보았을 때도 내게 모든 걸 알려주진 않았거든.
대부분은 아주, 아주 행복해.
“...악랄하네, 하핫…
나... 나 울고 싶어. 그냥… 울고 싶어. 대체 나는 여태까지 뭘 해온 거지? 난 왜 죽은 거지?”
...
“표정이 볼 만하네. 넌 알아? 대답할 수 있어? 내가 왜 죽은 건지?
...으윽, 아파. 모든 게 다 아파. 드디어… 모든 걸 이해했어. 이 세계의 모든 게 다 끔찍하다는 사실을... 그런데... 난 울지도 못해.”
그거야.
“...?”
죽고 싶지 않았잖아. 그런데 왜 죽었어?
“...내 전생에선, 내 삶이 어떻게 될지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어.
미래는 수없는 갈림길의 연속이었지.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었어. 그래, 그중에는 죽음도 있겠지.
하지만 길을 잘 고르기만 한다면 그 무엇이라도 가능했던 거야.
여기서는 달라. 바보같이 여기도 전생과 같다고 생각했던 시기가 있었지. 구역질이 나와.
이 세계의 길은 끝이 없는 황무지야.
누가 어떤 길을 걷든, 목적 없이 영원히 걸어가다 결국 지쳐 쓰러지고 진리를 알게 돼.
이 세계에서는 어디서 어떤 선택을 하든, 모든 길은 결국 허무로 이어진다는 진리를.”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나는 이 세계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
“여기에 갇혀서 죽은 사람하고만 얘기할 수 있는 주제에 왜 그렇게 생각해?
바보야? 여태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긴 했어?”
...너처럼 생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
나는... 네 말을 믿고 싶지 않아.
“내 말이 그거라고. 진리에서 눈을 돌리지 마. 이 세계에 의미 따위는 없어.”
아니.
그건 진리가 아니야.
진리가 되도록 두지 않겠어.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만약 그게 진리라면 너무... 역겹지 않을까? 너무 슬프지 않을까?
“...
기억해, 전생에서는 나도 너처럼 생각했지. 그렇게 살아가려는 의지를 곱씹었어.
너는 정말 나구나. 나는 그 아이가 만들어낸... ‘나’의 복사본.
그래... 우린 결국 텅 비어버린, 복제품 영혼에 불과했어.
그렇구나...
그 아이는 살아있고, 우린 모두 죽은 거구나.”
...
“그런데... 너는 왜 여기에 있지? 다른 아이들의 ‘원본’은? 영혼은?”
...나도 잘 모르겠네, 바보라서.
“그래, 그럼... 말 돌리지 말고 이것만은 확실하게 말해줘. 너는 ‘진짜’ 나이자, 나의 영혼인 거야?”
그래... 맞아. 줄곧 이 장소에서 홀로 모든 걸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나도 이제 슬슬 짜증이 나려 하네.
타이리츠야, 너는 ‘진짜’가 아니니? 나도, 너도, 그 세계의 모두가 생각하며 존재하고 있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난 죽어서 없지만.”
또, 짜증나는 소릴.
그렇게 사람 신경 긁는 재주가 있는 네가 어떻게 가짜겠니.
“하핫...
...
고마워.”
두 번째 삶에서조차 끔찍한 운명을 맞이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게다가 이렇게 바뀌어버리다니...
“뭐가 어떻게 바뀌었는데?”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포기했다고.
나는... 음...
좋은 쪽으로 바뀌길 원했는데...
...
정말 어떻게 안될까? ‘악당’은 죽었잖아.
“...‘악당’이라... 농담인 건 알지만, 미안해.
화가 많이 났었나 봐.
나도 완전히 포기하기는 싫었어.
전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네가 있잖아? 어쩌면 내가 사라지고 나서도 넌 여기 남아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없어지고 나서도 계속 이 세계를 지켜볼 생각이라면...
...나처럼 희망을 놓지 않아줬으면 해.
그럼, 어쩌면...
아니, 확실히,
이 세계에 남아있는 아이들도 구원받을 거야. 그렇게 믿고 싶어.
네가 말한 대로 뭔가 바뀌는 것...
내가 원하는 건 그게 다야.
내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 모든 게 다 끝나고 나서도 날 찾아낼 수 있다면...
그게 이루어졌을 때 알려주길 바래.”
약속할게.
“생각해 보니 웃기네.
살아있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곧잘 나 자신에게 말을 걸곤 했어.
그런데도, 혼자인 느낌은 들지 않았지.”
그 누구도 진정으로 혼자인 사람은 없어.
“그래...
그렇게 되뇌이곤 했지.
...다시 이 세계를 보고 싶어.
무너진 탑. 하늘을 떠다니는 유리 조각. 드넓은 백색의 세계.
하얀색, 하얀색, 망자의 영혼에 이끌리는 유리...
이제는 알아.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어.
저 아이들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을 거라는 걸.
정말? 누구 잊은 사람 없어?
“잊은 사람...?
아, 그렇지. 히카리... 여기서도 보여. 상심이 엄청 큰 모양인데.
...하지만 저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분개하고, 상처받고...
아무것도 없는 허무보다는, 저게 나아.”
그렇지.
“히카리가 앞으로도 잘해나갈지는 몰라. 하지만 저 순간은 분명 영원히 기억에 남겠지.
솔직히... 히카리에게 사과하고 싶어. 분명 나는 옳은 일을 했어. 하지만...”
그게 무슨 소리니? 네가 한 일에 어디 옳은 게 있다고.
“풉...! 하핫. 그래. 하지만... 정말로, 잘못된 일은 하지 않았다고 믿어.
히카리에게 사과하고 싶어. 우리가 진짜고, 히카리도 진짜라면...
저 애도 아무것도 모른 채 이유없이 벌을 받은 또다른 멍청한 영혼에 불과한걸.
...
이제 시간이 다 된 것 같네.”
유감이지만, 그런 것 같아...
...
떠나지 말아줘.
“유감이지만, 그럴 수는 없어... 나는 겨우겨우... 여기 존재하고 있을 뿐이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잖아.
“그렇지...
...히카리...
미안해. 후회는 하지 않지만, 내가 느꼈던 증오는... 너를 향한 게 아니었어.
또다른... 너는... 아직... 있어... 살...아있어...
그 아이는... 여전히 싫...지만...
너는...
...
너는... 그 녀석보다 강해… 너도 알고 있잖아...
히카리, 그러니까...
나는 네가 다시 일어서리라 믿어.”
눈을 감자.
“이미 감았어.”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
“걱정 따위 없어.”
다시 만나자.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아.
그래도 괜찮아.
받아들였으니까.
난 끔찍한 삶을 살았지만, 더 나은 세상을 꿈꿨어...
그 어떤 벽과 마주치더라도, 나에게는 이상이 있었어. 그래서 싸웠어.
얼마나 잘못되었다 해도… 길을 잃어버렸다 해도...
...
죽음을 택해버려서 미안해.
포기해버려서 미안해.
...이렇게 낭비해버렸지만,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 건 행운이었어.
그러니까... 받아들였어.
응.
“히카리...나는...한심...
바보같… 끝으로만… 내가 기억되질 않았... 좋겠어...
...내 말이 들린다면, 꼭 명심해줘, 히...히카리...
정말로. 잊지... 마...
...
...
내가... 이 삶을 받아들였다는 걸.”
소녀는 타이리츠의 주검 앞에서 울었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비애로 가득 찬 히카리는, 마지막으로 타이리츠가 지은 미소를 놓치고 말았다.
이 이야기의 일부분은 아직까지 전해지지 않는다. 어떤 이야기는 완전히 전해지지 않은 채 끝을 맺는 법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조각만이 남아, 다시 하나가 되어 전해지길 기다리는 것이다.
이곳은 조각의 세계.
조각을 줍는 것은 남겨진 소녀들.
조각에 비치는 것에 의미가 있고, 삶이란 존재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 소녀들.
상처받고 외로운 하얀 옷의 소녀가 땅 위로 쓰러졌다.
하지만 언젠가는 일어서, 다시 조각을 찾아 나설 것이다.
기억들은 이 세계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끝의 순간. 그 너머까지,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소녀들은 나아갈 것이며,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잊지 않으리라.
끝.
운명 거부하기 | |
{{{#!folding [펼치기 / 접기] 마지막 꿈 One Last Dream | > 먼지와 피로 덮인 히카리가 외로이 앉아있어. 순전히 자신의 잘못으로... 자기 연민으로 말미암아 파멸을 맞이한 소녀. 손에 얼굴을 파묻은 히카리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건 바로 너. 죽어버린 나의 분신이야. 너의 죽음, 아니, 이 모든 비극을 불러온 그 무심함이 다시 소녀의 마음속으로 비집고 들어가려 하고 있어. 붉게 물든 하얀 소녀도 알고 있을 거야. 이게 자신의 운명이라는 걸. 너를 죽이는 게, 자신의 운명이었다는 걸 말이야. 뻣뻣하게 굳어있던 히카리의 등이 조금 굽어. 이 세계, 아르케아에 팽팽하게 돌던 긴장감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져. 안도감. 혼돈은 물러갔어. 이제 안심해도 돼... 하지만 나에게도 들리는걸. 이 상황을, 자기 자신을, 아르케아를 받아들이라고 히카리의 마음 속에 속삭이는 무언가가. ...하지만. “...타이리츠...” 히카리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너의 이름을 속삭였어. “그게 ‘이 세계’에서의 이름이라니, 대체 무슨 뜻이었어...?” 그리고 조용히 사색에 잠겼어. 그러자 다시 속삭이는 목소리가 찾아왔지. 원한다면 그 질문의 답은 언젠가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 세계는 기억의 보관소니까.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 점점 마음을 채워가는 무심함 밑에서 들꿇는 것은 격렬한 혐오. 자신을 향한, 끝없는 혐오. 당연한 일이야. 어떻게 이런 결말을 용납할 수가 있겠어?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지? 이게 히카리 자기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말이야. 히카리는, 이 세계에서 앞으로 보고 걸어갔던 히카리는, 도저히 이 결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히카리는 울렁이는 가슴을 붙잡고 어금니를 꽉 물었어. “...” 그러고는 발밑의 모래에 손을 파묻고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어. “아르케아... 너는 나를 치유하는 존재니?” 서늘한 감각이 사지를 타고 흘러오는 것이 느껴졌어. 팔의 긴장이 풀렸어. “...나는 알아.” 히카리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쉰 목소리로 속삭였어. “이 세계가 겁먹고 지치고 나약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낙원이라는 걸...” “...” 바싹 미른 입으로 침을 삼키는 시늉이라도 해보는 히카리. 천천히 눈을 뜨고, 모래에 파묻은 손을 꽉 쥐고 두 발로 일어섰어. 쥔 주먹 사이로 모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어. “내가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네가 날 위로하도록 두는 게 정답일까?” “아니... 절대로 아니야.” “이런 건 싫어...” “싫단 말이야...!” ... “으읍...!” 히카리가 갑작스레 앞으로 몸을 굽히며 한 손으로는 배를 부여잡고 다른 손으로는 입을 틀어막았어. 히카리의 거부 선언에, 세계가 또다시 히카리를 ‘기억’한 모양이야.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틀어막은 히카리가 갑자기 움찔했어. 나에게도 들려. 히카리의 귓속에서, 머릿속에서, 심장 속에서 날카롭게 울리는 소음이. 이제는 속삭임이 아니라 우렁찬 고함과도 같은 소음. 그 고요한 아우성이 히카리에게 묻고 있어. 결정하라. 네 마음이 원하는 것을 외쳐라. “내... 마음이 원하는 것을...?” 히카리는 자신의 마음이 가라는 대로만 움직이는 소녀였어. 이 세계에서 눈을 뜨기도 전부터 말이야. 그 결과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지. 본능일까? 히카리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걸까? 히카리의 전생은 어땠지...? 하핫... 난 별로 궁금하지 않아. 그저 히카리의 새로운 ‘마음’이, 이 모든 일을 한순간에 없었던 일로 하려는 게 조금 웃길 뿐. 얕은 숨을 내쉬며,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히카리가 내뱉은 ‘답’은 아주 명료했어. “나는... 되돌리고 싶어.” “타이리츠를 되살려야만 해.” “이 세계는... 엉터리야 이런 세계 따윌 위해 내가 죽을 것 같아? 다른 사람이 죽도록 내버려 둘 것 같아?” “아니! 절대로! 무슨 짓을 해야 하든. 무엇을 포기해야 하든.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히카리가 손에 꽉 쥐고 있던 모래를 흩날리자 공중에서 모래알이 반짝거렸어.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 결말을 바꾸고...!” 세계의 심장이 요동치며 히카리의 목소리를 묻었어. 아르케아는 히카리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 절대로.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 세계의 정신이, 의도가, 지식이 히카리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전신에 울려 퍼졌어. 너는 죽을 수 없다. 너는 살아가기를 택했고, 살아가는 것이 너의 운명이다. 히카리는... 이미 그걸 알고 있었지. 마음속으로부터 죄책감과...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이 차올라 눈물이 고였어. 하지만, 그 눈물이 흐르기 전에 세계의 심장이 또다시 고동쳤어. 아르케아가 말하기를, “죽지 말아라.” — “다만, 끝을 맺어라.” 히카리는 입술을 깨물었어. 눈물이 넘쳐흘러 뺨을 타고 내려갔어. 고개를 끄덕였어. 또다시 심장이 뛰었어. 그리고... 아르케아의 빛이 서서히 멎어갔어. 그리고 그 빛은 히카리에게 흘러들어갔어. 팔과 다리로, 심장으로. 몸을 가누기 버거워진 히카리는 거의 쓰러질 뻔 했어. 히카리는 눈앞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는 수많은 기억들을 무시했어. 오로지 생명이 꺼진 너의 주검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히카리는 이제 자신의 소명만을 마음에 담았어. 내가 아래로 끌려 내려가는 것이 느껴져. 아래로, 아래로, 아래로... 네가 죽어버린 그 세계로. ... 히카리는... 자기가 뭘 포기하고 있는 지 알고는 있는 걸까? 이런 방식으로 ‘끝을 맺는다’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고 있는 걸까? 난 모르겠어. 너도 모르겠지. 그 세계로 끌려간 나는... 여전히 이 모든 걸 기억하고 있을까? 이해하고 있을까? 아니... 아마도 아니겠지. 하지만... 히카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신에 차있어. ... 히카리의 마음이, 심장이, 앞으로 일어날 일에서 모두를 인도할 등대가 될 거야. ...나는, 저 등대를 믿어. 너도 그렇지? 결국 네가 옳았으니까... 히카리와 그 아이는, 다른 사람이라는 걸. ...‘타이리츠’... 이제 작별이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네 곁을 떠나지는 않을 테니까. 히카리의 의지에 따라 또다시 하늘이 무너져내리며, 대지가 치솟았다. 세계가 스스로를 희생해 타이리츠를 되살리기 위해 움직였다. 살아있는 영혼이 진정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살아있었을 적의 모습을 한 모조품일 뿐. 그러나 빛의 소녀와 대립의 소녀가 지닌 영혼은... 평범하지 않았다.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펼쳐지고 있다. 분명, 세계가 크게 망가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르케아는 있는 힘을 다해 모든 것을 다시 써 내려가고자 할 것이다. 그러려면 검은 옷을 입은 소녀의 ‘첫 번째 영혼’과, 소녀의 두 번째 삶이 남긴 영혼의 조각이 필요하다. 조각난 영혼의 외침을 들은 완전한 영혼이 저 너머의 공간에서 이 세계를 향해 재빠르게 날아왔다. 히카리의 주변으로 소용돌이가 솟아올라 빛과 그림자의 격류로 현실의 장막을 찢어발겼다. 아르케아가 타이리츠를 ‘기억’했다. 그리고 히카리의 명령에 따라 그녀의 기억이 유리가 되어 쏟아져내렸다. 순식간이었다. 마치 항상 그곳에 있었다는 듯이. 정말 가능할까? 정말로 이 세계가 찢어진 두 영혼을 다시 합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칙 따위 무의미하다. 타이리츠의 기억으로, 히카리의 의지로, 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유리 조각들이 빛을 반사하며 소용돌이를 뚫고 나타났다. 고통을 머금고 이 땅 위를 거닐던 소녀가 있었다. 사무치는 비애에 파묻혀 땅을 기던 소녀... 그럼에도 그녀는 구원을 찾아 앞으로 나아갔다. 구원을 찾아, 자유를 찾아. 소녀가 바라던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진정으로 미소를 지을 이유였다.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세계를 뒤집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와 맞서 싸운 소녀. 히카리의 눈앞으로 기억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히카리는 자신의 기억을 되돌아볼 틈새도 없었다. 검은 소녀의 눈물방울이 폭풍 속으로 섞여들어갔다. 대부분의 고통은 이미 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빛의 영혼으로서, 히카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타이리츠가 겪은 절망의 기억 중 짧은 것들만을 모으는 것이 고작이었다. 긴 기억들은, 히카리의 손을 거부하고 멀어질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깊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타이리츠가 겪은 일을 알고 있는 히카리는, 슬픈 기억들을 놓아주기로 했다. 자신이 타이리츠와 만났던 순간의, 찾지 못할 그 기억과 함께. 새로이 탄생하는 타이리츠는 역경의 늪에서 빠져 겪은 절망은 모르지만, 자신이 투쟁과 대립 한가운데에서 태어났으며, 살아갔던 존재라는 것은 기억할 것이다. 히카리의 몸에서 새로운 힘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힘을 가득 담은 빛기둥에 네 개, 땅에서부터 솟구쳐올랐다. 마침내 강림한 검은 옷의 소녀로부터 히카리를 지키기 위해 이 세계가 불러낸 것이었다. 처음엔, 히카리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죽음 그 자체의 현현과도 같은 모습으로, 완전한 영혼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것은 천천히 가까워지더니 유리의 소용돌이로 흘러들어갔다. 그 순간 마침내 히카리는 이해했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서, 부드럽게 영혼을 유리 조각으로 인도했다. 그렇게 ‘첫 번째’ 타이리츠의 길 잃은 영혼은 새로이 태어날 타이리츠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두 번째’ 타이리츠의 영혼은 그 몸을 안정시켰다. 히카리의 발 밑에서 땅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히카리는 최대한 쓰러지지 않으려 애쓰며 두 손으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지휘했다. 이 세계가 격통에 내뱉는 천둥과 같은 곡성을 들으면서도, 새하얀 소녀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리고 소녀는 마음속으로 흔들리지 않는 그 맹세를 다시금 상기했다. 히카리는 이 세계를 이루는 핵조차 비틀어 죽어버린 여신의 부활에 이용했다. 그렇게, 마침내, 절대적이었던 법칙이 다시 쓰인 순간, 히카리의 고요하지만 명징한 명령으로, 세계의 핵에 새로운 죽음이 도달했다. 압도적인 빛과 그림자의 파동과 함께, 아르케아가 죽어가기 시작했다. 소원의 후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하늘이 격류와 같이 흐르고,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빛은 모조리 히카리에게 흘러들어갔다. 히카리는 공중에 떠 찬란하게 빛나는 타이리츠의 몸에 영혼을 불어넣고,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느끼며, 온 세계의 생명을, 대지의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히카리는, 아르케아를 포기했다. 멎어가는 햇빛 아래, 두 소녀의 머리 위로 구름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반쪽짜리 밤하늘 아래, 한 귀족이 갈라지는 대지 위에 서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자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별들이 보였다. 상냥하게 돌보는 소녀, 방랑하며 탐구하는 소녀, 관찰하고 염원하는 소녀... 행복한 영혼, 굶주린 영혼, 야망하는 영혼... 전쟁을 울부짖는 심장, 노래를 부르는 심장... 모든 생명이 머나먼 한 장소로 모여드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종말을 보았다. 이윽고... ...히카리는 마지막 생명의 조각이 타이리츠에게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녀의 몸이 천천히 땅으로 내려앉고, 히카리의 손에서 생명의 기척이 사라져갔다. 그리고... 하얀 옷을 입은 소녀는, 자신의 일부가 이 급류에 섞여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무런 걱정 따위 없었다. 몰아치던 바람이 멎고, 아르케아의 하늘에 평온이 찾아왔다. 현기증을 느낀 히카리는 쓰러지기 전에 자세를 고쳐잡았다. 어떻게든 진정하려 했다. 자신이 지금 한 일이 무엇인지, 다시금 곱씹으려 했다. 하지만 그리 할 수 없었다. 온 신경이, 단 한 가지에 쏠려있었기 때문이었다. 타이리츠는 정말로 되살아난 건가? — 하늘에서 또다시 먼지가 불어와 내려앉았다. 검은 소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끝이 다가온 때에,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곁에 그 누구도 없었다는 것을, 그저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을 뿐이라는 것을. 천천히 눈을 뜨자... 그러한 기억들은, 연기처럼 서서히 사라져갔다. 타이리츠의 눈썹이 움찔거리는 것이 보였다. 히카리는 주먹을 꽉 쥔 채 숨을 내쉬려 했지만 공기가 목에 걸려 잘 빠져나오지 않았다. 아주 화려한 소란을 불러일으킨 것치고는, 히카리가 한 일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너무나도...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게 희망과 노력뿐이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히카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의심을 떨쳐내고 덜덜 떠는 다리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타이리츠의 눈이 완전히 뜨여, 한번 눈꺼풀을 깜빡이더니, 다시 감기기 시작했다. 히카리는 재빨리 달려가 무릎을 꿇고 타이리츠를 껴안았다. “으, 으응?! 지금 뭐 하는...?”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강하게 자신을 껴안는 히카리를 보고서, 타이리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히카리가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타이리츠의 품에 얼굴을 품고 하염없이 울었다. 검은 옷의 소녀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채, 그저 히카리를 바라보기만 했다. 대지에 수많은 균열이 새겨졌다. 영원히 하늘에서 내리쬐던 빛은 멎었다. 세계가 상처를 입었다. 그럼에도 히카리가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눈앞에 있는 검은 옷의 소녀. 타이리츠가 움찔대는 히카리의 등 위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종말의 때에, 두 소녀는 말없이 서로를 위로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히카리가 끝없이 사과했다. “뭘 잘못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타이리츠가 대답했다. “결국 바로잡았잖아? 그런데 뭘 사과하고 있어?” 여전히 팔은 타이리츠를 껴안은 채로, 히카리가 몸을 들었다. 눈과 코가 새빨갛게 상기된 히카리는 비탄과 기쁨이 섞인 오묘한 감정을 품고 타이리츠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다시 타이리츠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타이리츠는 부드럽게 히카리를 안아주었다. 조용한 풍경 속, 검은 옷을 입은 소녀는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마음껏 울도록 두 팔로 안았다. — 회색빛이 되어버린 세계로 손을 맞잡은 두 소녀가 여정을 떠난다. 처음엔 타이리츠가 앞서갔으나, 얼마 안 가 두 사람의 보폭이 맞춰졌다. 타이리츠는 자신의 비극을 기억하지 못했다. 적어도 가장 끔찍한 부분만은. 절망의 기억을 비추는 유리 조각들은 더 이상 타이리츠에게 이끌리지 않았다. 행복한 기억을 비추는 유리 조각들 또한, 더 이상 히카리의 주위를 맴돌며 춤추지 않았다. 검은 옷의 소녀는 어둠의 일부분을 잃었으며, 하얀 옷을 입은 소녀와 세계는... 계속해서 빛을 잃어갔다. 하지만... ...이제 히카리는, 유리 조각의 빛 없이도 찬란한 미소를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소녀들은 절벽의 끝으로 걸어가, 천천히 무너져내려가는 잊힌 기억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완전히 바스러져 무너지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소녀들은 오로지 서로만의 존재를 느끼며, 과거를, 기억을 놓아주었다. 타이리츠는 따뜻한 눈빛으로 조용히 히카리를 바라보았다. 언젠가 다른 삶을 살았을 때, 곧잘 짓던 표정이었다. 히카리는 그 얼굴을 보고 아주 간단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래’...?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 상관 없었다. 그들이 느끼는 ‘충족감’은 결코 흔들리는 일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히카리는 이 여정이 끝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놓인 길 위에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될 것이다. ...그 길을 걸으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을, 히카리는 천천히 받아들였다. 미래의 일을 그 누가 알겠는가? 히카리는 그렇게 되뇌이고, 눈을 감고 생각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예전에는, 미래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알았는가? 아니, 그저 앞만 보고 걸어갔을 뿐이다. ... 살기로 선택했다면, 살아가리라. 이 세계에서 살아가며, 많은 것을 보고, 모든 순간을 음미하며 내 것으로 만드리라. 히카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짐을 굳혔다. 히카리는 눈을 뜨고 숨을 들이쉬었다.[3] 아직 모르는 미래를 알리듯 불어오는 바람, 곁에 선 소녀, 만나지 못한 사람들, 가보지 못한 장소... 그 모든 것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다. 히카리는 타이리츠의 손을 잡았다. 여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에. |
Arcaea 받아들이기 | |
{{{#!folding [펼치기 / 접기] 완벽한 소망 A Perfect Wish | > 멀지 않은 과거... 어둡고 추운 어느 곳에... 텅 빈 황량한 대지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거뭇거뭇한 구름으로 들어찬 하늘 아래, 새로이 차갑고, 새로이 공허하게 된 대지가. 청록의 나뭇잎과 붉게 물든 꽃들은 회색빛으로 바랬고,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갔다는 유일한 증거인 발자국조차 하늘에서 내려온 새하얀 재에 덮여 사라져갔다. 아직 겨울은 오지 않았음에도, 모든 것이 얼어붙은 공간. 얼음과 재로 뒤덮인 대지 위에 한 소녀가 무릎을 꿇고 구름 사이로 삐져나온 빛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크게 뜨고 빛을 응시하는 그 눈에 비친 것은, 천사였을까, 신이었을까. 돌아갈 집도 없고, 부모님은 죽었다. 보호자라고 불릴 법한 사람은 모두 다 죽었다. 동료였던 견습 조형자들도 모두 죽었고, 그녀를 미워하던 사람들조차 죽어버렸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손에 쥔 유리 조각. 자신의 집에서 가져온 깨진 창문의 조각이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은 있었다. 소녀는 선택받은 특별한 아이였으니까. 어린 나이에 조형자 훈련을 헤쳐나온 영재니까. 일단 시도해보기만 하면 가능성은 있었다. 분발한다면… 시간을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넘어, ‘신’이라 불릴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이 사태를 막고 싶었다. 사람들을 되살리고 싶었다. 손에 쥔 유리 조각을 바라보며, 세상을 구하고 싶다는 소원을 마음에 새겼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의지만으로는 무(無)에서 힘을 창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 아무리 강인한 의지라도, 아무 짝에 쓸모가 없었다. 이를 깨달은 소녀는 울었다. 하늘에 머무는 신의 의지만이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신의 의지가 바란 것은 소녀와 소녀의 민족이 먼지로 사라지는 것이었으며, 그 바람은 눈 깜짝할 새에 현실이 되었다. 신의 손으로, 직접. 소녀는 유리 조각에 반사된 자신의 눈동자를 보았다. 곧 눈물이 번져 시야가 흐려졌다. 떨리는 입으로,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고통으로, 사무치는 무력함으로, 비애가 온 몸에 서렸다. 그 무엇도 의미가 없었다. 소녀가 해온 일들도, 지금 하는 일도. 그 무엇도. 천사가 강림하는 것을 본 흑발의 소녀는 고개를 속였다. 그 앞에 선 천사가 손을 들었다. 그렇게, 소녀는 죽었다. 소녀의 이름은 잊혀졌다. 자기가 왜 죽은 건지,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그 누구도 그 삶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의 순간, 또다른 누군가가 빈 소원이 소녀를 데려가버렸으니까. 그보다 조금 더 먼 과거... 따뜻하지만 어두운 어느 곳에... 잊혀진 이름의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를 사는 또다른 소녀가 있었다. 이 장소를 어둡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본인. 커튼을 치고 문을 잠근 뒤, 문고리 밑에 의자를 받친 풍경의 방. 그 방에서, 소녀는 침대 위에 앉아 눈을 뜨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자기 자신”에게 압도되어 있었다. 머릿속을 한 기억이 끝없이 맴돌았다. 계단 아래에서 들려오는 부모님의 선명한 목소리를 엿듣던 기억이. 악담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확실했다. 부모님이 소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 마음엔 무언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부모님조차 사랑할 수 없었다. 어느새 기억과 같은 계단 위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무언가가 난간을 놓고 대리석 바닥을 향해 뛰어내리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실패하면 어떡하지? 소녀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돌아가 다시 문을 잠갔다. 왜 나는 사라질 수 없는 걸까? 왜 홀연히 어디론가 떠나버릴 수 없는 걸까? 왜 이런 생각이 들까? 왜 내 마음은 이런 걸까? 왜 사라질 수 없는 걸까...? 손톱이 종아리를 파고들었다. 동공이 커지며 호흡이 빨라졌다.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고뇌하는 백발의 소녀는 신이었다. 하지만 고뇌의 이유는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이 아니었다. 소녀는 자신이 지닌 힘을 몰랐다. 마음 속으로 피난처를 바랬다. 그리고 그 소원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이루어졌다. “어딘가… 내가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 곳으로...” — 흑발의 소녀가 죽었다. 누군가가 빌었던 소원이 그 영혼을 불러냈다. 머나먼 세계, 또다른 현실에서, 더욱 강한 힘을 지닌 누군가가 빈 소원이. 백발의 소녀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했던 나머지 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데에 이르렀다. 의미 없는 이름을 지닌 세계, 아르케아를. 아르케아는 망자를 위한 안식처였다. 소원을 빌 때 소녀는 살아있었으나, 항상 ‘죽음’을 가까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이 세계의 창조에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 줄래야 줄 수도 없었다. 아르케아는 자신을 위해 빌었던 소원에 불과했으니까. 아르케아에 오게 되는 이들이 어떤 운명을 겪은 사람들인지 만약 알게 된다면, 소녀는 분명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르케아는 시공간을 넘어 수많은 세계에 손을 뻗었다. 그 세계는 살아있었다. 생각은 없을지언정, 죽은 자들과 생명을 나누기를 ‘원했다’. 아르케아는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자들을 마구잡이로 불러들였다. 현실을 잇는 봉합선 사이, 부드러운 자줏빛 별이 반짝이는 공간... ...수많은 영혼이 그물에 얽혀, 검은 지평선 너머 새롭게 만들어진 빛나는 세계로 옮겨졌다. 백색의 세계... 그 곳에서 아르케아는 각 영혼의 완벽한 복제품을 만들어 풀어놓고, 따스한 공간과 새로운 모습을 주었다. 영원을, 끝없는 삶을 관측하거나 다시 경험할 영원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의 창조자만큼은 구원할 수 없었다. 아르케아는 수많은 영혼의 복제본을 만들어 새로운 몸을 주고, 원본이 되는 영혼은 풀어주어 원래대로의 운명을 맞이하도록 두었다. 그러나, 후에 ‘히카리’로 알려질 사람의 영혼만큼은 거둘 수가 없었다.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없는 세계인 아르케아는,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든 최대한 비슷하게 복제하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아르케아는 끔찍한 비극에 젖은 영혼, 자신의 창조주와 비슷한 영혼을 발견했다. 그 영혼에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복제본을 만든 후 풀어주었음에도 다른 영혼과는 다르게 이 가짜 세계의 경계선을 건너지를 못했다. 어쩔 수 없으니, 그 영혼은 이 새하얀 대지에서 깨어난 자신의 복제본을 관찰하기로 했다. 타이리츠가, 무너진 탑에서 깨어났다. ー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두 영혼 중 하나가 아르케아의 모든 것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세계의 창조주가 돌아와, 다시 세계는 안정을 되찾았다. 아르케아는 존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위협을 느낀 세계는 창조주를 불렀고, 창조주는 그 부름에 답했다. 아르케아가 자신의 존재를 위협할 이변을 먹어치울 조각의 감시자를 만들어냈듯이... 그리하여 아르케아의 존재는 지켜졌다. 천 년 이상, 줄곧 존재했다. 스며들었던 붉은 피가 사라져 또다시 순백의 대지만이 남았다. 타이리츠의 몸은 불타 사라져버렸다. 만물에 따스함이 스며들었다. 하늘은 눈부시게 빛났다. 하얗게 반짝이는 무한의 대지가 다시 본 모습을 되찾았다. 실로 아름다운 세계였다. 끝없는 여정의 무대인 이곳에서 안식을 택한 소녀들이 대지를 수놓았다. 얼어붙은 시간 안에 갇혀, 영원히 이 망자의 세계를 바라보길 선택한 소녀들. 그들이 만약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있다면... 아주 머나먼 과거의 기억 뿐일 것이다. 분명 이게 더 나은 선택일테니까. 영원히 걸음을 이어가며 여러가지를 보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분명 이게 더 나은 선택일테니까... 저 소녀들은 행복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아르케아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 선택밖에 없었다. 이 세계는 아직 현실의 봉합선 사이에 갇혀있었기에, 이 곳에서의 탈출은… 아르케아의 바깥은… 아주 머나먼 곳에, 그 누구도 다시는 볼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쌍둥이, 검을 든 소녀, 여행자, 귀족, 노래하는 소녀... 모두가 천사의 상이었다. 아르케아의 유리 조각 또한 종종 안식을 취했다. 벽과 기둥을 따라 모여 거대한 형태를 이루곤 했다. 마치 수정처럼. ...마치 부식 얼룩처럼. 신이 관리하는 아름다운 세계. 그 위에서, 히카리는 모든 것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옛 세계가 잊어버린 모든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주 조그마한 따스함과 관심을 품은 눈으로 옛 세계의 기억들을 보았다. 그것은 바래고 무기력한 신에게 있어, 일종의 유희였다. 어쩌면... 자신은 변한 게 아닐까. 예전의 나보다 더 ‘높은’ 존재로. 히카리는 이 소중한 진실을 누군가 이해해주길 바랬다. 하지만 이해해주지 않는다 해도 상관 없었다. 그렇다면 여태껏 해왔던 것처럼 말없이 지켜볼 뿐일테니. 히카리는 조용히 소녀들을 지켜보았다. 저들에게 세상의 ‘전부’를 주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 ...히카리의 시야 바깥에서는, 한 철학자가 사역마와 함께 방랑하고 있었다. 히카리의 시야가 닿는 곳에서는, 뿔이 난 여자가 소중한 기억의 조각들을 돌보고 있었다. 오른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꽃이 핀 여자가 고요한 땅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다. 허황된 일이다. 아르케아는 이제 그저 허영에 불과했다. 하지만... 차라리 이게 낫다. 자신을 증오하는 세계에서 스스로를 경멸하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낫다.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를 사랑하며, 허황된 꿈에 굴복하는 것이... ...현실이란 어떻게 보든, 공허하고, 부질없고, 무의미한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최대한 많은 것을 얻는 것 뿐. 쾌락을 추구하고, 사랑을 꿈꾸고, 희망을 품고, 힘을 갈망하라. 그렇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면… ... 더이상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 히카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쟁취하고, 살아가고,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를 진실로 사랑하라. 천 년이 지나고, 또다시 천 년이 지나도, 삶에 의미 따위는 없다는 사실을… 사랑하라. 결국 현실에는 ‘끝’이 없는 법이니까. 아르케아는 더욱이, 기억을 담아두는 그릇에 지나지 않으니까. 보이지 않는 조용한 기억들을 담아두는 그릇.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지 않고, 그 누구도 모르며,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릇. 그리고 이 고요 속에 기억들은 살아갈 것이다. 무심한 신, 히카리가 구해낸 망자들의 영혼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떠올리지 못할 기억도, 느끼지 못할 감정도 없으니까. 이게 ‘전부’니까. 이 세계의 빛이 닿는 모든 것이, 빛이 내려준 전부니까. 과거의 삶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행복. 영원한 평온. 히카리는 아르케아를 사랑했다. 편애하지도, 재단하지도 않고 모두에게 평등히 베푸는 아르케아를. 그렇게 운명의 수레바퀴는 계속해서 돌아간다... ...그 어떤 운명도 기다리지 않는 미래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