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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09:36:30

Come on Come on 마산스트리트여

원곡
NC 다이노스의 팬이 만든 뮤직비디오

1. 개요2. 가사3. 여담

1. 개요

2007년에 발표한 노브레인의 정규 5집 '그것이 젊음'의 수록곡 중 하나이다.

노브레인의 보컬 이성우경상남도 마산시 출신이라서 자작곡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곡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게 된 계기는, 마산시와 통합된 경상남도 창원시를 연고지로 두고 구마산 지역에 홈구장을 둔 KBO 리그NC 다이노스가 팀 응원가로 쓰게 되면서부터이다.

한때는 NC 다이노스를 대표하는 응원가로 야구팬이 직접 뮤비를 만들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높은 지지도를 보이는 노래였지만 2019년부터 후술하는 이유로 사용하지 않았으나, 2021년에 2020년의 우승을 기점으로 다시 부활해 사용되고 있다.

2. 가사

내가 태어난 그 곳 마산 스트리트
바닷바람 거친 항구의 도시
특별한 것도 정 갈만한 구석 없어도
난 그 곳을 사랑하네

콜라빛나는 바닷물[1][2]이 흘러흐르고
아줌마의 구수한 마산 사투리
정든 그 곳을 등지고서 난 떠나왔네
꿈을 가득 안고서

흘러가는 한강의 강물이여
마산항으로 내마음 보내다오

Come on! Come on! 마산 스트리트여!
Come on! Come on! 나의 나의 친구여!
Come on! Come on! 마산 스트리트여!
뛰어올라라!

일가 친척 하나 없는 서울로 와서
집도 절도 없이 떠도는 나날
싸구려 낡은 나의 기타 함께라면
난 어디든 즐거웠지

몇년만에 찾아간 마산 스트리트
내가 커온 중앙동[3][4] 나의 집은
아버지의 눈물과 함께 날 떠나갔네
나의 추억과 함께

달려가는 서울행 열차여 워어어
흘러내린 내눈물 닦아주오

Come on! Come on! 마산 스트리트여!
Come on! Come on! 나의 나의 친구여!
Come on! Come on! 마산 스트리트여!
뛰어올라라!
뛰어올라라! Ah Ha!


흘러가는 한강의 강물이여 워어어
마산항으로 내마음 보내다오

Come on! Come on! 마산 스트리트여!
Come on! Come on! 나의 나의 친구여!
Come on! Come on! 마산 스트리트여!
뛰어올라라!

Come on! Come on! 마산 스트리트여!
Come on! Come on! 나의 나의 친구여!
Come on! Come on! 마산 스트리트여!
뛰어올라라! 직인다!![5][6]

3. 여담



[1] 바닷물이 콜라빛이 나는 이유는 예전 산업화로 인해 마산항 바닷물이 더러웠기 때문이다. 실제 '마산만을 살립시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공익 캠페인이 지역 내에서 전개된 적도 있었다. 현재는 시에서 수질 오염으로 폐쇄된 해수욕장을 재개장(!)할 정도로 수질 개선 사업을 많이 한지라 깨끗하다.[2] 모 시의원이 이 가사가 지금 마산이랑 맞지 않다면서 당분간 NC 다이노스창원시가 협의하여 사용하지 않다가 2015년 9월 13일부터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3] 실제로는 커온 중앙동이라고 불렀으나 가사집에도 '거주하던'으로 씌여있다. 기타리스트가 가사를 듣고 가사집에 받아적어서 나온 실수라고 함.[4] 실제로 보컬 이성우가 살던 중앙동 집이 몇년만에 찾아가니 없어졌더라..는 사연이 담긴 가사라고 본인 SNS에 밝힌 바 있다.[5] '죽여 준다'의 동남 방언이다.[6] 야구장 전광판에는 '쥑인다!'로 자막이 나온다. 마산아재도 쥑인다고 부른다! 그리고 이건 쥑인다라고 불러야 원래 느낌이 살아난다.[7] 2023년에도 여전히 '개사하면 좋겠다'며 비슷한 주장을 하는 일부 인사들이 있는데, 해당 노래는 원작자의 어린 시절 추억에 대한 노래이기 때문에 가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8] 서울의 찬가는 1969년에, 서울메들리로 쓰이는 이용의 서울은 1982년에 발표됐고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원곡이 1969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조용필이 독집 앨범에 실어 히트한 것이 1976년으로 알려져 있다.내 고향 충청도는 19세기에 지어진 구전 민요가 1970년대에 올리비아 뉴튼 존의 버전으로 국내에 보급됐고 1976년 조영남이 번안해서 발표했다. 김트리오의 연안부두1979년에 발표됐고 문성재의 부산 갈매기1982년, 김수희의 남행열차1986년에 발표됐다. 심지어 잘 부르지는 않지만 목포의 눈물1935년...[9] 오히려 이성우는 이 사건으로 피해를 봤다. 금전적인 이득은 어차피 없었다지만 본인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대중들이 자신의 노래를 그만큼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예술인으로서는 당연히 손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