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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30 15:11:16

M3 리/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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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dium Tank, M3
파생형 실전 운용국 미디어

1. 개요

M3 리의 실전 기록을 정리한 문서.

2. 제2차 세계 대전

2.1. 북아프리카 전역

파일:959036cc76e5e21b026c537f09b51aa4.jpg
리비아 트리폴리 근교의 영국 육군 소속 그랜트 IX 커맨드 "몬티"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
[1]

무기대여법으로 영국군에 지원된 M3 리, 그랜트들은 북아프리카 전역에 투입되자 순식간에 당시 독일 아프리카 군단에 소속된 독일 국방군 전차를 화력에서 압도했다.

M3의 도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영국제 전차들은 독일군 전차에 비해서 상당히 약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전차포3호 전차5 cm KwK 38이나 5 cm KwK 39보다 열세한 40mm 구경의 2파운더가 주류였는데, 개발 당시 철갑유탄이 존재하였으나 관통력이 낮다는 사유로 생산중지 당하고 내부에 아무런 작약이 없는 통짜 철갑탄으로만 탄약이 공급되는 바람에 대보병 능력은 제로에 가까웠고 대전차 능력도 신통치가 않았다. 그리고 바다사자 작전에 직면한 영국 본토의 위기 때문에 윈스턴 처칠의 명령으로 당장 생산이 가능한 2파운더를 고집하던 시기도 있어서 6파운더를 전차에 설치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따라서 화력 부족으로 고통받던 영국 전차병들은 "드디어 우리 전차도 75mm를 달았어!"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 정도이다.[2]

1942년 초에 200대의 그랜트 전차가 이집트의 영국 제8군에 공급되었으며, 그랜트를 주력으로 장비한 영국 제4기갑여단은 1942년 5월 가잘라 전투에 참가하여 활약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위에 언급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꽤나 성공을 거두었으나 이후 독일 아프리카 군단4호 전차 F2형이 장비한 7,5cm KwK 408,8cm FlaK을 앞세운 공세로 인해 화포의 위력과 사정거리면에서 독일군이 더 우월해지면서 점점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영국군이 75mm를 받아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순간이 독소전쟁의 여파로 4호 전차의 업건이 결정되면서 나치 독일의 4호 전차도 Happy time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2.1.1. 엘 알라메인 전투

파일:M-3Grants-E_014053.jpg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영국 육군 소속 M3 리 & 그랜트
파일:external/orig02.deviantart.net/on_commanding_an_m3_in_north_africa_by_epictones-d5vrkgy.jpg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상황을 묘사한 만화
75mm를 쏘고 있다. 37mm도 쏘고 있지만 엉뚱한 방향으로 돌아가 있다.[3]
브라우닝은 탄이 걸렸다.
나는 A-set에 "조종수, 전진!"을 외쳤지만
내 말이 안 들리는 조종수는 후진 중이다.[4]
포탑 위로 올라갔더니 50야드[5] 거리에서 전진 중인 적 전차 12대가 보이던 차에...
누군가가 치즈 샌드위치를 건네주더라.
- 켄 자일즈 중위(Lieutenant Ken Giles),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엘 알라메인 전투의 주역이 바로 이 전차였으며, 특히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그랜트 전차가 매복해 있다 독일 아프리카 군단 소속 기갑부대의 측면을 기습해 무려 49대를 격파한 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2.1.2. 튀니지 전투

파일:SC167328t.jpg
튀니지 전투 당시 젠두바에서 촬영한
미 육군 제1기갑사단 제2/13기병연대 D중대 소속 M3 리
[6]

튀니지 전투 당시 연합군의 주요 전력 중 하나로 사용되었다. 해당 시기부터는 M4 셔먼이 주력의 자리를 이어받기 시작했지만 아직 숫자가 모자라서 혼성편제해서 사용하였다.

2.1.3. 이탈리아 전선

파일:Grant Command Tank in Sicily.webp
이탈리아 전선 당시 시칠리아에서 작전 중인
영국 육군 소속 그랜트 커맨드

이탈리아 전선 당시, 소수의 단차가 투입되어 사용된 기록이 남아있다. 해당 시기부터는 M3 리는 2선급 전차로 분류되지만 아직 1선에 있는 전차는 소량이 사용중이었다.

2.2. 서부전선

2.2.1. 오버로드 작전

파일:M31 Normandy.jpg
코브라 작전 당시
프랑스 육군 소속 M31B2 TRV

오버로드 작전 당시 프랑스 도서 지역을 독일군으로부터 탈환하는 세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소수의 M31B2가 자유 프랑스 육군 소속으로 투입되었다.

2.2.2. 독일 본토 진격전

파일:M31_1945.png
독일 본토 진격전 당시
미 육군 제899대전차대대 소속 M31B1 구난전차

M3 리는 1944년에 서유럽전선에서는 사용부적합병기로 판명되어 투입되지 않았지만, 이를 베이스로 하여 제작된 M31B1, M31B2가 독일 본토 진격전 당시 각 전차 대대에 배속되어 격파되거나, 피격당한 전차들을 회수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2.3. 독소전쟁

파일:ww2_ussr_m3_lee_late.jpg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 육군 소속 M3 중형전차[7]

독소전쟁 당시, 1942년 북아프리카 전역 이후부터 2선급 장비로 돌려진 M3 리 다수가 소련으로 공여되었으며, 1944년 이후로 일선에서 은퇴하여 2선급 장비로 돌려졌다.

2.3.1.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파일:Kharkov_M3_knocked_out.jpg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당시 격파된 소련 육군 소속 M3 중형전차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당시, 소련군의 M3 리는 데뷔전을 치렀으나 바르벤코프스키 다리를 방어하는 임무에 실패하여 다수가 격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2.3.2. 스탈린그라드 전투

파일:Don_front_1942_12_M3_lee.jpg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돈 전선으로 이동 중인
소련 육군 제241전차연대 소속 M3 중형전차 네임드 차량 "스탈린을 위해!"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벌어졌던 돈 전선에 소련군 소속으로 다수의 M3 리가 투입되어 전투를 치렀다.

2.3.3.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파일:1943_bryansk_M3_Lee.webp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당시 브랸스크 전선에서 격파된
소련 육군 소속 M3 중형전차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당시 소련군 소속으로 다수가 투입된 기록이 남아있다.

2.3.4. 쿠르스크 전투

파일:Soviet_M3_Lee_tanks_of_the_6th_Guards_Army_Kursk_July_1943.jpg
쿠르스크 전투 당시
소련 제6근위군 산하 제193독립전차연대 소속 M3 중형전차 소대

쿠르스크 전투 당시에도 소련 제6근위군 산하 소속으로 다수의 M3가 참전하였다.

2.4. 태평양 전쟁

파일:M3 burma.jpg
태평양 전쟁 당시
영국 육군 소속 리 I 네임드 차량 "칼레도니안"

태평양 전쟁 당시, 상술한 유럽 전선에서의 도태 이후 태평양 전쟁의 영연방군 소속으로 투입되어 보병을 지원하는 보병전차로서 훌륭하게 역할을 수행했다.

2.4.1. 동남아시아 전역

파일:A_Lee_tank_being_loaded_onto_a_pontoon_ferry_by_men_of_the_2nd_Division_before_crossing_the_Irrawaddy_river_at_Ngazun,_Burma,_28_February_1945._SE3155.jpg
동남아시아 전역 당시
버마의 영국 육군 산하 제2사단 소속 M3 리
[8]

동남아시아 전역에서는 영연방군이 주로 사용했는데 험지돌파력이 떨어지지만 높은 차체는 오히려 수풀이 우거진 동남아시아에서 다른 전차들보다 나은 시야를 확보해 주었고, 차체에 붙은 75mm 포는 "초목을 제거하는데" 쓸모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일본군 전차는 하고, 치로, 치하와 같은 경장갑에 빈약한 화력을 가진 전차뿐이라 차체에 장착된 75mm 주포로 초목을 제거하면서 동시에 포탑에 달린 37mm 부포로 일본군 전차도 제거해주는 일도 많았다. 또한 보병이 공격하기 어려운 진지나 거점공격에도 활용되었다.

일반적으로 37mm 구경의 소구경 대전차포 계열의 대전차화기는 2차대전 중반인 1942년부터는 서유럽이나 소련에서는 1선급 대전차화기의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1선에 배치한 하고, 치로, 치하의 경우에는 가장 두꺼운 장갑을 가진 치하가 고작 25mm 경사장갑이 전면장갑이고 하고같은 경전차는 12.7mm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에게 정면장갑이 관통될 수준으로 장갑 방어력이 약하다. 따라서 M3 37mm 대전차포 계열의 강화된 37mm 계열의 부포를 가진 M3 리는 부포만 사격해도 500m에서 61mm의 장갑을 관통하기 때문에 충분하게 당시에 일본군이 1선에 배치한 전차들을 관통 및 격파가 가능하다. 일본군의 전차 중에서 M3 리의 부포를 막을만한 전차는 치헤부터인데 해당 전차부터는 일본 본토에서 결호작전용으로 대기중인지라 실전을 겪지 못했으므로 M3 리와 전투할 수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군이 1선에 배치한 전차들은 워낙 내부 공간이 협소한 관계로 장갑을 관통하면 전차 승무원 중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고 내부 시설물이 박살나는 경우가 흔하며 M4 셔먼의 습식 탄약고처럼 유폭을 방지하는 시스템이 없고 좁은 전차 내부에 탄약이 꽉 들어찬 관계로 유폭할 확률이 상당히 높다. 그리고 표면경화장갑을 사용하였기에 장갑관통시 유리가 깨진 것처럼 장갑 파편이 대량으로 발생해서 전차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그래서 유럽이나 북아프리카에서는 대보병 능력이 없다시피하고 대전차 능력도 신통치 않았던 2파운더가 그렇게 욕을 먹던 구식 통짜 철갑탄을 사용해도 충분히 일본군의 전차를 격파할 능력을 보유해서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시아와 태평양에서 1선급 대전차화기로 사용될 정도였다.[9]

만일 행운이 발생해서 37mm 부포 1발을 맞고 관통되었으나 격파되지 않고 버티는 일본군 전차가 발생했다고 해도 이미 전차 승무원이 부상을 입거나 내부 시설물이 박살나서 전투불가능한 경우가 거의 100%이며 이런 경우에는 빠르게 속사가능한 37mm 부포를 몇 발 더 쏴주면서 차체도 돌리기 시작해서 마무리 타격으로 차체의 75mm 주포로 사격해서 일본군 전차를 완파시키면 된다. 따라서 1944년에 유럽전선에서 사용부적합병기로 퇴출된 M3 리와 그랜트는 일본군 상대로는 종전까지 사용되게 된다.

일본군은 효과적인 대전차 수단이 별로 없었기에 M3를 상대로 처절한 육탄공격을 감행했다. 특히 임팔 작전 당시 영국군 소속 제3소총기갑연대의 M3 그랜트들을 막기 위해 일본군은 영국군으로부터 노획한 M3 스튜어트까지 동원해야 했다.

2.4.2. 임팔 작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mphalgurkhas.jpg
임팔 작전 당시
인도 제국 육군 소속 M3 리와 보병들

임팔 작전 당시, 고질적인 문제점을 가졌음에도 일본군을 압박했으며 영국군으로부터 노획한 스튜어트 전차와 95식 경전차 하고로 이루어진 14 기갑연대에 큰 피해를 주었다.

2.5. 계속전쟁


파일:Jatkosotta_Soviet_91_tank_brigade_M3_medium.jpg
계속전쟁 당시
카렐리야의 소련 육군 제91독립전차연대 소속 M3 중형전차

계속전쟁 당시 소련군 산하 제91독립전차연대 소속으로 다수의 M3 리가 투입되었다.

3. 냉전

3.1. 인도차이나 전쟁

3.1.1.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파일:Indochina_war_Knocked_out_M31_French.jpg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격파된 프랑스 극동 원정 군단 소속 M31B2 구난전차, 1952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프랑스 극동 원정 군단 소속으로 M31B2 구난전차 소수가 투입되었으나 이 중 1대가 베트민이 설치한 대전차지뢰로 인해 격파되는 피해를 입었다.

프랑스군의 M31B2는 직접적으로 전투를 치를 수는 없었지만, 구난전차답게 고장난 프랑스군의 전차를 빠르게 회수하는 활약을 했다.


[1] 1943년 1월 27일 촬영된 사진이다.[2] 흔히 미 육군의 2차 대전 교리가 아군 전차가 적 전차와 싸우는 것을 피하고 구축전차가 대신 싸우는 식이라는 것이라고 아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 나와 있듯이 차체에라도 무리하게 75mm를 장착한 이유가 전차 대 전차로 싸우기 위해서라는 좋은 반증이다. 보병지원용이라면 4호 초기형처럼 포신이 훨씬 짧은 물건으로도 충분하다. 연합군 입장에서는 보병지원임무가 바로 대전차 임무 수행이다.[3] 전차장 입장에서는 난감한 상황과 몸개그가 따로 없었겠지만, 기관총 포탑을 겸하는 큐폴라(차장용 전망탑)와 37mm 부포탑이 따로따로 회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다.[4] 영국군 전차가 사용하던 No.19 무전기에서 A-set은 연대 무전망이다. B-set이 소대망이고 IC가 인터컴 설정. 즉 인터컴이 아닌 연대망에 대고 외치고 있으니 조종수에게 전차장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게 당연한 상황이다.[5] 45.72m로 말 그대로 적 전차가 코앞까지 접근했단 이야기다.[6] 1942년 11월 23일 촬영된 사진이다.[7] 뱌지마 시를 해방한 직후 촬영된 사진이다.[8] 1945년 2월 28일 촬영된 사진이다.[9] 전차가 장갑관통을 당해도 살아남는 경우는 포탄의 관통력이 매우 높아서 과관통 발생 + 전차 내부 공간이 넓음 + 포탄이 내부의 빈 공간만 통과함 등의 행운의 연속이 발생해야 한다. 일본군이 1선에 배치했던 전차들은 그래도 약간의 장갑이 있어서 37mm로는 과관통 나는 것이 상당히 힘들고 내부 공간이 매우 좁아서 빈 공간이 없다시피하므로 이런 행운이 불가능하다시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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