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2파운더 포의 저화력에 시달리던 시달리던 영국군에게 공여되었는데, 무려 300대라는 압도적인 수량으로 화끈하게 공여되며 영국군은 이에 크게 만족하여 사용하기 시작했고,[1] 독일군의 포를 무자비하게 튕겨내며 거침없이 진격하며 전투가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가게 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일부 차량이 손실되었지만 상륙작전이 성공하며 프랑스에 진입하게 되었으며, 이때 진행된 코브라 작전에서 M4A1 (76) W가 실전을 치르게 되었다.
또한, 이때 프랑스군에게 넘겨졌던 M4A1들도 가세하여 프랑스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데에 영향을 끼쳤다.
용기병 작전 당시의 미 육군 소속 M4A1 DD, 1944년 8월 15일
미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진행된 코브라 작전에서 76mm 셔먼이 활약하며 미 군부에서도 적극적으로 76mm M1A1 대전차포로의 업건을 추진하며, 이전과 달리 M10 GMC 급으로 고화력을 지니게 된 M4A1들은 이전까지 전투력에 있어서는 상당 부분 우위에 있던 장포신 탑재 4호 전차(G, H, J형)와 비교하자면 전투력, 소프트스펙 모든 것을 상회하였으며, 5호 전차 판터나, 6호 전차 티거와도 비등비등하게 대결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져, 독일 기갑군단의 악명을 꺾는데 일조하게 되었다.
미 육군 제3기갑사단 제32기갑연대 제3대대 1중대 소속 M4A1 (76) W 네임드 차량 "기분대로 (IN THE MOOD)"[6]
그리고 이 시기, M4A1 에이스도 생기게 되는데, 그 이름하야 라파예드 G. 풀이며, M4A1 1대, M4A1 (76) W 2대를 사용하여[7] 전차 12대, 장갑차량 246대, 도합 258대의 독일 차량을 격파하였는데, 이는 2차 세계 대전 미군, 나아가서 연합군 소속 전차장 중 기갑장비 파괴수로는 1위일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하였다.
추가로 그는, 에이스가 된 원인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M4 셔먼 시리즈 전체에 장비된 "자이로 주포안정기"를 하나의 비결로 꼽았는데, 이에 대해서 그는, 적 전차는 사격 시 무조건 정지해야 했던 것에 반하여, M4A1은 주포안정기를 작동시켜 기동간 사격으로 적이 정지하고 포를 조정하는 사이 먼저 선타를 날려 격파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독일 본토 진격전에서 M4A1의 교전 기록중 특이한 사례로는 셔먼 1개 중대와 반궤도 장갑차에 탑승한 보병 1개 중대, 3대의 M36 GMC 대전차 자주포로 구성된 웰본 기동부대가 제507중전차대대 산하 3중대 소속 티거 2 10대와 지근거리에서 조우해 전투를 치른 사례로, 이때 미군은 엄청난 손실을 입었지만, 특이한 점은 이 전투에서 3대의 티거 2가 손실되었다는 것이다.[9]
나머지 격파된 한 량의 경우, M4A1 (76) W가 격파한 것이 확인되었는데, 티거 2들이 셔먼 중대를 유린하는 동안, M4A1 (76) W 한 량이 행렬에서 벗어나, 아군 행렬 가운데 지점의 도로에서 약간 벗어난 작은 회벽 농가 건물 뒤로 엄폐했다.
때 마침 한 량의 티거 2가 후면을 내주고 있던 것을 발견한 M4A1 (76) W의 전차장은 엔진룸 쪽으로 포를 회전 시키라고 명령한 후, 티거 2의 엔진룸을 강타하여 이를 격파하는데 성공했지만, 곧바로 다른 티거 2에 의하여 격파되고 말았다.
비록 활약을 한 이후 바로 격파되고 말았지만, 이 용감한 M4A1 (76) W가 격파한 티거 2는 놀랍게도 미 제3기갑사단장인 모리스 로즈 육군 소장을 전사하게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티거 2였다고 한다.[10]
이후에는 일명, "베를린 익스프레스"라고 불리는 독일 본토 진격전에 참전, 쾰른 등의 대도시에서의 독일군의 발악을 뚫고 기어코 라인 강을 건넌 후 엘베강에서 소련군과 조우 후 나치 독일을 패망시키는 데에 큰 획을 그었다.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며 파키스탄군의 주력 전차로 사용되었으며, 인도군의 센추리온 전차에 맞서 싸웠다.
켐 카란 전투 당시, "마지 카딤 후산" 전차장이 지위하는 M4A1E6 공병전차 708호차 한 량이 인도군의 센추리온 3대와 맞닥뜨렸는데, 놀랍게도 그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전차를 지휘하며 센추리온 3대를 짧은 시간 내에 단신으로 격파하는 대활약을 해낸 기록이 남아있다.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통칭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에도 파키스탄군의 주력 전차로 등장했다.
이 때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 당시 인도군에게 노획된 M4A1E6도 인도군 측으로 전쟁에 동원되었으며, 이밖에도 전시 중 몇몇 차량이 인도군에게 노획되어 방글라데시 육군에게 넘어가 방글라데시군과 인도군도 M4A1E6로 무장하여 모두 M4A1E6로 무장한 상태에서 같은 전차끼리 전투를 치르기도 하였다.
초창기 이스라엘 독립전쟁 이후, 불안정한 평화의 시기에, 소련은 SU-100, T-55, IS-3, T-34-85 등의 다수의 차량들을 이집트나 시리아 등에 공급하면서, 이스라엘을 서서히 압박하고 있었다. 이스라엘군의 상황은 매우 암담했는데,이스라엘 독립전쟁 당시 임시로 사용했던 야지 개조형 셔먼들은 30대 중 겨우 15대 남짓만 살아남았으며, 이 마저도 아랍 연맹군의 강력한 전투 차량들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것이 뻔하였다.
따라서 서방세계에서는 중동의 최전선인 이스라엘을 중무장하기 위하여, 프랑스와 벨기에 등의 나라에게 부탁하여 M4A1 (76) W HVSS와, M4A1 (76) W을 판매할 것을 요청했는데, 이를 프랑스, 벨기에 양국이 허락하며 M4A1 (76) W HVSS와 76mm 버전은 이스라엘이 소유한 최초의 진정한 전차가 되었다.
2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의 76mm M4A1들은 M-50과 함께 시리아군의 4호 전차와 이집트군의 T-34-85와의 싸움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며 대활약을 하였고, 이는 이스라엘이 M4A1을 주력 전차로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65년 기존의 76mm 장착형 M4A1과 M4A1E8가 노후화되고, 슬슬 요르단 등의 나라에서는 미국제 MBT인 M47 패튼과 M48 패튼으로 무장하며 군사력의 격차가 나기 시작하자, 이스라엘은 때마침 프랑스에서 부르주 조병창이 개조한 M4A1 (CN-105-F1)의 라이센스를 사들여 무장하기 시작했고, 이를 본격적으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3차 중동전이 발발하며, 전장에 등장한 M-51은 당시 최신예 MBT인 T-55를 무자비하게 격파하면서 그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기존의 76mm M4A1, M4A1E8들도 매우 분전했는데, 특히 예루살렘 전투에서 스코푸스 산 인근과 예리코 인근에서 이스라엘 공수부대를 지원하며 큰 도움이 되었고, 끝내 공수부대원들이 예루살렘을 탈환하며 1,900년만에,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1978년, 이디 아민을 쿠데타로 축출하려는 세력이 있었으나, 일이 실패로 끝나자 탄자니아 남부쪽으로 도망쳐서 이디 아민의 신경을 거스르게 되었는데, 이 것 때문에 열이 받을대로 받은 아민은 정말 뜬금없게도 탄자니아를 침공하기로 결정한다.
아민은 국영 언론이 우간다의 영토 주장을 강조하기 시작하도록 지시했으며, 이후 작전명을 해방 작전으로 정하고서는 10월 10일, 선전포고도 없이 침공을 개시하게 된다.
작전은 처음에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싶었으나, 폭격을 맞고 놀란 탄자니아군이 즉각 중국에게서 사온 59식 전차를 타고 등장하자 결국 패주하게 된다. 당시 탄자니아군이 가진 59식 전차는 M-1 슈퍼 셔먼이나, T-34-85CZ보다 훨씬 우월한데다, 무엇보다도 수량이 겨우 한줌 남짓인 우간다군의 셔먼들보다도 많았기에 패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 동년 11월 탄자니아에 대하여 반격을 했으나 오히려 안 그래도 부족한 애꿏은 M-1 슈퍼 셔먼 2대만 파괴되었으며, 계속 밀리는 전황속에 M-1 슈퍼 셔먼들은 파괴되기 일쑤였고 결국 1979년 6월 3일 탄자니아군이 우간다의 수도인 캄팔라를 점령하며 결국 패전하게 되었다.
1988년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몬테 카세로스 반란 당시에도 소수가 정부군 소속으로 사용되었다.
[1] 반면 이에 맞서 싸우는 독일군의 상황은 매우 안좋았는데, 당시 셔먼을 안정적으로 격파 가능한 유일한 전차였던 4호 전차 F2 (장포신형)의 배치수량은 겨우 30대 남짓으로 셔먼과 무려 10배 차이가 날 정도였다.[2] 프레스드 스틸 자동차 제작소에서 생산된 초기형이다.[3] 1943년 7월 10일에 촬영된 사진이다.[4] 1944년 8월 경 촬영된 사진이다.[5] 1944년 6월 9일 오마하 해변에서 격파되었다고 한다.[6] 하술할 라파예드 G. 풀의 탑승 차량이다.[7] 원래 M4A1에 탑승하고 있었으나, 독일군의 공격에 격파되고 M4A1 (76) W에 탑승하였다가 아군 P-38 라이트닝의 오폭으로 또 격파되고(...) 다시 같은 사양을 탑승했던 기구한 일화가 있다.[8] 우측에 있는 차량은 M4A3E2 점보 셔먼이다.[9] 이 중 2대는 75mm 탑재 셔먼의 백린탄 공격으로 인해 손실되었다.[10] 여담으로, 이후 제507중전차대대 소속원들은 이로부터 약 1달 보름이 지난 5월 12일에 미군 측에 항복했지만, 전범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기에 잔존 장병 전부 소련으로 끌려가서 굴라그에 수용되어 사망하는 등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11] 해당 잔해들 중 가운데에 있는 2대의 셔먼이 바로 이것이다. 추가로, 이 폐차들은 1949년 화이하이 전역 당시 격파된 국민당군의 다른 기갑차량들과 함께 상하이 인근 부두로 옮겨진 것이라고 한다.[12] 셔먼 왼편에 찍혀 있는 사람은 콘라도 D. 얍 대위로, 1951년 4월 23일 율동 전투 당시에 중공군의 기습을 막는데 성공하고 전사하였다. 그를 기리기 위해 국내에서는 태극 1등급 무공훈장을 수여했으며, 필리핀에서도 용맹훈장, 미국에서도 공로 십자훈장을 수여하였다.[13] 1950년 11월 10일 촬영된 사진이다.[14] 1951년 3월 3일 촬영된 사진이다.[15] 1952년 8월 16일 촬영된 사진이다.[16] 1954년 11월 4일에 촬영되었다.[17] 1961년 4월 23일에 촬영된 사진이다.[18] 1965년 9월 17일 촬영된 사진이다.[19] 왼쪽의 차량은 전시 생산분이다.[20]예리코 방향으로 진격 중 촬영된 사진이다.[21] 예루살렘 전투에서 촬영된 사진이다.[22] 1973년 10월 촬영된 사진이다.[23] 1962년 9월 21일에 촬영된 사진이다.[24] 다만 비글 분쟁 자체는 무려 80여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었다. 그런데 1978년에 들어서면서 칠레와 아르헨티나 모두 직접적인 무력 충돌까지 불사하는 분위기라 양국간의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에 셔먼 레포텐시아도가 투입된 것이다.[25] 1988년 1월 15일에 촬영된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