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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4:47:50

PEPCON 폭발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일:펩콘 폭발.jpg

1. 개요2. 사고 이전3. 사고 당시4. 피해5. 사고 이후

1. 개요

PEPCON Disaster

1988년 5월 4일 미국 네바다주 헨더슨의 PEPCON 공장에서 일어난 폭발사고.

2. 사고 이전

PEPCON(Pacific Engineering and Production Company on Nevada. 이하 '펩콘') 공장은 라스베이거스에서 남동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소도시 헨더슨의 사막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장으로, 로켓 연료로도 쓰이는 과염소산암모늄(Ammonium Perchlorate, NH4ClO4)을 생산했다. 130여명의 직원들이 근무했었는데, 전부 인근 헨더슨 주민이었다. 공장이 지어진 시기는 1950년대로, 당시만 해도 인근엔 사막밖에 없었다. 라스베이거스는 그냥 시골 도시1 정도의 이미지였고, 헨더슨도 당시엔 소규모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인근 라스베이거스는 미국을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로 자리 잡을 정도로 커졌고, 헨더슨도 다른 도시에 비하면 적은 규모이긴 하나 꽤 커졌다. 여담으로 옆에는 키드(Kidd)라는 작은 마시멜로 공장도 한 곳 있었다.

이곳에서 생산한 과염소산암모늄은 미사일로켓등을 발사하는데 쓰였는데, 챌린저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NASA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을 전면 중단했다. 그럼에도 펩콘은 과염소산암모늄을 계속 생산하였고, 남아도는 과염소산암모늄을 공장 내에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보관된 양은 무려 4,500톤에 이르렀는데, 이는 미국 정부가 소유한 과염소산암모늄의 절반 가량이었다.[1] 또 공장을 가로지르는 천연가스관이 있었다. 하지만 위험물질을 이렇게나 많이 보관하면서도, 공장 내부는 안전불감증으로 가득했다. 스프링클러가 설치된 곳은 사무실 뿐, 창고에는 전혀 없었고, 화재 알람 시스템 또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대피 계획마저 제대로 정해져있지 않았다.

3. 사고 당시

1988년 5월 4일. 당시 펩콘 공장에는 77명의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한쪽에선 용접 작업이 진행중이었다. 그런데 오전 11시 30분 경에 화재가 일어났다.[2] 직원들은 급히 소화기를 들고 와 진화를 시도했으나 앞서 말했듯이 스프링클러가 없어 불은 순식간에 퍼졌다. 직원들은 불을 끄는 걸 사실상 포기하고 각자 차를 타고 도망쳤다. 그렇게 75명이 도망쳤고, 펩콘 관리자 로이 웨스터필드(Roy Westerfield. 향년 62세)와 공장 매니저 브루스 하커(Bruce Halker. 향년 56세)만이 공장 내에 남아있었다. 로이 웨스터필드는 인근 지역에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 남았고, 브루스 하커는 휠체어를 타고 있어 대피가 늦었다. 인근 클라크 카운티에서 소방대원이 출동해 화재를 진압하려 했지만, 출동하던 도중 대피하던 직원들과 마주쳤고, 직원들은 화재를 진압하는게 사실상 불가능하니 전부 도망가야 한다고 말했고, 소방관들은 결국 진압을 포기했다.[3]


[4]

결국 화재가 일어난지 20분 뒤, 불을 못 이긴 로켓연료가 첫번째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로 인해 엄청난 양의 충격파가 주변에 퍼졌다. 인근 도로를 지나가던 차량도 충격파에 휘말려 도로에서 밀려났고 창문이 다 깨졌다. 다행히 운전자들은 크게 다치진 않았다. 하지만 약 4분 뒤, 두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이는 첫번째 폭발보다도 강력했기에, 965km 밖의 지진 관측소에서 리히터 3.5규모의 지진이 기록될 정도였다. 폭발력은 무려 1킬로톤을 기록했다. 폭발의 충격으로 그 자리에는 4.5m 깊이, 60m 너비의 대형 크레이터가 생겼다. 옆의 마시멜로 공장은 충격파를 직격타로 맞아 무너졌고, 인근 8마일 내의 건물들도 무사하지 못했다. 인근 라스베이거스의 공항에 착륙하던 보잉 737은 충격파에 휘말려 휘청거렸고, 폭발로 인해 유리창이 깨지면서 피부를 베인 사람들이 속출했다. 가까이 있던 사람은 폭발의 충격파를 그대로 맞아 고막이 터져버렸다. 유독가스를 들이마셔 에 부상을 입은 환자들도 많았다. 부상자가 너무 많아 지역의 버스들을 최대한 동원해 사람들을 병원으로 이송해야 했다. 피난민들이 너무 많아 인근 도로가 막힐 정도였고, 안부를 묻는 전화가 너무 많이 와서 인근 지역의 전화가 지연될 정도였다.

하지만 폭발만 위험한게 아니었다. 화학물질이 불타면서 생긴 유독성 구름이 인근 헨더슨과 라스베이거스의 5평방 마일을 뒤덮었다. 소방당국은 인근 5마일 내의 모든 사람을 전부 대피시켰다. 경찰과 군인들마저 전부 대피했다. 폭발의 충격으로 인근 지하의 천연가스관이 드러나 폭발하면서 화재는 계속됐고, 오후 1시 경, 사고 지역의 가스를 끊은 끝에야 천연가스 화재를 진압, 이후 펩콘의 화재도 진압했다.

4. 피해

파일:펩콘 폭발 전.jpg
사고 이전
파일:펩콘 폭발 이후.jpg
사고 후

결국 사고로 2명이 사망했고, 소방대원 15명을 포함한 400명 이상의 사람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는 폭발이 너무 강해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피해액은 무려 10억 달러에 달했다.

사고로 큰 피해를 입은 집은 3,160채에 달했다.

이 사고는 미국에서 일어난 폭발 중 핵폭발이 아닌 폭발 중에 가장 강력한 폭발이었다. 사망자가 적음에도 영어명에서 재앙(Disaster)라 불리는 이유가 피해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5. 사고 이후

펩콘 공장은 뼈대만 남아 결국 철거됐다. 펩콘 측은 사고 보상을 해야했지만, 회사가 가입한 보험은 최대 100만 달러밖에 보상할 수 있었고, 앞서 말한 피해액에 비해면 턱없이 부족한 수치였다. 이 때문에 피해자와 펩콘 사이에서 온갖 법정 공방이 오고갔다. 펩콘 측에서는 가스 회사에 죄를 돌리려 했으나 수많은 법정 공방끝에 패배, 7100만달러를 보상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펩콘은 공장을 새로 짓지 않았고, 사고 1년 후 회사명을 서부 전기화학 회사(Western Electrochemical Co. 줄여서 WECCO)로 바꿨다. 그리고 공장을 유타주의 사막으로 옮겨서 지었다. 펩콘 폭발이 너무 강했기에, 이번엔 인구 밀집 지역과 더 멀리 떨어져 짓게 됐다. 하지만 1997년에 또 화재가 일어나고 폭발까지 일어나면서 1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한 폭발 30주기를 맞은 2018년에는 뉴스3 라스베이거스에서 kidd 마시멜로우 공장을 취재했을 당시 화면과, 전 리포터의 인터뷰를 공개하기도 하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Te0lZtgKDFc
[1] 공장 내 한 곳에만 모아둔 것은 아니었고, 공장 내 창고, 그리고 공장 바깥에 쌓아뒀었다.[2] 정확한 화재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용접 불똥이 섬유유리에 튀면서 불길이 일었다는 게 정설이다.[3] 로켓연료로 쓰이는 물질에 불이 붙은데다 밑에서 말했다시피, 폭발의 위력이 핵폭발에 맞먹었기에 소방관이 출동한다 한들 힘을 쓸 수 없었다.[4] 인근 블랙 마운틴의 방송국 기지서 일하던 직원 데니스 토드(Dennis Todd)가 촬영한 영상. 첫번 째 폭발은 4분 59초, 두번 째 폭발은 8분 54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