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산 전투의 시작을 알린 랑 베이 전투에서는 베트남 인민군이 선두에 6대의 PT-76를 내세워 라오스 근처의 랑 베이 특수부대 캠프를 초토화시키게 되는데, 당시 미군은 알보병인 줄만 알았던 월맹군이 전차를 운용한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먹었다고 한다.
기지를 지키던 그린베레와 산악부족 몽타냐드들도 모든 게 열세였던 상황에서 전차 2대를 파괴하는 등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케산으로 후퇴해야 했는데, 전투 내내 베트남군이 전차를 대동하고 기습했다면서 계속 지원 요청을 했으나 이 소식을 들은 미 장성들이 "우리가 보고받은 바로는 베트남 측에는 그러한 지형에서 운용할 수 있는 전차가 없는 것으로 보이며, 야간에 장병들이 잘못 본 것으로 추정된다."라는 말로 어영부영하다가 반격시기를 놓친 것도 패배에 한 몫 했다.
이 랑 베이 전투에서 미군과 몽타냐드군이 패주했던 이유 중 하나로 꼽히는 사유가, M72 LAW로 PT-76을 격파하는 것에 실패했던 것이 꼽히는데, 이 M72는 원래 전투 시기 주력으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며, 106mm M40 무반동포로 3~4대 정도를 격파했지만, 포탄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M72를 집어든 것이었다.
또한, M72의 관통력으로는 충분히 PT-76을 격파 가능했지만, 당시 야간이라 정확히 차체 하단을 노리는 것이 불가능해 대충 보이는 실루엣에 조준하여 미군은 전면 상부의 경사장갑을 가격했는데, 몇몇 탄은 전면 파도막이를 들이받고 튕겨나갔다고 한다.
이후 전훈을 얻은 미군 측에서도 상부 경사장갑 탓에 자꾸 도탄이 나는 것을 본 이후부터는 M72로 PT-76의 측면을 가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벤 헷 전투 당시 미군의 M48 패튼에 의해 격파된 베트남 인민군 산하 제202기갑연대 소속 PT-76B[1]
1969년 벤 헷 전투에서 M48 패튼 중대와 대결하기도 했는데, PT-76이 대전차 지뢰를 밟아 무력화된 와중에도 선두에 있던 소대장차에게 반격을 날려 탄약수와 조종수가 사망하였으며, 결과적으로는 월맹군 측에서 PT-76 2량을 손실하고 물러나긴 했지만 체급적으로 상대가 안되는 MBT를 만나 선제 공격을 당했는데도 이 정도로 피해를 주고 후퇴한 걸 보면 대활약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라오스 내전 중 벌어진 9번 국도 전투 당시, 베트남 인민군 소속의 PT-76B "555번차"가 대활약한 기록이 남아있다.
전투 시작 전, 555번차의 승무원은 제3공수여단사령부가 위치한 543고지와, 이 곳에 주둔 중인 1개 낙하산대대, 1개 포병대대, 1중대를 제압하는 임무를 하달 받았으며, 당시 555번차에 탑승하고 있던 승무원은 전차장 "응우옌반두옌", 탄약수 "당반도안", 조종수 "응우옌토앙" 총 3명이었다.
1971년 2월 25일 11시 30분, 제9전차중대는 출격 명령을 받고 555번차가 선두에서 중대를 이끌게 되었는데, 9중대가 진격하는 것을 본 라오스 왕국군 측에서는 포격 및 근접항공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이 때 전차장인 응우옌반두옌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전차포와 기관총을 사용하여 포병들을 제압하고 통신소로 돌진하였다.
이후 555번차는 공성전 끝에 543고지를 장악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전차장인 응우옌반두옌은 1급해방승리훈장을 수여받고, 조종수 응우옌토앙과 탄약수 당반도안은 2급해방승리훈장을 수여받았으며, 해당 "555번차"는 일명 "9번 국도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부여받았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인도군의 각 부대에 대량으로 배치된 후 공격적으로 운용되어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71년 12월 9일 인도 제1기갑대대 D중대의 PT-76들과 파키스탄군의 건보트 3척이 다카 지역의 강에서 교전을 벌여 파키스탄군의 건보트 3척이 격침되었고 180여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동월 11일에는 파키스탄의 건보트 1척이 PT-76에 기관총 사격을 가해 교전이 벌어져 건보트는 침몰, 파키스탄군 83명이 전사하고 33명이 포로로 잡혔다.
동월 13-14일에는 제45기병연대 소속의 PT-76과 인도 제9보병사단이 바이탑(Bhaitab) 강을 도하하여 샴간즈(Syamganj)에 있는 선착장을 공격하자 파키스탄군은 진지를 포기하고 인도군에 항복했으며 파키스탄 제107여단 병력 3,7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제45기병연대의 A 중대는 마드후마티 강에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중인 파키스탄 9사단을 강북쪽에서부터 은밀히 도하하여 배후에서 기습하였고 50여명의 장교와 343명의 병사를 포로로 잡는 등의 대활약을 펼쳤다.
이라크군 소속의 PT-76의 활약상으로는, 1983년 2월 남부 티그리스강 유역에서 벌어졌던 "발 피질 작전"이 유명한데, 당시 이라크의 파키리 소장과 6기갑사단의 PT-76 전차들은 전답, 진탕, 수로, 하천 등으로 구성된 이 지역을 따라 올라오는 이란군의 건보트와 조디악들을 공격해 진출을 좌절시켰으며, 이 공로로 파키리 소장은 중장으로 진급해 후세인의 오른팔이 된다.
제1차 체첸 전쟁 중 벌어진 그로즈니 전투 당시 총 9대의 차량들이 제59특수목적연대 소속으로 투입되었으며, 이 중 1량이 체첸 반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 1량은 세르게이 골루베프 중위가 지휘하는 차량이었고, 격파되기 전 RPG-7의 공격을 무려 두 번이나 견뎌냈고 적의 진지 3곳을 파괴했다.
러시아군의 조사에 의하면 철수하는 아군을 엄호하기 위해 골루베프 중위의 PT-76이 체첸 진지들을 향해 공격했다고 한다. 교전은 치열했고 두 번째 RPG-7에 의해 PT-76의 포신이 무력화되었는데, 그러자 골루베프 중위는 전차를 체첸 반군의 건물을 향해 돌진시켜 그 건물을 파괴했고 골루베프와 승무원 전원은 건물의 잔해에 깔려 사망했다고 한다.
2012년 말리 쿠데타 당시 말리 육군 소속으로 PT-76 최소 1량 이상이 투입되었으며, 결국 아마두 투마니 투레 대통령을 축출하고 군부 정권이 자리잡으며 쿠데타는 성공으로 끝나게 되었다.
[1] 1969년 3월 3일 촬영된 사진이다.[2] 무려 40량이나 멀쩡한 PT-76들을 유기했다고 한다. 아랍연맹군이 이런 추태를 부리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라 이스라엘 독립전쟁 시기부터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매우 심각한 수준.[3] 1981년 촬영된 사진인데, 결국 이 단차는 구난하는데 실패하여 회수를 방지하기 위해 자폭처리하였다고 한다.[4] 1988년 8월 8일 촬영된 사진이다.[5] 1991년 1월 1일에 촬영된 사진이다.[6] 2003년 3월 21일 촬영된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