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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궁형(宮刑)은 죄인을 거세시켜 고자로 만드는 형벌이다.2. 상세
고대 중국의 오형(五刑)의 하나다. 오형이란 묵(墨), 의(劓), 월(刖), 궁(宮), 대벽(大辟)의 5가지 형벌로, '묵'은 죄명을 문신으로 얼굴이나 팔뚝에 새기는 것, '의'는 코를 베는 것, '월'은 아킬레스건을 끊는 것, '대벽'은 목을 치는 참수형이다. '궁'은 대벽 이상의 중형으로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궁형을 당한 당사자는 남성성과 번식 능력을 모두 잃게 되는데 가부장적 사회이던 전근대에 자손을 남기지 못한다는 것이 어느 의미인지 생각하면[1] 그야말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완전히 잃게 하는 형벌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2]중국의 전국시대에 중범죄자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깨끗하게 대벽을 선택하면 죽는 대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융숭하게 장례를 치러 줬으나 생에 대한 미련으로 궁형을 택하면 말 그대로 한심한 작자 취급을 당했다. 살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과 다를 바 없이 보였기 때문이다. 즉, 생을 포기하느냐 명예를 포기하느냐 둘 중 하나였는데 대벽을 선택하면 명예롭게 죽을 수 있으므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일종의 존엄사에 해당하겠다.[3]
사실 다른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는데 궁형을 받는다고 해도 의술이 빈약한 고대에는 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곧 죽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즉 명예를 완전히 잃고 얼마 살지도 못하고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극심한 고통만 길게 느껴가며 죽는 것만도 못한 삶을 살다가 죽느니 어차피 죽는 거 명예나마 온전히 살리는 게 더 합리적이라고 여길 법 하였다.
사형과 궁형 사이에서 궁형을 택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사마천. 사마천은 이를 택함으로써 후대에 위대한 명예를 얻었다는 점에서 또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반대로 사형을 선택했으면 사기 저술도 없었을 것이고 알량한 명예를 위해 생을 포기한 어리석은 사람으로 남았을 것이다.
사기 주본기에 의하면 궁형에 해당하는 죄목은 모두 300여 가지인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궁宮을 범한 죄로 불륜을 가리킨다.
남자의 궁형에는 음경과 고환 둘 중 하나만 도려내거나 음경과 고환 모두 도려내는 방법이 있다. 중국에서는 주로 둘 다 제거하는 형태를 많이 택했는데 그로 인해 음경이 없는 중국의 환관들은 항상 앉아서 소변을 봐야 했고 이 비참함으로 중국 환관들이 쓴 글들 중에 앉아서 볼일 보고 있을 때 종종 눈물이 난다거나 하는 표현이 나오기도 한다.
부형(腐刑)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성기를 절단한 환부에서 오랫동안 살이 썩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잠실(蠶室)로 보낸다고도 하는데 궁형을 당하면 상처가 아물 때까지 지하의 따뜻한 밀실에서 지내야 하는데[4] 그 모습이 마치 누에를 치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에 생긴 표현이다.
여자에게 궁형을 내리는 것은 유폐(幽閉)라고 했다. 여기에는 2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죽을 때까지 가둬 둔다는 것이고 두번째는 여성의 생식기를 폐쇄시킨다는 것이다. 알기 쉬운 남자의 경우와는 달리 형벌의 정확한 방법은 알기 어렵다.
여러 잔인한 방법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여성 생식기에서 힘줄을 잘라내거나, 흉부와 복부를 지속적으로 두들겨서 생식기능을 파괴했을 것이라 본다. 음부의 수비골이나 자궁을 내려앉게 만들어 생식능력을 빼앗는 형벌이다. 혹은 음부를 실로 꿰메거나 자물쇠를 채웠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에는 궁형이란 형벌이 없었지만 어릴 적부터 개에게 물려 고자가 된 사람을 환관으로 확충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까지 면면히 고자를 만들어 주는 기술자가(?)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옛날 영화 "업"에선 아래와 같이 집행한다.
1. 죄인의 바지를 내린다.
2. 포졸이 죄인의 거시기에 대통을 끼운다.[5]
3. 거시기를 자른다.
현대에는 독일, 체코, 스웨덴에서 성범죄자에게 시행한다. 물론 물리적인 거세가 아니고 화학물질을 투여하는 화학적 거세다. 과거에는 영국에서 동성애자를 상대로 화학적 거세를 시행한 적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성범죄자에게 '화학적 거세'를 집행하는데 공식명칭은 "성충동 약물 치료"다. 그러나 인터넷(특히 유튜브 뉴스 영상 댓글)의 여론에 의하면 '물리적 거세'만이 답이라는 것처럼 엄벌주의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와 반대로 화학적이든 물리적이든 성범죄의 다수는 성충동이 문제가 아니라 위계에 의한 폭력에 성적 요소가 추가된 것이라 법 관련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이기도 한다.
3. 궁형을 당한 사람
3.1. 실존 인물
사마천은 한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형벌을 받아 궁형을 당했다. 사마천뿐만 아니라 왕의 비위를 거스른 수많은 선비가 궁형/참수형 중을 선택하도록 강요받았으며 그중 일부는 궁형을 받기도 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궁형을 택한 선비들은 비록 전에 엄청난 학식과 명성을 누렸어도 온 세상의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명대 이후에는 남방의 이민족들을 포로로 잡은 경우 남성 성년은 모두 처형되고 여성과 여아는 노비가 되었으며 남아들은 궁형을 받기도 했는데 이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명나라의 정화다. 정화는 윈난성의 이슬람계 집안 출신인데 아버지가 친몽골 성향이어서 명에 끈질기게 저항하다가 정화 본인은 명군의 포로가 되어 어린 나이에 거세를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원나라 조정에서 활약하던 색목인들 중에는 정부 요직에 앉은 사람들이나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대놓고 다 궁형에 처하지는 못하고 대신 한족과의 통혼을 무조건 강제한 적도 있었다. 북방의 이민족들을 포로로 잡은 경우는 대개 궁형을 행하지는 않고 주로 남쪽 밀림 지역으로 보냈는데 이유는 북방 초원지대 사람들이 밀림 지역으로 파견되면 열대 전염병으로 금방 우수수 죽어나가기 때문이었다. 주로 원명교체기에 포로로 잡힌 몽골인들이 이런 식으로 소모되었다.
이 둘을 조합한 사례가 정통제 시절 중국의 서남부 묘족, 요족이 반란을 일으키자# 명나라는 이이제이로 위구르, 몽골병을 보내 이들을 진압했고[6] 포로로 잡은 묘족 아이들 1565명을 모조리 거세하여 환관으로 황궁에 보낸 걱이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남방 밀림 지대의 소수민족이 계속 반란을 일으켜 진압군을 파견할 경우 전염병으로 손실되는 병력들이 많아지면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에 최대한 인구를 감소시켜 놓는 편이 유리했다. 대치 와중에 요족이 묘족의 뒤통수를 때리고 협공하여 승리했는데 이 과정에서 요족들과 이족들이 묘족들의 화전을 노리고 묘족들을 무자비하게 4만 명이나 학살하였고 명나라 측에서는 아이들에게 궁형을 시행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물론 현대에도 윤리적으로 비난받는 악행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궁형에 처해진 묘족 아이들 329명이 사망하였고 명나라에서도 아이들에게 대량으로 궁형에 처한 것에 경악하였으며 정통제도 이 보고를 듣고 경악하여 이 사령관을 질책할 정도였다.
청나라 시기에도 소수민족의 봉기에 대한 대응책으로 종종 사용되었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신장 지역을 침공하고 장악했던 야쿱 벡의 어린 아들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것이다. 물론 이 경우는 소수민족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특정 개인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 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3.2. 가상 인물
[1] 애초에 비교적 최근까지 여자가 아들을 못 낳는 것도 칠거지악의 일종으로 간주되던 판이다.[2] 더구나 중세에도 수염을 잘라내는 것이 남성성 훼손으로 간주되어 이거 하나 때문에 온갖 유혈사태(대표적으로 무신정변, 몽골의 호라즘 왕조 침공 등이 있다)가 일어났다는 것을 감안하면 궁형이 얼마나 치욕적인 형벌이었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현대 이전까지 유럽에서 단지 성적 지향이 다를 뿐인 동성애자가 받았던 대우가 어떠했는가를 생각하면 그보다 더 옛날 중국에서 살겠다고 자발적으로 '남성성'을 버리는 궁형을 택한 사람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3] 물론 고통 없이 죽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안락사는 아니다.[4] 궁형 후 100여일 간은 밖에 외출할 수 없다고 한다. 궁형 시 바람을 쐬면 목숨을 잃기 때문이다.[5] 굳이 대통을 끼우지 않고도 거세할 수 있지만 대통을 끼우는 이유는 자르는 동시에 피가 거의 분수처럼 나오게 돼서 거세를 시행하는 자가 그 피를 묻지 않게 함과, 형벌을 내리는 자도 남자인지라... 그 모습을 직접 보기는 아마도 그로테스크했을 것이다...[6] 다만 위구르와 몽골병은 각각 2천명, 1천명에 불과했고 실제론 주력은 한족 병력 3만여 명 및 묘족을 뒤통수친 요족과 로로족 등이었다. 무엇보다 위구르인과 몽골인은 기병부대로 몽골인들은 궁기병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