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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03 14:19:10

검은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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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분쟁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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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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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중동전쟁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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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모전
,1967 ~ 1970,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이스라엘
검은 9월
,1970 ~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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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중동전쟁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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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리비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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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내전
,2015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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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9월
أيلول الأسود
Black September
파일:Jordanian_soldiers_surrounding_Syrian_tank,_17_September_1970.png
센추리온 전차 옆의 요르단군, 1970년 9월 17일
기간
1970년 9월 6일 ~ 1971년 7월 17일
원인
요르단과 PLO의 갈등
장소
요르단
교전국 및 교전 세력

[[요르단|]][[틀:국기|]][[틀:국기|]]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P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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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인민전사기구
지원국
지휘관
파일:요르단 국기.svg후세인 1세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야세르 아라파트
병력
결과
요르단의 승리
요르단의 PLO 추방
PLO가 레바논으로 본부를 이전해 레바논 내전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
영향
검은 9월단 창설
뮌헨 올림픽 참사
피해

1. 개요2. 원인과 배경3. 검은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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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ylūl al-Aswad) أيلول الأسود
الحرب الأهلية الأردنية
Black September
Jordanian Civil War

1970년 9월 요르단에서 후세인 1세의 요르단 정부와 시리아 바트당 정권의 지원을 받은 야세르 아라파트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및 시리아 사이에서 발생한 전쟁.

2. 원인과 배경

20세기 초 여러 국가에서 모인 6,000만 명의 군인이 싸운 제1차 세계대전이다. 팔레스타인은 당시 나라의 기틀을 세운 군주 오스만의 이름을 따 오스만 제국으로 불리던 튀르키예 제국의 작은 지방이었다. 튀르키예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와 같은 편에 서서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튀르키예의 지방 군주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벅차했다. 그러다 보니 중앙정부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각자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그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이 당시 메카의 군주이자 하심 가문 아미르인 후세인 빈 알리에게 비밀협상을 제안했다. 영국은 후세인 빈 알리에게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국가지역에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대신 그 전에 후세인이 오스만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 경이 그런 내용을 담은 서신을 후세인 빈 알리와 주고받았다. 이 서신들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불린다.후세인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져 있는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후세인 빈 알리를 도왔다. 그러나 영국은 약속과 달리 거대 왕국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후세인 빈 알리는 스스로를 '아라비아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서양에서는 그를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지방인 헤자즈의 군주로만 인정했을 뿐이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협정을 맺었지만 당시 반란을 도모한 후세인 빈 알리는 영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비밀협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오스만 제국을 그곳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토를 분할해 두 나라가 나눠 갖기로 합의를 했다. 이 협정은 협상을 맡은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총영사 찰스 조르지 피코와 영국 정부에서 파견한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의 이름을 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다. 이러한 비밀협정에 대해 팔레스타인들 대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오늘날과 같은 갈등이 시작된 중요한 사건은 20세기 초 여러 국가에서 모인 6,000만 명의 군인이 싸운 1차 세계대전이다. 팔레스타인은 당시 나라의 기틀을 세운 군주 오스만의 이름을 따 오스만 제국으로 불리던 터키 제국의 작은 지방이었다. 터키군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및 헝가리와 같은 편에 서서 참전했다. 그런데 당시 터키의 지방 군주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정부의 명령을 잘 따르지 않고, 각자 자신들의 관심사에 몰두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그런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영국이 당시 메카의 군주였던 후세인 빈 알리에게 비밀협상을 제안했다. (중략) 영국의 제안은 당시 메카의 군주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영국은 후세인에게 팔레스타인에 독립 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대신 그 전에 후세인이 오스만 중앙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영국 외교관 헨리 맥마흔 경이 그런 내용을 담은 서신을 후세인 빈 알리와 주고받았다. 후세인은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1916년 오스만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잘 알려져 있는 토마스 애드워드 로렌스가 그를 도왔다.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13쪽, 15쪽
이 서신들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불린다. 아랍 민족이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여 연합국 측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전후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아랍국가의 독립과 후세인 지도하에 아랍 칼리프제 구축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13쪽
그러나 영국은 약속과 달리 거대 왕국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 후세인 빈 알리는 실망했다. 그는 스스로를 '아라비아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서양에서는 그를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지방인 헤자즈의 군주로만 인정했을 뿐이다.
당시 반란을 도모한 후세인은 영국이 프랑스와 체결한 비밀협정에 대해 알지 못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오스만 제국을 그곳 사람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국토를 분할해 두 나라가 나눠 갖기로 합의를 했다. 이 협정은 협상을 맡은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총영사 찰스 조르지 피코와 영국 정부에서 파견한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의 이름을 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다.
이러한 비밀협정에 대해 팔레스타인들 대부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15쪽

한국에선 맥마흔 선언 vs 벨푸어 선언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후세인- 맥마흔 서한이 묵살된 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다. 후세인-맥마흔 서한은 제1차 중동전쟁에서 트란스요르단의 목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건이다. 당시 트란스요르단의 국왕인 압둘라 빈 알 후세인이 비로 후세인 빈 알리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트란스 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빈 알 후세인은 국토를 확장해 요르단이라고 국명을 개명했다. 요르단은 구시가지가 있는 동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지구를 국토에 합병시켰다. (중략) 요르단 국왕은 아버지 후세인 빈 알리의 큰 꿈에 한층 더 가까워졌다. 메카의 수장이었던 후세인 빈 알리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에 협조해 거대한 아랍국가 건설이 그의 아들 대에 와서 실현되는 듯 했다.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90쪽.

그 당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시절에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민족주의는 없다고 해야할 것이다.
아랍인 봉기에 참여한 반군한테 1930년대는 독립된 국가를 세우기 위한 투쟁이라기보다 사전에 계획되어 있던 유대인 국가의 건설을 막기 위해 싸우던 시기였다. 팔레스타인 국수주의, 즉 팔레스타인인들의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는 계획은 수십 년이 지나서야 태동한다. 그 이전까지는 팔레스타인의 많은 정치인은 팔레스타인의 국경을 넘어 북쪽의 시리아와 남쪽의 이집트까지 뻗어나가는 아랍 제국을 꿈꾸고 있었다.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36-37쪽
그러므로 요르단이 제1차 중동전쟁에서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배신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한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의 철수가 임박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소유권을 놓고 유대인아랍인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1947년 말 UN은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양측으로부터 모두 거부당했다. 사태가 격화되던 가운데 영국이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고 동시에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요르단 강을 경계로 팔레스타인과 접한 요르단 역시 아랍 연합군에 가담하여 전쟁에 참전했는데 당시 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1세는 전쟁에 참전한 다른 아랍 국가들과는 속셈이 달랐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독립 국가를 세우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를 자국의 일부로 합병하려는 계획을 꾸민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요르단은 재빠르게 팔레스타인에서 제일 중요한 성지인 동예루살렘과 아랍 국가에 배정될 예정이었던 라말라헤브론, 나블루스, 베들레헴, 예리코 등을 확보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역시 요르단과 휴전을 맺으면서 요르단이 이 지역을 점령한 것을 묵인했다. 비록 원하던 팔레스타인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요르단은 숨겨진 승리자가 되었고 이후 요르단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일명 요르단 강 서안 지구라고 불리게 되었다.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차지한 요르단은 이 지역을 자국의 일부로 합병하는 절차를 시작했는데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948년 12월 압둘라 1세는 예리코에서 팔레스타인인 명사들을 접견해 그들로부터 팔레스타인의 지배자로 인정받았다. 압둘라 1세는 점령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자국 행정구역을 설치한 다음 주지사들을 파견했고 1949년 요르단 강 양안의 통일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그때까지 트란스요르단이었던 이름을 요르단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50년 요르단은 정식으로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합병하고 요르단에 살던 팔레스타인인 전부에게 요르단 시민권을 주었다. 요르단을 다스리는 하심 가문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이자 메카메디나를 비롯해 히자즈 지역을 대대로 다스려 왔으나 네지드사우드 왕조에게 패해 히자즈를 빼앗기고 요르단과 이라크로 도망쳐 왔다. 비록 이슬람의 최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차지한 '두 성지의 수호자' 자리는 사우드 가문에게 빼앗겼으나 그에 버금가는 성지인 '예루살렘의 지배자' 칭호 정도면 압둘라 1세에게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보상이었다. 요르단의 일방적인 서안지구 합병은 국제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인정한 나라는 미국영국 정도밖에 없었다. 아랍 국가들은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팔레스타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요르단이 임시로 지배하는 조건으로 이를 묵인했다.

그런데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합병하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시민권을 주다 보니, 요르단에서 요르단 원주민이 소수민족이 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요르단 원주민들이 요르단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는데 이스라엘을 피해 요르단 강 동안으로 도망쳐 온 팔레스타인인들이 인구의 3분의 1, 거기에 새로 합병한 서안 지구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이 또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한 것이었다. 의회 의석의 절반을 배정해 주고 한동안 잠잠한 상태였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요르단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기형적인 인구구조는 곧 팔레스타인인들이 요르단 국내 정치와 안보 문제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것은 1951년 7월 20일에 압둘라 1세가 사흘 전 암살당한 레바논 총리 리아드 베이 알솔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기 위해 알아크사를 방문하여 예배하던 중 21세의 팔레스타인인인 무스타파 아슈에게 총격을 받아 암살당하는 것으로 현실화된다. 암살범은 현장에서 왕의 경호원들에게 사살되었다. 그 이후 요르단의 국왕 후세인 1세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가리켜 살기 아니면 죽기로 묘사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 팔레스타인인들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문제가 터졌다.

PLO를 결성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랍 세계에서 여러 방면으로 원조를 받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는 정치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적으로 후원을 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아랍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요르단을 근거지로 삼아 반이스라엘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무장투쟁의 일환으로 이들은 심심하면 휴전선을 넘어 이스라엘을 향해 레이드를 갔고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보복 레이드를 오면서 요르단-이스라엘 휴전선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다. 이 때문에 요르단은 비밀리에 이스라엘과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접촉했고, 이를 위해서 후세인 국왕이 내린 이스라엘 침공 금지 명령은 불복종되었다. 심지어 일부 요르단 장교들과 지휘관들은 대놓고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소극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레이드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서안 지구를 빼앗긴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다음해인 1968년에는 이스라엘군이 PLO를 공격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카마라 마을에 진입했고 피터지는 전투가 벌어진 끝에 이스라엘군이 물러났지만[1] 요르단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애초에 이 전투는 PLO가 수시로 월경해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이스라엘이 보복 차원에서 월경해 PLO를 제거하려고 벌인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사태의 원흉인 PLO는 요르단 영내 깊숙한 곳으로 도망쳤고 이스라엘군의 분노를 뒤집어쓴 것은 무고한 요르단군과 민간인들이었다. 어쨌던 간에 이 전투에서 가장 득을 본 것은 아라파트와 파타당이었고 아랍 세계에서 큰 명성을 얻은 파타당은 PLO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이런 군사적인 분쟁 말고도 내부 문제도 어느 정도 있었다. 당시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캠프의 지배자는 PLO의 팔레스타인이었다. 요르단 경찰이나 군대는 아예 간섭을 못 했다. 심지어 이들은 캠프에 검문소를 설치해서 통행세를 갈취하기까지 했다.

결국 1968년 11월 후세인 국왕과 PLO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져 7개 조항이 합의되었다.

조항이 만들어졌지만 PLO는 잘 지키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민병대 내부의 규율은 완전히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고 카마라 전투 이후 여러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다 보니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중앙조직의 힘도 전무했다. 더구나 시리아이라크의 지원을 받고 생겨나는 단체들도 있었고 어떤 단체들은 급진주의적인 자세를 취해 요르단 왕가의 권위에 반발하면서 저항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어떤 단체는 깡패 조직화 되어서 차량을 탈취하지를 않나 상인들과 난민들에게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돈과 물품을 강탈하기까지 했다. 그러다보니 요르단에서 PLO를 향한 반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1968년 중순과 1969년 말 사이에는 갈등이 더욱더 고조되었다. 요르단군과 팔레스타인 민병대는 수시로 충돌했고 폭력행위와 납치가 수시로 벌어졌다.

심지어 당시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요르단 군인을 죽인 뒤 그 군인의 머리를 잘라서 축구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다음해인 1970년 2월 미국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후세인 국왕은 PLO의 활동을 제한하는 칙령을 내렸고 결국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처절한 시가전이 벌어져 300명이나 사망했다.

1970년 7월 이집트와 요르단이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호를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PLO와 이집트의 좋은 시절은 끝나 버렸고 PLO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요르단과 끝장을 보겠다면서 발악했다.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는 중동 지도자들을 카이로로 초청하여 이들에게 화해를 호소하였지만 이미 극도로 건강이 악화된 나세르는 회담 도중에 급사하였고 그나마 아랍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범아랍주의의 상징인 나세르의 죽음으로 외교적 중재 노력도 물거품이 되었다.

후세인 국왕을 암살하려 여러 번 시도했고[2] 1970년 9월에는 PLO 내 강경분파였던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은 여객기 5대를 납치해 요르단의 다우슨이란 옛 영국 공군 활주로에서 4대를 날려버렸다(PFLP 동시다발 하이재킹 사건).[3]

3. 검은 9월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후세인 국왕은 결국 9월 15일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요르단군은 전차를 몰고 가서 수도 암만의 PLO 본부를 급습했고 동시에 요르단의 PLO 기지도 공격하여 레바논 일대로 몰아내 버렸다.

그 결과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를 빌미로 시리아군이 요르단을 직접 침공했다. 1970년 9월 18일 시리아 육군 제5보병사단 예하 1개 전차여단과 1개 기계화보병여단의 전차 300여대가 북부 요르단으로 진입했다. 요르단 육군 제40기갑여단이 격렬한 전투 끝에 시리아군의 전진을 일시적으로 멈춰세웠지만 국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다고 판단한 후세인 국왕은 영국, 미국, 이스라엘 등에 개입을 요청했다.

후세인의 절박한 요청을 거절한 영국과 달리 미국과 이스라엘은 군사적 개입 요청을 승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리처드 닉슨은 단독개입을, 헨리 키신저는 이스라엘과의 공동 개입을 선호했으나 개입해야 한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내각에도 요르단은 6일 전쟁 당시 이집트의 프로파간다에 속아넘어가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괘씸죄가 있으니 그냥 망하게 내버려 두자는 각료들이 있었지만, 골다 메이어 총리를 포함한 다수파는 옛 일은 덮어두고 하심 왕가를 지원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다행히 9월 22일부터 시작된 요르단군의 반격이 성공하여 후세인 국왕의 군사적 개입 요청은 철회됐다. 시리아 국방장관 하페즈 알아사드와 침공을 주도한 살라흐 자디드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시리아군이 항공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이 요르단군은 공지합동으로 역습을 실시하여 시리아군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시리아군 5사단은 이날 늦은 오후부터 요르단 영토 바깥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내쫓긴 PLO는 레바논시리아로 옮겨갔다. 이것 때문에 팔레스타인 과격분자들은 적반하장 태도를 보이며 이를 요르단의 배신이라고 성토했고 이 원한을 절대 잊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또 1971년 11월에는 와스피 탈 요르단 총리대신을 카이로에서 암살했다. 훗날 1972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을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던 "검은 9월단"은 이 사건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골다 메이어는 아랍 국가들이 자기네 나라 안에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들을 제어할 수 없다는 변명에 대해서 더욱 냉소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메이어는 압둘라는 수 년간 자기네들에게 PLO를 몰아낼 힘이 없다고 징징대더니 정작 자신의 왕궁이 위협받자 아주 훌륭하게 해내더라고 씹으면서 레바논이 PLO를 단속하라는 말을 능력 부족을 핑계로 듣지 않으면 자기들이 직접 때려잡아 주겠다고 덧붙였다.
[1] 애초에 요르단과 전면전을 벌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PLO의 뿌리를 뽑기 위해 벌인 전투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측은 피해만 입은 채 철수했고 원래 목적인 PLO 멸망은 실패했다.[2] 심지어 PLO에 동조하는 요르단 공군 전투기 조종사가 후세인 국왕이 탄 헬기를 기관포로 공격한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3] 납치기들 중 엘알 219편은 납치범 2명이 모두 제압되었고 런던 히스로 공항에 비상착륙함으로써 유일하게 폭파를 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