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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1:32:24

검은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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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9월
أيلول الأسود
Black September
파일:Jordanian_soldiers_surrounding_Syrian_tank,_17_September_1970.png
센추리온 전차 옆의 요르단군, 1970년 9월 17일
기간
1970년 9월 6일 ~ 1971년 7월 17일
원인
요르단과 PLO의 갈등
장소
요르단
교전국 및 교전 세력

[[요르단|]][[틀:국기|]][[틀:국기|]]
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P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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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파일:요르단 국기.svg 537명 전사파일:팔레스타인 국기.svg 3,400여 명 전사
파일:시리아 국기.svg 600여 명 사상
결과
요르단의 승리
요르단의 PLO 추방
PLO가 레바논으로 본부를 이전해 레바논 내전의 직접적인 원인 제공
영향
검은 9월단 창설
뮌헨 올림픽 참사

1. 개요2. 원인과 배경3.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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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ylūl al-Aswad) أيلول الأسود
الحرب الأهلية الأردنية
Black September
Jordanian Civil War

1970년 9월 요르단에서 후세인 1세의 요르단 정부와 시리아 바트당 정권의 지원을 받은 야세르 아라파트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및 시리아 사이에서 발생한 전쟁.

2. 원인과 배경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의 철수가 임박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소유권을 놓고 유대인아랍인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1947년 말 UN은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로 분할하는 중재안을 제시했지만 양측으로부터 모두 거부당했다. 사태가 격화되던 가운데 영국이 영국령 팔레스타인에서 철수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했고 동시에 아랍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요르단강을 경계로 팔레스타인과 접한 요르단 역시 아랍 연합군에 가담하여 전쟁에 참전했는데 당시 요르단의 국왕 압둘라 1세는 전쟁에 참전한 다른 아랍 국가들과는 속셈이 달랐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독립 국가를 세우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체를 자국의 일부로 합병하려는 계획을 꾸민 것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요르단은 재빠르게 팔레스타인에서 제일 중요한 성지인 동예루살렘과 아랍 국가에 배정될 예정이었던 라말라헤브론, 나블루스, 베들레헴, 예리코 등을 확보했고 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 역시 요르단과 휴전을 맺으면서 요르단이 이 지역을 점령한 것을 묵인했다. 비록 원하던 팔레스타인 전체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요르단은 숨겨진 승리자가 되었고 이후 요르단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일명 요르단강 서안 지구라고 불리게 되었다.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차지한 요르단은 이 지역을 자국의 일부로 합병하는 절차를 시작했는데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948년 12월 압둘라 1세는 예리코에서 팔레스타인인 명사들을 소집해 그들로부터 충성을 받아내었다. 압둘라 1세는 점령한 요르단 강 서안 지구에 자국 행정구역을 설치한 다음 주지사들을 파견했고 1949년 요르단 강 양안의 통일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그때까지 트란스요르단이었던 이름을 요르단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1950년 요르단은 정식으로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합병하고 요르단에 살던 팔레스타인인 전부에게 요르단 시민권을 주었다. 요르단을 다스리는 하심 가문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이자 메카메디나를 비롯해 히자즈 지역을 대대로 다스려 왔으나 네지드사우드 왕조에게 패해 히자즈를 빼앗기고 요르단과 이라크로 도망쳐 왔다. 비록 이슬람의 최대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차지한 '두 성지의 수호자' 자리는 사우드 가문에게 빼앗겼으나 그에 버금가는 성지인 '예루살렘의 지배자' 칭호 정도면 압둘라 1세에게는 충분히 만족할 만한 보상이었다. 요르단의 일방적인 서안지구 합병은 국제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인정한 나라는 미국영국 정도밖에 없었다. 아랍 국가들은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팔레스타인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요르단이 임시로 지배하는 조건으로 이를 묵인했다.

그런데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합병하고 영토를 확장하다보니 요르단에서 요르단 원주민이 소수민족이 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요르단 원주민들이 요르단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는데 이스라엘을 피해 요르단 강 동안으로 도망쳐 온 팔레스타인인들이 인구의 3분의 1, 거기에 새로 합병한 서안 지구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이 또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한 것이었다. 요르단 정부는 자국 통치 아래에 든 팔레스타인인 모두에게 요르단 국적을 주며 자국민으로 대우했으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요르단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 기형적인 인구구조는 곧 팔레스타인인들이 요르단 국내 정치와 안보 문제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당시 요르단의 국왕 후세인 1세는 팔레스타인 문제를 가리켜 살기 아니면 죽기로 묘사하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들 팔레스타인인들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결성하여 본격적으로 문제가 터졌다.

PLO를 결성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아랍 세계에서 여러 방면으로 원조를 받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는 정치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적으로 후원을 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아랍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이들은 요르단을 근거지로 삼아 반이스라엘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다. 무장투쟁의 일환으로 이들은 심심하면 휴전선을 넘어 이스라엘을 향해 레이드를 갔고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보복 레이드를 오면서 요르단-이스라엘 휴전선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다. 이 때문에 요르단은 비밀리에 이스라엘과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접촉했고, 이를 위해서 후세인 국왕이 내린 이스라엘 침공 금지 명령은 불복종되었다. 심지어 일부 요르단 장교들과 지휘관들은 대놓고 명령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소극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레이드를 도와주기까지 했다.

서안 지구를 빼앗긴 6일 전쟁(제3차 중동전쟁) 다음해인 1968년에는 이스라엘군이 PLO를 공격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카마라 마을에 진입했고 피터지는 전투가 벌어진 끝에 이스라엘군이 물러났지만[1] 요르단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애초에 이 전투는 PLO가 수시로 월경해 이스라엘을 공격하자 이스라엘이 보복 차원에서 월경해 PLO를 제거하려고 벌인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사태의 원흉인 PLO는 요르단 영내 깊숙한 곳으로 도망쳤고 이스라엘군의 분노를 뒤집어쓴 것은 무고한 요르단군과 민간인들이었다. 어쨌던 간에 이 전투에서 가장 득을 본 것은 아라파트와 파타당이었고 아랍 세계에서 큰 명성을 얻은 파타당은 PLO의 주도권을 획득했다.

이런 군사적인 분쟁 말고도 내부 문제도 어느 정도 있었다. 당시 요르단의 팔레스타인 캠프의 지배자는 PLO의 팔레스타인이었다. 요르단 경찰이나 군대는 아예 간섭을 못 했다. 심지어 이들은 캠프에 검문소를 설치해서 통행세를 갈취하기까지 했다.

결국 1968년 11월 후세인 국왕과 PLO 사이에 협상이 이루어져 7개 조항이 합의되었다.

양측의 합의로 PLO의 행동을 통제하는 조항이 만들어졌지만 PLO는 이를 준주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민병대 내부의 규율은 완전히 없다시피 한 수준이었고 카마라 전투 이후 여러 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기다 보니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중앙조직의 힘도 전무했다. 더구나 시리아이라크의 지원을 받고 생겨나는 단체들도 있었고 어떤 단체들은 급진주의적인 자세를 취해 요르단 왕가의 권위에 반발하면서 저항을 촉구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어떤 단체는 깡패 조직화 되어서 차량을 탈취하지를 않나 상인들과 난민들에게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돈과 물품을 강탈하기까지 했다. 그러다보니 요르단에서 PLO를 향한 반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1968년 중순과 1969년 말 사이에는 갈등이 더욱더 고조되었다. 요르단군과 팔레스타인 민병대는 수시로 충돌했고 폭력행위와 납치가 수시로 벌어졌다. 심지어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요르단 군인을 죽인 뒤 그 군인의 머리를 잘라서 축구를 한 일도 있었다. 다음해인 1970년 2월 미국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을 만나고 돌아온 후세인 국왕은 PLO의 활동을 제한하는 칙령을 내렸고 결국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처절한 시가전이 벌어져 300명이나 사망했다.

1970년 7월 이집트와 요르단이 유엔 안보리 결의안 242호를 받아들이기로 하면서 상황은 점점 심각해졌다. PLO와 이집트의 좋은 시절은 끝나 버렸고 점점 더 과격해지는 PLO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요르단과 끝장을 보겠다면서 발악했다. PLO는 후세인 국왕 암살을 여러 번 시도했고[2] 1970년 9월에는 PLO 내 강경분파였던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은 여객기 5대를 납치해 요르단 공군의 비행장이었으나 자신들이 장악하고 이른바 '혁명 공항'으로 선언한 자르카의 도슨스 비행장에서 4대를 날려버렸다(PFLP 동시다발 하이재킹 사건).[3]

3. 결과

하이재킹 사건에 분노한 후세인은 결국 PLO를 자국 내에서 축출하기로 결의하였고 9월 15일 저녁 요르단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9월 17일 후세인 국왕의 명을 받은 요르단군은 수도 암만을 비롯해, 제라쉬, 이르비드, 자르카 등 주요 도시들을 포위한 후 도시에 주둔한 PLO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PLO는 요르단군의 공격에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이윽고 요르단군과 PLO 사이에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공격 개시 다음날인 9월 18일에는 시리아군이 PLO 지원을 위해 요르단을 침공, 요르단군과 PLO가 전투를 벌이는 이르비드로 진격을 시도했다. 긴급히 방어에 나선 요르단 육군 제40기갑여단이 격렬한 전투 끝에 요르단 북부로 진입한 시리아 육군 제5보병사단 예하 1개 전차여단과 1개 기계화보병여단의 전차 300여대를 일시적으로 멈춰세웠지만 국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했다고 판단한 후세인 국왕은 영국, 미국, 이스라엘 등에 개입을 요청했다.

후세인의 절박한 요청을 거절한 영국과 달리 미국과 이스라엘은 군사적 개입 요청을 승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리처드 닉슨은 단독개입을, 헨리 키신저는 이스라엘과의 공동 개입을 선호했으나 개입해야 한다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내각에도 요르단은 6일 전쟁 당시 이집트의 프로파간다에 속아넘어가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괘씸죄가 있으니 그냥 망하게 내버려 두자는 각료들이 있었지만, 골다 메이어 총리를 포함한 다수파는 옛 일은 덮어두고 하심 왕가를 지원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다행히 9월 22일부터 시작된 요르단군의 반격이 성공하여 후세인 국왕의 군사적 개입 요청은 철회됐다. 시리아 국방장관 겸 공군참모총장 하페즈 알아사드와 시리아 최고권력자이자 침공을 주도한 살라흐 자디드 사이의 알력다툼으로 시리아군이 항공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이 요르단군은 공지합동으로 역습을 실시하여 시리아군에 막대한 타격을 가했다. 심각한 피해를 입은 시리아군 5사단은 이날 늦은 오후부터 요르단 영토 바깥으로 철수를 시작했다.[4]

한편 요르단군과 PLO가 전투를 벌이던 그 시각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아랍 연맹 정상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아랍 국가들은 요르단군의 PLO 강경 진압에 대해 팔레스타인인을 학살한다며 후세인과 요르단을 맹비난했고, 회의에 참석한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는 회의에 참석한 후세인을 조롱하기도 했다. 정상회의를 개최한 나세르가 후세인과 아라파트 사이를 직접 중재하면서 9월 27일 요르단군과 PLO 사이에 휴전이 타결되었으나 이미 건강이 좋지 않던 나세르는 사태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생하면서 다음날인 9월 28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0월 13일 후세인과 아라파트 사이에 또다른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PLO는 요르단 정부의 우세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PLO를 팔레스타인인의 유일한 대표단체로 인정하라"는 PLO의 요구가 있었고 요르단 정부는 이를 거부한다. 후세인은 강경파인 와스피 탈을 총리로 임명하였고, 탈 내각의 강경 진압으로 요르단 각지의 PLO 조직은 요르단군의 공세로 인해 하나둘 무너진다. 1971년 7월 요르단 아질룬 인근 숲에 마지막으로 남은 PLO 2,000여 명도 요르단군에게 항복한 후 시리아로 이동했다. 그리고 1971년 7월 17일 후세인은 직접 기자회견을 통해 요르단의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선언하고 '상황 종결'을 선포하였다. 아라파트는 요르단군이 25,000여 명을 죽였다고 비난했으나 실제로는 PLO측이 2,000명에서 3,400여 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되며 요르단군측은 537명이 전사하였다.

그리고 시리아로 쫓겨난 PLO는 요르단의 강경진압에 대해 요르단의 배신이라고 성토했고 보복을 선언했다. 검은 9월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검은 9월단은 1971년 아랍 연맹 정상회의를 위해 카이로를 방문한 요르단의 와스피 탈(1919~1971) 총리를 암살했고 1972 뮌헨 올림픽에서는 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선수단을 인질로 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골다 메이어는 아랍 국가들이 자기네 나라 안에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들을 제어할 수 없다는 변명에 대해서 더욱 냉소적으로 변하게 되었다.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메이어는 후세인은 수 년간 자기네들에게 PLO를 몰아낼 힘이 없다고 징징대더니 정작 자신의 왕궁이 위협받자 아주 훌륭하게 해내더라고 씹으면서[5] 레바논이 PLO를 단속하라는 말을 능력 부족을 핑계로 듣지 않으면 자기들이 직접 때려잡아 주겠다고 덧붙였다.[6]
[1] 애초에 요르단과 전면전을 벌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야라파트의 생포와 PLO의 뿌리를 뽑기 위해 벌인 전투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측은 피해만 입은 채 철수했고 원래 목적인 PLO 멸망은 실패했다.[2] 심지어 PLO에 동조하는 요르단 공군 전투기 조종사가 후세인 국왕이 탄 헬기를 기관포로 공격한 일도 있었을 정도였다.[3] 납치기들 중 엘알 219편은 납치범 2명이 모두 제압되었고 런던 히스로 공항에 비상착륙함으로써 유일하게 폭파를 면하였다.[4] 알아사드는 같은해 11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자디드를 축출하고 시리아의 최고권력자 자리에 오른다.[5] 다만 상술했듯 이와 별개로 메이어는 사건 당시 요르단 편을 들어 요르단군 지원을 검토하기도 했다. 요르단이 PLO를 손수 때려잡겠다고 나서니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환영할 만 했다.[6] 이후 이스라엘은 PLO 소탕을 위해 레바논 내전에 개입하며, PLO는 이스라엘은 물론 한때 자신의 편이었던 시리아에게도 공격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