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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5 12:29:03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두크비츠

<colbgcolor=#000,#050505><colcolor=#fff>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두크비츠
Georg Ferdinand Duckwitz
파일:duckwitz.jpg
출생 1904년 9월 29일
독일 브레멘
사망 1973년 2월 16일 (향년 68세)
독일 브레멘
직업 외교관
1. 개요2. 시작3. 덴마크의 기적4.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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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Georg Ferdinand Duckwitz. 나치 독일, 그리고 서독외교관. 덴마크의 기적을 만든 장본인.

2. 시작

1904년 태어난 두크비츠는 브레멘의 유명한 상인집 아들로,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을 졸업한 후 커피 회사(Café HAG)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8년 코펜하겐으로 가게 되었다. 1932년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만나게 되고 1933년 나치 독일에 입당한 후 외무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1935년부터 나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반유대주의가 불던 때 자기 집 아파트에 유대인 3명을 숨겨주었다. 그리고 나치를 탈당했지만, 1941년 다시 외무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3. 덴마크의 기적

1943년 같이 근무하던 베르너 베스트에게서 10월 1일 유대인들을 넘길거린 소식을 듣고 스웨덴에 덴마크 유대인을 난민으로 처리할 것을 요청하고, 1943년 9월 28일 나치 정복 차림으로 노동당 앞에서 나치의 계획을 밝혔다. 덴마크 노동당은 이를 알렸고, 29일 이 소식이 덴마크 전체에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10월 1일이 밝자, 나치 친위대들은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되었다. 덴마크 경찰은 이들을 방해하고, 거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다 스웨덴으로 도망간 상태였고, 건너갔던 당시 유명인사였던 닐스 보어[1]가 스웨덴을 설득해[2] 난민으로 받아들인다고 공식 성명을 내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직 580명만 나치 돌격대에게 잡히게 된다. 물론 덴마크는 이 580명에 대해서도 계속 나치를 괴롭혀 한명도 치클론 B를 맡게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돌프 아이히만이 좌절

4. 이후

종전 후 서독의 외교관으로 서독 덴마크 대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빌리 브란트가 수상이 되자 외무부 차관으로 폴란드 정부와 화해를 주선하라는 명령을 받아 폴란드 정부와 화해를 주선했다. 1970년 은퇴하였으며, 1971년 이스라엘로부터 세계의 은인 칭호를 받게 된다.


[1] 어머니가 유태인이었다.[2] 스웨덴은 그를 미국으로 보낼려 했지만, 사람들 안 받아주면 미국으로 안간다고 뻐팅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