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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3 10:55:28

경성호국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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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호국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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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 경성신사 경성호국신사 박문사 약초사


1. 개요2. 역사3. 현재

1. 개요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는 오늘날 서울특별시 용산구 신흥로 22가길, 26길 부근에 있었던 일본 제국 일본군 전몰자를 기렸던 신사(神社)이다.

2. 역사

일본에는 원래 전사자에 대한 위령제를 지내는 초혼사(招魂社)라는 시설이 있었다. 그런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전사자가 늘어나자 1938년 일제는 초혼사의 명칭을 호국신사라 하고 관련 제도를 정비했다. 일본 본토에서는 내무대신(内務大臣) 명의로 호국신사들을 정하고 관리했지만 식민지에서는 총독들이 관리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 명의로 경성부(서울)에 경성호국신사가, 함경북도 청진부(청진시)에 나남호국신사(羅南護國神社)를 짓기로 했다. 경성호국신사는 1943년 11월 용산 일본군기지[1]와 가까운 곳에 완공되었다. 나남호국신사 또한 일본군 주둔지 가까운 곳에 세웠다. 공사비는 약간의 국고보조에, 대부분은 헌금을 갹출해 마련했다.
우리가 내야 할 각종 성금 목록이 무자비하게 쌓여 간다. 당국은 국채-이율이 3.5%인 지나사변 국채-까지 강매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경찰대로 30만엔이 소요될 경찰관 관사를 짓겠다고 10만엔을 모금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종로경찰서도 재건축을 하겠다고 더 많은 금액을 긁어낼 것이다. 전몰장병 영령들을 모실 신사를 경성과 남산에 각각 한 채씩 짓는 데도 성금이 징수될 것이다.
윤치호 일기》 1939.9.3.#

1945년 이전 일본에서는 정부가 일본 전역의 신사에 등급을 매기는 근대사격제도를 시행했다. 사격제도에서 관국폐사(官国幣社) 밑으로는 일본의 현이나 촌 같은 행정구역을 대표하여 현사, 촌사 등을 두었다.[2] 조선총독부는 본토와 별개로 관국폐사 등급 밑으로 도공진사(道供進社)·부공진사(府供進社)·읍공진사(邑供進社)라는 등급을 새로 만들었다. 각각 도(道), 부(府), 읍(邑)의 행정구역에서 공물을 올리고 유지비를 지원했다. 경성호국신사는 도공진사(道供進社)였으므로 경기도에서 예물을 바치고 유지비를 지원했다.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게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소리소문 없이 버려졌을 것이다. 경성호국신사는 창건으로부터 광복 때까지 1년 9개월 남짓 유지되었다. 경성호국신사의 주변은 자연 그대로 남산자락 숲이었으나, 1945년 광복 후 경성호국신사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한 뒤로는 신사(神社)와 숲을 헐고 사람 사는 달동네가 형성되었다.[3]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고 피난민들도 내려와 경성호국신사 자리 주변에 정착했고 그 후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과정에서 남산자락 숲이 대부분 사라지고 판자촌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해방촌이다.[4][5]

3. 현재

현재는 단순 동네계단인 서울 용산구 후암동 108계단이 경성호국신사의 흔적이다. 해오름빌[6]이라는 빌라 옆에 경성호국신사의 옹벽인 듯한 벽이 있는데, 108계단과 옹벽 외에는 경성호국신사의 다른 흔적들은 깨끗이 사라졌다.

개요에 소개된 주소로 구글 지도구글 어스를 이용해 지형을 살펴보면 신사 경내로 추정되는 구역을 볼 수 있다.

네이버 모 블로그의 신사 경내 추정도는 거르면 될 듯하다. 블로그에서 추정한 구역을 보면 해방촌 고지대로 올라갔다가, 보성여자중학교·보성여자고등학교이태원동 방향 즉 내리막 길로 가는 방향인데, 신사는 보통 평평하게 평탄화 작업을 한 땅에 짓는다.

[1] 현재의 용산기지[2] 가령 현사라면 그 시설이 있는 현에서 예물을 바치고 지원비를 주는 식이다.[3] 만약 패전 후에 신사의 궁사들이 승신식 같은 의식을 진행하고 신사경내를 철거했다면 호국신사 터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성호국신사에 대한 자료는 매우 적어서 추측만 할 뿐이다.[4] 현재의 용산동2가, 후암동 일부[5] 남산 산기슭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제법 높은 고지대이다.[6] 거주자외 외부인 출입금지 구역이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