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서울과 인천을 이었던 대규모 송수관과 그 상부를 덮었던 도로를 말하며 '수도길'이라고 불렀다.조선 말기까지의 제물포 시가지는 인천항 바로 앞의 어촌이 전부였다.[1] 이 지역은 바로 앞의 바다와 주변 구릉지 및 산으로 인해 제대로 발달된 수계가 없었으며, 지하수 역시 해수의 영향으로 개발이 어려워서 우물의 용량이 작은 마을 규모인 당시 제물포 인구 정도만 감당해낼 수 있는 정도였다. 조선시대까지 서울로 향하는 해운이 종착하는 항구는 인천이 아닌 마포구였기 때문에 10여개 집이 오순도순 어촌을 이루고 있던 작은 제물포는 적은 우물만으로도 물 공급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1883년 강제 개항되면서 인천은 당시 한성부의 물동량을 감당하는 대표 무역항으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많은 일본인이 정착했다. 청일전쟁이 끝난 1895년에는 4000명의 일본인이 조계지와 그 주변에 모여 살게 되면서 현재의 인천 중구 개항장 일대를 구성하게 되었고, 무역항이 된 인천항에 중국 상인들이 들어와서 차이나타운까지 구성, 상수도 시설이 없는 인천은 물 공급이 큰 문제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러일전쟁이 끝난 뒤인 1905년, 일본인 나카지마(中島)가 다른 일본인들과 함께 서울과 인천 사이의 상수도 건설계획을 추진, 설계하였다. 일본인이 많이 사는 용산과 인천 개항장에 상수도를 공급하는 설계였다. 이 설계도에 의하면 수원지는 한강 노량진동[2] 일대이고, 급수지역은 서울, 용산, 인천지역이었다. 이 설계도에 따라 1906년 6월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오늘날 재정경제부와 비슷한 국가재정 전반을 다루던 탁지부에 수도국을 두었다. 그런데 재정이 부족해 수도사업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일본의 한국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정부에 관세수입을 담보로 일본흥업에서 1천원을 대출받아 상수도 사업을 시행하였다. 1906년 11월 노량진 수원지에서 공사를 시작하여 1910년 10월 준공되었다. 인천 수도국산[3]에도 송현배수지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게 되었다. 노량진하고 수도국산 사이 32.62㎞에는 지름 500밀리미터 독일제 주철 수도관이 깔렸다. 이 수도관을 땅 밑에 심고 그 위는 흙을 덮어서 폭이 4미터나 되는 당시에는 제일 큰 신작로인 수도길을 만들었다. 수도선로(水道線路)라고 명명했다.
1910년 10월 30일 통수식과 시범급수를 거쳐 12월 1일 급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수돗물이 송현배수지에 가득 차게 되었다. 이 송현배수지는 부지면적 36,780㎡이고 5,000㎥ 저수조 3개를 갖추고 있었다. 제물포 일대에 하루 2만톤에 달하는 수돗물을 공급했다. 이 물로 일본인 거류민들이 맘껏 식수로 쓰고 목욕물로 쓰고 제물포 일대에 세워지기 시작한 군수공장의 공업용수로도 썼다. 당시 제물포항에 정박하는 일본기선, 서양기선들도 식수를 공급 받았다.
2. 경로 및 현재
경인수도는 상부를 덮은 '수돗길' 혹은 '수도선로'라 불리는 신작로와 함께 개통되었기 때문에 현재에도 서울-인천간에 도로로 흔적이 많이 남아있으며, 일부 시설은 여전히 수도공급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이 수돗길은 한국이 근대적으로 발전하기 전까지만 해도 경인선과 함께 경인지역을 잇는 주요 교통로중 하나였으며, 인천 상륙 작전 당시에는 오히려 6번 국도보다 큰 규모였기에 인천에서 서울 방향 진격에도 국도가 아닌 경인수도 수돗길이 활용되었다. 현재는 크고 좋은 대체 도로가 많이 뚫려서 많은 구간이 이면도로화 되어있지만 연속적으로 연결되어있어 지적편집도 내에서 보면 연속성이 보인다.사육신묘 근처 현재 노들나루공원에 있었던 노량진 정수장에서 출발한 수도길은 영등포에서 경인선 철도 및 경인로와 엇갈리며 영등포로터리와 오목교를 지나 서울시 서쪽의 김포 정수장으로 올라간다. 김포 정수장은 지금의 서서울호수공원[4]이다. 서서울호수공원 근처에서 수도길은 북서방향으로 부천시 고강동을 지나가 서쪽으로 부천 제일시장을 통과한 뒤 남서방향으로 원종동을 지나 부평을 향한다. 오정동 군부대 및 경인고속도로를 만나고, 신흥동과 도당동 사이의 경계를 이루다가 약대오거리를 넘어 약대동을 관통한 뒤, 중동신도시를 지나(이 구간은 흔적이 거의 없음) 현재 부평중학교 뒤(장제로189,190번길)를 지나 계속되어 현재의 미군부대인 부평 캠프마켓으로 이어진다. 캠프마켓에서 수도길은 장고개(場峴)로(현재는 한국군 군부대가 장고개가 있는 산곡동에 위치하여 민간인 통제지역이다)를 지나 주안역 북쪽의 옛 염전 근처인 염전로201,202번길을 거쳐 송림삼거리에서 인천서흥초등학교를 지나가는 고개길을 올라 동인천역 북쪽의 수도국산(水道局山)에서 끝이 난다.
이렇게 저렇게 남아있는 흔적은 아래와 같다. 지적편집도로 보면 대부분 지목이 "수"(수도공급 및 하수도시설)로 되어있다.
- 노들나루공원(구.노량진 배수지 공원)(노량진동 258번지, 구 노량진수원지) - 노량진로
- 여의대방로62, 61길 - 영등포로57길 - 경인로112길 - 영등포로터리
- 영등포로 - 오목로 - 신정중앙로 - 화곡고가/국회대로 교차 [5]
- 강서로5나길[6] - 월정로17길 - 남부순환로65길
- 서서울호수공원(구 신월동정수장)
- 역곡로482, 481번길 - 성지로102, 101번길 - 소사로794, 793번길 - 성오로128, 127번길 - 상오정로[7]
- 수도로[8]
- 약대동에서 인천시계까지는 중동신도시 개발로 인해 흔적이 사라졌다.
- 충선로161번길 - 장제로190, 189번길 - 부평고등학교 - 부평대로104번길
- 부평여자고등학교 - 부평 창보아파트, 대우아파트 - 부평구건강가정지원센터
- 부평주한미군기지 내 통과 - 인천산곡남초등학교/산곡여자중학교 - 마장로204번길 - 부평주한미군기지 내 통과
- 장고개로 - 인천교공원[9] - 염전로201번길, 144번안길, 202번길 - 송림로201번길 및 본선 - 송림로157번길 - 육송로44번길 - 샛골로194, 193번길 - 안송로113번길
- 송현근린공원(구 송현배수지, 수도국산. 경인수도 종점.)
[1] 당시까지도 인천의 중심지는 문학동 일대이다.[2] 현재 노량진동 258번지 한강대교 남단. 현재도 노량진 배수지 공원이 조성된 곳이고, 지하에는 여전히 수도시설이 있어서 노량진 배수지 수몰 참사가 난 곳이기도 하다.[3] 수도국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산에 수도국에서 송현배수지를 조성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이름은 송림산 또는 만수산[4] (구.신월동정수장) 신월동-부천시 사이는 꽤나 높은 구릉지이다. 개화기 당시 상수도 기술의 한계로 이 고개를 노량진 수원지의 수압만으로 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중간 저수지 겸 정수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현재 호수공원은 이 정수장을 리모델링한 것이다.[5] 목동동로 - 목동7단지아파트 중앙길 - 목동로25길 - 국회대로7길 - 강서로5나길 - 곰달래로14길 구간은 복개천 구간이다.[6] 흔히 화곡동-신월동 복개천 유흥지구로 통하는 지역이다. 해당 구간은 위에서 언급한 복개천 수로와 경인수도 상수로를 동시에 부설한 구간이라 도로 폭이 넓어 도로 양쪽에 주차장을 운영중.[7] 본 도로보다 한블럭 북쪽의 신월동정수장 - 역곡로490, 489번길 - 성지로112, 111번길 - 소사로808, 807번길 - 성오로160번길 - (국가보안시설) - 부천로460, 459번길로 이어지는 구간은 신규 간선 수도관 매설 도로. 해방 이후에 경인지역 물 공급이 경인수도만으로는 부족해지자 1959년 신월동정수장-노량진간 상수도 용량 업그레이드와 함께 개설되었다.[8] 당연히 이 도로 이름의 기원은 경인수도이다.[9] 과거 이곳은 서해바다가 들어오던 뻘밭으로, 인천교라는 다리가 들어서있다가 매립되었다. (이곳에서 경인수도와 교차하는 방축로는 바로 과거 인천 앞바다의 방조제인 방축이었다.) 인천교가 세워지기 이전에는 수도나루라고 불렸던 위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