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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01:04:03

고려증권 배구단

대한배구협회
대한민국의 해체한 배구단
국제 배구단 효성 배구단 고려증권 배구단 미도파 배구단
서울시청 배구단 SK케미칼 배구단 한일합섬 배구단 한국 후지필름 배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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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즌이었던 1997-98 슈퍼리그 때의 사진. 고려증권 멤버 중에서 가운데가 이성희, 왼쪽은 문병택, 스파이크를 때리고 있는 선수는 손재홍이다. 상대는 한양대학교 배구부로 왼쪽부터 석진욱, 이경수, 손석범.

1. 개요2. 역사3. 출신 선수4. 역대 감독5. 역대 단장6. 우승 경력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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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3년 3월에 창단해 1998년 2월까지 존속했던 배구단. 모체는 IMF로 부도가 난 고려증권(고려통상[1] 계열)이었다. 마스코트는 여왕벌이었다.[2] 배구해설가로 이름을 날린 오관영이 고려증권의 모기업인 고려통상 상무로 있으면서 배구단 창단에 깊이 관여했다.창단 비하인드 스토리

2. 역사

1983년에 창단하며 신생 구단에 대한 배려로 장윤창, 이경석, 정의탁, 류중탁 등 당시 국가 대표 엘리트들을 비교적 적은 돈으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 중 장윤창은 당시에는 강만수의 후계자로 꼽힐 정도로 강력한 스파이크를 뽐냈고 나중에는 경험치까지 쌓여서 배구판에서 꽤 오래까지 경기력을 유지했다. 국내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도 보여 주던 최고의 라이트 공격수로서 제1공격수 역할을 90년대 초반까지 담당했다. 거기다 정의탁과 류중탁[3]이 책임지던 센터진은 고려증권 최고의 속공을 펼치면서 그야말로 고려증권의 전성기를 열었다.

스타 플레이어들이 노쇠화되기 시작할 때 현대자동차써비스의 강력한 현질 스카우트가 개시됐고 그렇게 힘이 빠져가나 할 때 진준택 감독의 부임과 더불어 박삼용-이성희 콤비를 중심으로 문병택-이수동-박선출 등의 선수들로 압도적인 스타는 없었지만 그만큼 끈끈하고 유기적으로 돌아가던 체계를 구축해 1988~1989시즌 제6회 대통령배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에도 스타 플레이어들을 중심으로 화려하고 선 굵은 배구를 선보이던 현대자동차써비스와 팽팽한 라이벌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로 모기업인 고려증권이 부도가 나면서 구단 운영이 어려움에 빠졌고 숙식도 여관방에서 해결해야 했다. 당시 배구협회가 출전비를 지원해서 간신히 1997~1998 시즌에는 출전했지만 결국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아 해체되었다.

1996 슈퍼리그 결승 제4차전 현대자동차써비스과 고려증권의 명승부 게임. 고려증권의 신들린 듯한 수비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링크 이 당시는 서브권이 있을 때만 점수가 올라가던(5세트 제외) 사이드아웃 시절로 현행 랠리포인트제 도입은 고려증권이 해체된 뒤의 일이다.

몸을 던져 상대의 강스파이크를 걷어올리던 고려증권 선수들의 처절함의 끝을 보여준 4차전 경기 영상이다.



여담으로 국내 다른 스포츠 종목의 구단 중에서는 KBO 리그해태 타이거즈와 여러모로 비슷한 컬러를 갖고 있었다. 양측 모두 준척급 이상의 엘리트 선수가 다수 포진했고[4] 특히 특정 몇몇 선수에 의존하는 플레이보다 끈끈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한 조직력과 정신력으로 강팀에 맞섰다. 또 이같은 조직력과 정신력을 앞세워 1980~1990년대 리그를 평정하기도 했다. 두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응용 감독과 진준택 감독 모두 강력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선수단을 장악하는 스타일로 유명했다는 점도 비슷했다.[5] 게다가 두 팀 모두 모기업인 고려증권과 해태제과의 자금력이 다른 팀의 모기업에 비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고 나란히 1997년 외환 위기로 모기업이 부도를 맞았던 것도 똑같다. 다만 해태 타이거즈는 기아자동차가 인수해서 KIA 타이거즈로 부활했지만 고려증권은 결국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그대로 해체되는 비운의 결말을 맞이하였다.

모기업의 부도로 결국 마지막이 되어 버렸지만 슈퍼리그 1997-98 시즌 고려증권 배구단의 사투는 많은 배구 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외환위기의 살벌한 한파 속에서 특히 순식간에 직장을 잃고 실업자가 된 수많은 넥타이 부대가 고려증권 경기가 있는 날이면 체육관을 가득 메웠고 고려증권 힘내라라면서 열광적인 응원을 하였다. 그들은 단 한 푼의 지원도 받지 못하면서도 꿋꿋히 이미 망해 버린 고려증권의 로고를 달고 사력을 다해 싸우는 선수들에게서 자신들의 모습을 투영한 것이다. 그렇게 고려증권 배구단은 많은 이에게 감동을 안겨주고 결국 슈퍼리그 4강을 마지막으로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지금도 인터넷에 보면 그 시절의 고려증권 배구단을 추억하는 수많은 이들의 글을 찾을 수 있다.

2017년 황금 시대의 주역들과 인터뷰를 했다.#

창단식 영상이 아직 남아 있다.대한뉴스

3. 출신 선수

이하 가나다순, 괄호는 구단 소속 기간

4. 역대 감독

5. 역대 단장

6. 우승 경력

삼성화재 배구단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통령배-슈퍼리그 통산 최다 우승 구단이었다. 고려증권이 마지막으로 참가한 1997년 대회부터 삼성화재가 무려 8년 연속 우승을 거머쥐면서 남자 배구계의 세력 교체가 이뤄진다. 참고로 고려증권의 라이벌이자 만년 콩라인에 머물던 현대자동차써비스 배구단은 고려증권에 이은 대통령배-슈퍼리그 5회 우승 경험이 있다.
우승 (6회)
1984년 제1회 대통령배
1985년 제2회 대통령배
1988년 제6회 대통령배
1990년 제7회 대통령배
1993년 제10회 대통령배
1996년 슈퍼리그
준우승 (3회)
1987년 제5회 대통령배[9]
1992년 제9회 대통령배[10]
1994년 제11회 대통령배[11]

7. 기타



[1] 고려대연각타워 소유주로 알려진 회사.[2] 왕관을 쓴 벌이고 몸통에 고려증권 CI가 붙어 있다. 고려증권 배구단 말기에 여왕벌에서 돌고래로 마스코트가 바뀌게 되는데 당시 계열사인 고려관광(현재 서울에 소재한 서울고려관광과는 관계가 없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 류윤식의 아버지.[4] 고려증권에 장윤창, 정의탁, 류중탁, 이경석, 어창선, 박삼용, 이성희 등이 있었던 것처럼 해태 타이거즈에도 선동열,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김성한, 김종모, 이순철, 이건열, 김정수, 장채근, 조계현, 문희수, 신동수, 송유석, 이강철, 이호성--, 정회열, 이종범, 이대진, 임창용, 김상진, 장성호 등 엘리트 선수가 많았다.[5] 진준택 감독은 선수 전원에게 무기한 사직서(사직 날짜가 적혀지지 않은 사직서를 무기한 사직서라고 한다.)를 받아놓고 선수가 은퇴할 때까지 보관했다고 한다. 실업배구 시절이라 선수들은 운동선수이자 회사 정직원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직서를 받아놓을 수 있었다.[6] 참고로 윤상용과 이재욱은 성균관대 89학번 동기다.[7] GS칼텍스 시절에는 이희완 감독이 지병으로 감독직에서 하차하게 되자 대행 신분으로 챔피언결정전 우승을 이끌고 정식 감독이 되고 나서도 정규시즌 우승을 겪었지만, 인삼공사 시절에는 극단적인 몰빵배구와 국내 선수 육성 전무로 팀을 완전히 나락으로 빠뜨리면서 인삼공사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낙인되고 말았다.[8] 2018년 컵 대회부터 경기감독관과 심판감독관을 번갈아 본다.[9] 현대자동차써비스에 패배.[10] 상무 배구단에 패배.[11] 현대자동차써비스에 패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