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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13 21:06:08

장윤창

파일:장윤창.jpg
장윤창
張允昌
출생 1960년 9월 10일 ([age(1960-09-10)]세)
충청남도 논산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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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송산중 - 인창고 - 경기대
포지션 세터, 아포짓 스파이커
신체 신장 195cm
소속 구단 고려증권 배구단 (1983~1994)
가족 관계 아내 이성희, 아들 장대한, 장민국

1. 개요2. 선수 경력
2.1. 스파이크 서브2.2. 현대 창단 비화
3. 은퇴 후4. 가족5. 논란6. 관련 링크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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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배구인. 前 고려증권 소속.

현재 경기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프로배구 KOVO 경기감독관으로도 재직했으나 오심 논란으로 인해 2010년을 끝으로 옷을 벗었다.

2. 선수 경력

파일:external/www.koreadaily.com/083954390.jpg

배구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세터였으나, 공격수로 전향한 뒤 왼손잡이(사실은 양손잡이에 가까울 만큼 오른손도 잘 썼다)라는 특성 때문에 라이트 포지션에서 뛰었다. 그가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뽑힌 게 인창고 2학년 때였다고 하니, 그의 천부적인 재질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약관 18세 나이인 1978년 강만수, 김호철, 강두태, 정강섭, 이인 쟁쟁한 선배들과 같이 주전으로 뛰면서 한국 배구 역사상 최고의 성적인 4강 진출을 이뤄냈다.

이때의 쾌거 이후 발판이 된 남자배구의 실업리그화 선봉장으로 제1회 대통령배 배구대회(1984년)에서 인기선수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대회가 거듭될수록 MVP와 베스트 6에 뽑히는 찬란한 기록을 세웠다. 그래서 특히 80년대 초중반부터 배구를 본 사람은 상술한 선배들이 해외진출로 국내에서 볼수 없는 상황에서 그때도 이미 최고의 공격수이자 세계적인 선수였던 장윤창을 보고 자랐고 장윤창하면 배구를 떠올릴 만큼 장윤창은 배구의 대명사였을 정도라 한다. 이는 대한민국 최고 선수였던 김호철은 유럽에 진출했고(세터라서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지만), 아시아의 거포 강만수는 장윤창보다 시대가 조금 앞서서 백구의 대제전 때까지 활약한 장윤창보다 현재 팬들에게 인지도가 낮기 때문이다. 거기다 장윤창은 자기관리도 잘돼서 34세의 나이인 1994년까지도 선수로 활약한 덕에 오랫동안 한국 배구의 상징으로 남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의 놀라운 체공력으로 어택 라인 밖에서 점프하며 몸을 뒤로 젖히고 나오는 백어택은 보는 사람을 경악하게 만들었고, 이는 그가 '돌고래'라는 애칭을 얻으며 후세에 회자되고 있다. 그의 뒤를 잇는 선수로 김세진박철우가 있지만 워낙 장윤창의 아성과 국제무대에서의 성과가 높아 배구팬들 사이에선 대부분 이들이 성적이나 선수능력,테크닉등에서 장윤창보다는 조금 뒤진다는 평. 물론 김세진이 월드리그 6강 진출때 에이스활약도 했고 국내대회에서 MVP를 많이 받기야 했지만 그건 소속팀의 무지막지한 독주 때문에 인정하기 힘들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장윤창의 경우는 소속 팀인 고려증권의 부실한 선수층과 신인 선수 수급이라는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끈끈한 노력으로 팀웍을 이루며 지겨울 정도로 독주를 벌이지 않았기에 인정받는 것이다.

2.1. 스파이크 서브

대한민국 배구에서 국내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를 시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며 그가 작두를 타는 시즌에는 100% 고려증권의 우승이라 할 만큼 고려증권의 핵심 멤버였다.

단 세계 최초의 스파이크 서브 시도라는 점은 기록 부족으로 정확한 답을 찾기는 힘들며, 현재까지는 한국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를 개인 전술로 활용한 선수이자, 세계적으로도 최초에 가까운 선수라는 점은 확실한 영상증거가 남아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3개월 동안 뛰면 20만 달러를 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었어요. 그 당시에 20만 달러면 강남에 있는 아파트 8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 협회에서 저도 모르게 거절했더라고요. 국가대표 주축 선수들이 다 외국으로 나가 있으니깐 저까지 빠지면 전력 손실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거죠. 사실 이때 분노의 스파이크 서브가 탄생했어요.(웃음)” 당시 실망감으로 가득 찬 그는 중동으로 전지훈련을 떠난 대표팀을 뒤로 한 채 한국에서 홀로 방황하는 시절을 보냈다. “원로 선배들이 ‘아직 앞길이 창창한데 이래서 되겠냐’ 하면서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라고 설득하셨죠. 결국 그분들의 말을 듣고 전지훈련에 합류했어요. 솔직히 연습도 하기 싫은데 스파이크 서브나 한번 해보자 해서 시도한 거죠. 근데 아무도 못 받더라고요. ‘아, 이거 조금만 다듬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2018년 10월 30 일 브라보마이라이프 인터뷰###

이전까지의 문서 내용에서 기술된 세계 최초의 스파이크 서브는 1978년경 한 중국의 선수가 시도한 것이고 현재와 같은 강서브보다 약한 위력이었으며 그것도 어쩌다 한두번 시도하는 정도였다. 1981년 이 모습을 보고 현재와 같은 스파이크 서브로 발전시켜 매 게임 사용하기 시작한 선수는 캐나다의 John Barrett으로 ### 스파이크 서브가 일반화된건 1984년 올림픽에서 브라질팀이 사용하고 나서부터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장윤창은 이 1984년 보다도 이전인, 경기대 재학 시절(79학번 이다)에 이미, 민감한 국가 대항전 에서도 강력한 무기로 충분히 사용 할 수 있을 만큼 완성도 높은 스파이크서브(당시는 스카이 서브라고 불렸다.)를 자유자재로 구사 하고 있었다. 1982년 한일남자배구정기전 영상으로 당시 경기대 4학년이던 장윤창은 영상 시작과 동시에 이미 당시에도 매우 완성도 높은 강력한 스파이크서브를 실전에서, 그것도 무려 민감한 한/일 국가대표팀간의 경기 에서 자유롭게 구사 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영상에서 보이는 스파이크서브의 위력과 정확도, 스파이크서브를 연속으로 구사하고도 전혀 위력이 떨어지지 않는 장면을 보면 이미 충분한 시간과 연습을 통하여 완성되어 있었던 개인 전술이라고 할 수 있고 영상에서 확인 할 수 있는 수준을 놓고 보았을 때, 장윤창이 스파이크서브를 구사 한 것이 단기간 사이 였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확인 할 수 있으며, 상기 단락에서 캐나다의 John Barrett이 최초 라고 주장하며 근거로 제시한 링크에 있는, 별 내용도 없이 단순한 주장만 몇 줄 담은것 뿐인 저런 부실한 내용 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이 아닌한 국제교류의 기회가 적고 각국 리그를 통해 발전했던 만큼, 상술한 78년 쯤에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선수들이 시작한 점프 서브를 스파이크 서브의 형태로 완성하여 A클래스 경기에 사용한 시기는 누가 원조냐를 가리기 어려울만큼 비슷한 시기였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은 스파이크 서브를 넣지 못하면 상대에게 위압감을 못 주는 만만한 선수로 여겨지지만, 당시에는 스파이크 서브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서브의 제한 규정도 지금보다 훨씬 까다로웠다.[1] 그런 상황에서 장윤창의 스파이크 서브는 매우 빠른 속력으로 상대 코트로 날아가 작렬하기 때문에 무시무시한 공격과 다름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요즘 제법 한다 하는 선수들의 스파이크 서브가 빠르고 받기 힘들다 하더라도 82년도 기준이면 스파이크 서브의 실제 구속은 기압높은 공을 쓰던 그때가 훨씬 빨랐다. 구속이 훨씬 빠르다보니 받는 것도 더욱 어려웠고 기술적으로 완성된 90년대 초 남자배구 국제경기를 보면 경기가 서브 공방전으로만 가니까[2] 공기압을 낮춘 것, 대신 공에 딤플을 많이 넣어서 변화를 많이 받게 해 받기 힘든 건 그때나 지금이나 차이 없을 정도다.

2.2. 현대 창단 비화

지금의 현대자동차서비스 배구단(이하 현대)이 창단되게 만든 것 또한 장윤창의 간접적인 기여가 한몫했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증권이 창단된 게 1983년 3월이었고 당시 고려증권이 대학 졸업 선수들을 픽업하는 방식으로 장윤창, 정의탁, 류중탁 등을 픽업했다. 그렇게 고려증권 배구단이 생겨났는데, 다섯 달 늦게 현대가 창단될 때 장윤창을 픽하는 조건으로 창단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현대는 고려증권 단장에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분을 섭외하면서 자기 팀 단장으로 불러 들이고 이 과정에서 장윤창을 데려가려 했으나 장윤창은 이 때 이런 말을 남긴다. "남자는 의리를 지켜야 하는 법" 그리고 고려증권에서 나오지 않는다. 졸지에 선수 확보에 비상이 걸린 현대는 외국 무대에서 활약하던 이인, 강만수를 데려오는 정도로 체면치레를 했다.

이런 정도로 그의 재능은 어느 팀이라도 탐낼 만했고 사실 그가 고려증권에 가기 전에 중동에서 오퍼가 들어올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었으나 정작 배구협회인지 뭔지는 본인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채 병역 의무라는 것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막아 버렸다. 왜냐하면 그 당시 한국 배구가 1978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4위[3]를 했는데 당시 주축 멤버들이 줄줄이 해외에 진출하게 되자 위기 의식을 느낀 양반들이 막았을지 모를 일이다.

당시 같은 팀의 세터였고, 前 경기대 배구부 감독인 이경석이 1년 후배이기는 하나 사실은 동갑이고, 이경석이 고등학교에서 유급하는 바람에 1년 늦게 들어가면서 후배가 된 것일 뿐이라 이미 10여 년 전부터 서로 말 놓고 지냈다고 한다.

3. 은퇴 후

1994년에 은퇴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귀국했다. 한때 친정 팀인 고려증권의 코치로도 재직했고, 이후 논산에서 볼링장을 운영하기도 하는 등 개인 사업을 했지만 과감히 접은 후 모교인 경기대학교로 왔다. 그리고 유명 스포츠 스타답게 다른 종목의 은퇴선수들과 함께 봉사활동 단체를 조직해 활발한 활동을 하기도 했다. 현재는 대한민국 스포츠 국가대표 선수회의 회장직을 맡고 있다.

4. 가족


파일:2014060142136188.jpg

5. 논란

6. 관련 링크

7. 관련 문서



[1] 지금은 서브를 넣을 때 타격지점이 인코트 둘레 안이면 인코트 밖에서 서브를 올려도 상관없지만, 당시는 서브를 넣을 수 있는 위치는 인코트 오른쪽 구석의 3m 공간에 불과했으며, 서브가 백테에 스치기만 해도 그냥 아웃이었다. 이 때문에 서브는 배구에서 굉장히 발전이 늦은 분야였고 장윤창 이후 스파이크 서브가 전략화 되면서 배구의 양상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이 스파이크 서브는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랠리포인트 제도, 배구공의 공기압 변화, 리베로 도입 등과 맞물려서 2000년대 이후 스피드 배구가 출현하게 된 주요인이다.[2] 95년 월드리그 지역예선 러시아와의 경기를 본 사람이면 기억할 것이다. 원래 그당시 러시아 배구가 높이와 파워로 찍어누르는 닥공배구였지만 그중 특히 주포인 드미트리 포민의 엄청난 파워 스파이크 서브에 내로라하는 국내 수비수들이 쩔쩔매고 서브에이스를 헌납 하는 장면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을 것 이다.[3] 대한민국 남자배구 역사상 국제대회 최고 성적. 당시 주전은 세터 김호철, 레프트 강만수, 강두태, 라이트 정강섭, 센터 이인, 장윤창이었다. 원포지션인 라이트가 아닌 센터긴 했지만 18세에 세계 4강팀 주전이었던 것이다.[4] 신영수는 6회 지방선거에서는 이재명에 패해 낙선했고, 20대 총선은 경선에서 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