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목 | |
별명 | 마사이찌 (正一) |
출생 | 1916년/1920년[1] |
전라북도 군산시# | |
사망 | 1962년 이후(향년 42/46세 이상) |
대한민국 일대 | |
직업 | 조직폭력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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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조직폭력배. 마사이찌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2. 생애
전북 군산에서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방황하며 17살 때부터 전라도와 부산경남 지역을 휩쓸며 일제강점기 때부터 부산의 주먹왕자로 유명했다. 부산의 김두한으로 불릴만큼 부산의 거물급 주먹이었다. 당시 깡패들이 그렇듯 자신을 정의청년이라고 미화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의 기록은 없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온 서울의 주먹들과 엮이며 이름이 알려진다. 이른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고 하자 불화를 빚는데, 명동에서 온 이화룡 패거리와 마찰이 심했다. 결국 적산가옥을 두고 이화룡 패거리와 다투던 중 황병관에게 따귀를 맞고 개털린 고영묵이 빡쳐서 총을 빼내 황병관을 쏘아 죽인다. 헌병대에 넘겨졌지만 정당방위였다고 판결받으며 풀려났고 이후 황병관의 원수를 갚으러 온 시라소니 이성순에게 보복당한다. 시라소니와는 무관하게 1959년 2월 22일 세 명에게 습격당하며 춘해병원[2]으로 이송된다.이성순에게 탈탈 털린 후에도 부산에서 세력을 자랑했다고 하며 캬바레 같은 유흥업소를 운영하고 논개 영화 제작에 관여해서 큰 수익을 거뒀다고 한다. 하지만 군사 정권이 들어서며 세력을 잃은 뒤에는 부산의 주먹왕자에서 그냥 동네 양아치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재일교포들을 향해 온갖 폭행과 금품갈취를 일삼다가 입건되어 부산교도소에 수감된다. 하지만 폐결핵으로 인한 보석으로 석방.
세력을 잃고 서울로 상경, 하지만 옛 성깔은 버리지 못하고 동거녀를 폭행하다가 또 구속된다. 여차저차 사견이 종결된 후 당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백수로 지내던 김두한과 술을 마시던 중 시비가 붙는다. 술자리의 손님들이고 기생들이고 할 것 없이 고영목을 무시한 채 김두한에게 붙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고. 결국 대판 싸우다가 김두한이 화해하자며 그를 데리고 간 뒤 부하들과 함께 기습 공격을 가해 린치를 당하여 불에 달궈진 연탄집게로 지져짐을 당한다.
그 뒤의 행방은 미상.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야인시대
자세한 내용은 고사이마찌 문서 참고하십시오.[1] 김두한과 싸운 일을 다룬 신문 기사에서는 1918년생인 김두한보다 두 살 연상으로 소개되었다면 1916년생이다. 하지만 황병관 살해 사건 때는 1919년생인 황병관보다 한 살 어린 걸로 나왔다. 황병관 살해 사건 때 나온 기사를 반영한다면 1920년생이다.[2] 고영목에게 총을 맞은 황병관 역시 춘해병원으로 옮겨졌다가 숨을 거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