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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고종수의 선수시절 경력을 설명하는 문서.경력 문서를 작성하기 앞서 고종수가 뛰던 시절 체계화되지 않은 대회 기록으로 인해 누락된 기록이 있음을 알린다.
아시아축구연맹(AFC) 클럽대항전이 체계화되지 않았던 시절이기 때문에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을 2연속 우승했음에도 공식적인 기록이 정확히 남아있지 않아 AFC 관련 대회의 우승 여부를 제외한 경기 성적은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공식 홈페이지 자료 및 경기 관련 기사를 참조하여 확인된 기록만 작성했음을 알린다.
또한 과거 선수들의 경우 FA 컵 대회 기록이 불분명하여 통산 기록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과 다르게 최근 현역 선수들은 FA 컵 기록을 통산 기록에 포함시키고 있고, 최근 대한축구협회(KFA)에서 과거 기록들을 정리함에 따라 FA컵 기록을 확인 할 수 있게되어 그 근거를 토대로 고종수 역시 이 문서에서 FA컵 출전 기록 7경기를 포함시켜 서술한다.[1]
2. 아마추어 시절
2.1. 프로에 데뷔하기까지
여수서초등학교, 구봉중학교, 금호고등학교 시절 그라운드를 휘젓고 돌아다니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대담하고 탁월한 축구 실력을 선보였다. 금호고등학교 축구부 1학년 때인 1993년 시도대항 축구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팀의 결승진출을 이끌었고,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94년 금호고를 제2회 백록기고교축구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활약에 언론은 고종수에게 '앙팡테리블 (Enfant Terrible)'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이때부터 고종수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김호 감독은 당시 새롭게 창단하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초대 감독을 맡으면서 고종수를 바로 수원으로 데려오게 되는데, 원래는 전남 드래곤즈가 고종수에게 눈독을 들여 그가 다니던 금호고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고종수는 물론이거니와 이후에 또 제 2의 고종수로 알려졌던 고창현까지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 빼앗기자, 금호고에 대한 지원을 확 줄였다고 한다.
그렇게 고종수는 1996년 드래프트에서 신생팀 수원의 고졸선수 우선지명으로 선발되며 프로 선수가 됐다.
3. 프로 경력
3.1. 수원 삼성 블루윙즈
K리그 플레이오프 부산전 고종수 골 |
K리그 부산전 고종수 중거리 골 |
(1996~2002년)
고종수 프리킥 골 | 고종수 덤블링 세레머니 |
수원 삼성 블루윙즈 통산 146경기 42골 44도움(K리그 96경기 20골 25도움/리그 컵 32경기 12골 7도움/FA 컵 6경기 3골 4도움/AFC 12경기 7골 8도움)
3.1.1. 1996 시즌
수원에 창단 멤버로 입단한 고종수는 96년 7월 4일 전북과의 경기에서 프로 데뷔 전을 치르며 이 뒤에도 프로 데뷔 시즌 신인치고 꽤나 많은 기회를 부여받게 되었다. 11월 2일에는 데뷔 전 상대였던 전북을 상대로 프로 데뷔 골을 터뜨렸다. 이 득점은 당시 리그 최연소 득점 4위이자 현재까지도 수원 역사상 최연소 득점 기록(만 18세 3일)으로 남아있다. 고종수는 1996시즌 18경기 4골 8도움을 기록하였고 리그 준우승과 FA 컵 대회 준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초대 대회였던 FA컵에서는 결승전(0:0 무승부 뒤 승부차기)을 제외한 모든 경기에서 공격 포인트를 기록, 총 4경기에서 3골 4도움을 몰아치며 맹활약한다.1996년 K리그: 18경기 4골 8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K리그 | 11 | 1 | 3 |
아디다스 컵 | 3 | 0 | 1 |
FA 컵 | 4 | 3 | 4 |
합계 | 18 | 4 | 8 |
3.1.2. 1997 시즌
1997시즌 역시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16경기 6골 7도움을 기록한 고종수는 아시안 컵 위너스컵 8강 2차전에서[3] 혼자 3골 2도움을 기록, 국제 경기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팀의 준우승에 기여한다.1997년 K리그: 16경기 6골 7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K리그 | 7 | 1 | 1 |
아디다스 컵 | 8 | 2 | 4 |
아시안 컵 위너스컵 | 1 | 3 | 2 |
합계 | 16 | 6 | 7 |
팀 성적: K리그 5위[4], 아디다스컵 6위, 아시안 컵 위너스컵 준우승
3.1.3. 1998 시즌
고종수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과감하고 저돌적인 돌파, 자로 잰 듯 정확하고 감각적인 패스와 크로스, 강력하면서도 정확한 슛, 센스 있는 연계 플레이로 단숨에 수원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팀을 이끌었다. 특히 탁월한 프리킥 능력과 골을 넣고 하는 텀블링 세리머니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5] 프리킥의 경우 아크 정면 오른쪽에서 가장 높은 성공률을 보였는데 이 구간을 '고종수 존'이라 부르기도 했다.당시 고종수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는데 고종수가 출전한 경기는 무조건 승리한다는 인식이 심어져 있었고 실제로도 출전하는 경기 대부분을 승리로 이끈다. 다만 이것은 후에 독으로 돌아와 수원이 조금만 부진해도 모든 비난과 원인이 고종수에게 쏠리기도 하였고 어린 시절부터 스타였던 고종수가 방황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조별리그 탈락 후 K리그 보기 운동[6]이 펼쳐졌을 때, 당시 이동국, 안정환과 함께 K리그에서 '트로이카'로 불리며 소녀팬들을 몰고 다녔다. 그중에 고종수는 소속팀인 수원의 적극적인 스타 마케팅 덕분에 언론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될 수 있었고, "축구선수=그냥 잘 뛰는 애들"이라는 공식이 만연해 있던 그 시절 개구쟁이 같은 외모의 국가 대표 선수가 팬 사인회를 열고 인터뷰도 잘했기 때문에 이를 안 띄워줄 수가 없었다. 축구 선수를 넘어 스타급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인기 덕에[7] 현역 축구선수가 연예활동을 병행하는 당시로서는 가히 파격적인 행보를 계속 보였는데, 이는 고종수 본인 스스로가 운동선수로서 딱딱한 이미지를 탈피하고 팬들에게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고종수의 기량은 98시즌부터 절정에 달하기 시작하는데 1998시즌 20경기 3골 4도움을 기록하며 팀 창단 첫 리그 우승을 이끈다. 스탯 상 엄청난 공격 포인트를 올린 것은 아니지만 수원 시절 넣은 모든 골들이 원더골 혹은 결승골이었고 도움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든 득점에 관여할 정도로 공격의 핵으로 활약했으며 창의적인 플레이를 통해 매 경기마다 강한 존재감을 보였다.
1998년 K리그: 20경기 3골 4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K리그 | 19 | 3 | 4 |
아디다스 컵 | 1 | 0 | 0 |
합계 | 20 | 3 | 4 |
1998년 K리그 베스트 11
팀 성적: K리그 우승, 아디다스컵 5위
3.1.4. 1999 시즌
1999시즌 역시 98년의 활약을 이어갔는데 수원은 두 시즌 연속 리그 우승과 두 개의 리그컵(아디다스컵과 대한화재컵), K리그 슈퍼컵까지 4개의 우승컵을 차지하였고, 고종수는 이러한 팀의 트로피 수집에 큰 공헌을 하였다. 99시즌 총 스탯은 25경기 4골 8도움.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며 두 시즌 연속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또한 이 시즌 소속팀 수원은 프로축구연맹이 주관하는 모든 대회 전관왕을 차지하는 등 본격적인 전성기를 누렸다.
1999년 K리그: 25경기 4골 8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K리그 | 14 | 2 | 6 |
대한화재 컵 | 5 | 1 | 1 |
아디다스 컵 | 2 | 1 | 0 |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 4 | 0 | 1 |
합계 | 25 | 4 | 8 |
팀 성적: K리그 우승, 대한화재 컵 우승, 아디다스 컵 우승, K리그 슈퍼컵 우승,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4위
3.1.5. 2000 시즌
K리그 울산전 고종수 감아차기 골[9] |
세계 올스타전 고종수 프리킥 골 |
2000년 K리그: 20경기 11골 7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K리그 | 8 | 4 | 3 |
대한화재 컵 | 3 | 1 | 0 |
아디다스 컵 | 2 | 2 | 0 |
서울은행 FA 컵 | 2 | 0 | 0 |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 5 | 4 | 4 |
합계 | 20 | 11 | 7 |
팀 성적: K리그 5위, 대한화재 컵 8위, 아디다스 컵 우승,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우승, K리그 슈퍼컵 우승
3.1.6. 2001 시즌
2001 시즌에도 기량이 만개한 고종수는 소속팀의 데니스, 산드로와 같이 고데로 라인의 일원으로 대단한 활약을 보이며 리그 12경기에서 5골 5도움, 아디다스 컵 8경기 5골 1도움을 기록한다. 2월에는 AFC 이달의 골, 3월에는 AFC 이달의 선수에 선정되었고 5월 2일 안양 LG 치타스와의 리그컵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하며 K리그 역대 최연소 20-20 클럽에 가입[11]하게 된다. 특히 주특기였던 프리킥 능력이 절정에 오른 고종수는 2001년에 프리킥으로만 5골을 기록한다. 이는 당시를 포함 2021년 현재까지도 국내 선수가 기록한 한 시즌 K리그 프리킥 최다골 기록이며 외국인 선수까지 포함하면 역대 2위의 기록에 해당한다.[12] 여기에 팀 성적 역시 아디다스컵 3연속 우승, 아시아 클럽 챔피언십 2연속 우승, 아시안 슈퍼컵 우승을 이끌며 최고의 순간을 보냈다.하지만 2002 한일 월드컵을 불과 9개월여 앞둔 2001년 8월 25일 K리그 전남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축구 선수 생활을 마감할 수 있는 큰 부상을 당해 재활에만 무려 11개월이 소요됐고 결국 월드컵 대표팀 승선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고종수는 2002 한일 월드컵 대표팀 탈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시즌 기록은 22경기 10골 7도움.
2001년 K리그: 22경기 10골 7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K리그 | 12 | 5 | 5 |
아디다스 컵 | 8 | 5 | 1 |
아시안 슈퍼컵 | 2 | 0 | 1 |
합계 | 22 | 10 | 7 |
3.1.7. 2002 시즌
K리그 전북전 57m 장거리 골[13] |
이후 긴 재활 끝에 십자인대 부상 후 11개월 만인 2002년 7월 17일 포항전에 이르러서야 그라운드에 복귀할 수 있었다. 재활 기간동안 경기 경험이 전혀 없다보니 부상 이전에 비해 기량의 저하가 분명히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고종수는 9월 4일 전북과의 경기 종료 직전 57m 장거리 골을 성공시키며 K리그 사상 최단 경기(114경기) 30-30 클럽에 가입[14]하게 된다. 지금과 달리 당시 이름난 선수들은 시즌 중에 국가대표팀으로 차출이 잦았기 때문에 K리그 출전 횟수가 적은 편이었고 무엇보다 K리그에 참여하는 팀의 숫자 상 경기 횟수 자체가 적다 보니 현재보다 20-20 클럽 혹은 30-30 클럽에 가입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종수는 당시 K리그 역대 최소 경기로 30-30 클럽에 가입을 한 것이다. 게다가 20-20클럽에 가입한지 불과 14개월만에 이뤄낸 기록으로 십자인대 파열로 인한 11개월의 재활 치료 기간을 제외하면 3개월만에 이뤄낸 성과로 전성기 시절에 비해 부진한 느낌을 주었을 뿐 기록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여전히 무시못할 실력을 보였다고 볼 수 있다. 시즌 기록은 20경기 4골 3도움.
2002년 K리그: 20경기 4골 3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K리그 | 20 | 4 | 3 |
합계 | 20 | 4 | 3 |
3.1.8. 교토 퍼플 상가 (임대)
교토 퍼플 상가 시절 기록
(2003년)
02/03 시즌 J리그: 16경기 2골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J리그 전기리그 | 9 | 1 | 0 |
J리그 후기리그 | 4 | 0 | 0 |
J리그컵 | 3 | 1 | 0 |
합계 | 16 | 2 | 0 |
교토 퍼플 상가 통산 16경기 2골(J리그 13경기 1골/리그 컵 3경기 1골)
03년 J리그 나고야 그램퍼스전 고종수 골 |
참고로 당시 J리그에서는 고종수의 영입을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였던 나카무라 슌스케와 비교하며 기대하기도 했는데, J리그 전문 기자들의 고종수에 대한 평가는 '슌스케와 같이 탁월한 프리킥 능력을 소유했지만 슌스케와 달리 오랫동안 프리킥 골을 넣지 못하고 있다. 그의 프리킥은 슌스케의 것보다는 완만한 커브를 그린다. 플레이 스타일은 슌스케와 달리 몸싸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돌적이며 파워가 있는 플레이를 선보이는 선수다.'였다. 기존에 일본에서 알던 날렵했던 고종수의 이미지와 달리 몸무게를 비롯한 관리 안된 몸상태를 보고 걱정하는 의견도 있었다.
3.1.9. 2004 시즌
그렇게 수원으로 복귀한 이후 본인의 은사였던 김호 감독의 사임으로 인해 후임 감독으로 차범근 감독이 선임된 상황에서 지난 1998년 월드컵에서의 인연으로 좋은 시너지를 낼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초반부터 이런저런 일로 갈등을 겪게 되는데, 팀내 부적응 등의 문제로 훈련에 불참하고 불성실한 태도를 보여 결국 2004년 10월에 임의탈퇴 선수로 공시되었다.2004년 K리그: 5경기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K리그 | 5 | 0 | 0 |
합계 | 5 | 0 | 0 |
3.2. 전남 드래곤즈
2005시즌 개막 당시 수비수를 필요로 하던 전남과 수비형 미드필더를 필요로 하던 수원이 벌인 조병국 ↔ 김남일 트레이드 때 덤으로 끼어서 이적하게 되는 굴욕을 겪게 된다.전남 드래곤즈 시절 기록
(2005년)
2005년 K리그: 16경기 2골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K리그 | 11 | 1 | 0 |
삼성 하우젠 컵 | 5 | 1 | 0 |
합계 | 16 | 2 | 0 |
전남 드래곤즈 통산 16경기 2골(K리그 11경기 1골/리그 컵 5경기 1골)
전남 시절 고종수 패스 | 고종수 포항전 골 |
다만 과거의 압도적인 모습에 비해 실력이 떨어졌을 뿐 순간마다 예전의 번뜩이는 플레이를 선보이며 일정 수준의 경기력은 유지했으며 상기되어 있는 것처럼 막장의 경기력은 아니었다. 물론 기대에 못 미치는 플레이었음은 분명하다.
3.3. 대전 시티즌
대전 시절 고종수 플레이 |
대전 시티즌 통산 28경기 3골 2도움(K리그 24경기 2골 2도움/리그 컵 3경기 1골/FA 컵 1경기)
3.3.1. 2007 시즌
월드컵이 열렸던 2006년 한 시즌에는 계속 무적 신분으로 지내다 2007년이 되어서야 대전 시티즌에 입단하며 2년 만에 프로 무대에 복귀하였다.이미 여러 차례 전과를 남겼기 때문인지라 이때 계약 조건 중에 시즌 중 절대 팀 분위기를 해치거나 품위를 손상시키면 자동으로 계약을 중지하는 항목이 있었다고 한다.[17] 본인 스스로도 0%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계약 자체를 백지위임한 상태였고 실제 계약도 입단 이후 당시 대전 시티즌 감독이었던 최윤겸 감독이 제시한 요구 조건이 충족된 뒤 정식 진행되었다.
최윤겸 감독이 고종수에게 내건 조건은 단 하나, 바로 체중 감량이었다. 이미 1년 넘게 무적 신분으로 지내며 몸 상태가 엉망이었던 고종수는 몸무게가 81kg까지 늘어나 있는 상태였고 훈련 시 전남 시절보다 더욱 둔중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종수는 기어이 전성기 시절 몸무게였던 74~75kg에 근접한 76kg까지 감량에 성공한다.
사실 전남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조건이 있었는데 전남에 합류할 당시 몸무게가 무려 87kg에 이르던 고종수를 전남 드래곤즈의 코치였던 황선홍의 열성적인 지도로 79kg까지 감량시키기도 했었지만 대전처럼 계약 조건으로 내걸지는 않았었다.
이처럼 반년 동안은 몸만들기에 주력하던 고종수였지만 비운의 선수답게 쉽게 경기에 투입되지 못했는데 경기를 소화할 체력적인 준비도 안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선수 생활 내내 발목을 잡았던 고질적인 다리 부상이 다시 재발하여 차일피일 재기 경기의 날짜가 미뤄졌다. 당시 언론에서는 한국으로 돌아온 안정환과 함께 90년대 K리그를 흥행시킨 장본인들에 집중적인 관심이 쏠린 상태였지만 계속 미뤄지는 복귀전에 의해 고종수가 그라운드에 모습을 보인지 어느덧 2년 가까이 되다 보니 서서히 언론의 관심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와중에 2007년 7월 고종수를 영입한 최윤겸 감독이 물러나기까지 해서 고종수의 복귀가 무산되는 것 아니냐는 기사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최윤겸 감독 후임으로 대전의 감독을 맡게 된 건 다름 아닌 고종수가 아버지처럼 따르던 은사 김호 감독이었고 드디어 2007년 후반기부터 K리그에 출장하기 시작한다.
K리그 전남전 고종수 골[18] |
사실 대전에서는 고종수를 영입하며 전성기 시절의 4~50%의 모습만 보여줘도 팀의 전력에 도움이 되지 않겠냐는 의견이 있었는데 그 기대를 뛰어넘는 활약을 보이며 하위권에 머물러 있던 팀이 후반기에 구단 역사상 첫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기적적인 성적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K리그 6강 P.O 결정전 수원 경기 활약상[19] |
고종수는 2년 가까운 경기 경험 부재가 무색할 정도로 대전 입단 후 가장 적극적이고 날이 선 플레이를 선보였는데, 친정팀이라지만 막판 2:1트레이드의 굴욕이 마음속 깊이 남아 있었는지 경기 내내 골을 넣으려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후반전 골키퍼와 2:1 상황에서 반대편에 쇄도하던 고종수에게 패스를 주지 않고 직접 처리하려다 이운재에게 막힌 데닐손에게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였다.[20]
대전에서 외국인 공격진들에게 공격의 활로를 열어주는 역할에 치중하던 고종수가 전성기 시절처럼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자 대전의 경기력 자체가 달라졌는데 이운재, 안정환, 조원희, 김남일, 송종국 등 국가대표 선수들뿐 아니라 에두, 마토 같은 손꼽히는 외국인 선수들까지 보유하며 객관적인 전력 면에서 대전보다 몇 수 위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수원이 경기 내내 고전을 면치 못하며 결국 대전에게 1:0 승리를 헌납하게 된다. 경기 종료 후 고종수는 골을 넣은 외국인 용병이었던 아드리아누 슈바를 제치고 경기 MVP를 차지한다.
K리그 6강 플레이오프 울산전 고종수 1 | K리그 6강 플레이오프 울산전 고종수 2 |
2007년 활약상을 두고 당시 K리그 팬들과 전문가들의 평가는 다소 갈렸는데 K리그 팬들의 경우 언론사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2007시즌 가장 훌륭한 기량을 펼친 선수로 고종수를 뽑은 반면 전문가들은 아직 완벽한 몸 상태가 아니라는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두 쪽 모두 잊혀진 천재의 성공적인 복귀라는 공통된 의견을 보였다.
여담으로 당시 대전의 경기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고종수가 만든 여러 결정적인 찬스들을 대전 공격진들이 굉장히 많이 날려먹기도 했다.
2007년 K리그: 12경기 1골 1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K리그 | 12 | 1 | 1 |
하나은행 FA 컵 | 1 | 0 | 0 |
합계 | 12 | 1 | 1 |
3.3.2. 2008 시즌
성공적인 2007시즌 종료 후 대전 구단과의 갈등으로 재계약에 난항을 겪는듯했지만 가까스로 대전 시티즌과 재계약하고 주장 완장을 받으며 큰 기대를 받았다.K리그 서울전 고종수 골 |
하지만 구단과 또다시 갈등을 겪게 되고, 9월에는 선수단을 무단이탈하는 등 각종 논란과 구설수에 오르면서 구단과 불협화음을 내다가 결국 2008 시즌 종료 후 김호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른 나이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씁쓸하게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며, 이로 인해 고종수는 다른 축구팬들에게는 예전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레전드로 칭송받을지라도 대전 팬들에게만큼은 감독 커리어에 서술되어 있는 것처럼 현재까지도 매우 안 좋게 보이고 있다.
2008년 K리그: 16경기 2골 1도움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K리그 | 13 | 1 | 1 |
삼성 하우젠 컵 | 3 | 1 | 0 |
합계 | 16 | 2 | 1 |
3.4. 통산 기록
프로 통산 206경기 49골 46도움(리그 144경기 24골 27도움/리그 컵 43경기 15골 7도움/FA 컵 7경기 3골 4도움/AFC 12경기 7골 8도움)
수원 삼성 블루윙즈 146경기 42골 44도움교토 상가 FC 16경기 2골
전남 드래곤즈 16경기 2골
대전 하나 시티즌 28경기 3골 2도움
4. 국가대표 경력
1997년 1월 18일에 노르웨이전을 통해 국가대표로 데뷔하였으며, A매치 데뷔 당시 나이는 18세 80일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연소 A매치 데뷔 순위에서 4위를 기록했다. 이후 1주일 후에 치러진 뉴질랜드전에서 A매치 데뷔골을 기록하면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연소 데뷔골 기록(18세 87일)을 세우며 당대 한국 축구의 기대주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멕시코 전의 참패 속에서도 고종수의 플레이는 빛났다. 당시 프랑스 언론에서는 "한국의 14번 선수(고종수)는 마치 브라질 선수처럼 플레이한다."고 평했을 정도로 시망 수준의 국가대표팀에서 이동국과 더불어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열정적인 플레이를 보여줘서 절망 속에서 팬들은 대한민국 축구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이후 2000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으로 선발되어 대회에 참가했고 같은 해에 열린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에는 부상때문에 선발되지 못했다.
이후 수원에서 큰 활약을 펼치며 당시 히딩크가 고종수의 재능을 극찬하기도 했다.뉴스 거기에 2002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 감독으로 새로 부임한 거스 히딩크로 부터 전폭적인 신임을 받으면서 "히딩크의 황태자"라는 별명을 받기도 하는 등, 축구 선수로서 그의 미래는 탄탄대로를 달리면서 쭉쭉 뻗어나갈 것으로 예상되었다.
하지만 2002 한일 월드컵을 약 1년 정도 앞둔 2001년 8월 25일 전남과 K리그 경기에 후반 교체 투입됐다가 7분 만에 십자 인대 파열 부상을 입는다. 주치의로부터 "더 이상 축구를 하면 안 된다"는 통보까지 받을 정도로 선수 생명을 위협받는 치명적인 부상이었다. 그래도 부상을 극복하기 위해 9개월 이상을 재활에 매달렸으나, 결국 2002년 월드컵 국가대표 최종 엔트리에 오르지 못하고 월드컵 4강을 달성하는 모습을 TV로 봐야만 했다[21] 게다가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징병신체검사에서도 최종 5급 판정[22]을 받아 병역의 부담은 덜게 되었지만, 그만큼 축구 선수로서 신체적 결점이 있다는 것을 공식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특히 축구 선수들의 경우 월드컵, 올림픽 등의 국제 대회에서 매우 우수한 성과를 달성해서 병역특례를 받는 케이스가 아니면, 현역으로 복무하여 상무나 경찰 축구단에서 선수로 활동하는게 좋다. 장기적으로 경력 관리 및 연봉 협상에도 도움이 되는 길이니까.
히딩크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 국가대표팀 명단 발표하는 자리에서 고종수를 언급했고 애정어린 충고를 하면서 고종수의 탈락을 아쉬워했다.
본인도 착잡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며 피크를 찍으려던 찰나에 발생한 치명적인 부상은 그에게 내적으로 엄청난 상실감과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선수 생활에 있어서도 상당히 무기력 해지는 등 앞으로의 몰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 애초에 K리그 자체가 운영 방식 변경이 굉장히 많은 점도 있고 기록적인 측면에서도 기록에 따라 2부 리그 경력을 포함시키거나 컵 대회 기록을 미포함하는 등 명확한 기준 없이 기록을 산정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체계 없이 무턱대고 운영해온 K리그의 자승자박이라 할 수 있다.#[2] 기존 8개 구단에 천안 팀이 추가되어 총 9개 팀이 참가했고 각 팀당 32경기를 치렀다.[3] 나머지 경기는 부상 및 리그 경기 일정으로 인해 출전하지 않았다.[4] 기존 9개 구단에 대전 팀이 추가되어 총 10개 팀이 참가했고 각 팀당 18경기를 치렀다.[5] 다만 이 세레머니가 고질적인 무릎 부상의 원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6] 당시 16강 진출 실패한 원인이 K리그의 약화 때문이며 2002 월드컵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조건 K리그를 많이 봐야 한다는 등 언론이 K리그 오빠부대를 이끌고 다니던 트로이카(고종수, 이동국, 안정환)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K리그 분위기 쇄신에 앞장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야빠언론이니 해축빠니 하면서 팬들이 언론에 각을 세우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는데, 굳이 보기 운동을 안 했더라도 이 당시 월드컵 열기와 K리그 오빠부대의 인기가 아주 상상을 초월해 관중들이 항상 많았기 때문이었다.[7] 이때 고종수의 인기는 가히 인기 아이돌 그룹 H.O.T급이었으며, 팬레터가 하루에 20,000개씩 날아왔다고 한다.[8] 2024년 현재까지도 K리그 최연소 MVP 수상 기록에 해당하며 베스트 11 기록은 2008년 19세의 나이로 선정된 기성용에 의해 경신되었다.[9] 2000년 5월 17일 울산전, 고종수는 이 경기에서 혼자 2골 1도움을 몰아치며 팀의 3:1승리를 이끈다. 참고로 울산의 골문을 지키던 선수는 당대 대한민국 최고의 골키퍼였던 김병지였다.[10] 당시에 피파 99부터 국내 정발판이 배급되며 국내 축구선수를 표지모델로 기용하기 시작한 초창기 단계였고, 고종수 이전에 표지모델로 오른 선수들로 피파 99의 안정환과 피파 2000의 김병지가 있는데, 그야말로 이들 역시 당대 최고의 축구스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피파 2001의 경우, 고종수 효과도 있었지만 유저들이 고대하던 K리그가 탑재되기 시작하면서 FIFA 시리즈 사상 최초로 한국어화된 게임으로 국내에서는 상당히 의미가 깊은 명작으로 불린다. 당시 국내 게임 소프트웨어 판매 순위에서 2위에 등극하는 등 상당히 인기도 좋았다.[11] 당시 K리그 최연소 20-20클럽 가입 및 역대 2번째 최소 경기(88경기) 기록이었다. 현재는 2부 리그, 리그컵, 플레이오프 기록과 혼재되거나 명확하지 못한 합산 기록 때문에 정확한 순위를 파악하기 어렵다.[12] K리그 역대 한 시즌 최다 프리킥 골 기록은 안드레 6골(2000년), 뽀뽀 6골(2006년)이다.[13] 2002년 9월 4일 K리그 전북전, 고종수는 이 골을 통해 역대 최소경기 30-30클럽에 가입했으며 당시 K리그 역대 최장거리 골 기록을 수립한다. 2021년 현재 기준 역대 최장거리골 5위, 왼발 최장거리 골 1위에 해당한다.[14] 2023년 기준 몰리나, 세징야, 에닝요에 이은 역대 4위이다. (2부 리그에서의 기록까지 합산하든 1부 리그 기록만 따지든 역대 4위)[15] 히딩크호에서 코치로 재직한 바 있어 고종수를 매우 잘 알고 있었다.[16] 여담으로 당시 신성이었던 박주영이 막 뜨고 있던 시기였는데, 시사매거진 2580에서 박주영에 대해 다루면서 그가 잘 성장하기 위해서 반면교사로 삼아할 예인 다른 쪽 길로 빠지고 자만하고 게을러서 실패한 천재 선배의 한 예로 그의 모습이 나온 적이 있다.[17] 감독의 말을 듣지 않거나, 팀을 무단이탈하고, 음주를 하는 등의 행동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18] 2007년 9월 30일 전남전에서 기록한 대전 이적 후 첫 골이자 837일만의 골이다. 고종수 본인도 기쁨을 감출 수 없었는지 자제하던 덤블링 세레머니를 오랜만에 선보이기도 했다.[19] 이 경기 승리로 인해 대전은 사상 첫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끈다. 당시 진출이 확정되고 대전 서포터즈들의 오열은 덤[20] 움짤 막판 장면이 바로 그 장면으로 누가 봐도 고종수에게 줘야 하는 장면에서 어처구니없는 플레이를 보였다. 데닐손 본인도 면목이 없었는지 원본 경기 영상을 보면 분노에 차 노려보는 고종수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연신 보낸다.[21] 여담으로 만약 이 당시 뛰었다고 해도 2002년 월드컵 팀의 스타일상 아마 팀에서 상당히 애매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팀 전술상 플레이메이커나 공격형 미드필더의 자리는 없었고 (실제로 이 덕분에 당대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평가받고 평가전에서도 우수한 모습을 보인 윤정환 같은 경우는 본선에서 단 한 게임도 뛰지 못했다.) 고종수가 딱히 피지컬과 활동량과 수비력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기 때문. 쓰리톱의 한자리에는 유럽 선수들과 대등하게 경합하며 볼을 운반하는게 가능한 설기현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설사 뽑혔어도, 압박으로 상대팀 체력이 소진되었을때를 노린 조커로나 기용됐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고종수가 부상을 당하기 이전, 컨페더레이션스컵 직후 히딩크는 공개적으로 고종수에 대한 부정적 소견을 연거푸 밝히며 고종수에게 실망한 모습을 숨기지 않았고 실제로 최종엔트리 발표후 고종수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고종수의 실력 미달 문제를 거론했을 뿐 부상때문에 뽑지 않았다는 소린 하지 않았다. 히딩크 자서전에서도 고종수는 파괴력은 있으나 체력과 수비가담이 부족하다고 평가하면서 2002년 당시 히딩크의 축구는 전원 공격 전원 수비를 하는 '토털축구'를 구사하던 만큼 자신이 원하는 공격과 수비를 모두 담당하는 공격형 미드필더는 아니었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이를 비추어 볼 때 설사 부상이 없었더라도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는 뽑히지 못했거나 뽑혀도 1경기도 못뛰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히딩크가 부임한 이래 고종수에 대해 여러 포지션이 소화 가능하다고 칭찬했을 뿐 아니라 평가전마다 다양한 포지션에서 실험해봤던 만큼 승선을 했다면 어떻게든 써먹었을 확률이 높다. 특히 세트 플레이에서는 더더욱 전담 키커를 맡았을 가능성이 높다.[22] 제2국민역으로 편입되어 병역의 의무는 없기에 사실상 면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