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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기현

설기현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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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파일:IMG_7058.pn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설기현
薛琦鉉 | Seol Ki-hyeon
출생 1979년 2월 4일 ([age(1979-02-04)]세)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 북평리
(現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정선읍 북평리)
거주지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본관 순창 설씨 (淳昌 薛氏)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신체 187cm[1], 82kg, B형
직업 축구 선수 (윙어[2]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로열 앤트워프 FC (2000~2001)
RSC 안데를레흐트 (2001~2004)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2004~2006)
레딩 FC (2006~2007)
풀럼 FC (2007~2010)
알 힐랄 FC (2009 / 임대)
포항 스틸러스 (2010)
울산 현대 (2011)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2~2014)
감독 성균관대학교 축구부 (2015~2016 / 감독 대행)
대한민국 대표팀
(2017 / 코치)
성균관대학교 축구부 (2016~2018)
경남 FC (2020~2023)
행정 성남 FC (2019 / 전력 강화부장)
국가대표 82경기 19골 (대한민국 / 200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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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정보 더 보기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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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가족 어머니 김영자, 아내 윤미[3], 아들 설인웅(2002년 8월생), 설여진(2005년생)[4]
종교 불교
학력 강릉성덕초등학교 (졸업)
주문진중학교 (졸업)
강릉상업고등학교 (졸업)
광운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신문방송학 97 / 학사)
병역 예술체육요원[5]
등번호 7번[6], 9번[7], 10번[8], 11번[9], 18번[10], 19번[11], 24번[12], 26번[13]
서명 파일:설기현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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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지도자 경력
4.1. 지도 스타일
5. 행정가 경력
5.1. 성남 FC 전력 강화부장
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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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현역 시절 탄탄한 피지컬과 드리블, 크로스 능력으로 한국 대표팀의 측면을 담당한 선수였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경남 FC 감독을 맡았다.

2. 선수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설기현/선수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플레이 스타일



빠른 스피드, 유럽 선수들과 대등한 몸싸움이 가능한 피지컬, 정교한 크로스 3박자를 갖춘 양발잡이 측면 공격수로 한국 축구에서 상당히 드문 스타일의 선수다. 역대 한국 선수들 중에서도 그 셋을 모두 갖춘건 설기현을 빼면 고정운손흥민 정도뿐이었지만, 고정운은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피지컬에서 우위를 둘 정도는 아니었다. 설기현보다 EPL에 조금 더 빨리 입성했던 박지성이영표가 부족한 피지컬에도 유럽에서도 보기드문 스타일로 경쟁력을 갖춰서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했다면, 설기현은 매우 전형적인 플레이스타일로도 동양인이 피지컬에서 밀리지 않고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양발잡이에 피지컬과 스피드가 좋아 EPL에서도 공격포인트를 쌓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손흥민과 장점이 비슷하나, 국가대표에서 설기현과 같은 위치에다가 설기현의 주요 업적이던 프리미어리그 선수랭킹에서도 수시로 1위를 찍는 명백한 상위호환인 손흥민이 존재하기 때문에 후대에 와서는 2002년 대표팀 중 사람들이 잘 모르는 편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 주전을 놓고 경쟁하던 부평고 듀오 이천수최태욱은 스피드와 크로스는 좋았으나 170 초반의 단신이라 몸싸움이 안됐고, 설기현 이상의 스피드와 몸싸움으로 유럽 선수들을 압도할 수 있었던 차두리는 크로스가 부정확하고 골결정력도 부족했다. 그래서 히딩크는 유럽 선수들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으며 측면을 흔들어 줄 수 있는 설기현을 월드컵 무대에서 주전으로 기용하고 이천수차두리, 최태욱은 상황에 맞춰 백업으로 활용했다.[14] 히딩크는 설기현을 두고 "한국에서 유일하게 외국 선수들과의 몸싸움을 이겨내고 크로스를 올려줄 수 있는 선수"로 평했다. 2001년 대표팀이 공격수 부재에 시달렸을 때도 담담하게 "설기현만 오면 다 해결된다"는 답변을 남겼으며, 실제로 설기현 이후 대표팀에선 이 3박자를 갖춘 측면 공격수가 완전히 사라졌다.

특히 크로스를 평하자면 고정운 이후 대표팀에서 가장 정확한 크로스를 올리는 선수였다. 정확도는 물론이려니와 속도가 빨랐고, 각도 예리했다. 양발 잡이라 좌우도 가리지 않았으며, 정지상태에서 올리는 크로스 뿐 아니라 러닝 크로스도 한국에선 독보적이었다. 2023년 현재에도 설기현에 근접한 레벨의 크로스를 올리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는 찾기 힘들며 2002세대 이후 선수들이 런닝크로스는커녕, 최성국이나 김민우처럼 오픈 찬스에서도 황당한 수준의 크로스를 올리는 일이 빈번했던 한국축구의 사정상, 한국 국대 역사에서 최고의 크로스 능력을 가진 선수를 논할 때 설기현은 반드시 거론되는 선수 중 하나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프랑스전 박지성의 동점골 과정에서 올린 러닝 크로스가 좋은 예시인데, 무려 전성기의 에릭 아비달을 순간적으로 돌파해버리고[15] 파포스트로 크게 러닝 크로스를 올렸다. 이 크로스의 속도가 무척 빨랐던 데다 크게 휘어졌던 탓에 조재진을 마크하던 라이트백 윌리 사뇰이 낙하지점을 제대로 잡지 못해 조재진에게 쉽게 헤더를 허용했고, 가운데로 박지성이 순간적으로 쇄도해 밀어넣을 수 있었다.

피지컬도 한국 기준으론 스피드, 경합능력 모두 최상급이었고 유럽에서도 경쟁력이 있는 신체 조건이었으며, 키도 187cm의 장신이라 공중볼도 상당히 잘 따냈다. 이 강력한 헤더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에서 뛸 시 크로스능력과 함께 대표적인 장점이었으며, [16]이러한 피지컬을 바탕으로 약팀들을 상대할 때는 최전방 스트라이커로도 뛰었다. 왼쪽 윙포워드가 주포지션이었지만 양발 모두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 오른쪽 윙 포워드로도 종종 뛰었고 클럽에서는 중앙 공격형 미드필더로 시즌을 소화한 적도 있다.

단점은 둔탁한 볼터치와 떨어지는 축구지능. 그가 대표팀 생활 내내 지적받은 골 결정력 부족이나 패스 정확도 부족은 둔탁한 볼터치에 기인한다. 건장한 신체를 바탕으로 한 슈팅파워는 좋았으나 볼을 부드럽게 다루는 능력이 부족하니 공이 뜨거나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실제로 2002년 월드컵 당시 미국전에서 완벽한 찬스를 세 번이나 날려먹고 포르투갈 전에서는 후반 막판에 1대1 찬스도 말아먹는 바람에, 이탈리아전에서 동점골을 넣기 전까지 설기현은 정말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또한 박지성만큼의 축구지능을 가진 선수는 아니었기 때문에 공간 창출력이 부족해 다른 공격수들과의 연계 플레이가 약했다.

100m를 11초대에 주파할 정도로 주력은 빠른 편이지만[17] 큰 키와 우람한 체격으로 인해 골문에서의 민첩성은 조금 떨어졌었다. 치고 달리는 것은 잘하지만, 막상 돌파 후 골문 앞에서의 최종 마무리의 섬세함이 아쉬운 편이다. 그를 비하하는 가장 대표적인 별명이 '설거북'이었는데 사실 이것은 오명에 가깝다. 주력이 빠르다는 서술이 자주 되어있듯이, 187cm의 선수치고는 그렇게 느린 편은 아니었지만 덩치가 크다 보니 뭔가 느려보이기도 했고 골대 앞에서 어기적거리는 모습이 자주 보여서 당시 축구를 잘 모르거나 국가대표 축구선수라면 일단 까고보는 축구팬들에게 붙은 잘못된 별명이다. 그래서, 피파 온라인 4에서 설기현의 스피드 능력치가 80으로 낮은 편인데 안정환이 이를 보고 "기현이는 스피드가 있지.", "어? 이 정도면 느린거야? 잘못됐는데?", "설기현이 (스피드가 100으로 되어있는) 이영표보다 훨씬 빨라!" 라고 잘못되었다면서 납득하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설기현은 빠른 스피드와 양발에서 나오는 정확한 크로스와 강력한 피지컬을 보유한 대신 볼 터치가 좋지 않고 골 결정력과 축구 지능은 떨어지는 편이었다. 따라서 이런 특성들 때문에 클래식 윙어의 역할, 라인파고 크로스가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이었다. 설기현을 지휘한 감독들도 측면으로 기용하려 하고 그가 원하던 대로 중앙 공격수로 기용하려고 하지 않았다.[18] 연계능력이나 공간창출 능력이 떨어지는 선수를 중앙에 세우면 효율이 떨어지는데다 스피드와 크로스는 너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후술할 내용과 같이 본인이 이 장점을 살리기보다 다른 포지션을 선호했다.

설기현이 워낙에 K리그에서 보여준 행적이 좋지 않다 보니 능력을 자주 비하당하지만 훌륭한 실력과 업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팬들이 저평가를 하게 되는 원인은 설기현이 심각한 외골수라는 문제점 때문이고 설기현의 최대 단점으로 커리어 내내 그를 깎아먹었다. 자기 생각과 고집에 빠져서 지도자들과 소통을 많이 하지 않는다. 대표적으로 자꾸 중앙 공격수로 뛰려는 황소고집을 부리는 것인데 레딩에서도 이 때문에 스티브 코펠 감독과 갈등이 생겨서 결국 이적하게 되었다.[19][20] 풀럼에서도 본인이 말하길, 자기가 생각해도 하면 안되는 실수를 감독에게 해 사이가 틀어졌다고 말했기도 했다. 박지성은 설기현을 말할때 "기현이 형이 선수로서 잉글랜드에 있을 때 감독들이 좀 더 기현이 형을 믿고 계속해서 꾸준하게 출전 기회만 주어졌다면 다른 어떤 선수보다 가장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선수다." 라고 했는데 지도자와의 트러블은 가장 가까이에서 본 동료들조차 가장 아쉬운 단점인듯.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이 고집 때문에 K리그에서는 이적할 때마다 팬들과도 척을 지고 이적을 선택하니 여론마저 악화되었다.

포지션 고집도 심한데 도전정신이 부족하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주전 보장에 집착하였으며[21]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실력에 비해 너무 낮은 수준의 팀만 고집한 것도 문제였다. 대표적으로 2002-03 시즌 설기현은 RSC 안데를레흐트[22]에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었는데, 월드컵에서의 활약에 유럽 무대에서의 활약까지 덧붙여 발롱도르 50인 후보까지 올랐을 정도였다. 이 시기 토트넘, 첼시 등 EPL과 라리가의 상위권팀에서 영입을 희망했을 정도 였음에도 이적하지 않았으며, 04-05 시즌 당시 벨기에를 떠날 때도 에버튼이나 웨스트 햄에서 관심을 보였다. 그럼에도 설기현이 선택한 팀은 엉뚱하게도 그 해 챔피언쉽으로 강등되었던 울버햄튼이었다.[23] 풀럼을 떠날 때도 분데스리가의 여러 팀에서도 관심을 보였지만 설기현이 선택한 곳은 황당하게도 사우디 리그의 알 힐랄이었다.[24]

물론 어떤 팀을 선택할지는 선수의 자유이고 주전으로 나오지도 못 할 높은 레벨의 팀을 고집하는 것도 안 좋지만, 설기현은 본인의 능력치에 비해 너무 낮은 수준의 구단만 골랐고, 이러한 선택들로 인해 본인의 전성기와 기회들을 약팀에서 날려버린 것은 아쉬운 점이다.울버햄튼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이 시절의 챔피언쉽 리그는 아주 전통적인 영국식 킥 앤 러쉬 위주였고 단순 피지컬만 보자면 EPL보다도 거친 면이 있었다. 이런 선수들 상대로도 설기현은 피지컬에서 우위를 점하며 드리블로 둘, 셋을 뚫어내고 크로스를 올릴 정도였으니, 승격 0순위 팀이었음에도 팬들이나 동료 선수 조차 "이 정도의 선수가 왜 2부리그에 왔는지 이해를 못하겠다"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적한 팀들의 수준이 낮았기에 쉽게 주전이 가능했지만, 전성기에 한 단계 높은 도전을 하지 않은 점이 아쉬움이 남는다.

설기현이 안더를레흐트 선수시절 전성기를 맞이 했을때 허정무는[25] 설기현은 아직 부족한 선수라고 지적하긴 하였다. 볼터치 및 축구 지능 등의 이유로 인한 것 같은데 허정무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하기에는 허정무도 국가대표 감독 당시 즐겨 쓴 선수다. 부상 때문에 2010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을 뿐.

4.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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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지도 스타일

현대 축구의 흐름에 걸맞게 후방 빌드업 과정을 중요시하는 공격 축구를 표방하며 '설사커'라는 애칭을 얻었다. 결과를 떠나 '과정이 매력적인 축구'라는 점에서 호평을 받은 부분도 있고, 설 감독이 준비한 플랜대로 맞아 떨어진 경기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볼을 돌리기보다는 구체적으로 공격 시 4-2-2-2 대형을 주로 형성하며 여섯 명의 선수를 중앙에 밀집 배치해 수적 우위를 형성해 점유 게임을 시도한다. 빌드업도 추구하는데 빌드업시 중앙 밀집 배치된 1, 2선 움직임을 통해 후방에서의 패스 코스를 열어주는 경우가 잦다.

2선에는 상대 수비 사이 공간에서 적극적으로 볼을 받을 것을 주문하며 공격은 역동적인 움직임을 통해 동료 공간을 창출을 노린다.

하지만 지나치게 빌드업에 얽매이고 전술적 고집이 강했으며, 전력이 강한 팀을 상대했을 때도 무턱대고 공격 일변도의 전술을 추구하다가 전방 압박이나 카운터 어택으로 무너지는 패턴이 많았는데, 경남 감독 재직 당시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골 결정력이 약하고 선수 개개인이 타점에서 많이 밀리는 경향이 강한 것을 봤을 때 지도자로서 팀을 구성할 때 선수를 보는 안목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선수들을 데리고 전력이 강한 팀을 상대했을 때도 무턱대고 공격을 시도하는 답답한 축구라는 비판 역시 존재했으며 이러한 탓에 전환이 빠른 팀을 상대로는 유독 고전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26]

많은 축구 팬은 설기현이 선진적인 축구를 하고 싶은 것은 알겠고 그 형태도 어느 정도 예쁘다는 것까지는 인정하지만 정작 그 축구를 어떻게 실현시키는지 그 과정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말이 많다.

5. 행정가 경력

5.1. 성남 FC 전력 강화부장

한동안 소식이 없다가 2019년 7월쯤 유튜브 슛포러브에 게스트로 한 번 출연하고 나서 얼마 후인 7월 16일 성남 FC의 전력 강화부장으로 부임하였다.

코칭스태프와의 소통을 통한 프로 및 유소년 스카우트 업무를 총괄하게 되며 우수 유소년 발굴을 위한 유스 코디네이터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한다.#

2019 시즌 종료 후 남기일 감독이 사퇴하면서 유력 후임 감독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 실제로는 후임 감독으로 김남일이 내정되면서 없던 이야기가 됐다. 나중에 경남 FC의 감독으로 이직하면서 성남과의 짧은 만남을 마무리했다. 경남 감독 부임 과정은 해당 항목 참조.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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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문서



[1] 프로필에는 187cm로 기재되어 있고 본인도 187이라고 언급했지만 2000년 일본과의 친선 경기 대표팀 명단 정보에는 184cm로 기재되어 있다.참조 이때 나이가 만 21세라서 이후에 더 성장했거나 실제보다 작게 기재된 것으로 보인다[2] 본인은 스트라이커로 뛰고 싶었으나 선수 생활 대부분 윙어로 중용되었다. 이유는 골 결정력이 그다지 좋지 않은 반면에 수준급의 러닝 크로스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3] 광운대 축구부 동기 윤철한 씨의 여동생.[4] 자녀 둘 다 벨기에 리그에서 활동할 당시에 현지에서 출산했다. 단 벨기에는 속인주의 국가라 자녀의 국적은 모두 한국이다.[5]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8강 진출로 인한 병역 특례.[6] 풀럼 FC, 알 힐랄 SFC[7]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2002 한일 월드컵,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인천 유나이티드 FC[8] 울산 현대[9]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 2006 독일 월드컵, 포항 스틸러스[10] RSC 안데를레흐트[11] 울버햄튼 원더러스 FC, 레딩 FC[12] 2000 CONCACAF 골드컵[13] 로열 앤트워프 FC[14] 2002 월드컵은 특이하게 미국전을 제외한 6경기가 유럽팀이었다.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터키. 미국도 남미나 아프리카보다는 유럽 스타일에 가깝다.[15] 1대1 상황에서 살짝 간을 보다 오른발을 뻗어 순간적으로 아비달의 리듬을 뺏고 바로 간결한 시저스로 가속을 붙였다[16] 여담으로 은퇴한 지금은 이따끔씩 방송에 나올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엄청난 수트빨을 자랑한다. 단순히 키만 큰것이 아니라 어깨와 덩치가 엄청나고 비율도 좋다.[17] 2002년 체력테스트 당시 12초 7을 기록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 당시 설기현은 부상 중이었다.[18] 2002 월드컵에서는 준수한 포스트 플레이와 훌륭한 돌파를 보여주며 인사이드 포워드로써의 역할도 잘 해냈다. 다만 설기현이 뛸 당시에는 인사이드 포워드의 대표주자인 호날두와 아르옌 로번도 각각 클래식 윙어처럼 오른쪽, 왼쪽에서 더 많이 뛰었던 만큼 윙어가 중앙 공격수의 역할을 동시에 한다는 개념 자체가 생소했고 킥앤러시 스타일인 영국의 중하위권 팀 감독에게 히딩크 처럼 새로운 전술을 요구하는 것도 어찌보면 무리였다.[19] 당시 레딩에는 케빈 도일, 데이브 킷슨, 르로이 리타, 셰인 롱 등 이미 1군 공격수로 쓸 만한 선수가 네 명으로 시즌을 다 꾸릴 만했고 정확한 크로스, 빠른 스피드, 돌파력을 지닌 설기현은 오히려 오른쪽 윙어 쪽이 경쟁하기 더 쉬운 편이었다. 특히 레딩의 주전 공격수 케빈 도일과 르로이 리타 투톱은 EPL 승격 전 05/06 시즌 챔피언십에서 두명 다 챔피언십은 첫 경험임에도 케빈 도일은 45경기 18골, 리타는 26경기 11골로 두자릿수 득점을 할 정도였던데다가 백업 공격수 중 한 명이었던 데이브 킷슨도 06/07 시즌에는 부상에 시달리는 바람에 주로 케빈 도일의 백업 역할을 소화한 것이지 챔피언쉽에서 34경기 18골을 넣었던 05/06시즌 레딩의 에이스 스트라이커였다. 그에 비해 설기현은 주로 윙어로 기용된 걸 감안해도 챔피언십의 울버햄튼에서 04/05시즌 37경기 4골, 05/06 시즌 32경기 4골로 2시즌 동안 69경기 8골에 그쳤었다. 그러니 이미 저 네 명이 있는데 정확한 크로스, 빠른 스피드, 돌파력은 좋으나 볼 터치와 골 결정력이 좋지 않은 설기현을 저 선수들을 제끼고 굳이 공격수로 쓸 이유는 사실상 없었다. 사실상 편하게 주전으로 출장 할 수 있는 기회를 자기 스스로 내쳐 버리고 팀을 이적하며 커리어가 완전히 꼬여버린 것.[20] 이 문제는 한 때 시오 월콧도 겪었던 문제인데 아스날 입단 후 중앙 공격수로 뛰기를 원했던 월콧은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건지 16-17 시즌부터 벵거를 설득하여 오른쪽 윙어로 정착하는 데 성공했다.[21] 심지어 풀럼 시절엔 출장 경기 보장 조건 계약까지 있었다.[22] 지금도 그렇지만 벨기에 리그 최다 우승팀이기도 하고 당시 축구게임의 챔피언스리그에서 벨기에리그를 대표하는 팀이자 당시 히딩크호에서 단 둘 뿐인 유럽파였기에 2002WC 이전 국내에서는 후에 비교되었던 에레디비지에의 페예노르트는 커녕 아약스나 PSV도 가볍게 누르는 인지도를 지녔었다.[23] 물론 울버햄튼은 강등 되었음에도 선수 이탈이 거의 없었기에 당해 승격 0순위이기도 했다. 그런데 결국 05/06 시즌에 승격하지 못 했다.[24] 분데스리가가 지금같은 위상을 가지던 시절이 아니었더라도 당연히 알 힐랄보다 훨씬 수준 높은 팀들이 있는 세계 최상위 리그 중 하나다. 유럽리그는 계속 발전하고 있고 자본이 집중되고 있다. 근데 아직까지도 애매한 팀의 애매한 위치의 선수는 생각보다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한다. 헌데 설기현이 뛰던 시절을 생각하면 레딩에서는 그야말로 애매한 팀의 애매한 위치의 선수였고 풀햄은 재정적으로 좋은 팀이긴 하지만, 설기현의 위치상 생각보다 EPL에서 돈을 많이 벌지 못했을 수는 있다. 울버햄튼은 당시 2부리그 소속이였으니 말할 것도 없고, 분데스리가는 특히 재정적인 면에서 당시의 EPL보다 많이 떨어지니 알 힐랄은 아마도 금전적인 이적이었을 것이다.[25] 허정무의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선수 보는 안목이 정말 좋다. 다만 전술에 있어서는 의문을 표하는 사람이 많지만, 비슷한 나이대의 국내 지도자들 중에선 전술 이해도가 높았던 사람이 허정무다. 허정무 입장에선 축구지능이 좀 만 더 높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26] 2021~2022년 빠른 전환과 스피드를 앞세운 이민성 감독의 대전과 2021년 말부터 2022년까지의 박동혁 감독의 충남 아산에 유독 고전했다.[27] 설기현과 이동국 둘 다 1979년생이지만 설기현은 빠른 생일이라 1년 선후배 관계다. 생년은 같지만 빠른 생일로 1년 선후배가 된 박지성이천수와 비슷한 케이스.[28] 당시는 지금과는 달리 유럽에서 뛰는 한국선수가 거의 없었다. 설기현 이외에는 안정환 정도인데 안정환도 이적 초기에는 팀 적응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한국인의 유럽 진출이 수월해진건 02월드컵 4강 신화와 박지성, 이영표 등의 해외 진출 성공 등의 성과가 있었기 때문이다.[29] 이영표는 마찬가지로 불자였던 이을용에게도 전도했지만, 이을용이 나무아미타불로 대응했다고 한다. 그래서 설기현은 이영표의 중동 이적을 전혀 예상하지 않았다고 한다.[30]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아내의 외모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2006년 세네갈과의 평가전에서 역주행 논란으로 설기현 선수가 비판을 받을 당시 아내는 본인의 SNS로 답답함을 토로하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멤버 아내들 중 방송 출연이 없는 편이다. 2015년 국가대표 은퇴식때 가족들 모습[31] 송종국 송지아와 아들 송지욱도 함께 참석했다.[32] 비슷하게 동세대인 이동국도 왜곡된 선입견으로 인해 느리다거나 활동량이 적다, 게으르다는 등의 비난을 많이 받았다. 이동국은 보기와는 다르게 오히려 빠른 스피드로 드리블을 하는 것 주력으로 밀던 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