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삼국지 유비로 천하쟁패의 등장인물. 원 역사의 관우에게서 모티브를 따왔다.2. 작중 행적
입촉을 준비하던 유비에게 곽선호가 빙의되면서 생각을 바꿔 장로의 한중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어 장비와 함께 불러들인다. 방통은 당연히 관우에게 형주를 맡길 것이라 여겼으나 그랬다간 원 역사처럼 손권과 관계가 파탄날 수 있음을 잘 아는[1] 유비는 그를 장비와 함께 한중으로 소환한다.상용에서 귀환한 후 유비와 갈라져 파군 방면을 접수하고 여유가 있으면 강주까지 진군하는 역할을 맡는다.[2] 마침 복황후 일가의 몰살로 유비측의 명분이 한층 강화된 덕에 순조롭게 파군으로 길을 뚫었고 낙성 앞에서 맏형과 합류한다. 파군에서 왕평을 알게 되어 유비에게 천거한다.
법정이 낙성을 앞에 두고 제안한 초토화 전술에 반대 의사를 명확히 한다. 다만 상용에서 자신을 도와줬던 법정을 인간적으로 싫어하는 건 아니라서 장비가 끼어들어 분위기를 수습하자 별 불만없이 받아준다. 관우의 성향을 다시 느낀 유비는 원역사의 유관장 삼형제가 맞았던 슬픈 결말을 돌이켜보고 조조나 손권처럼 쉬운 길을 가고 싶다는 고뇌에 휩싸이지만[3] 결국 인의의 길을 택한다. 유비가 약탈은 지양하되 기병을 활용한 흔들기 자체는 시행하기로 결정하자 장비와 함께 자원한다.
이후 자신들을 요격하기 위해 출진한 1만 동주병을 장비와의 협격으로 가볍게 박살내고 상존과 호위병들을 단기로 참하는 무용을 선보인다.
동오가 형남을 침공하자 유비와 함께 동오를 막기 위해 형남으로 이동한다. 북방 출신임에도 수군 조련에 일가견이 있어 물길이 매우 거세고 굴곡진 장강삼협을 능숙한 조함 실력으로 돌파한다. 형주에 도착한 후 요립과 함께 임상현을 수복해 동오군과 대치했고 대치가 마무리 된 후 마초를 돕기 위해 서량으로 파견된다. 마초가 관우가 무척 싫어하는 명문가 자제 겸 호족이라 유비는 둘이 불화할 것을 걱정하는데 제갈량은 염행과 마초의 일기토 일화를 거론해 마초를 호족이 아닌 (관우가 한없이 관대해지는)조조에게 핍박받는 약자로 여기게끔 만든다. 상규성에 주둔하며 기성에 주둔한 마초에 연계해 염행과 하후연에 대적한다. 그렇게 1년여를 주둔하며 맞서던 중 가까운 진창에서 유비와 하후연의 결전이 벌어지자, 황권과 함께 조홍을 격파하고 진창에 수군을 끌고 들어오는 데 성공한다.
진창을 포기하고 물러나던 서황을 막아세우고 조조군 시절 친분이 있던 그에게 투항시 서황과 병사들 전원의 신변 보장을 약속하나 서황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서황과 일기토를 벌여 서항과 고참병들을 참하고 남은 병력의 투항을 받는다.
3. 능력
특유의 단순한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전술을 사용하는데, 한번 흐름을 타서 힘을 내면 온 천하를 울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어이없이 패배하기 때문에 최대한 변수(현지 호족, 보급, 적의 공세로 등)가 없는 환경을 만들어 오롯이 한타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1인분 이상은 충분히 하고도 남지만 그러기 위해선 은근히 손을 많이 써야 하는 유형이다. 이런 성향을 감안해, 험준한 산악 지대 사이의 작은 분지여서 예측된 장소에서 정면 힘싸움밖에 할 게 없는 상용에서 악진에 맞설 장수로 추천받는다.상술된 단순한 성격에 병법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해서 관우는 도적 떼와 군소 세력이 난립하던 시절에나 유효하던 맹장과 소수 정예를 활용한 전투법을 거대 세력들로 재편되며 체계가 잡힌 삼국정립기까지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요립이 관우에 대해 평했던 것처럼 거칠고 정제되지 못한 병력 운용을 하는 약점이 있지만, 단기로 적진에 뛰어들어 안량의 목을 베는 괴력[4]과 오랫동안 곁에 두며 훈련시킨 부곡의 숙련도가 합쳐진 파괴력은 무시무시하다.
당대 제일 전술가인 조조 휘하에서 체계적으로 병법을 익히고 경험도 많은, 오늘날에도 오자양장의 일원에 들며 뛰어난 장수로 알려진 악진이 백전연마의 정예병을 거느리고도 관우의 돌파에 쩔쩔맬 정도로, 이것이 기본기는 부족하지만 피지컬을 이용한 돌파로 득점을 하는 르브론 제임스의 플레이 스타일과 유사하기 때문에 독자들 사이에서 관브론 우임스라는 별명이 붙었다.[5] 이래저래 옆에서 챙겨줄 유능한 참모와, 참모의 말을 듣도록 제어할 주군의 교통정리가 필수인 캐릭터로 작중에서도 유비가 법정에게 빨리 가서 붙으라 할 정도다.
작가의 서술 때문에 관우의 능력에 대한 설정이 이게 맞냐고 한동안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관우가 평민 출신으로 체계적으로 군사 교육을 못 받고 밑바닥에서 경험만으로 군사적 능력을 양성했음을 고려하면 이런 관우의 묘사는 별로 특이할 것이 없다.[6]
또한 특이하게도 유비, 장비, 조운 등의 초창기 동료들처럼 북방에서 군경력을 시작했는데도 수군을 무척 잘 다룬다. 간절히 작가도 위나라에선 문빙급 장수가 아니면 관우를 수전에서 이기기 힘들다고 평한다.
4. 기타
유비와 매우 친한 의형제면서 정작 유비에게 다른 사람이 빙의되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 등 은근 얼빵하다. 조조는 유비가 한중을 공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정말로 자신이 아는 유비가 맞는지 위화감을 느낀 것과 비교된다.삼국지연의로 인해 생긴 이미지가 아닌, 정사의 앞뒤가 지나치게 같고 다혈질적인 성격이 잘 고증되었다. 독자들도 이 때문에 관우의 성격에 대해 상당히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모습을 보인다. 관우의 성격이 호불호가 심히 갈렸다는 원 역사 기록을 감안하면 이것도 고증이라면 고증인 듯.
성격은 단순하고 큰형 앞에서 아이처럼 구는 면모가 있어서 조조가 사건 하나 일으킬 때마다 허도 사냥터에서 베어버렸어야 했다고 칭얼거린다. 반면 장비와는 현실 형제처럼 서로 투닥거리는 사이로, 형은 아랫사람에게 가혹한 동생이 염려스러워 볼 때마다 말리고, 동생은 식자들에게 말을 예쁘게 못하는 형이 걱정스러워 충고를 해준다. 관우도 각자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진 않아서 장비에게 우리는 함께 있는 게 좋다고 말한다.[7] 작중 언급을 보면 평소 유비가 관우에게 성격 교정을 조언하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오냐오냐하는 면이 있던 모양이다.
명실공히 유비군 2인자로 타군 2인자들과 비교해도 세력 내에서 가지는 위상이 남다르다. 서량 전쟁 막판에 패잔병을 이끌고 후퇴하던 서황과 대치했을 때 투항한다면 서황과 휘하 병사들의 신변 보장은 물론 책임지고 천거해 줄 것까지 장담했다. 다른 세력이라면 아무리 2인자격 인사라도 적 상장의 신변을 마음대로 확정할 수 없었다. 최소한 군주와 사전 교감은 가져야 한다. 유비에게 사관한지 얼마 안 된 황권은 이런 관우의 모습에 놀라는 걸 넘어 기겁을 한다. 위의 하후돈, 오의 주유조차 관우만큼 대놓고 위세를 부리지 못했음을 고려하면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얼마나 특이한지 알 수 있다.[8]
원 역사처럼 호족들을 싫어하나(정확히는 유비를 제외한 높으신 분들 전반) 약자, 양민들에게는 친절하다. 죽서기년 발굴로 한중에 온 가난한 학자들이 노숙을 하자 안쓰러워하며 얼른 공개해 돌려보내자고 의견을 냈고 항장 출신이라 유비군 내에서 입지가 좁았던 황권에게도 무척 정중하게 대해주었다. 마초도 유비가 가족들의 비극을 설명하면서 잘 대해주라고 하자 연민을 느껴서 친절하게 대하기도 했다. 반면 힘 있는 사람, 호족 상대로는 불안하기에 외교는 아예 유비가 직접 맡았다.
본작에서는 원 역사의 관우의 북벌에 대해 왜 그랬어야 했는지 여러 화에 걸쳐 설명된다.
[1] 유비-손권 동맹 파탄에 누가 더 큰 책임이 있냐는 논쟁은 지금까지도 큰 떡밥거리긴 하지만 일단 형주 사령관으로서 손권에 대한 관우의 대처가 결코 현명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2] 유장이 동주병을 전부 성도 주변으로 물려서 외곽 지역엔 정예 병력이 남아있지 않았다.[3] 이 고민의 가장 큰 이유가 된 것도 관우였다. 만일 관우가 번성 공방전 당시 우금과 3만 위군 포로를 무리하게 돌보지 않고 전부 죽였더라면 번성의 조인과 서황 등도 버티기 어려웠을 것이지만, 관우는 끝까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패배했다.[4] 악진과의 교전 묘사를 보면 중년을 훨씬 넘긴 관우는 적진을 한참 휘저으면서도 쌩쌩한데 부하들이 먼저 지쳐서 돌격력이 약해진다.[5] 작중 유비는 이를 '우당탕탕'이란 수식어로 정리한다.[6] 역사적으로 전근대~근대 전쟁에 대한 언급을 보면 제대로 된 군사적 교육 없이 뛰어난 전공을 세운 장수들도 있기는 했지만 이런 자들도 교육의 부족으로 인해 세세한 전술은 약하거나 일정 이상으로 거대한 병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문제가 없을 정도의 천재는 정말 드문 케이스다.[7] 원 역사에서 이들의 최후를 생각하면 씁쓸한 부분.[8] 물론 관우는 원 역사에서 유비에게 워낙 절대적 충성을 바친지라 당대인과 후세인들도 저들만은 예외로 취급하는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