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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6-07-20 16:51:11

광개토대왕/생애/원년~6년

상위항목 : 광개토대왕/생애

1. 즉위년의 맹활약2. 근성의 아신왕3. 거란-비려 원정4. 백제의 항복

1. 즉위년의 맹활약

秋七月、南伐百濟、拔十城。九月、北伐契丹、虜男女五百口、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가을 7월에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10성을 무너뜨렸다. 9월에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남녀 5백 구를 사로잡고, 또 본국의 잡혀간 백성 1만을 불러서 타일러 돌아왔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 원년
임진년의 맹활약[1]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전쟁을 치루었다. 즉위한 지 고작 두 달 밖에 지나지 않은 원년 7월에 직접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한 것이다. 이로 인해 석현성(石峴城)을 비롯한 10여 성과 한강 이북의 부락 다수가 고구려에 함락되었다. 이때 광개토대왕이 보여 준 군사적 재능은 대단한 것이어서,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진사왕이 '담덕이 용병에 능하다'는 말을 듣고 감히 나아가 막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9월에는 반대 방향인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거란에 끌려갔던 고구려 백성들을 되찾아 오는 것과 더불어 거란족 500명까지 사로잡아 왔다. 사실 광개토대왕 원년의 북부 전선에서는 광개토대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갔다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광개토대왕은 여전히 남부 전선에 머물러 있고, 북부 전선에서는 다른 장수가 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관미성이 함락되고 남부 전선이 정리된 뒤에는 광개토대왕도 거란 전선에 합류했을 것이다.

『광개토왕릉비』 의 비려 전선 기록에는 광개토대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토벌했다(躬率往討)'는 말이 분명히 나온다. 흔히 이때 되찾아 온 고구려 백성들을 14년 전인 소수림왕 8년(378)에 거란이 고구려 북쪽 여덟 부락을 약탈해간 사건과 관련지어 해석하곤 하지만, 이때까지 잡혀간 사람의 수가 자그마치 1만에 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거란의 약탈은 그 뒤에도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채무 불이행으로 이자까지 쳐서 강제 압류 들어가겠습니다 호갱님

다시 10월에는 백제 북방의 요충지인 관미성을 공격했는데,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르고 바닷물이 에워싸고 있는 곳이라 공략이 쉽지 않았다. 때문에 군사를 일곱 길로 나누어 20일 동안 끈질긴 러시를 감행한 끝에 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강화도나 교동도라는 설이 있고,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파주 오두산성이라는 설도 유력하며, 소수설로는 예성강 하구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관미성이 어느 곳이든 한강의 물길을 통제할 수 있는 전략적 위치라는 점에서는 모든 견해가 일치한다. 즉 관미성이 무너졌다는 것은 곧 백제의 목줄을 쥐고 흔드는 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국가적 위기에 맞서 진사왕은 구원의 행궁으로 사냥하러 나갔다. 그것도 열흘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군주의 사냥이란 무력 과시와 군사 훈련의 의미를 겸비하는 것이므로, 이는 진사왕이 군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하려 한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정작 진사왕은 그렇게 달을 넘겨 11월이 되자마자 구원의 행궁에서 급사하고 말았다.(...)

진사왕의 갑작스러운 사망에 대해서도 이설이 엇갈리는데, 바로 진사왕 사후 백제의 왕위가 아들이 아닌 조카 아신왕에게로 계승된 것이다.[2] 이에 대해 《일본서기》에서는 본디 왕위를 이어받았어야 할 침류왕의 아들 아화가 즉위하기도 전에 진사왕이 왕위를 빼앗았고, 이후 진사왕이 일본 천황에게 실례하여 일본에서 사람을 보내 진사왕을 죽이고 조카 아화를 세우고 돌아왔다고 한다.

이를 종합해보면, 진사왕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일본서기》의 주장이 상당히 유력해진다. 다만 실제로 일본이 백제의 왕을 죽이고 살리고 했을 가능성은 무한히 0에 수렴한다. 진사왕의 구원 행차가 실제로 사냥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여 즐겁게 놀고 덤으로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이기에 유인만 잘 한다면 사람 암살하기엔 더 없이 적합한 장소로 변한다는 사냥터의 속성을 이용해 아신왕이 제거했을 것이다.

물론 《삼국사기》 기록에 '행궁에서 죽었다'는 표현을 분명히 하고 있으므로, 적어도 행궁으로 옮겨진 뒤 죽었을 것이다. 아니면 사냥 중 빗나간 화살에 맞은 곳이 덧나 죽었다고 하면 너무 자비로운가... 또 군대 정비와 반격 준비가 목적이었다고 하면, 진사왕이 진성 레임덕 상태인 가운데 왕위를 노리고 있는 왕족과 군사를 이끌고 한 자리에 모인 귀족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여기에 《일본서기》의 기록을 일정 부분 신뢰한다면 아신왕은 즉위과정에서 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은 것으로 보이고, 이는 『광개토왕릉비』 의 이른바 '신묘년조 기사'와도 연관지어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아신왕이 왜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느라 태자를 왜국으로 보내는 등 저자세 외교까지 불사한 것도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2. 근성의 아신왕

이후 영락 5년에 비려 토벌이 완료되기까지, 광개토대왕은 거란-비려를 상대로 한 북방 전선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인지,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2년부터 광개토대왕 4년까지 남방 전선에서 줄곧 백제의 공격을 받아주는(...) 역할을 맡았다.

백제 아신왕은 즉위한 이듬해 정월에 동명왕의 사당과 천지신명에 제사를 올리고, 개각을 단행한 듯 자신의 외삼촌 진무에게 군사 업무를 맡겼다. 그리고 그해 8월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다음과 같이 비장하게 말하며 고구려로의 반격(?)을 시작한다.
關彌城者、我北鄙之襟要也。今爲高句麗所有、此寡人之所痛惜、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
관미성이란 곳은 우리 북쪽 변경의 요충지다. 지금 고구려가 가진 바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슬퍼하는 바로,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2년

그러자 진무는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으로 쳐들어가, 석현성 등 다섯 성을 회복하기 위해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다. 진무는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공격해 들어갔지만, 군량 수송이 끊어지자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이에 대해 고구려본기에서는 단지 쿨시크하게 "백제가 쳐들어오자 장수를 보내 막았다."라고 써놓은 게 고작이다.(...)

이와 더불어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했다고 하는데, 영명사와 중흥사가 이때 지어진 절로 꼽힌다. 영명사는 목은 이색의 부벽루에도 등장하는 절이다. 부벽루만이 아니라 다른 문학작품에도 자주 등장하고, 일제강점기 때는 31본산 중 한 곳이였을 정도로 유명한 절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벽루도 광개토대왕때에 지어젔을 것으로 추정되곤 한다.

이어서 광개토대왕 3년 7월에도 백제가 쳐들어오자, 이번에는 광개토대왕이 직접 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수곡성 밑에서 싸워 격퇴했다. 이듬해인 광개토대왕 4년 8월에도 백제의 좌장 진무가 다시 쳐들어오자, 광개토대왕도 다시 직접 군사 7천을 이끌고 패수 가에 진을 치고 격퇴했다. 이 전투로 백제군 8천이 고스란히 갈려나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수급 8천여 개를 노획했다(虜獲八千餘級)'고 나오고, 백제본기에는 '죽은 자가 8천 명(死者八千人)'이라고 나온다.

그해 11월에 아신왕은 패수에서의 대패에 보복하고자 직접 군사 7천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청목령 밑에 이르렀지만, 때마침 폭설을 만나 군사들이 죽어나가자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한산성(漢山城)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위로했다. 이때 아신왕의 심정은 훗날 나라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발해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눈 핑계로 돌아온 신라의 통쾌한 기분과는 정반대였을 것이다. 백제 역사상 최악의 대설이었을지도.

백제는 가을마다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추수기를 노리고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백제만 그런 것도 아니다. 비상시에는 군량의 약탈을 통한 현지 조달이 가능해지는데다, 빼앗을 것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간단히 천고마비의 고사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삼국사기》 광개토대왕 원년의 관미성 전투 기록이나 광개토왕비문 영락 6년의 전쟁을 제외하고는 전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이 더욱 상세한 전황을 전하고 있다. 이건 백제본기의 기록이 고구려나 신라 것을 참고한 게 아니라, 백제 측의 기록이라는 것이고, '사료가 부족해서 아신왕의 승전이 전해지지 않는게 아닐까'하는 추측도 가능성이 낮아진다.

자잘한 규모의 전투들도 전부 기록되었고 또한 거의 1년 주기로 가을마다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으로 보아 광개토대왕 2년에서 광개토대왕 4년까지 백제가 고구려에 반격한 것은 한국 고대사에서 보기 드물게 누락 없이 기록이 살아남은 사건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아신왕의 호구스러움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3. 거란-비려 원정


위서 거란전에 따르면 거란은 388년에 북위가 동으로 고막해를 정벌하면서 고막해에서 분리되어 나온 세력이라 하고, 실제로 중국 사서에서 거란이라는 칭호는 5세기가 되어야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10년 앞선 378년에 이미 거란이 고구려의 북변을 침탈하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으로 미루어 이 시기의 거란은 아직 하나의 집단으로 형성되지 못한 초창기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초창기부터 고구려에 개발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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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대략적인 비려 정벌 루트
영락 5년에 광개토대왕은 사람을 돌려보내지 않는 비려[3]를 토벌하기 위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을 격파하니, 6~700영에 마소와 양떼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돌아오는 길에 요동을 거쳐 국경을 돌아보고 사냥을 즐기다 왔다.

여기서의 비려 또는 패려에 대해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거란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요동과 인접해 있는 점에서 위치가 들어맞고, 사람을 돌려받으러 갔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의 서술과 일치한다. 구체적으로는 거란의 필혈부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이외에도 많은 이설이 있지만, 적어도 요하 중상류 지역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즉 광개토대왕 원년부터 시작된 거란 정벌이 이 시점에 와서 마무리되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 특히 광개토대왕은 복수의 전선을 함께 운용한 것으로 보이고, 훗, 양면전쟁 따위... 『광개토왕릉비』 는 《삼국사기》와 달리 광개토대왕의 정복 과정을 시간의 흐름대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한 정복이 마무리되면 당시까지의 경과를 몰아서 정리하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영은 유목민 마을의 단위라고 한다. 보통 100개의 게르가 모여 1영을 이룬다고 하는데[4], 이에 따르면 비려의 인구는 700영×100게르×5인[5]으로 자그마치 35만에 달한다.(...) 하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다. 유목민 마을이라는 것이 애초에 100개 단위로 정확히 끊어서 통제되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위서에 따르면 당시 거란은 대다수 북위의 침공을 피해 달아나 흩어진 상태였다. 또한 영(營)과 부(部)가 서로 병렬적인 관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후한서 오환전에 따르면 초원의 공동체는 부(국가)-읍(마을)-락(가족)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으며, 영이라는 단위는 찾아볼 수 없다.

요동을 거쳐 돌아왔다는 서술을 자세히 보면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역성(力城)과 북풍(北豊)에 왔다고 되어 있는데, 양평은 요동군의 치소로 흔히 요동성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바로 그곳이고 북풍과 역성은 모두 요동군에 소속되어 있는 곳이다. 그런데 고국양왕 때까지만 해도 요동은 후연의 땅이어서, 거란으로부터 돌아오면서 요동 일대를 확보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러나 후연의 양평령 단등의 묵인하에 요동 땅을 맘대로 지났거나, 이미 그 이전에 양평을 제외한 요동 일부, 즉 역성과 북풍을 미리 확보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역성과 북풍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한 설이 존재하지 않는 실정이다. 특히 북풍의 위치에 대해 혹자는 요양 북쪽이라거나 심양 서쪽이라 하기도 하고, 막가면 통화 즉 국내성 인근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중국역사지도집에는 요동반도 한가운데로 표시되어 있다.

광개토왕비문의 이 부분에서 비려라는 판독을 따를 경우, 碑麗라고 쓰는데, 여기서 앞글자는 비석이라는 뜻이고 뒷글자는 매다라는 뜻이 되어 비석에 매달아놓은 제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수 있게 된다. 왠지 고어하다 백제를 백잔으로, 왜를 왜구 등으로 멸칭한 것과 같은 거란의 필혈부에 대한 멸칭이 되는 것이다.

4. 백제의 항복

영락 6년, 북방 전선에서 거란-비려와의 전쟁도 마무리되었고, 이제 광개토대왕은 그동안 백제의 아신왕이 고구려에 집적거린 것을 응징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제로 밀고 들어갔다. 수로와 육로 양면으로 진공하여[6] 아단성, 미추성, 대산한성, 고모루성 등이 무너지고 백제의 수도로 압박해 들어가니, 그때까지 함락된 백제의 성이 모두 58성에 700촌이었다.[7] 일본서기에는 이때 빼았긴 땅을 침미다례, 현남, 지침, 곡나, 동한이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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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hansungattack2.png

하지만 그럼에도 근성의 남자 아신왕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군대를 성 밖으로 보내어 응전하려 하자, 광개토대왕은 분노하여 아리수를(을) 건너서 성을 압박하였다. 마침내 군대가 격퇴되고 성이 포위되기에 이르러 처지가 곤란해진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고 남녀 1천 명과 세포 1천 필을 바치면서 '지금부터 이후 영원히 노객이 되겠다'는 맹서를 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왕의 아우와 대신 10명을 데리고 수도로 돌아왔다.

이로서 백제와 고구려의 직접적인 전쟁은 끝이 났다. 고구려는 남방 전선에서 백제를 완전히 압도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근성남 아신왕은 계속해서 반격 시도를 멈추지 않았는데, 보는 사람이 애처로울 정도로 족족 실패한다.

광개토대왕 6년 5월에 아신왕은 태자 전지를 왜국으로 보내어 우호를 맺고 7월에는 한강 남쪽에서 크게 군대를 사열한데다, 다시 이듬해 봄에는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사두를 좌장으로 앉히고 새로 쌍현성을 축조하는 등 반격을 노렸다. 그리고 그해 8월에 드디어 야심차게 군사를 내어 한산 북쪽의 목책에 이르렀으나 하필이면 그날 밤에 병영으로 유성이 떨어졌다.(...) 하늘이 외칩니다. "고만해 미친놈들아." 그러자 하늘의 뜻이라 여겨 회군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신왕은 바로 다음달에 도성 사람들을 모아서 활쏘기를 가르치며 긴장 국면을 유지했다.(...)
[1] 실제로 삼국사기의 연표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이 즉위한 해도 임진년으로 추산된다. 다만 능비문에 따르면 신묘년이 되지만... '기년 수정론' 항목 참조.[2] 그런데 《삼국유사》 왕력에서는 괴랄하게도 아신왕을 진사왕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으니...[3] 능비문의 판독에 따라 비려(碑麗)는 패려(稗麗)로 읽기도 한다.[4] 우리나라 삼국지 4권 325쪽 각주. 그러나 우리나라 삼국지는 소설이기에 이에 대한 정확한 근거는 확인이 필요하다. 참고로 김용만의 역사서적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에도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우리나라 삼국지 자문을 김용만이 했다.[5] 한 게르는 한 집으로 곧 한 가족이고, 한 가족의 구성원을 5인으로 본 기준.[6] 능비문의 판독에 따라 '水軍'이라는 글자를 판독 불명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공략된 성의 위치로 미루어 일단은 수군이 동원되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7] 아단성보다 앞에 각미성(各彌城)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관미성과 동일한 성으로 보인다. 따라서 능비문의 해당 숫자는 이보다 앞서 즉위 원년부터 함락된 모든 성을 망라한 숫자로 여겨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