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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00:01:47

구리(바둑기사)

구리
古力 / Gu Li
파일:Gu_Li.jpg
직업 바둑기사
소속 중국기원
생년월일 1983년 2월 3일 ([age(1983-02-03)]세)
국적
[[중국|]][[틀:국기|]][[틀:국기|]]
출신지 충칭시
학력 칭화대학 역사학과 졸업
입단 1995년
단급 九단

1. 개요2. 생애3. 기풍4. 이세돌과의 관계5.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6.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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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바둑 기사.

2. 생애

6살에 바둑을 시작해 1994년 세계 청소년 바둑 선수권 소년부 우승, 1995년 프로에 입단했다. 이후 2001년 신인왕전, 2003년 천원전, 2005년 명인전 우승 등 국내 기전에서 실적을 쌓았으며 2006년 LG배에서 우승하며 九단으로 승단했다.[1]

2009년 LG배에서 지난해 세계 대회 3관왕 이세돌을 종합 전적 2-0으로 꺾고, 삼성화재배, BC카드배까지 우승하며 세계 대회 3관왕을 달성, 세계 최강 기사 중 한 명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2014년 이세돌과의 Milly 몽백합 이세돌-구리 10번기에서 패배하며 커리어의 위기가 있었지만 2015년 춘란배에서 우승하며 다시 세계 대회 타이틀을 획득하며 건재를 알렸다.

2016년 LG배 32강전에서 이세돌을 다시 한 번 이기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이후 이세돌의 연승을 종결시켰다.

동갑내기 이세돌의 라이벌로 꼽히며,[2] 상대전적은 25승 23패 1무이다.

이세돌을 상대로 선전했던 기사였음에도 그에게도 천적은 있었으니, 그는 안조영. 커리어에선 객관적으로 밀리는 기사였음에도 끝내기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안조영과 스타일이 대비되어서인지, 안조영을 상대로는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안조영 기사 문서 참고.

2004년 삼성화재배 준결승 1-2 패
2009년 LG배 결승 2-0 승
2011년 BC카드배 결승 2-3 패
2012년 삼성화재배 32강 4패 빅 무승부, 결승 1-2 패
2014년 Milly 몽백합 이세돌-구리 10번기 2-6 패[3]

2015년부터 체육 특기자 제도로 칭화대학에 입학했다. 중국의 체육 특기자 제도는 운동선수가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학과를 갈 수 있도록 하는데, 구리는 그들 중 90%가 가는 체육학 전공을 마다하고 유일하게 역사학 전공을 선택했다고 한다. 추후 졸업하면 영미권으로 유학을 갈 의사를 중국 인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자기가 학자로서의 길을 가기 전에 세계대회 우승을 한 번 더 하고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2016년 LG배ⓞ 8강까지 올라갔다 8강 상대가 상대 전적에서 절대 우위인 박정환(구리 4 : 박정환 2)이다.

2018년 9월 23일 천부배 A조 8강전에서 롄샤오에게 패했다.

판후이, 저우루이양과 함께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과 알파고끼리의 대결에 대한 해설을 맡았다.

텐센트의 투자를 받아 한큐바둑을 창업하여 타이젬바둑, 사이버오로 등을 완전히 듣보잡화 해버렸다.

2019년 7월 칭화대학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기사

10월 10일 몽백합배에 와일드 카드로 출전. 64강전에서 왕웨이에게 패했다.

2023년 몽백합배에도 와일드 카드로 출전했지만 8월 3일 64강전에서 최정에게 졌다.

2024년 남양배에 주최 측 지명 선수로 나섰고, 11월 2일 32강전에서 변상일에게 패했다.

3. 기풍

내실 있는 바둑을 두는 기사로서 초반 포석이 강하고 모양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 수읽기를 많이 하지 않아도 좋은 수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후반 끝내기에서 역전당하는 경우가 많아 '최강의 아마추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마추어들처럼 초반 포석은 잘 두지만 끝내기가 약하다는 뜻으로, 프로들은 유리한 상황에서 쉽게 두려는 경향이 강하나 구리는 그런 것 없이 계속 밀어붙이다 역전당했던 것이다. 또한 아마추어들이 좋아할 만한, 일견 속수 같은 수들을 두면서 결국에는 힘으로 밀어붙여 승리하는 모습도 많이 보여주었다.

4. 이세돌과의 관계

구리와 이세돌은 오래된 바둑 역사 속에서도 전례가 없는 라이벌이었다. 이전 사례로는 20세기 희대의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는 사카타 에이오후지사와 히데유키[4], 조훈현서봉수[5]가 있긴 하지만, 이 두 번의 라이벌전은 사실상 한 쪽의 일방적인 승리였다면 구리와 이세돌은 10여년의 세월 동안 치열한 일진일퇴의 공방을 거듭했다. 두 기사가 최정상권에서 물러난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번기 승부와 Milly 몽백합 이세돌-구리 10번기에서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준 이세돌의 우위가 일반적인 평가지만, 역사상 바둑계에서 동시대 1인자를 상대로 이렇게까지 분전한 기사는 2020년대 기준 구리가 유일했다.

또한 구리와 이세돌은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기 힘든 여러가지 기록들을 갖고 있는데,

이렇게 서로 치고받는 싸움이 계속되고 10번기에서 지기도 했지만, 구리는 짧은 원망과 오랜 사랑을 느꼈다면서 이세돌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표하기도 했다. 2019년 이세돌이 한국기원과의 갈등 끝에 프로 바둑계 은퇴를 선언하자, 구리는 웨이보에 '자신이 좇던 목표였으며 나를 격려해주고 나아가게 해줘서 고마웠다', '신의 한 수로 인류의 지혜와 보물을 지켜주었다.'[6], '지난날과 미래에 건배를 보내며 더욱 유일무이한 이세돌로 살아가길 바란다.'란 글을 남기기도 했다. # 이에 이세돌도 SBS 주영진 뉴스브리핑 인터뷰 도중 관련 언급이 나오자 이미 글을 봤다며 고마움을 표했다. 또 라이벌이자 친구로 지냈지만 사실 친구의 감정이 더 컸다며 자신은 은퇴하지만 구리는 바둑계에 좀 더 남아서 유종의 미를 거두길 바란다는 식의 메시지를 보냈다.

5. 주요 기사들과의 상대 전적

6. 저서

파일:이세돌 구리 격전보.jpg

* 이세돌 구리 격전보 - 한.중 바둑의 영웅 : 2014년 대한민국에 번역되어 나왔고, 2016년 재정가되어서 재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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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은 세계 대회 우승 1회 또는 준우승 2회 달성시 九단으로 승단한다.[2] 출생일도 거의 비슷(이세돌 1983년 3월 2일생, 구리 1983년 2월 3일생) 입단한 해도 동일하다.(1995년)[3] 10번기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여전히 이세돌과 우정이 돈독하고, 이후에도 이세돌과 바둑을 두면 배우는 것이 많다며 이세돌과 바둑을 둘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통산 1000승 달성 이후 이세돌과 바둑을 더 둬 보고 싶다고 했으나, 이 날은 바둑계가 이세돌의 프로기사회 탈퇴로 난리가 나서 묻혔다.[4] 사카다 九단이 53승 33패 1무 우세.[5] 조훈현 九단이 251승 120패 우세.[6] 이 대국에서 구리는 해설 도중에 승리의 시초가 된 78수를 두고 '신의 한 수'라고 평하기도 했었다.[7] 비공식전까지 포함하면 25:1:25 동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