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제4대 민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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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5년 7월 26일 |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 (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 | |
사망 | 1965년 1월 27일 (향년 49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본관 | 능성 구씨[1] |
서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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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5년 7월 26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신풍리(현 수원시 팔달구 장안동)에서 태어났다. 수원공립보통학교, 5년제 중앙중학교를 졸업하였다.그는 1940년 3월 일본 릿쿄대학에 재학 중 민족정신이 투철한 동지 15명과 비밀결사 죽마계를 조직하고 항일운동을 계획했다. 이들은 수차례 회합을 갖고 때가 오면 일제히 봉기하여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목표 아래 동지규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김사복(金思宓)을 계장(契長)으로 추대하고 동경에 본부를 두었으며, 그 산하에 민족독립운동의 이론적 체계를 연구 토의하기 위하여 1941년 4월에 연구부를 설치했다. 이때 그는 이창덕(李昌德)·이해룡(李海龍)·이봉하(李鳳夏)·이일동(李一東)·김홍기(金泓沂) 등과 함께 연구부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그는 1941년 6월에 체포되었다. 1943년 3월 30일 도쿄 형사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15 광복 후 서울로 귀환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기도 용인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류기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기도 용인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신의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도 용인군 선거구에 출마해 현역 국회의원인 자유당 신의식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을 탈당하여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홍길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민의당 후보로 경기도 수원시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이병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5년 1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구철회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7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1907 ~ 1969)의 첫째 동생인 구철회(1911 ~ 1975) 고문하고는 동명이인[2]인데.. 공교롭게도 둘 다 능성 구씨다. 서로 존재를 알았는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