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화모(花芼)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81년 2월 16일 |
경상도 의성현 안평면 거촌동 (현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걸촌마을) | |
사망 | 1925년 6월 25일 |
경상북도 의성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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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권사연은 1881년 2월 16일 경상도 의성현 안평면 거촌동(현 경상북도 의성군 안평면 석탑리 걸촌마을)에서 아버지 권순선(權順善)과 어머니 의성 김씨 김성준(金聖俊)의 딸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그는 1919년 3월 17일 오후 8시경 점곡면 송내동교회 조사(助事)인 권수백(權秀伯)의 권유를 받고, 이종출(李鍾出)·이양준(李良俊)·김옥돈(金玉頓)·이만준(李萬俊) 등 1백 5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사동 우리곡 부락에 모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창길동을 거쳐 화령동까지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계속하고, 자진 해산하였다. 또한 3월 19일의 도리원 장날을 이용하여 이양준 등 수천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날 미리 정보를 입수한 의성경찰서에서는 당시 비안주재소에 응원 출장 중이던 일본 군경을 도리주재소에 급파하여, 시장이 열릴 무렵 무력으로 시장을 폐쇄하는 등 사전에 만세시위를 저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썼다. 그러나 오후 1시 30분경, 일제의 저지 공작에 격분하 시위군중은 몽둥이와 돌멩이를 가지고 주재소로 몰려가 포위하고, 투석으로 건물을 파괴하며 격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주재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경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시위군중은 일시 해산되었다.
이후 주재소 경관들은 격분한 군중이 의성경찰서와 안평주재소를 습격한다는 풍문에 겁을 먹고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80연대에 응원 요청을 하여, 장교 이하 1백 7명의 일본군을 동원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는 한편,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때 권사연은 부상을 입은 채 체포되었으며, 1919년 5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의 여독에 시달리다 1925년 6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부정공파 숙(璛)계 3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