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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6년 10월 25일 |
평안북도 정주시 아이포면 대산리 (현 평안북도 정주시 대산리) | |
사망 | 1927년 8월 31일 (향년 30세) |
러시아 모스크바 주 세르푸호프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본관 | 경주 김씨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공집은 1896년 10월 25일 평안북도 정주군 아이포면 대산리(현 정주시 대산리)에서 부친 김낙행(金洛行)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0년부터 1907년까지 집에서 공부했고, 1907년부터 1908년까지 대산리 소학교에서 공부했다. 이어 1908년부터 오산학교에서 공부해 1912년 16살의 나이로 오산학교 중학부를 졸업했다. 또한 그는 정주군의 장로회 집안의 여식이던 14살 김씨와 결혼했고, 아내의 종교를 따라 장로회 신자가 되었다.오삭학교를 졸업한 그는 정주군을 떠나 경기도 죽산군으로 이주하여 1913년부터 1914년까지 삼악학교 교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14년에는 만주로 이동하여 봉천성 통화현에 위치한 신흥중학교의 교원이 되어 1915년까지 활동하며 지리를 가르쳤다. 그러나 그가 도착했을 때 신흥중학교는 거듭되는 천재(天災)로 인하여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1915년 김공집은 고향 정주로 돌아와 영창학교 교원으로 1916년까지 근무했다.
이후 아내가 아들 정옥을 임신했지만, 그는 아내가 임신한지 4개월만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그리고 1917년까지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서 영어를 공부했고, 이어 1918년까지 도쿄 경응의숙(慶應義塾)에서 이재과(理財科)를 공부했다. 1918년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상하이로 건너갔고, 이듬해인 1919년 상반기에는 만주 안동현에 머물렸다.
1919년 9월 15일 오후 6시 15분경 만주 봉천성내 샤오난먼 뒤 천성여관 제2호실에서 전일이 폭탄을 제조하던 중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폭탄이 터지면서 사망했다. 이때 전일의 수첩에는 55명의 이름과 주소가 기재되어 있었는데, 김공집의 이름은 53번째로 기록되었다. 이 사건 이후 서로군정서 의용대장 이석(李錫)이 상하이로 피신하여 김공집, 이영운, 이한산 등과 함께 폭탄 제조를 계속했다고 한다. 김공집의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1919년 하반기에는 경성에 있으면서 13도총간부의 문통부 부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즉, 그는 1919년 하반기에 상하이와 경성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13도총간부는 1919년 음력 8월경 서울 가회동의 취운정(翠雲亭)에서 강택진, 박상목, 박시묵(朴時默), 송병조(宋炳朝)[1], 윤태선(尹泰善) 등이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 결사였다. 13도 총간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활동했으나, 곧 일제에 탐지되어 13도 총간부관련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래서 1920년 3월 안창호가 상하이에 있던 김공집에게 경성으로 갈 것을 제안하자, 그는 체포 명령 중이므로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1920년 2월 18일, 김공집은 이석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동국 총판 안창호를 찾아가서 항해학 공부를 하고 싶다며 힘써줄 것을 요청했다. 김공집이 이석을 통하여 안창호에게 항해술을 배우고 싶다고 한 것은 비행기에 대한 임정과 안창호의 각별한 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임정은 1919년 11월 5일 법률 제2호로 군무부가 육군비행대와 해군비행대에 관한 사항을 관리한다고 규정하였다. 또한 1920년 1월 13일 발표한 국무원 포고 제1호에서 비행대 편성 문제를 중심으로 비행사 양성소 설치를 표명하였고, 1920년 3월 발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정방침에 비행기대 편성을 규정하였다. 비행기를 구입하여 선전용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는 안창호의 계획으로, 그는 독립운동 수행에 비행기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 예측하였다.
1920년 2월 29일, 김공집은 박현환(朴賢煥)과 함께 안창호를 방문하여 광둥 유학 속행이 어떤가 물었고, 안창호는 결심하였으니 속행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임정은 한인 비행대 편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독자적으로 공군력을 양성할 수 없었으므로 중국의 항공학교에 한인청년들을 위탁하여 비행술을 배우게 하였다. 김공집이 가고 싶어한 곳은 비행학교였고, 박현환도 비행학교를 희망했는데, 두 사람이 입학을 허락받은 학교는 광둥의 무관학교였다.
그러던 3월 8일, 김공집은 단독으로 안창호를 찾아가 미국으로 유학가고 싶다고 밝혔다. <신한민보>와 <독립신문> 기사를 통해 노백린이 주관하는 미국에서의 비행양성소 건립 소식을 접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가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지 않자, 그는 3월 12일에 다시 안창호를 찾아가서 광둥행에 관련된 손영직(孫永稷)을 믿기 어렵다고 말했다. 안창호는 자신도 알지 못하지만, 이미 시작하였으므로 광둥에 가보라고 하였다. 그날 안창호는 손영직의 방문을 받았고, 그로부터 광둥에 20명의 한인학생을 보낼수 있는데 14명이 파견된 상태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광둥에 가면 먼저 한자와 권술을 공부하고, 이어 항해술과 육군학을 공부한다는 말도 들었다. 며칠 후 김공집은 박현환과 함께 다시 안창호를 방문하여 손영직을 믿기 어려우므로, 공연히 광동으로 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안창호는 이미 약속한 것이고, 최소한 여행이라는 이익은 있을 것이라며 광동에 가라고 했다.
1920년 4월 29일 김공집은 박현환과 함께 광동에서 상하이로 돌아와 안창호를 방문하였다. 3월 16일 안창호를 방문하였으니 그 직후 광둥으로 떠났다면 한 달여 만에 상하이로 돌아온 것이다. 4월 30일 김공집은 박현환, 그리고 김형균(金亨均)과 함께 안창호를 방문하여 광둥에서의 경과를 보고하였다. 그는 자신이 한국학생대표로 웅변대회에 참석했다가 말을 못하고 왔다고 안창호에게 보고하였다. 이에 대해 박현환은 김공집을 포함하여 광동무관학교에 있던 한국학생들이 상하이로 돌아온 것은 중국인 웅변가가 한국학생들을 비적이라고 신문에 게재했기 때문이었다고 설명했다.
광동에서 돌아온 김공집은 1920년 5월 27일 흥사단에 가입하여 단우가 되었다. 이후 1920년 6월 중순 민병위(閔丙偉)와 함께 김창숙을 따라 광저우로 갔다가 7월 13일에 돌아왔다. 안창호는 7월 21일 그에게 한국을 방문한 미 의원단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기 위해 경성에 갈 것을 제의했지만, 김공집은 일제가 13도 총간부 임원들을 체포하고 있으므로 어렵다며 또다시 거절했다. 이후 그는 한동안 흥사단원으로서 상하이에서 활동하였다. 1920년 11월 29일 상하이의 단소(團所)에서 열린 흥사단 제7회 원동대회의 운동회에서 유연체조(柔軟體操: 맨손체조)로 3등을 하였고, 제8회 원동대회의 준비위원 중 한 사람으로 지정받았다.
한편 1920년 3월부터 1921년2월까지의 단보대(團報代) 1.20원을 1920년 11월 25일에, 1921년 3월부터 12월까지의 단보대 1원을 1922년 12월 31일에 납부하였다. 또한 예연금(例年金)을 미지급하여 징계금을 받기도 하였지만, 제 14반원으로 1921년 1계절 예연금 1문을 1920년 12월 30일자로 납부하였고, 1921년 4월 1일에도 예연금 1원을 납부하였다. 그리고 1922년 1월 9일 사천성 노주강무당(瀘州講武堂)으로 떠나기 전까지 제18반장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1월7일, 김공집은 ‘레닌의 사적(事蹟)’이라는 주제로 상하이의 흥사단 단소에서 25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하였다. 그리고 이틀 후 흥사단 단우 이영운(李英雲), 비단우 김득하(金得河), 이춘성(李春成)과 함께 사천성 노주강무당에 입학하기 위해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그들은 노주강무당에 입학했지만 사천성 군벌들간에 전투가 전개되자 상하이로 귀환하여 단우들 앞에서 '사천 체험담'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1922년 10월 김공집은 하남성에 있는 한단군사강습소(邯鄲軍事講習所)에 입학하기 위해 상하이를 출발했다. 이후 1923년부터 1924년까지는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나, 1925년 1월 말 그가 흥사단에 보고한 이력서에 따르면, 그는 광서성 오주에 거주하면서 광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쑨원의 광둥군에 들어가 실전에 참가했다고 한다. 즉 하남성의 한단군사강습소를 졸업한 김공집은 이후 광둥무관학교를 졸업하였고, 손문의 광둥군에도 참여한 것이다. 이후 1925년 가을 김공집은 몽고를 거쳐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는 1년 여후 <동광(東光)>지에 '김세정(金世錚)'이라는 이름으로 소식을 전했다. 만 1년 동안 모스크바 비행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앞으로 1년을 더 공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2년여를 공부한 후인 1927년 7월 김공집은 모스크바비행학교를 졸업하였고, 상급 학교로 진급진학하게 되어 모스크바에서 100여 리 떨어진 세르푸호프에 가서 비행 훈련을 하였다. 그러나 졸업 한 달여만인 1927년 8월 31일 비행 도중 기계 고장으로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그의 동기였던 박태하(朴泰河)는 김공집의 장례를 주관한 뒤 김공집의 아들 정옥을 수소문하여 한 통의 편지(1928년 1월 23일자, ‘김정옥 군 앞으로’)와 4장의 사진을 보냈다. 그의 유해는 현지에 매장되었다가 1994년 7월 4일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김공집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