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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95-96 시즌
1996 하얼빈 동계 아시안 게임을 통해 시니어 무대에 데뷔했다.[1] 또한 1996 세계선수권에도 참가하지만 이때는 종합 15위에 머물렀다.2. 1996-97 시즌
1997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각종 기록을 세우며 평정한 후 곧바로 다시 시니어 대표팀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첫 해만에 1997 세계선수권에서 당시 겨우 만 17세의 나이에 강력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종합우승을 차지하면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주니어 세계선수권과 세계선수권을 같은 해에 우승한 최초의 선수이다.[2] 당시 500m 은메달, 1000m[3], 3000m 금메달로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5000m 계주에서도 우승을 차지하며 당시 쇼트트랙 최강자 반열에 들어섰다.3. 1997-98 시즌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1000m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중국의 리자쥔과 경합을 벌일 때 날들이밀기로 짜릿하게 금메달을 받았다. 이 때 그가 0.053초 앞섰으며 경기 결과가 나오고서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심판에게 몇 번이나 되물어봤던 리자쥔의 모습이 당시 방송을 탔다. 이후 모든 쇼트트랙 선수들은 결승선을 통과할 때 날을 들이밀게 되었다.[4] 김동성의 이 금메달은 대한민국이 일본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따낸 최초의 금메달이다.[5] 또한 계주 은메달[6]을 따는 등 화려한 전적을 쌓으면서 한국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있었다.4. 1998-99 시즌
4.1. 월드컵 시리즈
1500m에서 최강자의 면모를 보였고, 최종 종합 3위를 기록한다.4.2. 1999 세계선수권
1000m에서만 은메달을 따고 나머지 종목은 메달권에 실패해, 1997년 이후로 두번째 세선 종합우승에는 실패한다.5. 1999-00 시즌
5.1. 월드컵 시리즈
비교적 리자쥔에게 밀리던 1000m에서 랭킹 1위를 달성하고, 주종목이 아니었던 500m에서도 랭킹 2위를 기록하는 등 놀라운 발전을 보여준다. 1500m는 살짝 하락한 3위를 기록했지만 종합 랭킹 1위를 기록하며 본인의 첫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다.5.2. 2000 세계선수권
주종목인 1500m 결승에서 최하위로 들어왔는데, 우승자는 민룡이었다. 이후 500m에서는 준결승까지 올라갔지만, 여기서 김동성이 코너를 돌며 인코스 추월을 하다 리자쥔과 충돌하여 같이 미끄러져 넘어지고 마는데 보통 선수들이 같이 넘어지면서 다른 선수에게 부상을 입힐 수 있으니 스케이트날을 서로에게서 멀리 해주는게 보통이지만, 리자쥔은 그대로 발을 뻗어 김동성의 몸으로 향하게 하여 고의적으로 다치게 했다. 선수를 스케이트 날로 부상을 당하게 했으면서도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김동성을 뒤도 안돌아보고 일어선 후 유유히 떠나는 리자쥔의 모습이 가관이다. 김동성은 오른쪽 팔과 허벅지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고 하마터면 얼굴에 닿을뻔 했다고 한다. 김동성 본인 언급으로 '당시 느낌으로는 하얗게 뼈가 보일 정도였다' 할 정도였으니 굉장히 깊게 베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곧 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김동성이 2012년 라디오스타에서 말한바로는 98년 나가노 올림픽에서 다 따놓은 금메달을 본인의 방심으로 김동성에게 빼았긴 것에 대한 복수로 그런 것 같다고 한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오심으로 금메달을 놓친 것도 아니고 김동성에게 날내밀기로 패배한 주제에 살인미수나 다름없는 방식으로 복수를 한다는건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더욱 경악스러운건 리자쥔이 사과했다는 언급은 전혀 없다. 심지어 고의가 아닌 실수로 벌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사과를 하는게 당연한 행동이다. 그야말로 빙판위의 사이코패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이 남자 1000m 편파 판정 논란으로 한창 시끄러웠을 당시 김동성이 한 인터뷰에서 리자쥔의 스케이트날 사건에 대해 다시 한번 언급하기도 했는데, 리자쥔은 사과를 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아예 김동성을 피해다녔다고 한다. 서먹함을 풀기 위해 오히려 김동성 본인이 웃으면서 직접 '너 때문에 팔이 이렇게 됐다' 라고 농담식으로 말을 건내야 했을 정도라고 한다.
6. 2000-01 시즌
월드컵 시리즈에서 큰 부상을 입었지만 다행히 2000-01시즌에 맞춰 복귀한다. 하지만 이때부터 무릎 컨디션이 나빠지며 월드컵에서는 이전 시즌 만큼의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종합 10위로 마무리했다. 결국 오른쪽 무릎 연골 손상 때문에 1월달 수술대에 올랐고 시즌 아웃이 되어 세계선수권에는 불참했다.7. 2001-02 시즌
7.1. 월드컵 시리즈
부상을 모두 털어내고 최고의 폼으로 복귀한다. 1500m, 1000m에서 랭킹 1위, 주종목이 아닌 500m에서도 랭킹 2위를 찍었으며 총 5번에 걸친 월드컵 대회에 모두 출전해 개인전에서만 무려 9개의 금메달을 휩쓸며 본인의 두번째 월드컵을 우승했고, 세계 종합랭킹 1위이자 최강자의 위엄을 제대로 선보인다. 계주에서까지 민룡, 오세종, 이승재와 팀을 이뤄 랭킹 1위를 찍어 정점을 찍었고, 이 압도적인 포스에 김동성이 이끄는 남자 대표팀이 최고의 성적을 낼 것이라 기대를 모았다.7.2.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 1000m
* 5000m 계주
- 1500m
김동성은 6위를 기록한 프랑스의 브루노 로스코스에게 축하를 받은 후, 태극기를 들고 세레모니를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심판인 제임스 휴이시가 아폴로 안톤 오노의 진로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금메달을 빼앗으면서 그의 쇼트트랙 인생에서 엄청난 파란기를 일으켰다. 순위가 확정되고 오노와 미국 관중들이 환호하자 김동성은 처음에는 멍해하며 전광판을 확인했고 그 후 어이상실한 표정으로 태극기를 바닥에 떨구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이 사건으로 인해 2002년 이후 한동안 국내에서 반미 감정이 극에 달한 적이 있었다. 그해 6월 10일에 열린 2002 한일월드컵 미국전에서 안정환(김동성 역)과 이천수(안톤 오노 역)가 오노의 할리우드액션 세레머니를 하면서 한 번 더 반미감정이 확인되었다.[8] 게다가 3일 뒤인 6월 13일[9]에는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압사당하는 사고까지 나서 이래저래 2002년은 미국에 대한 경멸과 불신 및 반미감정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 와중에 조선일보는 뜬금없이 김동성을 까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거기다 만평가 신경무는 '국기 팽개치는 X이나'라며 양비론적 시각에서 김동성을 싸잡아 공격했다가, 인터넷을 중심으로 반발과 비판 여론이 심각하게 비등하자 결국 오노를 크게 그려놓고 다른 선수들이 '쟤량 부딪히면 실격이다'라며 거리를 두고 따라가는 만평으로 교체되었다. 사실 김동성이 국기를 내팽개친 것도 아니고, 받아들이기 힘들고 어이없는 '실격'이란 결과에 망연자실 팔에 힘이 빠져 깃대가 내려가고 태극기가 날에 걸리며 손에서도 미끄러져 빙판에 떨어졌고, 곧바로 김동성이 '에이 억울해'하는 듯한 팔 모양으로 허공에 휘저은 것이다. 태극기를 내팽개쳤다는 말 자체가 사실과 다른 왜곡이다. 참고로 그가 한 강연에서 밝힌 바로는 원래 오노와는 데뷔 초기 시절부터 알았고 사이가 나쁜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친구였었다'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분노는 물론 오노에 대한 배신감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 500m
7.3. 2002 세계선수권
본격_김동성_스피드핵_사용.flv (김동성의 분노의 질주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영상참고로 쇼트트랙에는 골 때리는 규칙이 한 가지 있는데, 바로 따라가지 않는 죄다. 앞선 주자에게 2바퀴 이상 추월당하면 심판의 재량에 따라 경기를 포기한 것으로 간주하고 실격이 주어질 수 있다. 이 경기에서 김동성은 정말 아슬아슬하게 1바퀴 반의 격차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룰을 인지한 최후방 주자들은 김동성이 뒤에 달라붙자 미친듯이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장면이 일품이다. 김동성도 이 룰을 알고 있었기에 2바퀴 이상 벌리지 않았던 것. 오로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고자 했을 뿐이지 다른 선수들까지 실격시키고자 했던 건 아니었던 것이다. 즉 할 수 있었는데 안 한 것일 뿐이다.
이후 500m는 물론 1000m에서도 금메달을 땄고, 이미 우승이 확정 된 상황에서 마저 슈퍼파이널에서까지 금메달을 땄다. 이후 5000m 계주에서는 비록 가뇽이 은퇴해 빠졌다지만 여전히 계주에서는 최강급 전력을 갖춘 캐나다를 상대로도 4번 주자 안현수의 실수로 반 바퀴 이상 차이가 났는데도 김동성이 미친 스퍼트로 따라잡아 기여코 역전승을 거두기까지 하며 그야말로 안드로메다의 기량을 전부 표출했다. 남자부에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인 6관왕(종합 성적 포함) 기록은[12] 남자부에서는 김동성 이후로는 나온적이 없다.[13]
8. 2002-03 시즌
이 일이 있던 뒤에 동두천시청 팀에 입단했으나 부상과 코치, 스태프 간의 갈등으로 쇼트트랙계를 잠시 접고 연예계에서 활동. 하지만 이것도 신통치 않아서[14] 결국에는 2002년 말에 다시 선수로 복귀했다.국가대표 선발전의 무릎 부상을 이유로 불참했으나 연맹의 추천으로 선발명단에는 올라갔었다. 다만 김동성 본인이 복귀하지 않아 원래는 6명이어야 하는 대표팀이 5명으로 계속 대회에 참가했다. 이후 민룡이 그의 자리를 메꿨다. 사실상 은퇴하는 분위기였으나, 2003년 2월에 전국체전에 출전해 2개의 금메달을 따며 그의 대표팀 복귀에 관심을 모았다.
9. 2003-04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는 또 다시 무릎 부상을 이유로 불참했으나, 당시에는 연맹 추천으로 2명의 추가 선수를 발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김동성 본인이 원했다면 대표팀에 재승선 할 수 있었지만 당시 김기훈 대표팀 코치와의 불화로 대표팀 자리를 반납해 서호진이 대신 대표팀에 추천 선수로 합류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무릎부상을 완전히 회복하는데는 실패했다.10. 2004-05 시즌
안현수의 엄청난 활약과 함께 남자 대표팀의 에이스로 자리 잡으면서 연맹 또한 더 이상 김동성에게 미련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05년에 공식 은퇴했다.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만 잘 넘겼어도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까지는 현역으로 활동했을 거라는 의견이 많았다.
11. 은퇴 이후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는 MBC 쇼트트랙 해설위원을 맡았다.은퇴 이후 대학 강연 등에서도 이 일을 언급하곤 하는데 '오노 사건 이후로 광고 제의가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감독님이 광고를 찍지 말라고 하셔서 화가 나서 연습을 더 많이 했다. 찍었으면 수 십억은 벌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라며 농담 반 진담 반의 이야기도 함께 하고 있다. 은퇴를 하면서 '더 이상 자기와 같은 선수들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 심판이 되어보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은퇴하자마자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나 영어를 배우던 와중에 워싱턴 DC에 있는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학부모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면 어떻겠냐는 건의를 하였고 이 조건을 승낙해 현재는 코치로 일하고 있다. 이 덕분에 코치직을 계속 맡을 것으로 보였지만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 자기가 8년 전에 겪은 아픔이 그대로 반복되는 바람에 결국 다시 심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15]
과거 코치를 하러 미국에 있던 시절 당시나 지금이나 국내 쇼트트랙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지금은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전향했지만 원래 쇼트트랙을 했던 이승훈은 존경하던 선수로 김동성을 꼽았다. 또한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대부분의 선수가 운동을 시작할 무렵이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과 전이경이 메달을 따며 선전한 것을 보고 자란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야구의 박찬호 세대, 골프의 박세리 세대, 축구에서의 4강 신화 세대라는 것이다.[16]
그런데 미국에서 제자 폭행 의혹이 일고 있으며 현재 김동성은 억울함을 주장하며 법적 대응을 준비했다. 이로 인해 코치 자격을 일시적으로 박탈당했다. 2011년 인터뷰에 따르면 자격 정지가 된 다음 날 곧 자격 정지가 풀렸다고 한다. 김동성에 의하면 미국 빙상계에서 의도적으로 한국 인사들을 물먹이고 있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로 한국 출신 빙상 인사들이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고 있으며 이번에 그것을 확실하게 뿌리 뽑겠다며 변호사까지 선임했다. 그리고 8월 16일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7] |
[1] 대회 5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따며 만 16세의 나이로 병역 특례를 받았는데, 이는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요트 남자 옵티미스트 종목에 출전한 박성빈이 만 13세에 우승하기 전까지 최연소 기록이었다.[2] 이후 2000년에 민룡이 달성했다.[3] 원래 2등으로 들어왔으나 마크 가뇽이 반칙으로 실격되면서 금메달을 획득했다.[4] 이는 스피드 스케이팅과 인라인 스케이팅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소수점 이하 세 자리에서 순위가 갈리는 종목이다.[5] 하계 올림픽은 2020 도쿄 올림픽에서 김제덕과 안산이 양궁 혼성 단체전에서 따낸 금메달이 처음이다.[6] 중국이랑 부딪혀서 넘어졌는데도, 은메달을 획득했다.[7] 8년 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도 올림픽에서의 한국과 악연은 계속되었는데 주심을 맡았던 여자 3000m 계주 결승에서 1위를 기록한 한국팀에 다시 한번 오심으로 실격을 준다.[8] 공교롭게도 12년 후에 열린 월드컵에서도 대한민국은 같은 해 동계올림픽에서 김동성의 대학교 후배인 김연아가 가장 유력한 금메달을 홈 텃세로 빼앗아간 아델리나 소트니코바의 나라 러시아를 첫 경기에서 만나게 되었고, 이근호가 통쾌한 선취골을 넣었다. 하지만 불과 4분 후 아쉬운 동점골을 내줘 빛이 바랬다.[9]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당일이었고, 대한민국 축구 최초의 월드컵 16강 진출 전날이었다.[10] 이때 김동성이 왜 저렇게 초반부터 치고 나갔냐는 질문에 '초반부터 너무 견제가 심해서 몸싸움 하기 싫어서 그랬다'라는 '참 쉽죠?'급의 답변을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작전은 중국인 선수가 따라하려다가 털려버린 적이 있었다. 영상을 보지 않은 사람을 위해 설명하면서 초반부터 치고 나갔으나 김동성처럼 한 바퀴 반은커녕 반 바퀴 앞에서 질주를 하다가 체력이 딸려 막판 스퍼트를 거의 못해 꼴찌로 들어왔다. 김동성이 괜히 김동성이 아니란 걸 보여준 셈이다.[11] 다만 요즘은 전세계적으로 실력이 상향평준화된 것은 물론 1500m 랩타임이 많이 빨라졌기에 갈수록 이런 작전을 펼치기 힘들어지고 있다. 또한 요즘은 이런 작전을 할 낌세가 보이면 뒷 선수들이 웬만하면 큰 체력소모 없는 선에서 어느정도는 따라가 주는게 맞는 선택이다. 물론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김동성이 보여준 활약이 대단한 건 맞다.[12] 김기훈도 전관왕을 달성했지만 계주는 포함되지 않았다. 6관왕으로는 김동성이 유일무이하다.[13] 여자부에서는 2021 세계선수권에서 쉬자너 스휠팅이 달성하기는 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불참한 국가들이 꽤 있었다. 한국도 불참하였다. 이 때문에 올림픽 시즌에 열리는 세계선수권의 몇배 이상으로 역대급 빈집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이 대회는 스휠팅의 고국인 네덜란드에서 열렸다.[14] 아이스크림 광고를 찍기도 했고 쟁반노래방에 나와서 신나게 쟁반에 얻어맞는 등 예능에서 주로 활약했다. 심지어 트로트 음반까지 냈었는데 아무도 낸 줄 모를 정도로 쫄딱 망했다.[15] 12년 후 자신의 후배들인 황대헌과 이준서도 그의 불구대천 원수의 나라에서 피해를 입었다.[16] 또한 이들 중 여자축구를 제외한 대부분이 1987~90년생이라는 점도 공통점이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의 메달리스트들과 골프의 신지애, 최나연, 축구의 기성용, 이청용 등이 대표적이다.[17] 이때 방송에서 밝힌 바로는 갑자기 카메라를 들이대서 '당황스럽게' 찍힌 사진이라고 했지만 왼손을 오노 어깨 위에 올려놓고 포즈를 취한 걸 보면 갑자기 찍힌 건 아니다. 사실 저렇게 카메라를 들이대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오노가 대놓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는데 정색하거나 거절하기도 뭐한 상황이었다.[18] 캐스터는 축빠들에게 락커룸으로 유명한 이재후가 맡았다.[19] 말은 그렇게 했지만 꽤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린 모양으로, 강연에 초청되어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까지 오노를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