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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10-25 18:57:50

김병지/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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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월드컵 벨기에전 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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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월드컵 네덜란드전 선방
파일:2001 코스타리카 전.gif
2001년 코스타리카전 선방

1. 개요2. 1998년 이전3.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3.1. 유럽 이적설
4. 허정무호 1기 시절5. 히딩크호 시절6. 2002년 이후

[clearfix]

1. 개요

김병지의 대한민국 국가대표 경력을 정리한 문서.

2. 1998년 이전

1994 FIFA 월드컵 미국 이후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은 최인영의 후계자를 찾고 있었고, 그 다음 해 중반부터 김병지가 기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기존의 유력 후계자였던 이운재는 올림픽 대표팀과 함께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간염에 걸리며 선수 생활을 잠시 접어야 했고, 그렇게 주전 수문장은 김병지의 몫이 되었다.

1995년 6월 5일 코리아컵 코스타리카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했다. 이후 1996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에도 참가했는데, 팀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팀은 이란과의 8강전에서 식스투 참사로 탈락했고 김병지도 이 경기를 포함해 대회 4경기에서 11실점을 하며 좋지 못한 기록을 남겼다. 다만, 이 결과에 대한 비판은 김병지보다 박종환 감독과 수비진에게 많은 편이다. 이후 차범근호에서도 주전 자리를 지켰으며,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도 출전했다.

3.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1998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조별리그 3경기에서 1무 2패를 기록하였는데, 도합 슈팅 57개, 유효 슈팅 32개를 허용했고 김병지는 19세이브, 12스틸, 9실점을 기록했다.[논란] 실점이 많았지만 그만큼 맞이한 유효 슈팅 수가 많았고 차범근호에서 제 몫을 한 선수를 한 명 뽑으면 그 선수가 김병지라는 게 중론이다. 특히 2차전인 네덜란드전에서의 그의 활약은 찬사를 받았다.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네덜란드는 우승 후보로 꼽히는 명실상부 최고의 팀[2]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선수진은 데니스 베르캄프, 에드가 다비즈,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에드빈 판데르사르, 야프 스탐, 프랑크 더부르 등 축구계에서 손꼽힐 만한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 팀을 상대로 대한민국은 5대0 패배를 당하고, 결국 차범근 감독이 네덜란드전 대패의 여파로 프랑스 현지에서 경질되며 귀국길에 오른다.

대한민국은 3-6-1 포메이션에서 선수비 후역습으로 어느 정도 상대의 측면돌파를 윙백이 끊어주고 중앙에서 강하게 압박을 시도하는 전술을 가지고 나왔으나 1차 저지선이어야 할 허리라인은 상대의 현란한 개인기와 패스 조합에 우왕좌왕하다 헝클어지면서 윙백의 부담이 커진 데다가, 레프트 윙어인 마르크 오버르마르스를 위시한 네덜란드의 윙플레이어들의 미친 돌파력으로 윙백들이 최후방라인보다 더 내려가게 되어 쓸모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협력수비 한답시고 다들 공이 가는 곳마다 몰려다녀 정작 데니스 베르캄프 등의 공격수를 놓치면서 공간이 호남평야마냥 훤하게 드러나 침투도 용이해지는 바람에 골키퍼의 부담의 가중까지 미쳐 올라가는 지라 한마디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그렇게 17개의 유효 슈팅을 허용했는데 5실점밖에 하지 않은 건 김병지의 눈부신 선방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히딩크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우리는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골키퍼가 너무 뛰어나서 더 많은 골을 넣지 못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후에 히딩크는 대한민국을 맡게 되었을 때 인터뷰 내용 중 프랑스 월드컵에서 김병지의 활약을 언급하자 월드컵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골키퍼가 있다는 것은 팀에게도 감독에게도 좋은 일이며 더구나 그 때 김병지가 가장 인상에 깊게 남았었는데 그와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3.1. 유럽 이적설

월드컵이 끝나고 당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선덜랜드 AFC로부터 정식 영입 제의를 받기도 했다. 과거에는 언어 문제로 본인이 고사했다고 알려졌으나 2020년에 김병지가 본인 유튜브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본인은 월드컵 종료 후 구단에 복귀하지 않으며 항명했을 정도로 진출을 강하게 희망했으나 울산 구단에서 강제로 막았다고 한다. 1990년대 K리그 구단들은 입단 계약서에 계약종료 날짜가 없어서 강제 원클럽맨 신세였고 눈 밖에 나면 일부러 경기에 안 내보내고, 2군으로 보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고 한다. 입단 계약서가 노비 문서였던 셈인데, 1990년대에 있으나 마나했던 대한민국의 노동법 실태가 축구계에 한층 열악하게 드러난 것이다. 2001년 MBC가 연제협의 노비 문서 실태를 고발하여 먼저 터진 뒤부터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나마 김병지는 이미 대중적인 인지도가 어마어마한 스타 선수이자 자타공인 No.1 골키퍼였기에 구단이 불이익을 주거나 하지 않고 외국구단 제시액보다 연봉을 더 줘서 회유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한다.

사실 1994년 브라질 플라멩구 오퍼를 시작으로 1997년부터 1998 월드컵 즈음해서 선더랜드와 노리치, 프랑스 리그 1~2팀의 오퍼가 있었다고 한다. 저때 당시는 EPL이 최강 시절은 아니고, 세리에 A가 넘사벽 최강이었고 그리고 리그앙은 한 3~4위 리그 정도 되던 상위리그 시절이었다. 유럽 상위팀은 주전이 어려워도 중하위권팀은 자기와 비슷한 기량의 유럽 골키퍼들이 많이 뛰고 있어서 도전해볼 생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적에 대한 피파룰에 몰랐었고 당시 관행이었던 종신계약과 울산 현대의 완강한 반대로 잔류해버렸다. 해외로 이적을 위한 항명까지 했지만 해외에서 제시한 연봉을 환율로 계산해서 더 주는 것으로 해버렸다고 한다. 계약서에는 계약기간도 없어서 무조건 원클럽맨이었고, 그게 1990년대 말까지 지속돼서 이적이 어려웠다고 한다.

4. 허정무호 1기 시절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준수한 활약을 바탕으로 허정무 감독 체제에서도 초반에는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변수 또한 생겼는데, 간염을 회복한 이운재가 K리그에 나와 다시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허정무도 그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일단 김병지가 주전으로 선택을 받아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2000 CONCACAF 골드컵에 참가했는데, 각각 8강과 조별 리그에서 광속 탈락했다. 대표팀의 성적이 계속 부진했고 이후 K리그에서도 기록과 소속 팀 성적이 좋지 않자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에서는 명단에 제외되며 출전하지 못했다.[3] 그 사이 상무에서 군 복무 중이던 이운재가 대회를 소화하면서 주전 경쟁의 시작을 알렸다.

5. 히딩크호 시절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어이없어하는 거스 히딩크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핌 베어백의 모습이 압권이다.

마르세유에서 안면이 있는 히딩크 감독이 2001년에 선임되고 본격적으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위한 경쟁을 시작했는데, 시작은 좋지 못했다. 2001년 1월 칼스버그컵 파라과이 전에서 갑자기 무리하게 공을 몰고 가다 상대 미드필더인 구스타보 모리니고에게 공을 빼앗기는 아찔한 실수를 벌였고, 결국 후반전에 교체되고 말았다. 비록 대한민국이 승부차기에서 승리했지만, 이 플레이로 김병지는 히딩크의 눈밖에 제대로 나게 되면서 한동안 대표팀에서 볼 수 없었다. 김병지의 2001년 출전 기록이 단 2경기 밖에 없었던 반면, 이운재는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을 포함하여 12경기를 출전하면서 히딩크의 신임을 받았다.

이 드리블은 은퇴한 지금까지 김병지를 쫒아다니는 상징적인 플레이가 되어버렸는데, 김병지 본인은 2018년 개인 유튜브 꽁병지tv와 언론 인터뷰나 가짜사나이 면접 등 당시 드리블에 대해 묻는 다양한 매체에서 드리블과 실패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만큼 후회하지 않지만 그 이후 자신의 태도는 후회스럽다고 소회를 밝혔다. 자신의 실수이니 바로 인정했어야 했는데, '내가 김병지인데'라는 혈기에 먼저 사과하고 히딩크 감독과의 응어리를 풀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까지 부침을 겪으며 선수와 감독과의 관계, 고참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게 700경기 넘게 뛰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래도 이후에 절치부심하여 리그에서 성실한 모습을 보이자 그 해 11월에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게 되었고, 2002년 월드컵 엔트리에도 포함되면서 자신의 2번째 월드컵을 맞게 되었다. 2002년에는 월드컵 직전까지 이운재와 함께 교대로 선발 출전하면서 팽팽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월드컵에서는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벤치에서 4강 진출의 기쁨을 맛봐야 했다. 히딩크 감독 자서전에 의하면 이운재김병지 두 선수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으나, 이운재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지속적으로 출전시켰다고 한다. 골키퍼 문제는 히딩크가 월드컵 개막 직전까지 고민했는데, 이운재를 낙점하고 김병지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 주전 키퍼로 이운재를 낙점했지만, 자신의 질책을 받아들이고 성실히 훈련에 임해 온 김병지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김병지도 이에 대해서는 히딩크에게 원망을 표하지 않았고, 히딩크는 이후로도 별말없이 성실히 훈련에 임하는 김병지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다만 선수로써 최전성기 때 고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뛴다는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친 것은 역시 한이 되는지 후에 히딩크와 2002년에 대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는 식의 발언을 몇차례 했다. 4강에서 패배한 뒤라 3/4위전은 자신에게 기회를 줄 거라 생각했는데 끝까지 출전을 못해서 원망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성적과 관련이 거의 없는 마지막 경기이고 축제 분위기였던 만큼 후보인 자신이 뛸 수 있지 않을까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3, 4위전은 후보 선수나 출전하지 못하는 선수들이 많이 나오는 편이다.[4]

6. 2002년 이후

이후에도 대표팀의 주전 수문장은 이운재로 고정되어 가게 되는데, 김영광이나 김용대 등 젊은 골키퍼들도 두각을 나타내었고 한일 월드컵 이후 외국인 감독들이 국제경험이 많으면서 최근 월드컵을 경험한 이운재를 중심으로 삼게되면서 자연적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되곤 하였다.

그러나 2006 FIFA 월드컵 독일을 앞두고 이운재가 2004년, 2005년 2년 간 리그와 대표팀에서 기량 정체 및 저하를 보이자, 일부 언론과 축구팬들 사이에서 대표팀 부동의 1번에 의구심을 드러냈고 김병지의 재입성을 주장했다. 실제로 기록만으로 본다면 이운재는 1점대 이상의 실점률을, 김병지는 0점대의 실점률을 보이며 수치상으로는 이운재를 압도하는 중이었다. 거기다 이운재의 소속팀은 K리그를 대표하는 클럽 중 하나이자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즐비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였지만, 김병지는 전통 명문 구단이긴 하나 당시에는 중위권에 위치하며 주춤했던 포항 스틸러스 소속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비교가 되었다.[5]

이 현상에 대해 이운재는 "좋은 후배들이 많기 때문에 김병지가 대표팀에 돌아오면 후배들의 앞길을 틀어막는다."며 디스를 시전하였고 얼마 뒤 김병지가 "너나 똑바로 해라. 네가 얼마나 대표팀에서 빙다리 핫바지식으로 굴었으면 나를 찾는가? 내가 돌아갈 정도면 네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입을 놀리는 것인가?"라는 식의 맞디스를 날리면서 으르렁거리는 상황이 펼져졌고, 양 선수들의 팬들까지 서로 '파라과이전 무한돌파 실패한 벤치멤버', '운동도 안하고 살만찌는 돼랑이'라고 온라인에서 물어뜯었다.[6] 한편, 팬들의 반응에 아랑곳 없이 월드컵 대표팀의 골키퍼 명단은 이운재, 김용대, 김영광 세 선수로 유지되었고 팬들은 월드컵 엔트리에서 탈락해 아쉬운 선수로 김병지를 차두리와 함께 거론했다. 그러나 논란이 무색하게 이운재는 독일 월드컵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여줬다.

2007년 아시안컵 이후 음주 파동에 휘말린 이운재를 대신해 오랜만에 대표팀에 복귀했으나, 2008년 1월 칠레와의 경기에서 허리 부상을 당하면서 다시 아웃된다. 이후 국가대표는 본인이 후배들을 위해서 길을 터줘야 한다며 사실상 국가대표 자리에서 은퇴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선언했다.


[논란] 김병지가 월드컵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과는 별개로, 그 기록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날조된 정보가 대한민국 내에서 널리 퍼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대회에서 허용한 유효 슈팅 57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효 슈팅이 아니라 전체 슈팅이다. 또 다른 날조는 야신상 후보에 올라 2위에 랭크됐다는 것이다. 이 또한 조별리그 초반 2경기 기준으로 세이브 2위를 기록했던 것이 야신상 득표 2위로 크게 와전된 것이다. 대회가 월드컵인 만큼 다른 골키퍼들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으며 이 중에는 야신상 수상자 파비앵 바르테즈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 안도니 수비사레타 등의 월드 클래스들도 있었다. 당시 아시아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를 받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하메드 알데아예아도 이 대회에 출전해 김병지보다 더 많은 38개의 유효 슈팅 속에서 19개의 세이브와 7실점을 기록했다. 결정적으로 1998년 월드컵은 올스타 팀에 골키퍼를 2명 뽑았는데 바르테즈와 함께 선정된 선수는 김병지가 아니라 칠라베르트였다.[2] 역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3번째로 나온 세계구급 강팀이었다. 첫째는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1974 FIFA 월드컵 서독에서의 네덜란드, 2번째는 오렌지 삼총사를 필두로 UEFA 유로 1988에서 우승한 네덜란드, 그리고 바로 이 팀이다.[3] K리그의 정규 시즌을 모두 소화하긴 했으나 부상 기사가 몇 개 있던 것을 보면, 잔부상에 시달려 부진했을 가능성도 있다.[4] 대표적으로 루이 판할이 지휘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들 수 있으며, 판할은 3-4위전에서 23인 엔트리를 대회에서 모두 기용한 감독이 되었다.[5] 2003년부터 2005년까지의 3년간 수원과 포항의 슈팅 당 실점율을 비교하면 이운재가 가장 잘했던 시즌과 김병지가 가장 떨어지는 시즌의 실점율이 비슷한 수준이었다.[6] 그러나 유튜브 슛포러브에서 둘이 재회했는데 나름 훈훈했다. 시간도 많이 지났고, 어느 정도 화해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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