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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4년 11월 17일 |
경상북도 성주군 | |
사망 | 1929년 10월 16일 (향년 54세) |
일제강점기 | |
본관 | 김녕 김씨 |
서훈 | 1992년 대통령 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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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874년 11월 17일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나고 대가면 도남리에서 살았다.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919년 3월 27일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소학리의 이현기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과 가천면 동원리의 이상해가 주도한 만세 시위 운동에 자극받은 성주 지역의 유림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연합하여 성주읍 장날 만세 시위 운동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의 야소교 장로파 교회 조사 유진성이, 유림 측에서 1919년 4월 2일 성주읍 장날에 만세 시위를 하기 위해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3월 30일에 유림 측의 송회근을 만나 연합하여 만세 시위를 펼치기로 합의하고 태극기 제작을 부탁하였다. 이어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동포동의 교회 영수 오의모와 대가면 옥화리의 교회 영수 홍진수로 하여금 성주군 각 면의 교인과 각처 교회의 간부들을 규합하도록 하였다. 당시 김상직은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옥화리의 교회 영수인 홍진수의 권유를 받고 참여를 결정하고, 1919년 4월 2일 오후 1시에 홍진수·김재곤·김석규·김치권·김학이 등의 기독교 신자들과 함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관제묘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시위 도중 김상직은 오의모·김재곤·홍진수·김석규·김치권·김학이 등과 함께 체포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1919년 4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김석규·김치권·김학이와 함께 징역 8월을 선고받았고, 오의모·김재곤·홍진수는 각기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5월 23일 김상직은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9년 10월 26일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