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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8 18:32:12

김신웅

<colcolor=#fedc89><colbgcolor=#670000> 고려의 대장군
김순웅
본관 경주 김씨(慶州 金氏)
이름 순웅(順雄)[1]/신웅(信雄)[2]
아버지 삼한공신 삼중대광 김인윤
(三韓功臣 三重大匡 金仁允)
배우자 강릉 김씨
(江陵 金氏)[3]
자녀 아들 - 김인위(金因渭)
생몰년도 ? ~ ?

1. 개요2. 생애3. 후손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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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초기의 무신으로, 경주 김씨 계림군파의 파시조이다. 금석문에는 김신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경주 김씨 족보에는 김순웅으로 나와 있다.

2. 생애

아버지는 삼한공신 삼중대광 김인윤이며, 김순웅은 호족/미래의 문벌귀족 가의 자제였다. 그는 좌우위,[4] 금오위,[5] 천문위와 감문위[6] 등 육위 장군[7]을 거친 뒤 안서홀성주(황해도 병마사)까지 지냈다. 태자태보 좌복야라는 일종의 명예직 역시 맡았다.

《증보문헌비고》에는 경순왕 후예라고도 한다. 단순히 김알지의 후예라고도, 반대로 구체적으로 경순왕의 아들로 기록된 대안군 김은열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근현대에 발견된 묘지명(금석문)에는 김신웅(김순웅)의 조부인 대광 김례가 원성왕의 자식[8]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3. 후손

김순웅의 아들 김인위는 대표적인 고려시대 문벌귀족으로 자리잡았으며, 이후 1300년대에 계림군파 파시조인 김균 때 개경에서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후 1600년대 김성진이 한양에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지금의 전북 임실 삼계면에 정착하였고, 이후 400여 년 넘게 여러 전란을 피하며 종족이 크게 번성하여 종가를 계속 이어왔다. 김성진의 아들인 김원중은 계림군파의 적장손으로 부친의 뜻에 따라 고향을 지키고, 둘째 김원립은 관직에 진출하여 그 후손들은 용인지역에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아울러 김균의 막내아들인 김계성의 후손들은 서울과 경기 지역에 세거지를 형성하며 크게 번성하였다.

이렇듯 김순웅의 후손들 중 가장 번창한 파가 계림군파인데, 계림군 김균은 김순웅의 12대손이다. 그런데 1980년대 계림군파 족보에 입보한 종원 일부가 이후 장군공파를 만들어 나갔고, 이후 태자파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김순웅을 마의태자의 아들로 기재함으로써 다른 경주 김씨 분파들 및 일부 분적된 성씨들과 논란을 야기했다.

태자파의 족보가 계림군파의 족보와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크게 두 군데인데, 하나는 김순웅의 아버지이고, 다른 하나는 계림군의 장남 김맹성의 후손이다.

태자파는 김순웅의 형이 김선웅(善雄)이며 아버지가 마의태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계림군파 측은 해당 기록이 근거가 없는 출처불명의 기재라고 보고 김순웅만을 원조로 받들고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정사에는 마의태자의 생년이나 후손 등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태자파가 근거로 제시한 『신라삼성연원보』는 족보 조작이 횡행하던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서 실제 역사와 배치되는 내용이 상당하기에 근거로 삼을 수 없다. 또한 계림군파 최초의 족보는 1772년에 나왔고, 이 족보의 가장 위 상계조상은 김순웅이었다. 경순왕이 조상이었다면 상계를 기록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족보에서 김순웅의 아들이라고 전하는 김인위는 금석문에 따르면 아버지가 김신웅이며 할아버지는 마의태자가 아니라 김인윤이라는 문관이었다.

다음으로, 김맹성의 후손에 관하여 두 파의 족보에 차이가 있다. 태자파의 족보에 따르면 김맹성에게 영부(榮富)와 영길(榮吉) 두 아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후손이 현대에도 이어진다. 그러나 계림군파는 김맹성의 아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김맹성의 졸기에 김맹성은 아들이 없었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만약 실록에 실린 졸기에서 관료들의 아들에 관해 서술할 때 서자를 제외하고 적자만 기록했다면, 영부 · 영길 형제가 김맹성의 아들이되 적자는 아니었을 수 있다. 정안왕후의 오라비인 김수의 졸기에서도 아들로 김겸 하나만 있었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족보에는 다른 아들로 김충원(忠源)과 김첨(添)이 실려 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1] 족보에서[2] 금석문에서[3] 족보에만 기록되어 있다.[4] 왕 및 외국 사절단 호위[5] 개경 치안 담당[6] 궁성 경비[7] 비슷한 관직에 있었다고 추정되는데, 고려의 관직 제도는 성종 때 정비된다.[8] 두 인물이 시기상으로는 자식일 수 없으므로 단순히 조상-후손 관계였다고 보기도 한다.[9] 『고려사』 권88, 후비열전[10] 『이정 묘지명』[11] 인천 이씨[12] 『김지우 묘지명』[13] 정주 류씨(貞州 柳氏) 류소의 아들[14] 수원 최씨(水原 崔氏) 최사위의 손자[15] 이천 서씨 서필의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