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한국대학생선교회 총재 김준곤 金俊坤 | Kim Jun Gon | |
<colbgcolor=#B13><colcolor=#fff> 출생 | 1925년 3월 28일 |
전라남도 무안군 | |
사망 | 2009년 9월 29일 (향년 84세) |
학력 |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 (졸업) 조선대학교 (문학 / 학사) 전북대학교 (문학 / 명예박사) 세종대학교 (교육학 / 명예박사) 명지대학교 (철학 / 명예박사) |
소속교단 |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 |
목회경력 | 영광법성교회 담임목사 광주서현교회 담임목사 광주숭일중학교 교목 광주숭일고등학교 교목 국제대학생선교회 동아시아대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자문위원 제4대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총재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 이사장 |
가족 | 배우자 전효심[1] 장녀(1946년생, 2021년 사망) [2] 차녀(1953년생, 1982년 사망) [3] 3녀 김윤희 [4], 사위 박성민 [5] 4녀 김희수, 사위 서정인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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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김준곤 목사의 신앙 신조이자 삶의 신조
1971년 1월 1일 오전 12시, 기독교방송을 통해 민족복음화운동 선언 시 처음 제창되었다.
대한민국의 개신교 목회자이다. 한국대학생선교회의 설립자이자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 창시자 중 한 명이다. 이 외에도 여러 단체의 이사장, 회장을 거쳤다.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김준곤 목사의 신앙 신조이자 삶의 신조
1971년 1월 1일 오전 12시, 기독교방송을 통해 민족복음화운동 선언 시 처음 제창되었다.
한국 개신교의 부흥에 큰 기여를 한 목사이다.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설립하여 캠퍼스 복음화를 통한 세계복음화를 목표로 사역했다. 대학에 다니던 많은 청년들이 대학생선교회(CCC)를 통해 개신교를 접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많은 목사와 간사, 선교사가 세워질 수 있도록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박정희 -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 시절에 독재정권에 영합하였고, 노년기에는 자신이 세우고 43년동안 총재를 맡던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사위에게 세습하여 비판을 받았다.
2. 생애
1984년 2월 24일자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1925년 3월 28일 전라남도 무안군에서 태어났다. 문준경 전도사를 통해 개신교에 귀의하였다.
해방과 함께 한반도로 돌아온 김준곤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를 1948년에 졸업하여 전도사가 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 중에 아버지와 아내를 인민군의 손에 잃는 비극을 겪었고, 여러 차례 고초를 겪었다. 하지만 그는 그들을 용서했다. 1951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아 고향마을인 신안군 지도읍 봉리에 봉리교회를 개척했다. 이후 법성포로 옮겨 법성교회 담임목사를 지냈고, 광주서교회(現 광주서현교회)로 옮겨 6개월간 임시 당회장을 맡았다. 1955년부터 1956년까지 광주숭일중학교/광주숭일고등학교 교목과 교장을 역임했다.
그는 숭일중고 교장 직을 그만두고 1957년에 남 캘리포니아에 있는 풀러 신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그는 CCC 간사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국제 CCC 단체의 설립자이자 총재인 빌 브라이엇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으며, 빌 브라이엇 목사와의 교제를 통해 유학을 마친 후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 주변인 전남 광주시를 시작으로 서울, 대구 등을 개척했다. 그는 대학복음화를 통한 민족복음화라는 가치를 걸고 대학생 선교에 집중했다. 그의 선교는 성공적이었고, 수 많은 청년들이 개신교에 입교했으며, 간사, 목사, 선교사 등으로 수 많은 청년들이 세워졌다. 1968년에 순론을 발표하고 1970년 12월 31일에는 '민족복음화운동'을 선언한다. 이는 반세기가 넘는 기간동안 CCC의 방향으로 유지되고 있다.
김준곤 목사는 1965년부터 국회조찬기도회를 시작했고 김종필, 김영삼 같은 개신교 신자 국회의원들이 정파에 상관 없이 많이 참석했다.[7] 1969년 군 복음화운동을 전개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군 내 좌익 침투에 대한 우려를 갖고 김준곤 목사에게 군인들의 사상 무장과 정신 무장에 대해 자문을 구해왔다. 이때 김 목사는 신앙 전력화가 군 내 반공운동과 정신력 무장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전군신자화운동을 제안했다. 전군신자화운동은 박 대통령의 흔쾌한 동의로 시작되었고, 그는 6일 동안 중령 이상 중장까지 고급 간부 2,472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전군신자화운동은 현재도 군 복음화를 위한 비전 2020운동으로 맥을 이어가고 있다.
1974년에 개최된 EXPLO 74 행사는 드 넓은 여의도광장을 꽉 채울 정도로 구름관중이 운집했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무려 32만 3,419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참석했다. 이후 국내 사역이 안정화되자 해외로 눈을 돌려 해외 사역에도 힘썼으며, 2000년부터는 대북선교(젖 염소 보내기)도 진행했다.[8] 1980년에는 한국창조과학회 설립을 주도했으며, 대학생선교회 동아시아 부총재를 10년간 역임했다. 이후 1991년에는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를 설립했고 교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이런 공로에 힘입어 2002년 12월 30일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이후에도 팔순을 넘긴 고령임에도 열심히 활동했고,[9] 향년 84세로 2009년 9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생전에 CCC를 통해서 훈련시킨 대학생의 수는 45만명이었고 그가 반세기동안 교계에 남긴 업적은 컸다. 하지만 후술할 과오들 역시 존재한다.
3. 비판과 논란
3.1. 군사독재 옹호와 유착
김준곤 목사는 교계의 큰 어른이자 대학생선교회를 통해 대학생 선교의 업적이 큰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독재정권에 영합했다는 큰 과오가 존재한다. 똑같이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침례교의 원로인 김장환 목사와 비견되는 수준인데, 1965년 2월부터 자신이 시작한 국회조찬기도회를 본떠 밤낮없이 일하시는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 조찬기도회'를 주관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고 기도했고 이듬해인 1967년에는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것은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라며 노골적으로 독재정권을 옹호했다.이 흐름에 편승한 인물이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인 조용기 목사로 1969년 8월 15일 김재준, 박형규 목사, 함석헌 선생 등 기독교 진보인사들이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반대운동을 하는 성명을 내자 9월 2일 박형룡, 김유찬 등 242명의 기독교 보수인사들과 함께 '개헌문제와 양심자유선언'을 발표하면서 진보인사들의 선언을 "순진한 성도들의 양심의 혼란을 일으키는 선동적 행위"라고 비난하고 교회는 정치적 문제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단 3일만에 입장을 바꿔서 9월 5일 '대한기독교연합회'라는 단체 명의로 발표된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이라는 성명에 서명하면서 3선 개헌을 지지했다. 1972년 발표된 10월 유신으로 박정희 정권과 기독교 진보세력과의 갈등이 커지고 1973년 남산 부활절예배 때 반정부 유인물 배포사건이 발생하자 5월 1일 김준곤 목사는 다시 교계 보수인사들을 규합해 유신의 앞날을 축복하는 열린 제6회 국가조찬기도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설교했다.
대학생선교회에서 개최한 행사 중 가장 큰 행사였던 EXPLO 74는 당시 그와 유착관계에 있던 박정희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으며, 75년 5월 서울 정동 CCC 대강당에 학생 1천여 명을 동원해 반공구국기독학생운동 특별기도회를 열어 "나라를 위해서는 순국을, 주님을 위해서는 순교를, 공산주의자들의 무력도발에는 육탄으로 맞서는 의지를 가지고, 반공의 면역체가 되고 전도의 새 종족이 될 것"을 다짐했다.
심지어 5.18 민주화운동으로부터 3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김준곤 총재는 그 전 해 12월에 12.12 군사반란으로 국가 최고 권력자가 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위해 국가조찬기도회를 주최했다. 그가 처음으로 개척한 지구가 어디인지를 생각하면 여러모로 씁쓸해지는 대목이다. 또한 그가 사역했던 교회인 광주서현교회가 6월 항쟁 당시 광주의 명동성당이라고 불릴 정도로 군중들을 도왔던 점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또한 당시 군부의 실력자 중 하나였던 박세직 수도방위사령관의 도움을 받아[10] 부암동 회관 건축을 이룰 수 있었다.
3.2. 한국대학생선교회 세습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대형교회 세습이 이어질 때 그 역시도 세습을 단행했다.[11] 세습에 대한 기초 작업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이를 계기로 제자들선교회(DFC)가 강원도 원주지구를 기반으로 하여[12]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2003년 1월 박성민 목사가 신임 대표로 내정되면서 세습이 마무리되었다.4. 여담
- 가정사가 불우한 인물 중 하나이다. 어머니, 위로 형 3명이 있었으나 일찍 잃었고 6.25 전쟁 중에는 인민군에 의해 아버지와 아내를 잃었다. 게다가 어려서 동생 둘을 사고로 잃었고 성년까지 생존한 동생 1명은 교사가 되었으나 슬하에 딸 4명을 남긴채로 병사했다. 게다가 김준곤 목사 본인도 CCC 간사였던 둘째 딸이 암으로 일찍 사망했다.#
-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김준곤 목사 자신도 2009년에 사망한 후 각막을 기부했다.
- 사망 1년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정정한 모습이었는데, 2009년 설을 앞두고 등산을 하다가 낙상을 당한 이후에는 활동이 줄었다. 결국 그 해 말에 세상을 떠났다.
- 북한에 2년간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임현수 목사를 비롯한 많은 CCC 출신 목사들이 그의 수 많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사후에도 그에게 감사와 존경심을 표하고 있다.
- 그리스도의 계절의 원문격인 민족복음화의 꿈이라는 시를 썼다. 이를 다듬은 CCM이 그리스도의 계절이다.
- CCC 창립자와 동일하게 천주교에 우호적인 입장이다. 이는 그의 유년시절 경험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다.
[1] 결혼을 2번 했다. 초혼을 한 인정진 사모는 6.25 전쟁 중에 인민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후 전효심 사모와 재혼하였고 사망할 때까지 부부였다.[2] 평신도(권사)로 살았다.[3] 간사로 섬겼다.[4] 신학을 배워 現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총장을 역임[5] 한국대학생선교회 대표[6] 한국컴패션 대표이자 목사[7] 그러나 이듬해부터 대통령조찬기도회도 진행했는데, 이는 결국 군사정권과의 유착이라는 비판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과의 친분은 군 복음화운동과 EXPLO 74의 원동력이 되었다.[8] 물론 김준곤 목사는 북한 정권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압제를 받는 주민에게는 안타까움을 느꼈지만, 반공성향이 상당히 강했다.[9] 팔순을 넘긴 이후에도 여름수련회 설교를 직접 했을 정도였다.[10] 부암동이 당시 수방사 작전지역 내에서 회관 건립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박세직 사령관이 건립허가가 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이후 박세직 장군과 친분을 유지했다.[11] 감리회의 3도로 유명한 김홍도 - 김선도 - 김국도 삼형제는 모두 아들들에게 자신의 교회를 세습했으며, 21세기 들어서는 예장통합의 대형교회인 명성교회 세습이 문제시되었다.[12] 이 과정에서 40여명의 간사가 속한 대전지구와 강원도 전체가 DFC로 간판을 갈아버리는 일이 생겨서 해당 지구는 사실상 기존의 인프라를 상실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수준까지 가버렸다. 김준곤 목사는 생전에 1991년을 'CCC가 도둑맞은 한 해'라고 표현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