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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0:57:56

나열

1. 한국어 단어2. 홍콩의 영화배우3. 前 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 사장 나열

1. 한국어 단어

한자어:

1. 죽 벌여 놓음. 또는 죽 벌여 있음.
2. 나란히 줄을 지음.

2. 홍콩의 영화배우

파일:Cbj0SzU.jpg
이름 羅烈
본명 王立達
생년월일 1939년 6월 29일
사망일 2002년 11월 2일

인도네시아 화교 출신의 홍콩의 영화배우. 홍콩식 발음으로 로례(Lo Lieh)라고 부르기도 한다.
대표작은 《심야의 결투(金燕子)》(1968), 《철수무정(鐵手無情)》(1969), 《아랑곡의 혈투(餓狼谷)》(1970), 《죽음의 다섯 손가락(天下第一拳)》(1972), 《홍희관(洪熙官)》(1977) 등이다.

1960년대 홍콩 최대의 영화사였던 쇼브라더스의 무협영화에 주로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얼굴이 제법 알려졌는데, 당시 활동하던 주연급 배우들인 왕우적룡, 강대위 같은 배우들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 마스크 때문에 주역 섭외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홍콩에 진출했던[1] 정창화 감독은 여타 홍콩 영화와 차별화를 궁리했고, 《아랑곡》이나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 나열을 주연으로 캐스팅한 이유는 바로 다른 감독들이 거들떠보지 않은 그 구수한 외모였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허점이 많다. 나열이 악역을 많이 연기했고 정창화 감독의 연출작에서 주인공을 잘 연기한 건 맞지만, 고립 감독의 《유협》, 서증굉 감독의 《강호기협》 3부작, 《십이금전표》, 장철 감독의 《변방삼협(邊坊三俠)》(1966), 《비도수》, 《철수무정》, 신강 감독의 《혈쇄천뢰》, 초원 감독의 《유성호접검》, 정강 감독의 《연지호》(군영회 3부작 중 2부), 하몽화 감독의 《협사행》, 무민웅 감독의 《청룡객잔》 등 다른 감독들 영화에서도 주역, 선역을 많이 맡았다. 쇼브라더스 동기인 왕우가 워낙 잘 나가서 상대적으로 악역만 맡은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줄곧 조연만 맡았던 정뢰에 비하면 나열은 훨씬 잘 나갔다고 할 수 있다.

특이하게도 영웅을 연기할 때는 과묵하고, 여자 앞에서 서면 수줍어하는 다소 소심한 캐릭터로 나온 반면, 악역을 맡으면 수다스럽거나 때로는 코믹하기까지 한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홍희관》의 최종보스 백미도인(白眉道人)이 유명한데, 속세를 초월한 듯한 신비스러움마저 느껴지는 강렬한 연기로 큰 호평을 받았다. 그 영향인지 이후 다른 영화에서도 유사한 캐릭터를 연이어 연기했고, 황정리가 《남권북퇴(南拳北腿. Secret Rivals)》(1976)에서 연기한 은여우 등 수많은 악역 캐릭터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 중에서도 정창화 감독의 《죽음의 다섯 손가락(天下第一拳)》(1972)은 꽃미남 몸짱이 온몸을 피로 물들이며 간지폭풍의 대결전을 벌이는 기존 무협영화와 달리, 흔한 인남캐가 피할 수 없는 시비에 휘말려 고뇌하며 싸우는 인간적인 모습을 나열을 통해 그려냈다. 그리고 이런 신선한 접근법은 제대로 대박이 났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홍콩뿐만 아니라 해외 시장에서도 히트를 치면서, 홍콩 영화 가운데 최초로 미국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나열은 무협영화를 좋아하는 아시아권뿐만 아니라 해외 양덕후들 사이에서도 지금도 상당히 유명한 배우다.

물론 한국 팬들 사이에서도 장철 감독의 《철수무정(鐵手無情, The Invincible Fist)》(1969)이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인데다, 동시대 인기 배우들과 다른, 인간미가 넘치는 캐릭터를 연기한 나열을 호평한다. 지금도 나열의 예명을 ‘로례’라는, 당시 극장판 포스터 등에서 표기하던 이름으로 또렷이 기억하는 팬들이 많다.

서양에도 팬들이 많이 생긴 덕에, 스파게티 웨스턴[2] 《총잡이와 소림고수(The Stranger and the Gunfighter)》(1974)에서는 리 밴클리프와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최초로 악역으로 출연한 영화는 《칠협오의》(1967)와 《비천여랑》(1967)인데, 이후 1972년작, 《14인의 여걸》에서 북방 오랑캐 서하의 막내 왕자로 악역연기가 호평 받으면서, 배우 생활 내내 최종보스 아니면 비중 있는 중간 보스 등을 많이 맡아, 악역계의 슈퍼스타로 자리 잡는다. 비슷한 예로 같은 쇼브라더스 출신의 선배인 진성, 그리고 후배인 장익 등이 있다. 이 셋은 70년대 내내 번갈아가면서 각종 영화의 악역으로 출연한다. 《칠협팔의(七俠八義)》(1978)라는 영화에서는 아예 이 세 배우가 모두 출연한다.

《철수무정》이나 《죽음의 다섯 손가락》에 출연할 때만 해도, 나열은 전형적인 미남은 아니었지만 부리부리한 눈과 짙은 눈썹, 그리고 두툼한 입술로, 우직한 훈남 이미지의 배우였는데, 이후부터는 그의 외모가 급격히 망가지고 콧수염까지 기르면서 그야말로 악역에 딱 어울리는 외모가 된다. 이렇게 된 이유로는 그가 이 무렵부터 아편에 손을 댔기 때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80년대 중반 무협영화 유행이 저물고 그가 나이가 든 상황에서, 홍콩 느와르 전성기가 시작되자 배우로서의 입지가 크게 줄어들었다. 사실 이 시기, 적룡, 이수현처럼 무협물에서 성공적으로 느와르로 갈아탄 배우들도 있었지만, 많은 무협스타들이 새로운 조류에 편승하지 못하고 몰락한 바 있었다. 나열 역시 1989년 성룡의 《기적(奇迹, Miracles)》에 조연으로 출연한 것 외에는 특기할 만한 영화 출연이 없다시피 했다. 1990년대에는 TV 쪽으로 전환, 홍콩 ATV와 계약을 맺고 드라마 출연을 했다. 허나 1998년, ATV는 경영진 교체로 인해 드라마 제작을 줄인 탓에 90년대 말기엔 드라마 출연도 거의 못했고, 결국 1999년에 방영한 《영웅 광동십호》를 끝으로 계약을 해지했다.

이후에는 중국 대륙에서 상업에 종사하다 2002년에 선전에서 사망했다.

파일:external/www.lovehkfilm.com/clan_of_the_white_lotus.jpg

위 영화 장면은 《홍문정삼파백련교(洪文定三破白蓮敎, Clan of the White Lotus)》(1980)에서 나온 것인데, 나열은 이 영화에서도, 상대가 진관태에서 유가휘로 바뀌었을 뿐, 《홍희관(洪熙官)》(1977)에서 맡았던 백미도인과 유사한 인물을 맡아 열연했었다.

여담으로 쿠엔틴 타란티노가 《킬빌》을 제작하면서 바친 무수한 오마쥬 가운데, 《죽음의 다섯 손가락》과 《홍희관》이 있다. 《킬빌》의 등장인물 파이 메이는 《홍희관》에 등장하는 악역 백미도인을 오마쥬한 캐릭터인데, 타란티노는 백미도인을 연기한 배우가 유가휘라고 착각하고 《킬빌》에 캐스팅했다. 하지만 사실은 나열이었다. 지못미. 참고로 《홍희관》에서 홍희관을 연기한 배우는 진관태.

3번이나 이혼하고 4번 결혼했는데, 그 중 2번째 아내가 유명 영화감독 당계례(唐季禮)의 누나였던 당가려(唐嘉麗)였다. 한편으론 1986년에 상하이 출신 배우인 악운(樂韻)[3]과 눈이 맞아버려 나열이 홍콩으로 데려가 결혼하려고 했으나, 당연히 아내에게 발각되어 대판 싸움판이 벌어진 뒤, 나열은 악운을 사실상 버려버렸는데, 여러 번 자신을 찾아온 악운을 문전박대했다. 이후 악운은 골든 하베스트 산하 회사의 소속 배우가 되었지만 당연히 광동어를 못했기 때문에 조연급에 머물렀으며, 그나마 첫 주연 작품도 성인영화였다. 비관에 빠진 악운은 결국 1995년 빌딩 옥상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당시 나이는 28살.

3.서울특별시도시철도공사 사장 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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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홍콩 영화산업이 한창 좋았던 시절이라 찍어내는 작품수에 비해 영화 인력이 달릴 정도였다. 때문에 한국인 감독까지 스카웃해가면서 영화를 제작했다.[2] 일본식 조어로는 마카로니 웨스턴[3] 당시 19살이었으며, 1984년 중국에서 《홍루몽》을 촬영했을 때 주연급 배역인 왕희봉 역을 맡을 예정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