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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9 22:46:03

나플리오

파일:travel-guide-to-nafplio-in-greece.jpg
팔라미디 성채에서 바라본 시가지와 아크로나플리아
파일:bourtzi_web.jpg
앞바다의 부르치 성채와 시가지 일대[1]

1. 개요2. 역사
2.1. 중세
2.1.1.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주령2.1.2. 베네치아 공화국
3. 볼거리

1. 개요

그리스어 Ναύπλιο
영어 Nafplio / Nauplio

그리스 동남부의 도시. 나플리온, 나우플리아, 나프플리오, 나브플리온 등으로도 표기된다. 펠로폰네소스 반도 동부 해안에 위치하며, 인구는 약 2만명이다. 중세 초반까지는 그저 아르고스의 항구였으나 15세기 베네치아 공화국령 요새 도시로 거듭났고, 19세기에는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한 그리스의 첫 수도 (1827-34년)로써 그리스 민족주의의 산실이었다.

2. 역사

파일:나플리오 2.jpg
처음 도시가 형성된 아크로나플리아

기원전 1700년 경부터 아크로나플리아 언덕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지명은 포세이돈의 아들 나우플리오스에서 유래되었다 하며, 기원전 14세기 이집트 신왕국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의 장례서에서 누플리자로 기록되었다. 지리가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주민들은 그리스 신화 속 리비아의 왕 다나오스가 데려온 이집트 인들이었다 한다. 학자들도 기존 미케네-그리스 폴리스들과 달리 해안으로 돌출된 바위 곶의 독특한 입지 조건을 주목하며 동쪽의 이주민들이 정착한 것으로 추정한다. 고대 나플리오는 칼라우레이아 섬에서 회담을 하는 해양 연맹에 속한 독립 시였으나, 기원전 7세기 중반 2차 메세니아 전쟁 당시 아르고스에게 점령되어 그 항구가 되었다. 스파르타는 메세니아의 메토니에서 축출된 주민들을 나플리오에 정착시켰고, 이들은 기원전 370년경 에파미논다스의 메세니아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아르고스는 칼라우레이아 연맹에서 나플리오의 자리를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지배에 나섰다. 기원전 4세기 아크로나플리아의 북쪽, 동쪽 면에는 미케네식 다각 공법으로 성벽이 둘러졌다. 다만 로마 제국 들어 아르고스가 쇠퇴하며 서기 2세기 무렵 나플리오는 거의 버려졌다. 파우사니아스는 포세이돈 신전, 성채, 헤라가 매년 세정을 통해 순결을 갱신했다고 한 카나토스 분수 등의 유적이 있다고 묘사했다.

2.1. 중세

동로마 제국 시기 아크로나플리오의 성벽이 보강되었고, 최소 12세기 들어 아르고스의 외항으로써 중요도를 되찾았다. 그러던 13세기 초엽, 동로마 제국이 쇠퇴하던 틈에 나플리오 출신의 레온 스구로스가 코린토스 ~ 아르고스 일대를 장악했다. 스구로스는 아테네도 공격했으나 아크로폴리스를 함락하지 못했고, 1205년 초에는 4차 십자군의 혼란을 틈타 보이오티아와 테살리아까지 진출했으나 테살로니카 왕국의 보니파초 1세가 남하하자 철수했다. 이후 십자군이 코린토스, 아르고스, 나플리오를 포위했으나 주민들이 완강히 버텼다. 1207년 보니파초 1세, 이듬해 스구로스가 사망한 후에도 이어지던 포위는 1210년에 코린토스와 나플리오가 함학되고 1212년에 마침내 아르고스도 함락되며 종식되었다. 이후 나플리오와 아르고스 일대는 아카이아 공국령이 되었으나, 아테네 공국의 오토 1세 드 라 로셰가 함락을 주도했기에 아카이아 공작의 봉신으로써 두 도시를 영지로 받았다.[2]

2.1.1.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주령

파일:나플리아 프랑코크라티아.jpg
아크로나플리아의 라틴 시기 성벽 유적

프랑코크라티아, 즉 라틴 지배 하에서도 주민들은 그리스 정교도로 남았다. 1230년경 오토의 사후 두 아들 기 1세와 오토 2세가 각각 아테네 공국과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주령을 상속받았다가, 1251년 4월에 오토 2세가 1만 5천 히페르피라 및 프랑스의 영지 소유권을 대가로 기 1세에게 매각하며 후자가 모두 소유하게 되었다.[3] 1224년 테살로니카 왕국의 멸망 후 그리스의 맹주가 된 아카이아 공국은 1256-58년의 에우보이아 계승전쟁으로 아테네 공국을 복속시켰다. 하지만 1259년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공작 기욤 2세가 니케아 제국의 포로가 되었고, 석방을 대가로 아카이아 고국은 남부 모레아를 할양해야 했다. 이때 니케아 제국은 아르고스와 나플리오도 요구했으나 거절되었다. 1261년 니케아 제국이 라틴 제국을 멸하며 동로마 제국으로 개편되자, 아카이아 공국은 완전히 독립했다. 다만 1270년대에는 동로마의 라틴계 제독 리카리오가 아르고스 만을 습격했고, 1278년 기욤 2세의 사후 아카이아 공국은 나폴리 왕국과 빌라르두앵 가문 간의 권력 다툼으로 쇠퇴했다.

그러던 1311년,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주 및 아테네 공작인 고티에 1세 드 브리엔이 카탈루냐 용병대에 패하고 전사하며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듬해 카탈루냐 용병대는 아테네 공국을 정복했고, 고티에 1세의 과부 조아나는 프랑스 장군인 부친 고셔 드 샤티용을 바일리 (대리인)로 둔 채로 이탈리아에서 도움을 모색했다. 그동안 프슈홀르 가문의 고티에, 프랑수아 형제가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지를 관리하며 아테네 수복을 위한 물자를 비축했다. 다만 카탈루냐 용병대의 습격을 막아내느라 조아나는 큰 빚을 지게 되었고, 1321년 성인이 된 조아나의 아들 고티에 2세는 7천 리브르를 납부한 후에야 권리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 교황청은 아라곤 십자군의 일환으로 카탈루냐 용병대를 파문하고 로도스 기사단에게도 함대를 보내 고티에 2세를 돕게 했다. 하지만 베네치아 공화국이 협조를 거부하며 회복 원정은 지연되었고, 1328년 고티에 2세는 카탈루냐 용병대와 휴전을 맺기도 했다.

마침내 1331년 8월, 고티에 2세는 나폴리 왕국의 도움으로 에피로스 친왕국을 지나 아티카로 진격했으나 카탈루냐 용병대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이듬해 여름에 철수했다. 그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케팔로니아 백국에게서 점령한 레프카다와 보니차도 1343년 베네치아에 매각했다. 1332년 에게 해 건너편의 튀르크계 아이든 왕조의 우무르 베이가 아르고스 만을 습격했고, 이 무렵 기근이 지속되며 나플리오 주민들은 이탈리아에서의 식량 수입에 의존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이 펠로폰네소스 반도 상당부를 석권하며 위협하자 고티에 2세는 나플리오의 만 건너편에 키베리 성채, 이드라 섬 맞은편에 테르미시 요새를 세웠다. 1356년 고티에 2세가 후사 없이 푸아티에 전투에서 전사하자, 여동생 이사벨라와 고티에 드 앙기엥 부부가 계승했다.

그후 부부의 장남 소이에가 브리엔 백작령 & 아테네 상속권, 차남 앙젤베르가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지를,[4] 삼남 기가 프랑스 라메륍트 영지를 상속받았다. 다만 그리스 영지를 방허할 자신이 없던 앙젤베르는 동생과 봉토를 바꿨고, 이로써 기 드 앙기엥이 '아르고스 & 나프리아 및 키베리' 영주가 되었다. 1357년 기는 지난 20여년간 영지를 관리하던 니콜 드 프슈홀르 대신 메디치 가문의 피에르 탄테네스를 바일리에 봉했고, 1360년에는 아라르도 (아베라르도) 디 메디치로 교체했다. 다만 1360년 아라르도가 무화과 및 건포도에 세금을 인상하자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고, 프랑스 군인들을 성채로 몰아넣었다. 이에 1364년 기가 직접 나플리오로 와서 상황을 진정시켰고, 현지 유력자의 두 딸과 결혼했다. 한편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이미 1362년 7월에 베네치아 시민권을 취득한 기는 베네치아와 협력하며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14세기 후반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주령은 농업과 목축업 및 염전업이 발달하여 건포도, 캐럽, 수지, 리넨 및 면화 옷감, 도토리 염료 등을 수출했다. 1370년에는 아카이아 공작 필리포 3세가 타란토에 머물며 기의 동생 루이를 모레아의 바일리로 파견했다. 동시에 또다른 동생인 레체 백작 장 (조반니)이 막 내전을 겪은 아테네 공국을 노리자, 기 역시 모레아 전제군주국과 휴전하며 원정을 준비했다. 이번에도 베네치아가 도움을 거절한 상태에서 1371년에 형제는 아티카에 상륙했으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함락에 실패해 철수했고, 8월에 카탈루냐 용병대와 휴전을 맺었다.[5] 그후 오스만 제국에 맞서기 위해 교황청이 카탈루냐 용병대를 지원하기 시작하고, 1374년에는 네리오 1세 아차이올리가 메가라를 점령하며 앙기엥 가문의 아테네 공국 수복은 요원하게 되었다. 1376년 10월 기가 사망하자 미성년인 딸 마리아가 계승했고, 기의 동생 루이가 섭정했다.

이듬해 마리아는 베네치아인 귀족 피에트로 코르나로와 결혼했는데, 그 역시 어렸기에 부친 페데리고[6]가 섭정했다. 1382년 페데리고의 사후 피에트로는 직접 나플리오로 향해 부친이 마련해 둔 함대라 해적을 물리쳤다. 다만 1388년 피에트로가 요절하자, 그해 12월 마리아는 매년 7백 두카트의 연금을 대가로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지를 베네치아에 매각했다. 베네치아가 일대를 접수하기 전에 모레아의 데스포티스 테오도로스 1세 팔레올로고스와 그의 장인인 아테네 공작 네리오 1세가 오스만 장군 에브레노스의 도움을 받아 점령했으나, 곧 축출되었다. 테오도로스 1세가 마지막까지 점거하던 테르미시도 1394년 6월에 베네치아에 양도되었다. 1393년 마리아의 사후에는 앙젤베르가 계승권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베네치아가 계약서를 제시하며 구매액 화급 및 방어 비용 마련이 가능하다면 양도하겠다고 엄포를 놓자 철회했다.

2.1.2. 베네치아 공화국

파일:Palamidi_castle_-_Agios_Andreas_Bastion.jpg
팔라미디 성채
파일:나플리오 11.jpg
부르치 성채

나플리오는 아드리아 해와 소아시아 및 흑해 사이의 기착지로써 베네치아에게 중요한 거점이었고,


1463년 아르고스 함락

1460년 대재상 마흐무트 파샤의 나플리오 공격 후
1471년 베르가모 출신 이탈리아인 건축가 안토니오 감벨로가 건설
대포 배치
1502년에 남서부에 증축, 항구의 등대까지 사슬을 연결해 적함의 진입을 막았다.

1699년 후 성탑 추가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발발 후 2백의 독립군이 부르치 성채를 점령, 도시를 포격하고 인근을 지니던 영국 선박의 수비대 보급을 차단했다. 그리스 독립군 사이의 내전기에 그리스 임시정부는 1824년 5월과 1827년 7월에 부르치 성채로 피신했다.
[김상엽] [오후 1:56] 요르요스 1세 1865년 부르치 성채 주둔군 철수시키고 단두대를 이용한 사형장으로 활용

1930년대에 정비 후 12개 객실을 둔 호텔과 식당으로 활용

60년대 군부 집권 후 폐업

3. 볼거리

파일:나플리오 1.jpg
파일:팔라미디 1.jpg
파일:팔라미디.jpg

[1] 좌측이 팔라미디 성채, 우측이 아크로나플리오[2] 여기에 코린토스에서도 매년 4백 히페르피라의 세폐를 받았다[3] 물론, 이전처럼 아르고스 & 나플리오 영주령은 아카이아 공작의 봉신으로써 소유한 것[4] 후자는 또한 고티에 가문의 킾로스 영지도 받았다[5] 다만 약속했던 혼인 동맹은 이루어지지 않음[6] 당시 베네치아 최대 갑부로 유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