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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23:29:21

노병준

노병준의 수상 이력
{{{#!folding ▼ 파일:AFC 챔피언스 리그 로고(2008~2020/가로형).svg MVP
2008 2009 2010
엔도 야스히토
(감바 오사카)
노병준
(포항 스틸러스)
사샤 오그네노브스키
(성남 일화 천마)
}}} ||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파일:external/www.daegufc.co.kr/FW.17.jpg
이름 노병준
盧炳俊 / No Byung-Jun
<colbgcolor=#eeeeee,#191919> 출생 1979년 9월 29일 ([age(1979-09-29)]세)
울산광역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조건 177cm, 67kg
포지션 스트라이커, 윙어
유소년 금정초 - 수영중 - 동래고 - 한양대
프로 입단 2002년 전남 드래곤즈
소속팀 전남 드래곤즈 (2002~2005)
그라츠 AK (2006)
포항 스틸러스 (2008~2013)
울산 현대 (2010 / 임대)
대구 FC (2014~2016)
지도자 양천 FC (?~?)
파주 HR FC (2024)
파주독립축구단 (2024.7~ )
국가대표 파일: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6경기 1골 (대한민국 / 2000~2010)
등번호 전남 드래곤즈 - 22
포항 스틸러스 - 22, 11
울산 현대 호랑이 - 11
대구 FC - 17

1. 개요2. 플레이스타일3. 선수 시절4. 지도자 시절5. 우승6. 에피소드
6.1. 전남 드래곤즈 구단과의 갈등6.2. 인종차별 논란6.3. 결혼6.4. 별명6.5. 기타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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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남 드래곤즈, 포항 스틸러스, 대구 FC의 공격수. 별명은 노뱅.

역대 대한축구협회 FA컵 최다 출전 및 득점 기록 보유자이기도 하다. 18골을 넣고 은퇴했다. #

2. 플레이스타일

전형적인 골게터라기보다는 상대 수비를 휘저어 주면서 호시탐탐 골을 노리는 포처 타입으로 선발 출장보다 교체 출장이 훨씬 많은 선수로 교체 출장시에 골 수가 더 많다. 특히, 상대팀 선수들이 지친 후반 조커로 나왔을때 뒷공간을 파고 드는 스타일이 잘 먹힌다.

또한, 경기장 사이드로 넓게 퍼져 볼을 받은 후 중앙으로 드리블 돌파를 즐긴다. 퍼스트 터치가 일품이며, 페널티에리어 근처에서 골대 구석으로 감아차는 프리킥 또한 정확한 편이라 공격수로서의 활용도가 다양하였다.

3. 선수 시절

3.1. 유소년 시절

울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초,중,고를 모두 나왔으며, 장산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선수로 활동했다. 유년기 시절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축구부 회비를 당시 부산시 축구협회 부회장이었던 박수관 씨가 지원한 바 있다.

동래고 재학 중 우연찮게 동래고 경기를 관전했던 이회택 당시 한양대학교 감독에 눈에 들어, 한양대로의 진학을 결정하였다. 한양대에서 대활약하며 국가대표로까지 뽑히는 등 대학권에서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통했으며, 한양대 졸업 후 은사인 이회택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던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하게 되었다.

3.2. 전남 드래곤즈

2002년 전남 드래곤즈에 계약금 2억 5천만원, 연봉 2천만원에 4년 계약으로 입단하였다. 전남 입단 당시, 많은 기대를 모았으나 메디컬 테스트에서 B형 간염 보균자임이 밝혀지면서 주로 교체출장 요원으로 경기를 나설수밖에 없었다. 결국 5경기 교체출장에 그치고 말았다.

이에 조금만 경기를 뛰어도 지친다는 세간의 선입견 속에서 맘고생이 심했던 노병준은 재활을 거쳐 어느정도 자신의 신체적 조건을 극복하면서 2003시즌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였고, 당시 전남에서 몇안되는 밥값하는 공격수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결국 39경기 출전 7골 4도움을 기록한다.

2001년 ~ 2002년 당시 전남 드래곤즈는 약 120억에 가까운 물량공세를 퍼부으며 각급 대표 공격수와 외국인 선수들을 수집했지만, 모조리 먹튀만 뽑아 실패했던 비참한 역사가 있다. 결국 2004년 스카우트 비리 파동이 터지면서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 대략 이유가 밝혀지긴 했지만. 그나마 이때의 흑역사급 스카우트 과정으로 뽑힌 선수 중, K리그에서 뛰고 있던 유일한 선수가 노병준이었다.

계약 만료 후 전남 드래곤즈과의 재계약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전남은 노병준의 동의없이 경남 FC로 이적시키려고 하다가[1] 선수 본인이 거부해 2006년 전반기는 무적 선수로 지내며 유럽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전전했다.

전남에서 통산 101경기 16골 8도움을 기록했다.

3.3. 그라츠 AK

그러다 2006년 5월, 홍순학과 함께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소속 그라츠 AK로 2006년 7월 1일에 이적했다. 계약기간은 6개월+2년이고 연봉은 팀내 최고 대우로 유럽에 진출했다.[2]

그러나 오랫동안 컨디션 조절을 못한탓에 초반의 임펙트 있는 활약도에 비해 갈수록 체력이 딸려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국 2006년 말, 그라츠 AK 측이 계약해지를 통보함에 따라 팀을 떠났고 2007년 5월까지 분데스리가, 벨기에 프로 리그 진출을 시도했지만 군대 문제가 걸려 계약이 성사되진 못했다.

노병준은 FA 이적료가 발생하는 신분[3]이었기 때문에, 전남 외 타 K리그 구단이 노병준을 영입하고자 한다면 수억의 이적료를 지불해야하는 상황이었다. 1년 간 소속팀이 없이 떠돌기만 했던 노병준을 받아주는 팀은 없었고 그렇게 2008년 초까지 무적 신분으로 지냈다.#

3.4. 포항 스틸러스

2008년 3월 수도권 구단이나 그의 고향팀인 부산 아이파크와의 계약이 모두 틀어졌고, 노병준은 한양대 시절 은사인 이회택 당시 협회 부회장과 통화 후 한양대 시절 코치였던 박창현 당시 포항 수석코치가 있는 포항에서 입단 테스트를 봤다. 그리고 고려대와의 연습경기에서 2골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 결국 이적료 1억원에 포항과 계약을 채결할 수 있었다.

2008 시즌부터 다시 선수 생활을 시작했지만 또다시 부상을 입어 3개월을 결장했다. 포항에 입단한 이후 주로 조커로 활약하면서 [4] 선발로 뛸때 보다 교체로 들어갔을때 골을 더 많이 넣는 등 대활약을 펼쳤고 결국 2009 AFC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선제골을 터트리며 팀의 3번째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공헌하며 대회 MVP를 수상했다. 또한 2009년 K리그 리그컵인 피스컵 코리아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다.

2009 시즌 종료 후 포항과 재계약 협상 중 이견을 보이며 다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결국 2년 재계약을 채결했다.

하지만 2010 시즌 팀이 나락으로 빠지면서 프런트의 농간으로 울산 현대이진호와 6개월간 맞임대[5]를 하기도 했다. 노병준의 자리에서는 설기현, 조찬호 등의 백업이 잇는 반면, 고기구를 제외하면 적당한 타겟이 부족하여 이진호를 원한 것으로 보인다. 울산에서 14경기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2011 시즌 황선홍 감독이 포항에 부임하면서 선발과 교체를 오가면서 맹활약, 비록 골 수는 적지만 순도 높은 골들을 터뜨리면서 포항 공격진을 이끌었다. 그 예로 32라운드 FC 서울 원정에서도 김광석의 퇴장으로 수비보강을 위해 노병준을 조기에 교체했는데 그 이후 포항은 제대로 된 공격을 못하고 역전패 당했다.

2012 시즌과, 2013 시즌에는 초반에는 나란히 부진했으나 같은 노장콤비인 박성호와 같이 후반기에 귀신같이 부활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워낙 포항 공격진들이 워낙 부진하는 바람에 선발 출장이 많아졌다. 풀타임을 뛰는 경우는 적었지만 예전과 달리 선발 출장에서의 활약도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특히 2013 시즌에는 팬들 사이에서도 이제 은퇴를 해야 할 때라고 할 정도로 나이가 많은 선수였음에도 FA컵 16강에서 천금같은 동점골, 그리고 리그 막판 중요 경기에서 골을 몰아넣으면서 포항의 더블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2013 시즌 마지막 울산 현대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울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6] 장면이 TV에 잡히면서 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참고로 2012 시즌 중반 울산 현대전을 앞두고 투병중인 아버지를 위해 티셔츠 세리머니를 준비했으나 골을 넣지 못해 운 일도 있었다. # [7]

하지만 2013 시즌 종료 후 재계약에 실패하면서 무적 선수로 포항을 나오게 되었다. 향후 행보가 묘연했으나, 3월에 이르러 대구 FC와의 1년 계약을 알린다.

포항에서 149경기 31골 10도움을 기록했다.

워낙 좋은 활약을 보여줬기에 김병지, 김기동에 이은 포항 스틸러스레전드로 남아주기를 바랐지만, 결국 이적하게 된 것에 대해 포항 팬들은 제법 아쉬운 반응을 보였다.

3.5. 대구 FC

파일:external/www.daegufc.co.kr/FW.17.jpg

광주 FC는 무적으로 풀린 노병준을 노렸으나, 대구 FC로 이적하자, 하필이면 대구로 이적하냐고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차라리 K리그 클래식의 타 팀으로 이적하면 별로 상관이 없을 테지만 이때 대구 FC는 강등을 당해서 K리그 챌린지에서 서로 겨루어야 했다.

2014년 4월 7일 고양 Hi FC전을 앞두고 남부지방산림청에 의해 산불방지 홍보대사에 위촉되어 녹색캠페인을 전개했다. 이날 대구 FC는 홈경기 당시 500명의 관객들에게 멀티스카프를 선물하고 산불예방 서명운동을 가졌다.

이적 직후 부상을 당해 바로 데뷔전을 치르지는 못했고, 결국 4월 19일 강원 FC와의 경기에서 대구 소속으로 첫 경기를 치렀다.

2014년 4월 26일 FC 안양전에서 후반 시작 윤영승과 교체되어 출전했다. 안양의 측면을 파고드는 좋은 활약을 보였으며, 후반 18분에 프리킥을 차기도 했으나 수비에 맞고 굴절되었다. 후반 47분 볼을 페널티 박스 안으로 전달했고, 장백규황순민에게 패스해 동점골의 시발점이 되었고 경기는 1-1로 끝났다.

2014년 6월 21일 대전 시티즌과의 16라운드에서 후반 11분 교체출전했으며, 대전의 레전드 김은중과의 대결이 성사되었으나 경기는 2-3으로 패했다.

2014년 6월 25일 콘사도레 삿포로와의 친선 경기에 스리톱의 일원으로 선발 출장했다. 스루패스를 찔러넣어주며 좋은 장면을 만들어내는 등 맹활약을 펼쳤으며, 경기는 2:0으로 승리했다.

2014년 9월 27일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 선발출장해 팀의 1:0 승리에 기여했다.

2014년 11월 2일 강원 FC와의 34라운드에 선발출장했고 팀의 역사적인 6-1 승리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대구가 한 경기에서 6골 이상 넣은 것은 창단 이후 처음이다. 전반 6분에 터닝슛을 시도했으나, 골로 연결되진 못했다. 후반 6분 최원권의 프리킥을 감아차 팀의 3번째 골을 기록했다. 후반 9분 프리킥을 찼으나 골키퍼가 선방했고, 나온 볼을 조나탄이 차 넣어 팀의 4번째 골을 기록하는데 기여했다. 5번째 골은 부상에서 복귀한 장백규와 강원의 측면을 돌파한 후 올린 공을 그대로 받아 골문으로 꽂아넣은 노병준의 골이었다. 이후, 후반 36분 신창무와 교체되었다.

2014년 11월 8일 충주 험멜와의 35라운드 경기에도 출장했지만 골은 기록하지 못하고 팀은 1-2로 패배했다.

2014년 11월 16일 FC 안양과의 2014 시즌 마지막 경기에 출장해 맹활약을 펼친다. 전반 10분 코너킥을 찼고, 안상현이 헤딩을 날렸으나 골키퍼 선방에 막혔다. 하지만 전반 18분에 코너킥을 조나탄이 발리슛으로 깔끔하게 골로 연결시켰고, 후반 9분의 프리킥을 김대열이 백헤딩으로 골을 기록하며 세트피스만으로 2도움을 올리고 36라운드 위클리 베스트에 선정되었다.

2014시즌 대구에서의 기록은 19경기 출전 4골 3도움.

2015시즌 재계약하며 키프로스 전지훈련에 합류했다. 최원권과 함께 대구 FC의 고참으로서 챌린지에서 베테랑이 사는 법이라는 제목의 인터뷰를 했다.

1월 14일 FK 추카리치키와의 친선경기 노병준은 이날 대구의 유일한 득점을 올렸다. 골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반전을 벤치에서 시작했지만 후배들을 열심히 독려했다. 경기가 풀리지 않자 후반에 들어갔다. 친선경기지만 임하는 자세부터 남달랐다. 긴 전지훈련으로 지친 선수단을 다독이는 여유를 보였으며, 실수를 해도 박수를 쳤다. 지친 외국인 선수들에게는 "브라보"를 외치며 한 발 더 뛰게 만들었다. 팀을 만들어가는 대구에서 활력소 역할하며 고참의 품격을 보여주었다.

2016년 시즌 14경기에 출전해 무득점에 그쳤고, 결국 은퇴를 결정하게 되었다. 대구 구단에서는 2017년 3월 11일 노병준의 은퇴식을 열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이전 친정팀인 포항 스틸러스도 그의 은퇴식을 열어주기로 결정함에 따라 일주일 사이 은퇴식만 2번을 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4. 지도자 시절

은퇴 후 고등부 팀 양천 FC에서 감독을 맡았지만 일반 클럽팀 특유의 열악한 환경이 겹쳐 이렇다할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팀을 떠났다.

2024년에는 파주 HR FC 감독을 맡아 K7리그에 참가했으나 7월 돌연 팀을 떠났고, 8월부터는 파주독립축구단(파주FC)의 감독을 맡게되었다.

5. 우승

6. 에피소드

6.1. 전남 드래곤즈 구단과의 갈등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그라츠 AK 이적 당시 전남에서 이적동의서를 발급해주지 않는 등 마찰이 있었던바 있다. [8] FIFA한국프로축구연맹의 중재로 이적 동의서가 발급된 노병준은 2006년 7월 정식 계약을 체결하고 데뷔전에서 도움을 기록하는등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숨겨진 유럽파 선수로 한동안 조명을 받았다. 하지만 이적 후 8경기 뛰고 부상당한데다가 구단도 자금난에 시달려 결국 다시 무적 선수로 돌아갔다. 그동안 사실상 한 푼도 못 벌었다고 한다. 노병준 본인은 이 시기가 선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하는데 사실상 2년동안 수입이 거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혼 뒤 6개월 동안 처가생활 했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포항에 입단하고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아내에게 전화하면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6.2. 인종차별 논란

2013년 4월 22일, 포항 소속으로서 AFC 챔피언스 리그 베이징 궈안과의 조별리그를 앞두고 페이스북에서 프레데리크 카누테를 향한 인종차별 피드를 올려 논란이 됐다.# #

이후 논란이 되자 “웃자고 던진 말에 죽자고 덤비면…”이라고 해명하며 논란에 기름을 퍼부었다. 그러나 존 듀어든에게 제대로 비판받았다. #

결국 공식 사과문을 게시하며 논란은 일단락됐다.

6.3. 결혼

노병준에 관해 가장 유명한 에피소드로는 결혼 이야기가 있는데 전남 시절 유연성을 기르기 위해 에어로빅 학원을 찾았다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지금의 부인과 만났다고 한다. 둘의 나이 차이는 6살이었으며, 몇 년의 연애 끝에 결혼했는데 이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후로 '대도 노병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6.4. 별명

노장임에도 신인 선수들 못지 않은 활약과, 이름 때문에 팬들 사이에선 더글러스 맥아더의 명언인 '노병은 죽지 않는다'는 칭송을 많이 듣는다.

6.5. 기타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바가지 머리가 있다. 축구를 좀 모르는 사람들도 가끔 스포츠 뉴스를 보다가 "저 촌스러운 머리는 뭐냐'' 하고 웃는 스타일이지만, 사실 이 스타일을 추천해 준 건 다름 아닌 노병준의 아내다. 프로선수라면 팬에게 뭔가 어필할 수 있는 게 있어야 한다는 아내의 추천에 어떻게 보면 촌스러울수도 있는 머리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포항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과 2000년대 이후 김병지, 김기동에 이어 사실상 포항의 레전드로서의 길을 걷고 있는 그의 실력을 보면 그의 머리는 단순한 어필이 아닌 실력이 겸비된 팬들에게 기억될 트레이드 마크라 볼 수 있다.

포항에서 사실상 방출에 가깝게 대구로 이적하는 바람에 김기동과 같이 포항의 레전드로 남기는 힘들게 되었지만, 노병준 본인은 포항에 엄청난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이적 이후에도 포항 팬들이 마련해준 행사에 거의 참가하는 편이다. 그래서 대구 팬들에게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7. 관련 문서




[1] K리그의 대표적인 악법 중 하나다. 선수의 이적 동의가 없어도 이적 시킬 수 있는 규정 때문에 억지로 팔려간 선수들이 한두명이 아니다. 노병준 외에도 윤빛가람이 대표적이다.[2] 당시 노병준의 에이전트는 홍이삭 에이전트였는데, 유럽 변방리그 이적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당시의 무조건적인 해외진출을 조성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3] 2005년 이전 FA 계약자들에게 해당하는 사항, 이근호J리그에서 울산 현대로 이적 당시 이적료가 발생했다.[4] 전남 시절에 B형 간염에 걸려서 고생했던 적이 있었고 그 뒤로 체력 회복이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5] 이 기사에 대한 보복 차원이라는 말도 있다.[6] 2012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7] 이때 페널티킥 키커로도 나섰는데 하필 상대 키퍼가 페널티킥 방어에 일가견 있던 김영광이라 막히고 말았다. 경기 후 노병준을 가장 먼저 위로해 준 것도 역시 김영광이었다.[8] 재계약 협상과정에서 전남과 감정이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 이적동의서 사건으로 노병준과 전남은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만다. 이는 포항으로 이적한 이후로도 계속 됐지만 은퇴하면서 앙금이 풀어진 듯 하며 병준의 아들이 광양제철남초등학교에 유소년 선수로 입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