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호
Green Cross. 녹색 십자 모양의 표식으로 재해나 위험으로부터의 안전을 상징한다. 병원에 크게 걸려있는 그것.
대한민국의 구급차에도 법적으로 녹십자 마크를 표시해야한다. 단 소방 구급차는 119 등 소방 표지로 대체할 수 있으며[1], 제네바 협약에 의거하여 적십자 표장은 군병원, 의무병과 군의관, 군용 구급차, 적십자 병원 구급차, 적십자병원 등 적십자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곳에만 쓸 수 있다. 이는 적십자 표장 오남용은 제네바 협약으로 금지되어 있어, 이를 저지르면 전후에 중대한 전쟁범죄로 처벌받는다. 따라서 녹십자는 주로 사설 구급차나 보건소, 병원 소속 구급차에 해당되는 사항이다.
한국의 긴급 자동차 경광등도 이 녹십자의 색상에 따라 사설 구급차, 보건소, 병원 소속 구급차는 녹색, 소방 구급차 및 군용 구급차 및 적십자병원 구급차는 적색을 쓴다. 일부 구급차는 적색 녹색이 아닌 청색을 쓰는 경우도 있다.
해외에서 녹십자 마크가 들어간 간판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의 녹십자는 합법적 대마초 판매점을 의미한다. 대마초가 흔한 나라에서는 녹색이 대마초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2. 국제녹십자
그린크로스 한국지부
지구의 환경과 인류의 생존 보호를 목적으로 설립된 국제 비정부 환경단체. 전쟁 때 부상자를 도와주기 위해 설립된 적십자와 달리 환경파괴로부터 지구를 지키자는 뜻에서 출범했다.
주요 사업은 지구의 환경과 인류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하여 가치관과 인식을 전환시키는 활동, 국제 재난 구호와 의료 지원,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차세대 에너지 개발에 대한 지원, 수자원 보호 및 수자원으로 인한 분쟁 방지와 해결, 핵무기와 전쟁으로부터 안전한 지구 및 인류의 생존 보호, 전후(戰後) 환경에 대한 분석 보고와 국제사회 지원 등이다.
당연하지만 적십자처럼 녹신월, 녹사자, 다윗의 별, 녹수정 문양도 있다고 한다.
3. 주식회사 녹십자(한국 기업)
GC녹십자 문서 참조.4. 주식회사 녹십자(일본 기업)
株式会社ミドリ十字(가부시키가이샤 미도리주지)[2]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설립된 일본의 의료관련 회사. 나이토 료이치[3]가 1950년 '일본혈액은행'(日本ブラッドバンク)을 설립한 것이 출발이다. 이름처럼 원래는 매혈 회사였다. 당시의 다른 일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6.25 전쟁 특수로 주일미군 상대로 혈장을 팔아서 부를 축적했다. 1964년 일본 정부가 매혈 행위를 금지하자[4][5], 사명을 주식회사 녹십자로 바꾸고 재고 혈액으로 혈우병 치료제를 만들어 팔았다.
로고는 한국 녹십자의 구 로고와 유사했으나, 가운데에 'APAM'(Adiutor pro arte medicina)란 라틴어 약자가 씌어있었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들어간 혈액으로 혈우병 약을 만들다
1967년, 미도리주지는 설사 예방약의 임상 실험을 육상 자위대 대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했으며, 그 결과 실험 참가자 1089명 중 절반가량인 577명이 급성 식중독 증세를 일으키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 미도리주지는 해외에서 혈청을 사들여 혈우병 환자들을 위한 혈액 응고 약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혈청들 중에는 다름 아닌 에이즈 환자들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제는 미도리주지 측에서 이런 혈청들을 원료로 혈액응고 의약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에이즈에 걸린 혈액인지를 조사하지도 않았고, 혈액을 가열해 병원균을 소독하는 조치도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더욱이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지만, 미도리주지 측은 문제 삼지 않고 그대로 에이즈 감염 혈액을 기반으로 한 의약품 제작을 서둘렀으며, 끝내 시중에 유통시켰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혈우병 약품들은 미도리주지 본사가 있는 일본뿐 아니라 지사가 진출해 있는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에서도 혈우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팔려 나갔다. 미도리주지에서 판매한 혈우병 응고 약품을 사들인 혈우병 환자들은 몇 년 후, 조금씩 이상해지는 몸 상태를 느끼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새 자신의 몸에 괴상한 붉은 반점들이 생겨나 피부를 뒤덮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병원으로 달려가 검진을 받은 환자들은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들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미도리주지는 처음부터 환자들이 에이즈에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혈우병 증세가 심해져 자사 소유의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 에이즈 균이 포함된 혈우병 치료제를 무단으로 투입하여, 그들에게서 에이즈의 발병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까지 했다. 옛날 731부대 시절에 했던 것보다 더욱 규모가 크고 치명적인 생체 실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비뚤어진 탐구욕으로 발생한 후유증은 너무나 끔찍했다. 일본에서만 자그마치 2000명에 이르는 혈우병 환자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고, 미국과 프랑스에서도 500명이 넘는 환자들이 역시 미도리주지에서 판매한 혈우병 치료제를 복용하다 에이즈에 걸려 그중 수백 명이 사망했다.
부패하고 사악한 대기업을 무너뜨린 용감한 시민들
영문을 알지 못해 당황해하는 환자들 중 일부는, 미도리주지에서 나온 혈우병 치료제를 산 이후부터 이런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는 미도리주지 측을 상대로 집단 에이즈 감염에 대한 책임을 묻는 한편, 이 사실을 일본 법원에 정식으로 고소했다. 그러나 미도리주지 측은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혈우병 치료제와 당신들의 에이즈 발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라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일본 법원에서도 “혈우병 치료제가 에이즈를 감염시켰다는 환자들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여 납득하기 어렵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에이즈는 성관계에 의해서만 전염된다고 알려졌으며, 수혈에 의해 걸린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에이즈 감염은 동정이 아닌 도덕적 비난과 야유의 대상이었다. 미도리주지의 혈우병 치료제를 사서 복용하다 에이즈에 걸린 피해자들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성적 문란을 숨기기 위해 애꿎은 기업을 걸고넘어지는 게 아니냐?”라는 조롱과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환자와 그 가족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에이즈에 걸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미도리주지 측이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으로 만든 혈우병 응고제를 시중에 유통시켰다는 증거를 수집해 나갔다. 그리고 최초의 에이즈 환자가 발생한 1984년으로부터 자그마치 9년 동안에 걸친 치열한 소송을 벌인 끝에, 그들은 법정에서 마침내 미도리주지가 판매한 혈우병 치료제가 에이즈를 유발시켰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지식인도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거대 권력 집단을 상대로 마침내 승리를 거둔 것이다. 법원의 판결이 떨어지자 미도리주지 측은 항소했지만 또다시 패소했다. 더구나 이 사실이 해외에 알려지자 미도리주지에서 제조한 혈우병 치료제 때문에 에이즈에 걸린 미국, 프랑스, 캐나다의 환자들도 일제히 미도리주지 측에 집단 항의를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게 된 미도리주지의 최고 간부 6명은 1996년 2월, 에이즈 환자와 가족들에게 공식 사과를 했고 이 장면은 TV를 통해 일본 전역에 생방송으로 공개되었다. 하지만 사과 현장에서조차 간부들은 마지못해 사과하는 태도를 보였고, 이 때문에 환자와 가족들의 분노는 매우 격렬하게 타올랐다.
에이즈 사건의 여파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간부들의 사과 장면이 TV로 방송되면서 미도리주지의 사회적 이미지는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 거기에 미도리주지에서 제작된 의약품들의 판매량도 급감해, 경영 위기에 봉착했다. 미도리주지에서 나온 약 때문에 무려 2500명이 에이즈에 걸려 인생을 망쳤는데, 누가 그 회사에서 만든 약을 사려고 하겠는가?
1998년, 미도리주지는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요시도미 제약 회사에 합병되었고, 이후 다나베 미쓰비시 제약에 인수되어 사실상 법인 자격이 소멸된 상태이다.
미도리주지 사건은 지금 현재의 역사를 제대로 판단하여 정리를 하는 것과 과거 역사의 오류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 번 보여준다. 한번 잘못 끼워진 역사의 단추는 두고두고 후세에까지 피해를 주게 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글에 나온 ‘미도리주지’는 한자로 녹십자綠十字란 뜻이지만, 한국의 의약품 제조사 녹십자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혀둔다.
어메이징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93~195쪽
1980년대에 이 회사에서 제조한 혈액응고제에 HIV 바이러스가 섞여있었단 사실이 1986년에 폭로되었다. 인간의 피를 원료로 하다 보니 제대로 검사를 했어야 하는데 일본 후생성과 녹십자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6] 당시 5000명의 혈우병 환자 중 약 2000명이 에이즈에 감염되었고, 이들 중 대부분이 사망했다.1967년, 미도리주지는 설사 예방약의 임상 실험을 육상 자위대 대원들을 대상으로 실시했으며, 그 결과 실험 참가자 1089명 중 절반가량인 577명이 급성 식중독 증세를 일으키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대 후반부터 일본 미도리주지는 해외에서 혈청을 사들여 혈우병 환자들을 위한 혈액 응고 약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혈청들 중에는 다름 아닌 에이즈 환자들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제는 미도리주지 측에서 이런 혈청들을 원료로 혈액응고 의약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에이즈에 걸린 혈액인지를 조사하지도 않았고, 혈액을 가열해 병원균을 소독하는 조치도 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더욱이 이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지만, 미도리주지 측은 문제 삼지 않고 그대로 에이즈 감염 혈액을 기반으로 한 의약품 제작을 서둘렀으며, 끝내 시중에 유통시켰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혈우병 약품들은 미도리주지 본사가 있는 일본뿐 아니라 지사가 진출해 있는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에서도 혈우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팔려 나갔다. 미도리주지에서 판매한 혈우병 응고 약품을 사들인 혈우병 환자들은 몇 년 후, 조금씩 이상해지는 몸 상태를 느끼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새 자신의 몸에 괴상한 붉은 반점들이 생겨나 피부를 뒤덮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병원으로 달려가 검진을 받은 환자들은 더욱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들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것이다! 놀라운 일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미도리주지는 처음부터 환자들이 에이즈에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혈우병 증세가 심해져 자사 소유의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에게 에이즈 균이 포함된 혈우병 치료제를 무단으로 투입하여, 그들에게서 에이즈의 발병 과정을 관찰하고 기록까지 했다. 옛날 731부대 시절에 했던 것보다 더욱 규모가 크고 치명적인 생체 실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비뚤어진 탐구욕으로 발생한 후유증은 너무나 끔찍했다. 일본에서만 자그마치 2000명에 이르는 혈우병 환자들이 에이즈에 감염되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고, 미국과 프랑스에서도 500명이 넘는 환자들이 역시 미도리주지에서 판매한 혈우병 치료제를 복용하다 에이즈에 걸려 그중 수백 명이 사망했다.
부패하고 사악한 대기업을 무너뜨린 용감한 시민들
영문을 알지 못해 당황해하는 환자들 중 일부는, 미도리주지에서 나온 혈우병 치료제를 산 이후부터 이런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는 미도리주지 측을 상대로 집단 에이즈 감염에 대한 책임을 묻는 한편, 이 사실을 일본 법원에 정식으로 고소했다. 그러나 미도리주지 측은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혈우병 치료제와 당신들의 에이즈 발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라고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일본 법원에서도 “혈우병 치료제가 에이즈를 감염시켰다는 환자들의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여 납득하기 어렵다.”라는 입장을 보였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에이즈는 성관계에 의해서만 전염된다고 알려졌으며, 수혈에 의해 걸린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에이즈 감염은 동정이 아닌 도덕적 비난과 야유의 대상이었다. 미도리주지의 혈우병 치료제를 사서 복용하다 에이즈에 걸린 피해자들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성적 문란을 숨기기 위해 애꿎은 기업을 걸고넘어지는 게 아니냐?”라는 조롱과 야유를 받았다. 하지만 환자와 그 가족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에이즈에 걸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미도리주지 측이 에이즈에 감염된 혈액으로 만든 혈우병 응고제를 시중에 유통시켰다는 증거를 수집해 나갔다. 그리고 최초의 에이즈 환자가 발생한 1984년으로부터 자그마치 9년 동안에 걸친 치열한 소송을 벌인 끝에, 그들은 법정에서 마침내 미도리주지가 판매한 혈우병 치료제가 에이즈를 유발시켰다는 판결을 받아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지식인도 아닌 평범한 시민들이 거대 권력 집단을 상대로 마침내 승리를 거둔 것이다. 법원의 판결이 떨어지자 미도리주지 측은 항소했지만 또다시 패소했다. 더구나 이 사실이 해외에 알려지자 미도리주지에서 제조한 혈우병 치료제 때문에 에이즈에 걸린 미국, 프랑스, 캐나다의 환자들도 일제히 미도리주지 측에 집단 항의를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결국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알게 된 미도리주지의 최고 간부 6명은 1996년 2월, 에이즈 환자와 가족들에게 공식 사과를 했고 이 장면은 TV를 통해 일본 전역에 생방송으로 공개되었다. 하지만 사과 현장에서조차 간부들은 마지못해 사과하는 태도를 보였고, 이 때문에 환자와 가족들의 분노는 매우 격렬하게 타올랐다.
에이즈 사건의 여파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간부들의 사과 장면이 TV로 방송되면서 미도리주지의 사회적 이미지는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 거기에 미도리주지에서 제작된 의약품들의 판매량도 급감해, 경영 위기에 봉착했다. 미도리주지에서 나온 약 때문에 무려 2500명이 에이즈에 걸려 인생을 망쳤는데, 누가 그 회사에서 만든 약을 사려고 하겠는가?
1998년, 미도리주지는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요시도미 제약 회사에 합병되었고, 이후 다나베 미쓰비시 제약에 인수되어 사실상 법인 자격이 소멸된 상태이다.
미도리주지 사건은 지금 현재의 역사를 제대로 판단하여 정리를 하는 것과 과거 역사의 오류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다시 한 번 보여준다. 한번 잘못 끼워진 역사의 단추는 두고두고 후세에까지 피해를 주게 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 글에 나온 ‘미도리주지’는 한자로 녹십자綠十字란 뜻이지만, 한국의 의약품 제조사 녹십자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혀둔다.
어메이징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193~195쪽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상기한 창립자들의 731부대 복무 사실까지 까발려지며 일본 사회를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7].이 사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일본어 위키피디아의 약해 에이즈 사건(薬害エイズ事件) 문서를 참조하길 바란다.
결국 자업자득으로 몰락의 길을 걷다 1998년 요시토미(吉富)제약[8]에 인수되어 48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요시토미제약은 다시 미쓰비시다나베제약[9]에 인수되었다. 국내에서는 녹우제약, 한일약품(현 HK이노엔), 종근당을 통해 진출하다가 녹우제약이 웰화이드코리아로 변경되었고 다나베와 합병이후 미쓰비시다나베파마코리아로 변경되었다.
전 일본 총리인 간 나오토가 민주당에 입당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사건이다. 당시 제1차 하시모토 내각의 후생대신[10]으로 있었던 그는 이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배상 판결이 내려지도록 노력했으며 이는 부인 노부코 여사의 요청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1] 구형 119 구급차에는 녹십자 표시가 있다.[2] 한국 언론에서는 종종 '일본 녹십자'로도 언급된다. 그러나 '일본녹십자'란 한자 사명을 쓰는 다른 회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고유명사 '미도리주지'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3] 内藤良一, 1906~1982. 녹십자의 대표 이사, 전무 이사를 역임했다.[4] 이는 1964년 3월 24일에 당시 주일본 미국 대사로 근무하던 에드윈 O. 라이샤워(Edwin O. Reischauer, 1910~1990)가 미국 대사관 로비에서 19세의 정신분열증 환자에게 피습당하고 수혈을 했다가 간염에 감염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의 영향이며, 라이샤워는 늙어서도 이로 인한 간염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5] 여담으로 레이샤워는 대한민국과도 인연이 굉장히 깊은데, 1938년 3월에 경성에 3개월간 머무르며 맥 매큔과 함께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만든 사람이 라이샤워고, 한글을 '세계 어느 나라에서 쓰이고 있는 어떤 문자보다도 과학적인 체계의 글자'라고 예찬했다.[6] 혼다 테츠야의 소설 "감염유희"에서도 흑막이 복수귀로 타락하게 된 주요 계기로 이 사건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사랑하던 여자가 이로 인해 에이즈에 걸렸는데 추가타로 외무성의 어떤 사람이 알지도 못하면서 걸레니 뭐니 하는 헛소문을 퍼트려서...[7] 그도 그럴 것이, 나이토 료이치는 731부대 시절에 육군군의학교 방역 연구실의 책임자로서 731부대의 세균 무기 개발과 연구, 심지어 인체실험에도 관여한 인물이었으며, 이 때문에 나이토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731부대가 주도한 세균전 및 인체 실험에 관한 중요 참고인으로서 GHQ의 심문을 받기도 했다. 심지어 녹십자의 공동설립자 중 한 명인 기타노 마사지(北野政次, 1894~1986)는 한술 더 떠 아예 731부대의 2인자이자 이시이 시로의 뒤를 이은 731부대 제2대 부대장이였고, 1959년에는 일본혈액은행 최고 이사이자 도쿄 공장 책임자까지 올랐으며, 같은 해에는 이시이 시로의 장례위원장까지 맡았고, 2차 대전 후 최초의 일본인 남극 탐험대를 위해 설치한 제1기 남극특별위원회의 위원까지 지냈다. 그리고 둘 다 80년대까지 천수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다가 악행에 비해 매우 편하게 죽었다.[8] 거담제 투스타졸,소염진통제 프라닌, 우울증치료제 데파스로 유명한 회사이다.[9] 혈압약 헤르벤, 근이완제 아로베스트, 혈액순환장애개선제 에글란딘 등으로 유명한 제약회사이다. HK이노엔(구 한일약품), 종근당과 기술제휴 관계이다. 미쓰비시웰파마(구 웰화이드)와 다나베의 합병으로 태어난 기업이다.[10] 한국으로 치면 보건복지부장관